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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군의 관광자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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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고흥군 나로도 주변 해역은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지역으로 주위의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국립공원내에 천연기념물 제362호인 봉래면 상록수림이 위치하고 있으며 나로도 연안의 사자암, 꼭두녀 등 크고 작은 섬과 도화면 연안의 금강죽봉, 활개바위, 거북바위 등의 절경과 일출의 경관이 장관을 이룬다. 2. 해수욕장 □ 대전 해수욕장 고흥군 두원면 대전리 대전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백사장 규모는 L=1,000m, B=30m로 경사가 완만하여 가족단위 피서지로서 적지이다. 광활한 은빛 백사장과 100년생 송림 200여 그루가 군생한 숲과 파도에 깎인 천연 기암절벽이 곳곳에 절경을 이루고 있다. 교통편은 광주 → 고흥간 아침 05:20분∼오후 20:40분까지 15분 간격, 고흥 → 대전간 아침 07:00∼오후 21:00분까지 60분간격으로 운행하고 있다. 편의시설로는 민박 1개소와 샤워장(10평) 1개소, 탈의실(5평) 1개소, 화장실(15평) 1개소, 음수대(10평)3개소, 주차장(600평)이 있고 기타 음식점 6개소가 있다. □ 남열 해수욕장 고흥군 영남면 남열리 175-1번지 지선에 위치하고 있는 해수욕장으로 규모는 L=700m, B=100m이다. 해수욕장 주변에 50∼60년생의 자연 송림 250그루가 군생하고 있어 여름 피서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파도가 심해 어린이들은 위험하지만 그 신비를 느낄수 있으며 모래질이 가늘고 고와 탕사용으로 유명하다. 주위에 소옥대·대옥대의 섬과 자연동백나무숲, 파도에 깍인 천연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룬다. 교통편은 광주 → 고흥간 아침 06:20분부터 오후 20:40분까지, 고흥 → 남열간 아침 09:00부터 오후 18:40분 까지, 과역 → 남열간 아침 06:50분부터 오후 19:10분까지 15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편의시설로는 민박 20개소와 샤워장(15평) 1개소, 공중화장실(15평) 1개소, 주차장(900평), 야영장 등이 있다. □ 익금 해수욕장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 익금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백사장 규모는 L=900m, B=50m로 경사가 완만하고 모래질이 좋아 가족단위 피서지로서 적합하다. 주위에 20∼30년생 송림 100여 그루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경관이 수려하다. 교통편은 육로로 광주 → 녹동간 아침 05:20분부터 오후 18:40분까지 15분간격으로, 금진 → 익금간 아침 08:00부터 오후 18:30분까지 1일 3회 운행하고 도선은 녹동 → 금진간 아침 06:00부터 오후 19:00까지 한시간 간격으로 운행하고 있다. 편의시설로 여관 2개소, 민박 4개소, 화장실(15평)1개소, 주차장(700평)이 있다. □ 발포 해수욕장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산12번지 지선에 위치하고 있다. 백사장 규모는 L=1,000m, B=100m이고 수심0.5-1m로 수심차가 완만하고 모래질이 좋아 탕사용으로 유명하며 호안상태로 형성되어 있어 해수욕장으로는 안전하다. 주변에 해상 기암절벽과 자연경관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교통편은 고흥 → 발포간 아침 06:30부터 오후 20:30까지 40분 간격으로 운행하고 있다. 편의시설로는 민박 2개소, 여관 4개소, 화장실 2개소, 샤워장· 탈의실 각 1개소, 음수대 3개소, 벤취 2개소, 주차장(2천평)이 있다. □ 나로도 해수욕장 고흥군 봉래면 신금리 신금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규모는 L=1,000m, B=100m로 수심(1∼2m)이 낮고 경사가 완만하며 모래질이 좋아 탕사용으로 적합하다. 주위에 300년생 송림 350여 그루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피서지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교통편은 육로로 광주 → 고흥간 05:20부터 오후 20:40분까지 15분 간격으로 고흥 → 봉래간 아침 06:20부터 오후 20:00까지 4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편의시설로 여관 3개소, 민박 10개소와 공중화장실 2개소, 샤워장 2개소, 음수대 2개소, 주차장(2천평)이 있다. □ 덕흥 해수욕장 고흥군 동일면 덕흥리 207번지 지선에 위치하고 있다. 백사장 규모는 L=450m, B=80m로 바닷물이 깨끗하고 모래질이 고우며 수심이 적당하고 경사가 완만하여 가족단위 피서지로 적합하다. 교통편은 광주 → 고흥간 아침 05:20부터 오후 20:40까지 15분간격으로, 고흥 → 동일간 아침 06:20부터 오후 20:00까지 40분간격으로 운행하고 있다. 편의시설로는 민박 3개소와 해수욕장에는 샤워장 1개소, 탈의실 1개소, 화장실 2개소, 주차장(500평)이 있다. □ 소록도 해수욕장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 소록도에 위치하고 있는 이 해수욕장의 백사장 규모는 L=1,200m, B=80m이다. 주위에 50∼60년생의 송림 200여주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피서하기에는 좋으나 간만의 차가 심하여 간조시에는 갯벌이 드러나는 단점이 있다. 교통편은 육로로는 광주 → 녹동간 오전 05:20부터 오후 20:40까지 10∼15간격으로 운행하며 수로로는 녹동 → 소록도간 아침 06:00∼21:00까지 도선이 계속 다닌다. 숙박업소는 호텔 1개소, 여관 25개소, 여인숙 5개소가 있고, 해수욕장 주위에 편의시설로 샤워장 1개소, 탈의실 1개소, 화장실 2개소, 벤취 20개소, 주차장(200평)이 있다. 3. 낚시터 □ 민물낚시터 고흥관내 민물 낚시터로는 전국적으로 붕어낚시로 널리 알려진 해창만 수로와 과역면 호덕제, 점암면 연등제, 도덕면 내봉제, 남양면 침교제, 포두면 세동제 등이 있는데 수심은 보통 20m 내외이다. □ 바다낚시터 바다낚시터로는 갯바위 낚시와 해상선상 낚시터로 구분할 수 있다. 갯바위 낚시터로는 도양읍 시산도 바래섬, 봉래면 하반 등 20개소에 이르며, 해상선상 낚시터로는 풍양면 풍남 앞바다 미역발사이, 도화면 단장과 지죽도 앞 수로, 도양읍 소록도 해상주변이 좋은 낚시터로 알려져 있다. 수심은 20m 내외로 주로 감성돔, 농어, 능성어 등 고급 어종이 시기에 따라 올라와 입질이 좋다. 4. 명산, 명승 □ 팔영산(608.6m) 팔영산(608.6m)은 소백산맥이 서쪽으로 힘에 지친 듯 기울다가 동남으로 고흥반도를 바라보며 점암면 성기리, 강산리, 영남면 양사리 등에 걸쳐 우뚝 솟아 있는 산으로 군의 진산(鎭山)이라 할 수 있다. 옛 문헌에 보면, 이 산의 이름은 팔영산(八影山)이외에 팔전산(八田山), 팔령산(八嶺山), 팔전산(八点山) 등으로 불리워졌다. 산의 정상에 팔봉(八峰)이 있는데 첫째 유영(儒影), 둘째 성주(聖株), 셋째 생황(笙簧), 넷째 사자(獅子), 다섯째 오로(五老), 여섯째 두류(頭流). 일곱째 칠성(七星), 여덟째 적취(積翠)라 하였다. 이 팔봉의 그림자가 멀리 한양(서울)에 까지 드리워져서 팔영산이라고 불렀다고 하고, 일설에는 금닭이 울고 날이 밝아 오면서 붉은 햇빛이 바다 위로 떠오르면 팔봉은 마치 창파에 떨어진 인판(印版:인쇄판)과 같다 하여 그림자 영(影)자를 붙였다고 하고 또, 옛날 중국 위(魏)나라 태화연간(太和年間: 227-231)에 팔봉의 그림자가 멀리 위주(魏主)의 세수대야에 비추어 왕이 몸소 이 산을 찾아보고 비로소 그림자 영자를 붙여주었다고 전한다. (만경암 중수기) 이는 다 전설에 불과하지만 세 가지 설을 종합해 볼 때 그림자 영자가 타당성이 높다. 산의 북쪽 아래 능가사가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의 기록을 보면 산 정상의 동쪽 바위에 서불암(西佛庵 : 不可思議庵)이 있고 서불암 아래 능가사 위에 만경암(萬景庵)이 있다. □ 팔영산 휴양림 휴양지 고흥군 영남면 우천리 산 350-1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팔영산 자연휴양림(조성면적 186.9ha)은 사업비 1,500만원을 투자 1993∼97년(5년간)까지 완공되었다. 이 휴양림에는 관광객의 편익시설로 관리사무소, 산막 7동, 매표소, 주차장, 야영장, 음수대, 등산로, 순환로, 평의자, 휴지통, 어린이 물놀이터, 취사장, 화장실(고정2, 이동4), 쓰레기 소각장, 기타, 상하수도 시설과 정화처리장 등이 있다. □ 적대봉(592m) 금산면 석정리, 신평리, 오천리, 어전리에 있는 산으로 금산면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서쪽에 국수봉(國壽峰)이 있고, 봉우리 밑에 송광암(松廣庵)이 있다. 그 남쪽에 풍악 (楓岳)과 망천(網川)이 있어 경치가 좋으며 또 비천(飛川)이 있어 물맛이 자못 달고 차다. 적대봉아래 북쪽 홍천(虹川)과 남쪽 태수천(太守川)은 그 굽이가 열두 굽이로 거슬러 들어가면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연상케 한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인재가 많이 난다고 전한다. 산정상에 봉수대가 원형그대로 보존 돼 있다. □ 천등산(550m) 절정에 바둑판같은 돌이 있는데 세간에서는 신선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었다 하여 신선대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또 천등암(天燈庵) 유지(遺址)가 있어 경치가 서불암에 못지 않았다. 동봉(東峰)에 신라 문무왕 태봉(胎峰)이 있다고 한다. 산 정상에 봉수대가 있다. □ 마복산(538.5m) 서쪽 골짜기가 온통 기암괴석으로 되어 있어 마치 백만대군이 적진을 바라보고 대치한 것 같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소금강이라 일컫는다. 서쪽에 향로봉이 있고, 반석이 공중으로 툭 튀어 나와 천명이 앉을 만 하다. 신선대가 공중에 서리고 있고 학 바위가 목을 펴고 있으며 장군석이 의젓하게, 전통바위가 예리하게, 쟁바위가 랑랑하게, 투구바위가 높이 걸렸고, 노바위가 우뚝 솟았다 또 북바위가 있어 북채로 북을 치는 것 같이 모두 절경이라 구경할 만 하다. □ 운암산(486.9m) 일명 모악산(모岳山)이다. 산의 진기한 경치가 팔영산으로부터 뻗어와 군의 북쪽에 우뚝 솟아 병풍을 펴 놓은 것 같다. 산위에 신선대가 있고 중간에 수도암이 있다. 오른쪽에 양암(陽岩), 왼쪽에 송대(松坮)와 기우단(祈雨壇)이 있고, 암자 곁에 영천(靈泉)이 있어 비가 와도 변하지 않고 가물어도 줄지 않아 이 물을 마시면 백병이 치료된다고 한다. □ 봉황산(199m) 옛날 이 지방에 군자(君子)가 많이 나서 봉황새가 이 산에 날아와 보금자리를 잡았다는 전설에 의하여 봉황산이라 부른다고 하며 군내의 명산으로 알려져 있다. 울창한 소나무와 바위가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다. □ 거금(금산) 8경 적대봉을 돌아가는 구름(赤坮歸雲), 송광암의 저문종소리(松菴暮鐘), 사봉에 떨어지는 햇빛(蓑峯落照), 연소의 가을달(蓮沼秋月), 외도의 고기를 보며(外島觀魚), 망천의 봄비(輞川春雨), 석교의 가라앉은 기러기(石橋落棧), 월포로 돌아가는 배(月浦歸帆) □ 금강죽봉 금강죽봉은 지죽도 해안에 마치 왕대 나무가 솟아 하늘을 찌를 듯한 암벽이 있어 금강죽봉이라 한다. □ 신선대 고흥 관내 명승중 신선대가 있는 곳은 마복산 신선대, 천등산 선인대, 두방산 신선대, 수덕산 신선대 등이다. □ 활개바위 도화면 발포리 발포 앞 바다 가운데 15리 쯤에 있으며 발포를 밝개라 하였으므로 밝개가 바뀌어 활개라 한다고 하며 또 어떤 이는 "활개"라는 것은 "활개치다"는 말과 함께 성행위를 뜻하고, 바다 가운데 우뚝 솟은 두 개의 바위 중 하나는 "X바위"라 부르고 다른 하나는 구멍이 뚫려 있으므로 활개바위라 부른다고 한다. 배를 타고 지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면 배가 지나는 바위에 따라 "X바위"가 움푹 패인 곳으로 쑥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자연의 장난스런 조화로서 암석으로 된 두 개의 섬을 지날 때 여자들은 고개를 돌린다고 한다. 옛 문헌에는 쌍주석(雙柱石)이라 기록되었다. □ 용바위 영남면 소재지로부터 동남방 9.5㎞지점 해안선 급경사지에 위치하고 있는 바위로 용이 바다에서 절벽을 발판 삼아 승천했다고 하는 용의 비늘과 발자국이 바위에 남아 있는 바위가 마을과 인접해 있고, 용바위 앞에는 약 2,000여평 정도의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어 주위의 기암절벽과 어우러져 천혜의 관광지로 유명하다. 제2절 불교 문화유적 고흥군의 전지역에 걸친 불교 문화 유적·유물을 유형별로 살펴보면 석탑(石塔) 2건, 불상(佛像) 11건, 부도(浮屠) 10기, 석조물(石造物) 1건, 동종(銅鐘) 2구, 불화(佛畵) 19매, 사지(寺址) 4개소, 금석문(金石文) 및 기문(記文)19건 등 총 68건이다. 1. 석 탑(石塔) 고흥군내에서 석탑 2건이 조사되었으나 이 중 1건은 탑재(塔材) 일부에 불과하다. 풍양면 사무소에 있는 천희명 삼층석탑(天禧銘 三層石塔) 역시 처음에는 완형이 아니고 소규모였지만 기단부 면석에 탑기(塔記)가 음각되어 있어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처럼 기단부분에 탑기가 새겨진 예는 드믄 편인데 그 연대도 고려 현종(高麗 顯宗 12년 : 천희 [天禧] 5년 1201)으로 고려시대 석탑으로서도 비교적 초반기에 속한 편이다. 고흥군 내 불교 유적은 물론, 한반도 남부지역 석탑의 편년을 비교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한편 고흥군내에는 천희명 3층 석탑 외에 드러나는 석탑 유구가 없다. 이 같은 현상은 고흥지역 가람(伽藍)의 규모나 사세(寺勢)와도 관련지을 수 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도 금탑사를 비롯하여 탑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전하고 있으므로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1) 풍양면 천희명 삼층탑(天禧銘 三層塔) □ 소 재 지 : 풍양면 야막리 풍양면사무소 내 고흥군에서 완형을 추정할 수 있는 석탑이다. 뿐만 아니라 기단부 면석에 천희 5년(고려 현종12) 석탑 조성기가 음각되어 있다. (총고 2.48m, 기단부 폭 1.2m) 면사무소에 복원 설치하였다. (2) 금탑사 탑재(金塔寺 塔材) □ 소 재 지 : 포두면 봉림리 700 금탑사 경내의 대웅전에서 남쪽 15m 지점에 있는 삼성각(三聖閣) 앞에 있다. 이 탑재는 요사채에 보관중인 [금탑사 대법당 금고 신비기(金塔寺 大法堂 金鼓 新備記)](현판 1861년 화주비구명월 [化主比丘明月])에 아육왕(阿育王)이 보탑을 건립해 금탑사라 했는데 임진왜란으로 훼손되고 1층 석탑만 남아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와 관련된 유물이 아닌가 한다. 2. 불 상(佛像) 고흥군내에서 불상은 모두 11건이다. 이들을 재료상으로 구분해 보면 석불(石佛)이 2건이며 목불(木佛)이 7건, 기타 2건이다. 석불로서 주목되는 예는 성불사(成佛寺)의 석불입상(石佛立像)과 학곡리의 석조보살상(石造菩薩像)이다. 성불사 석불은 고려시대 제작으로 추정되는데 고흥군의 불교 유적 중 비교적 이른 시기이다. 학곡리 석불은 의상(倚像)인 점이나 흔치 않는 석조 보살상이다. 목불(木佛)로서 능가사 대웅전 3체 불상이 있다. 대웅전 창건 시 함께 제작된 듯 한데 군내 불교유적 중 조선 후기의 대표작으로 꼽힐만하다. 기타 소형 청동불이 4구가 발견되었으나 제작 연대가 그리 오래지 않다. 또 두원면 운암산 용은사에서 금동관음보살이 출토되어 송광사에 보관되었다. (1) 용산리 석조 보살좌상 □ 소 재 지 : 두원면 용산리 산 143 □ 지정번호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58호(1987.6.1) 고흥읍에서 서북쪽으로 약 5km쯤 떨어진 두원면 학곡 마을 앞 200m 지점의 야산 구릉상에 있다. 정북에서 약간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높이 2.7m의 거불(巨佛)이다. 좌대석과 몸체가 한 돌로 되었으나 좌대석이 땅 속에 묻혀 있어 자세한 형식은 알 수 없다. 머리 위는 일부가 훼손되었으나 보관(寶冠)을 썼으며 그 하단으로 연주문(連珠紋) 같은 띠를 두르고 전면 중앙에는 화불(化佛) 1구가 조각되어 있다. 상호는 마모되고 평평하여 얼굴 모습이 잘 나타나지 않으나 눈과 눈썹은 조용한 선정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으며, 코는 훼손되어 아랫부분이 완전히 떨어져 나간 상태다. 양쪽 귀는 크고 둔중하게 조각되어 그 끝이 어깨 위에 닿았으며 목으로 내려와서는 삼도(三道)가 보이지 않는다.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왼쪽 어깨 위에 걸친 옷주름은 형식화되었고 왼팔을 구부려, 배 아래에 붙인 소매 자락은 도포처럼 넓어진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불상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앉은 자세라 하겠는데 반가상(半跏像)도 아니며 교각상(交脚像)도 아니다. 어깨에 걸친 법의 자락이 양발 무릎을 덮었고 그 끝자락은 왼편으로 돌아 뒤에서 마무리되었다. 오른편도 역시 한 가닥 겹쳐서 뒤로 돌아가고 있다. 전면에서 보면 왼쪽다리는 조금 낮게 딛고 있으며 오른쪽 다리는 높게 구부려 치켜들고 있는 모습이다. 불상의 뒷모습을 보면 방형의 좌대 위에 무릎을 구부려 앉아 있는 좌상으로 우견편단의 법의 자락이 왼쪽 어깨와 등허리를 지나 온 몸을 덮고 있다. 이 불은 앞에서 보면, 몸을 뒤로하여 편안히 앉아 있는 의상(倚像)으로 보인다. 그러나 좌대 뒤로 기댈 수 있는 설치물이 없는 것으로 보면 의상이라 하기는 좀 문제가 있다. 이 불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그 전면 중앙에 화불(化佛) 1구가 조각된 점으로 보아 관음보살상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조성연대는 고려 후기로 추정된다. (총고 270cm, 어깨목 90, 두고 90, 하단 몸체폭 114, 상체두깨 53cm) (2) 성불사 석조여래입상(成佛寺石造如來立像) □ 소 재 지 : 도화면 봉룡리 1124-1 봉룡리 봉동마을의 성불사에 있는 불상이다. 원래 이 곳은 '미륵절' 또는 '미륵골'로 불리웠던 곳으로 현재의 절 이름은 20여년전 고흥 출신인 신모엽(申毛葉)이 현몽을 계기로 목조 보호각을 지으면서 성불사라 하였다 한다( 그 이전에는 넘어져 있었음). 88년 1∼4월 사이 신도의 성금으로 현재의 건물을 지었다. 이 석불은 광배와 본존이 같은 돌로 조각되었다. 상호(相好)는 원만상으로 소발(素髮)의 머리에 도툼한 육계가 솟아 있다. 백호는 표현되지 않았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희미하게 조식되었다. 어깨는 큰 키에 비하여 약간 좁다란 느낌이 들며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처리하였다. 수인은 오른손을 올려 엄지와 인지를 잡고 있으며 왼손을 길게 밑으로 뻗쳐 내리고 있다. 이 같은 수인은 왼손의 모습이 확실치는 않으나 오른손의 손가락 모습으로 보면 하생상품인이다. 이로 보아 이 석불은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로 보는 것이 옳겠다. 이 불상은 형식화된 의문, 광배에서 나타나는 여러 문양의 생략 광배에 비해 너무 왜소해진 불신의 불균형 등으로 볼 때 시대적 후진성이 엿보인다. 조성연대는 고려 말로 추정된다.(총고 354㎝, 광배 최대폭 175㎝, 두께 44㎝, 두고 58㎝, 안고 37㎝, 안폭 35㎝, 견폭 67㎝, 신고 270㎝) (3) 능가사 대웅전 목조삼체불 □ 소 재 지 : 점암면 성기리 371-1 능가사의 대웅전내에 높직한 불단을 마련하여 봉안된 불상으로 재료는 목조이며 개금을 하였다. 3체불 좌우로는 보살입상이 각 1구씩이 배치되어 있다. 중앙 본체불은 나발의 머리에 조그마한 원형 육계와 계주가 보인다. 백호가 표현되었고 눈은 정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상호는 원만상이지만 조선시대 불상이 그렇듯이 경직되어 있고 무표정이다. 개금을 하면서 입과 턱 주위에 나선형의 수염을 표현하였다. 목에는 삼도가 보이며 법의도 통견으로 어깨선을 타고 내려온 옷주름이 두껍게 처리되었으며 특히 오른쪽 어깨를 타고 내려온 타원형의 옷주름은 조선시대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양식이다. 가슴은 앙연형의 내의 자락을 표현했고 그 아래로 띠매듭을 둘렀다. 수인은 오른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가볍게 무릎위에 놓은 항마인을 결하였다. 무릎은 오른발이 위로 올라가는 길상좌이며 하체정면에서 흘러내린 의습의 옷주름이 유려하게 흘러내려 무릎전체를 덮고 있다. 왼쪽(향우)의 여래상은 본존불과 비슷한 형식이지만 내의가 앙련형이 아닌 평행선으로 표현되었고 수인은 오른손을 들어 구품인인 중품하생의 반대형을 결하고 있다. 오른쪽(향좌)의 여래상 역시 왼손을 들어 중품하생인을 결하고 있다. 한편 3체불의 보처로서 양립하고 있는 보살입상은 2구가 있는데, 수인만 다를뿐 대체적으로 비슷한 양식이다. 이들 보살상은 모두 입상으로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관세음·대세지가 아닌점으로 보아 문수·보현보살이 아닌가 하며, 만일 문수·보현일때 중앙 본존불은 조선시대 흔히 볼 수 있는 석가여래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중앙 본체불 양편으로 아미타수인을 결하고 있는 두 여래가 있는 예는 해남 대흥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 불상은 그 조성연대가 동일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웅전의 건립시기(17C후반)와 같은 시기로 보인다. 특히, 경내의 능가사 사적비의 음기에 대웅전불상의 화주와 별좌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비문상의 불상이 현전하는 불상을 지칭하고 있는 것 같다. (본존불 총고 184, 보살상 두고 63, 안고 38, 안폭 38, 견폭 80, 무릎폭 12, 무릎높이 28cm, 좌우불상총고 107, 보살상 총고 136cm) (4) 능가사 응진당 목조 삼존불 □ 소 재 지 : 점암면 성기리 371-1 능가사 경내의 응진당내에 있는 목조 삼존불로 재료는 나무이지만 개금을 하였다. 양식을 보면 본존불은 나발의 머리에 조그마한 육계가 보이며 계주도 나타난다. 얼굴은 방형에 가까워 인후한 느낌을 주며 백호가 표현되었고 상호는 원만상이다.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었고 법의는 통견이다. 내의는 연화형으로 표현해 법의와 구분하였고 띠매듭을 둘렀다. 무릎은 결가부좌로 오른발이 왼쪽 무릎위로 올라가는 길상좌를 취하였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다. 무릎 밑으로 내려쳐지는 의습이 사실성을 띠고 있으나 너무 주름을 많이 주어 칙칙한 느낌이다. 보살상은 양식이 비슷한데 아직 피지않은 연꽃을 양손에 맞바꿔 잡고 있다. 화염무늬가 표현된 보관, 법의는 통견, 목에는 삼도가 보이며 때매듭이나 연화형 내의자락 처리는 보존불과 유사하다. 이 3존불은 어깨를 걸친 통견의 의문이나 그 양식이 대웅전에 봉안된 3체불과 동일 수법임을 알 수 있다. 이 응진당은 바로 인접한 『능가사 사적비(1690년)』에 따르면 17세기후반 중창할 때 동시에 지은 것으로 나타난다. (보존물 총높이 110, 두고 36, 안고 20, 견폭 55, 무릎폭 70, 무릎높이 20cm) (5) 능가사 목조 사천왕상 □ 소 재 지 : 점암면 성기리 371-1 능가사 입구의 사천왕(四天王) 문내에 있다. 대웅전을 향해서 들어서는 쪽으로 보아 향좌측에서부터 북방·서방이고 향우측이 동방·남방이다. 동방 지국천(持國天)을 보면 화려한 보관을 썼는데 보관 위로는 화염문이 조식되었다. 얼굴은 사천왕 특유의 얼굴이 사납고 위엄이 있는 표정이다. 왼손으로 비파를 쥐고 있으며 오른손으로는 현(絃)을 퉁기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오른 발 옆에 동자상이 있다. 남방 증장천(增長天)은 화려한 보관을 썼는데 그 뒤로는 화염문이 표현되었다. 손에는 오른손에 칼을, 왼손은 별다른 지물(持物)이 없이 칼끝을 잡고 있다. 서방(西方) 광목천(廣目天)은 역시 화려한 보관을 썼으며 보관 뒤로는 화염문이 보인다. 왼손은 손바닥을 들고 뻗쳐서 보주를 쥐고 있으며 오른손은 용두화(龍頭化)된 어류(魚類)를 가볍게 쥐고 있다. 허리띠 앞으로 귀면상이 조각되었다. 북방 다문천(多聞天)은 보관을 쓰고 역시 보관 뒤로는 화염문이 조식되었다. 왼손은 어깨위로 올렸으나 별다른 지물은 보이지 않고 오른손에는 긴 창을 잡고 서 있다. 이 사천왕의 제작 시기는 조선 후기로 보인다. 이는 [능가사 사적비](1690)의 음기에 [천왕문화주 시한 별좌 회익 왕상화주 천일 충인 삼련화주지웅(天王門化主 是閑 別座 懷益 王像化主 天日 ?印 三輦化主智雄)]이라 하여 천왕문을 지을 때 사천왕상도 함께 조성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나타나며 이때 참여한 화주나 별좌도 알 수 있다. 조성에 대한 절대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사천왕상이다.(총고 약 2.7m) (6) 수도암 대웅전 대조불상 □ 소 재 지 : 두원면 운대리 47 수도암 대웅전에 봉안된 소규모의 목조불상이다. 머리는 나발이고 조그마한 원형의 육계가 표현되었으며 얼굴은 방형에 가까워 풍만한 느낌을 들게 한다. 백호가 큼직하고 눈은 지긋이 내려뜨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이 나타나며 법의는 통견으로 가슴 밑에서 一자형의 내의 자락이 지나가고 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인데 오른손의 손가락 일부가 결락되었다. 무릎은 결가부좌인데 오른발이 왼 무릎 위로 올라가는 길상좌이다. 무릎 아래로 늘어진 법의 자락은 간략히 처리하였다. 이 불에서도 역시 오른팔을 감고도는 반달형의 법의 자락이 흘러내리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아 의문의 간략화가 역력하다. 제작 연대는 조선 후기로 추정된다.(총높이 47, 두고 18, 안고 10, 안폭 10.5, 견폭 22, 무릎폭 30, 무릎고 8cm) (7) 금탑사 극락전 삼존불 □ 소 재 지 : 포두면 봉림리 700 금탑사 극락전에 봉안된 삼존불로 재료는 목조이나 개금을 하였다. 본존불은 나발의 머리에 육계가 솟아있고 계주가 보인다. 상호는 4각에 가까운 방형으로 경직된 모습이며 백호가 표현되었고 목에는 삼도가 보인다. 법의는 통견으로 배 아래에서 U자형을 보이고 있으며 배 위에서 一자형의 내의 자락이 지나고 있다. 수인은 오른손은 어깨위로 올리고 왼손은 무릎 위로 내린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결하고 무릎은 결가부좌를 하여 오른발이 왼다리 위로 올라오게 하는 길상좌를 취하였다. 무릎을 휘감고 있는 군의 자락이 무릎 중앙에서 모아지고 있는데 다소 느슨해진 느낌이다. 왼쪽(향우)의 보살상은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왼손에는 보병(寶甁)이 걸렸다. 오른쪽(향좌)의 보살상은 손 모습만 반대로 하고 있을 뿐 제작 수법은 거의 유사하다. 이들 협시불은 아미타불을 협시하고 있는 관세음·다세지 보살로 생각된다 조성연대는 조선후기로 보인다. (본존불 총높이 160, 무릎 높이 110, 어깨폭 60㎝, 머리높이 60㎝, 얼굴높이 34㎝, 얼굴폭 31㎝ 보살 총 높이 각 146(좌) 150(우)cm) 한편 금탑사 경내의 명부전에는 목조로 된 지장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백호가 표현되고 삼도가 보이며 전체적으로 날렵한 인상을 풍긴다. 양편으로는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병립하고 있다. 조성시기는 조선 후기로 추정된다. (높이 110, 무릎 폭 76cm,) 또 극락전 안에는 직경 96cm, 높이 103cm의 법고가 보관되어 있다. (8) 봉래사 극락전 목조삼존불 □ 소 재 지 : 봉래면 신금리 401 봉래사의 극락전 안에 봉안되어 있는 삼존불이다. 본존불은 나발의 머리에 육계와 보주가 보이며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었다. 법의는 통견이며 수인은 두 손을 모두 무릎에 대고 있는 항마인을 결하고 있고 무릎은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 이 불은 의문의 간략화, 동체형의 불신, 무표정한 상호, 긴 손가락의 항마인 등 모두가 퇴화와 경직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양 옆에 좌상으로 배치된 보관을 쓴 보살상과 우측에 있는 지장보살은 원래 본존불과는 관계가 없는 듯 하다. 본존불의 조성시기는 조선조 말기로 추정된다. (본존불 총고 43cm) (9) 봉래사 극락전 철불 □ 소 재 지 : 봉래면 신금리 401 이 철불은 최근에 제작한 것이라 하나 그 재료가 철이라는 점에서 참고 사항으로 소개해 둔다. 이 불은 총 높이 96cm 로서 상호뿐 아니라 우견편단의 법의나 신체 균형이 잘 조화되고 있어 최근작으로서는 손꼽힐만한 불상이다. 나발의 머리에 높고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고 상호는 계란형이다. 눈·코·입 등이 사실적인 표현으로 어느정도 균형을 잡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보이며 법의는 우견편단인데 어깨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옷 주름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무릎은 결가부좌를 틀고 있는데 상단이 불신 폭에 비해 좀 과대해진 것 같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다. 원만한 상호와 당당한 어깨 등은 최근작이 아니라는 착각이 있을 정도로 뒷마무리가 잘 정돈되었으며 의습 역시 유려하게 처리되어 마치 남원 선원사의 철불(보물422호)을 연상케 한다. (총고 96cm) (10) 봉래사 청동불 □ 소 재 지 : 봉래면 신금리 401 이 소형의 청동불은 봉래사 요사채 안에 봉안되어 있다. 청동불은 모두 4구로서 입상이 2구 좌상이 2구이다. 모두 근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조각 기법 역시 서투르고 투박하다. 입상 2구는 보관을 쓴 머리에 합장을 하고 있고 옷자락 역시 치마 자락처럼 처리되었다. 하단으로 대좌를 갖추고 있다. 좌상 2구는 나발의 머리에 육계가 보이지 않으며 통견의 법의, 양손을 무릎 위로 내민 손 모습이 보이나 훼손이 심하여 원형을 살필 수가 없다. 밑으로 간략한 대좌가 보인다. 이들 청동불은 모두 뒷면을 생략한 청동판 불이다. 조성시기는 근년작으로 추정된다.(입상 2구; 17.5∼18cm, 좌상 2구 ; 12∼14cm) (11) 송광암 대웅전 목조삼존불 □ 소 재 지 : 금산면 어전리 74 송광암의 대웅전에 봉안된 3존불로 재료는 나무이며 개금을 하였다. 본존불은 나발의 머리에 육계가 솟아 있고 얼굴은 원만상으로 백호가 표현되었고 목에는 삼도가 보인다. 법의는 통견인데 가슴 밑에서 U자형으로 조직되었고 가슴에는 一자형의 매듭이 없는 띠가 보인다. 수인은 엄지와 중지를 잡고 있는 구품인(九品印)을 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미타여래인 것으로 보인다. 무릎은 결가부좌를 취하고 있으며 오른발이 왼발 위로 올라오는 길상좌를 하고 있다. 이 불은 일부 의문에서 도식적이며 형식화된 기법을 나타내고 있다. 양편의 협시불은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모두 오른손을 위로 올리고 있는 중생하품인을 결하고 있다. 이들 본존불과 보살들은 모두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간주된다. 조성시기는 조선조 후기로 추정된다. (본존불 총높이 67cm, 두고 24, 안고 13, 안폭 12.5, 어깨폭 32, 무릎폭 47, 무릎높이 13, 보살상 54cm) 3. 부 도(浮屠) 고흥관내의 사찰 중 능가사 경내에 10기(基)의 부도가 있다. 제17장 제1절 고흥의 절(능가사 부도 참조) 4. 동 종(銅鐘) 고흥군내에서 동종은 8건이 조사되었다. 이들 가운데 능가사 대웅전 안의 강희명동종(康熙銘銅鐘 : 도 유형문화재 제69호)과 현재 부여 박물관에 소장된 무술명동종(戊戌銘銅鐘)외에는 모두가 최근작이다. 포두면 송산리에서 출토되어 매장문화재(埋藏文化財)로 신고된 무술명의 동종은 그 제작 연대가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능가사 대웅전의 범종은 종고가 1.5m 넘는 크기로 강희 37년 무인운운(1698. 숙종24)의 주종명(鑄鐘銘)이 있어 절대연대를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팔괘(八卦)가 종신에 표현된 점도 주목된다. 본지에서는 최근 작품을 제외하고 2구만 소개한다. (1) 능가사 강희명동종(康熙銘銅鐘) □ 소 재 지 : 점암면 성기리 371-1 □ 지정번호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69호(1978. 9. 22) 능가사의 대웅전 안에 있다. 종신에 [강희삼십칠년 무인 삼월 일 흥양팔영산 능가사(康熙三十七年 戊寅三月 日 興陽八影山 楞伽寺)…]의 주종명이 있어 절대연대(1698년 숙종24)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세부 양식을 보면 용뉴(龍?)는 쌍룡으로 정상에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음관(音管 : 甬筒)을 두지 않고 조그마한 원형공(原形孔)으로 대신하고 있다. 천판(天板)은 이중의 연화문(蓮花紋)을 조식하였는바 상단은 16엽 연화문이고 하단은 입상화문(立像花紋)이다. 그 밑으로 상대(上帶)에 원형으로 자리를 마련해 12자의 범자문(梵字文)을 차례로 돌렸다. 인동문(忍冬紋)을 장식한 유곽(乳郭: 27×34cm)안에 9개의 유두(乳頭)를 뚜렷하게 조출하였다. 4곳의 유곽 사이에는 천의(天衣)를 걸친 보살입상과 문호형(門戶形) 장식을 보였는데 그 안에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歲)]라는 문구가 양각되었다. 종신의 중앙부에는 주역(周易)에서 나타나는 전양(全陽)인 건(乾: ≡)에서 전음인 곤(坤 : ㅟㅟ)에 이르기까지 팔괘를 양각으로 돌렸는바 이는 조선범종에서 불 수 없는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이러한 예는 같은 경내의 능가사 사적비 이수(彦首)에서도 표현되고 있어 주목된다. 하대로 내려와서는 두 줄의 띠를 둘렀고 그 안에 화판(花瓣)과 당초문대(唐草紋帶)를 둘렀다. 특히 화판은 각각 그 문양을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여 정교함을 엿볼 수 있다. (총고 157cm, 종신고 117cm, 구경 101㎝, 종신두께 9cm) (2) 송산리 출토 무술명동종(戊戌銘銅鐘) □ 출 토 지 : 포두면 송산리 산 223 □ 보 관 처 : 국립 부여 박물관 이 종은 1966년 9월 6일 포두면 송산리 산 223번지의 적석층(積石層) 속에서 같은 마을 거주 정병임(丁炳任)이 발견하여 매장문화재로 신고된 것이다. 당시 매장문화재를 관장하던 교육구에서 사진과 명문(銘文)을 첨부 문화재 관리국에 보고하였고, 동년 10월말 문화재 관리국의 지시에 의해 부여 박물관에 이관되어 현재까지 보관중이다. 황수영 박사 [고고미술]에 그 발전 경위와 양식·특징을 정리하였는데 이 보고문을 토대로 살펴보고자 한다.(성춘경·김희태) 이 종은 총높이 45.3cm에 이르는 중형으로서 출토 당시까지만 해도 고려종으로서는 최대의 규모였다 한다. 양식은 한국종으로서 통식을 따르고 있어 종정(鐘頂)에 용뉴(龍?)와 원통(圓沂)이 마련되었다. 상·하대가 있어 각각 국화와 보상화문을 돌린 것이다. 하대에 비하여 매우 좁은 상대에 부쳐서 입상 삼각대(立像三脚臺)가 달려 있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종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유곽(乳郭)이 원형인 점으로 대부분의 종이 예외없이 방형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상대와 연접되어서 네 곳에 배치되어 있는 이 원대(圓帶 : 외형 12.2cm, 목 2.1cm)에는 주문(珠紋)안에 범자가 돌려 있으며 그 안에는 9유(乳)가 통례대로 배치되어 있다. 각 원유간(圓乳間)에는 종복부하대(鐘腹部下帶)에 접근하여 운상(雲上)의 좌불(坐佛) 2구와 둥근 연화문 당좌(撞座) 2개가 교대로 배치되어 있는 바, 이 또한 통례를 따랐다. 당좌는 직경 6.1cm로서 주문으로 유곽을 만든 속에 8판의 복련을 새겼다. 원유와 하대사이에 6행 52자의 점각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명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말미의 [사어향(沙於鄕)]이다. 사어향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0 보성군 고적조에 '사어향재군남육리(沙於鄕在郡南6里)'란 기록으로 미루어 보성군에 속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어향은 현재의 보성군 보성읍 봉화리 일대로 추정된다. 무술명동종의 사어향 명문은 이 종(또는 종이 소재한 사찰)의 불사에 참여했던 발원지가 사어향의 관리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양식적으로 고려시대 종임을 더욱 확실하게 증빙해 주는 내용도 될 수 있다. 즉 향(鄕)·소(所)·부곡(部曲) 등의 행정구역이 조선초기에 이르러 대부분 혁파되었는데 위 명문은 혁파 이전임을 알려준다. 제3절 목조 문화유적 고흥관내의 대표적인 전통목조 기와집으로는 관청 건물로서 존심당(存心堂), 아문(衙門), 남휘루(覽輝樓)와 불교계의 사찰(절), 유교계의 향교 등이 있어 본서에는 건축양식만 적는다. 1. 목조건축 (1) 존심당(存心堂) 전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각집이다. 평면구성은 우측 뒷면으로 온돌방 3개(4칸 규모)가 설치되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우물마루를 깐 대청으로 처리하였다. 기단은 장대석(長大石) 2벌대 쌓기로 되어 있고 초석은 다듬은 원형초석을 놓았으며 기둥은 원통형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기둥머리는 창방(昌枋)으로 결구하였고 그 위로는 주간(柱間)마다 화반(花盤)을 1구씩 배치하였다.(우측 두번째 칸에는 코끼리 형상의 화반을 배치), 공포는 이익공식(二翼工式)으로 2개의 쇠서가 서로 마주 향하게 되어 있고 그 사이에는 연봉형상의 조각으로 장식이 되어있다. 가구(架構)는 전, 후 평주(平柱)위에 대량(大樑)을 걸고 다시 그 위로 뱫은 동자주를 놓고 종량을 올린 5량가(樑架)이며, 양 측면의 기둥위로는 대량위로 충량을 걸었다. 대청부분의 천장은 연등천장이나 종량위로는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처마는 모두 겹처마로 되어 있다. (2) 고흥아문(高興衙門)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어간(御間)은 맞배 솟을 지붕이고 양 협간(挾間)은 평지붕이다. 3칸 모두에 2짝의 판장문을 달았다. 양 측면의 중인방 위로는 심벽구조의 벽체로 그 아래로는 판벽으로 막음 처리하였다. 윗면이 평평한 막돌 초석위에 원통형 두리기둥을 세우고 기둥위로는 주두(柱頭)나 공포 짜임없이 도리로만 결구시켰다. 가구형식(架構形式)은 굴도리를 걸은(양 협간 주심 도리는 8각형) 3량가(樑架)이며 처마는 전·후면 홑처마로 꾸몄다. (3) 남휘루(覽輝樓)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층루(二層樓)로서 1, 2층 모두 4면이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고 지붕 네 귀에는 활주(活柱)를 세웠다. 방형으로 다듬은 화강석으로 2벌대 기단을 축조하고 그 위에 다듬은 원형초석을 놓았다. 기둥은 원통형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1.3미터 높이에 장귀틀과 동귀틀로 짜맞춘 루마루를 설치하였다. 2층마루 4면에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설치하였고 난간의 청판에는 풍혈(風穴)이 뚫려 있다. 2층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되어 있고 그 위로는 주칸마다 귀면(鬼面), 동물형상 등의 화반이 1구씩 놓여 있다. 공포는 외부로 행공첨차(行工?遮)를 둔 3익공식으로 쇠서는 모두 하나의 판형으로 붙어 있고 아래쇠서 위로는 조각된 연봉이 놓여 있다. 가구는 전, 후의 기둥위로 대량을 걸고 그 위로 종량을 올린 5량구조이며, 측면의 중심기둥으로부터 대량위로는 충량(衝樑)을 설치하였다. 충량의 머리는 용두로 장식하였다. (4) 능가사 대웅전(楞伽寺 大雄殿)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비교적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약하게 배흘림을 둔 두리기둥위에 창방과 평방(平枋)을 걸고 공포를 올렸으며 공포는 내 사출목(內 四出目), 외 삼출목의 다포양식(多包樣式)으로 되어 있다. 주칸포(柱間包)는 어칸(御間)에 3구(具), 협칸(挾間)에는 2구, 퇴칸(退間)에는 1구씩 놓았다. 첨차는 교두형으로 되어 있고 쇠서는 양서형으로 뾰쪽하게 처리하였다. 천장은 종량위로만 우물천장을 가설하였고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처마는 전, 후면 겹처마이다. (5) 금탑사 극락전(金塔寺 極樂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막돌허튼층 쌓기의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았으며 기둥은 민흘림과 원통형의 두리기둥이 혼재되어 있다. 공포는 어칸에는 2구, 협칸에는 1구의 주칸포를 놓은 다포양식이다. 출목은 외부로 삼출목, 내부로 4출목이며 양서형의 산미첨차(山彌?遮) 위로는 조각된 연봉이 놓여져 조선후기 장식적인 수법이 보인다. 가구는 5량가이며, 종량 위로는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처마는 겹처마로 되어있다. 창호(窓戶)는 중앙칸에는 4짝, 양 협칸에는 두짝의 빗살문을 달았다. (6) 수도암 무루전(修道庵 無漏殿)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집으로 전면으로는 살림집 형식으로 반간폭의 간을 두고 마루를 깔았다. 기단은 전면으로만 장대석 1벌대 쌓기로 되어 있고 초석은 막돌초석을 놓았다. 기둥은 두리기둥을 세우고 기둥위로는 행공첨차를 둔 2익공식의 공포를 올렸다. 공포는 전면에만 두고 후면은 보와 납도리 만으로 결구시켰다. 가구는 1고주 5량형식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이고 내부바닥은 장마루로 처리하였다. 처마는 전면은 겹처마, 후면은 홑처마로 꾸몄다. (7) 고흥향교(高興鄕校) 고흥읍 행정리에 위치한 고흥향교는 건물의 구성이나 배치 등에 있어 향교건축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는 이 지역의 귀중한 유교유적이다. 현재 본 향교는 전학후묘의 배치 유형으로 야트막한 산록에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향교 바로 앞으로는 현재 주택가로 형성되어 있으며, 계속해서 고흥읍 시가지와 구릉으로 연결된다. 향교의 건물은 막돌담으로 둘러진 약 850평의 대지에 대성전(32.8평), 명륜당(29.8평), 동·서무(각 5.4평), 동재(11.9평), 서재(12.2평), 내삼문(2.4평), 외삼문(3.6평), 향교사무실 (50평)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비교적 건립당시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배치 또한 짜임새 있게 형성되어 있다. 향교가 들어선 곳은 남북으로 긴 비교적 경사가 급한 지형으로서 공간은 기능별로 크게 4부분으로 분화되어 있다. 외삼문에서 명륜당 후문까지의 과정적 공간, 명륜당과 동·서재로 이루어진 교육공간, 대성전과 그 전면의 동·서무가 이루는 제향공간, 그리고 교육공간 우측으로 ?자형의 향교 사무실이 들어서 있는 부속공간으로 나뉘어져 각 공간(부속공간은 제외)은 경사축으로 공간의 수직적 위계를 갖고 형성되어 있다. 제향공간내에서는 지형관계상 대성전 전면으로 1m 높이의 장대석 축대가 기단형식으로 축조되어 있다. 관내 여행업체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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