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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忠信 義士 列傳(충신 의사 열전)
충(忠)은 군주시대에는 왕, 현대에 와서는
국가 지도자와 나라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으로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
광산 김씨사’를 요약 편집하고 있는 필자의 고향은
아직도 유교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안동 지방이다.
안동의 광산 김씨는 연산조에 낙향하여 예안에 터를 잡은
밀직부사공파(예인파)의 입향조 참의공(효려)의 집안과,
같은 연산조 때 사화(史禍)의 혼조 기미를 알고
안동 구담으로 낙향하여 은둔한
퇴촌공의 증손자 담암공(용석‧성균진사)과
같은 날 진사시에 함께 급제한
당숙 판관공(주‧군자감판관)의 집안이다.
판관공(주)의 후손 광과 장 형제가 임진왜란 때
일본의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와
조정에서 배척을 당하자
지리산 자락 하동으로 가족을 데리고 떠나가니
하동 광산김씨(하동 판관공파)의 시작이 되었다.
예안파와 담암공 두 집안 이외에
입향한 기록이나 구전(口傳)이 없으므로
대구‧경북의 광산 김씨는 두 집안의 출발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안동은 과거라는 전통이 현대라는 시대의 거센 조류에
쉽게 물들지 않고 있다.
안동을 찾는 나그네는 벼슬 자랑을 하지 말고
학문 자랑을 해야 손님으로 대접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지방이다.
아직까지 유학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안동 양반들의 고집스러운 선비정신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고집스럽게 이어온 선비 정신은 벼슬보다는
학자적인 긍지와 아무나 쉽게 지킬 수 없는 고상한 도덕률과
인간의 품위를 지키려 노력하는 정신이다.
지조 높은 안동 선비들이 양반으로 대접해 주는 가문에는 조건이 있다.
1. 입향조가 세조 찬탈 행위 및 무오‧갑자사화 때
정절을 지키면서 낙향하신 분
2. 본인이나 자제 중에 문과에 급제하여
가문을 중흥시킨 가문
3. 퇴계 선생 문하에서 석학이 된 분
4. 임진‧병자 양난에 의병을 일으킨 가문
4가지 유형을 다 갖추었거나, 최소한 하나라도 갖추어야
안동 양반의 반열에 들 수 있었다.
양반 대접의 차이가 다른 지방에서도 유사할 것이다.
고집스럽게 지켜온 안동 양반들의 선비정신은
충(忠)과 의(義)의 정신은 지속되어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이 망하자 조국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국가 보훈처에 따르면 독립 유공자로 포상된 인원의 경우
전국 군단위의 평균 30명이고
경북 지역의 경우 50명 전후이다.
유학의 선비정신이 아직도 살아있는
안동의 경우 254명이 되며(영덕 136명)
군단위로는 전국에서 제일 많다.
조선의 내란과 임진‧병자년에 왜와 오랑캐의 침공에
충과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면서
의분을 삭이지 못한 위대한 우국충정의 선조들을 찾아보자.
약황(19세․양간) |
하정표문 사건으로 중국 운남성에 귀양 가서 돌아가셨다. |
약시(19세․양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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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가 벼슬을 내려도 맹청이라 칭하며 벼슬에 나가지 않고 산촌에서 돌아가셨다. |
승길(19세․전리) |
불사이군으로 조선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
백겸(21세․전리) |
오랑캐 이만주를 토벌, 이시애의 난 평정 |
면(22세‧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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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부사를 지내고, 임진란 때 의병장 최경의와 함께 의병을 모아 참전하였다. |
대민(23세‧의랑) |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 용경사에 배향 |
신견(23세‧의랑) |
임진란 때 제종형 대민과 함께 순절 |
경남(23세‧삼사) |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싸웠다. 증 참판 |
개민(23세‧의랑) |
이괄의 난에 공이 있어 원종훈에 녹선 |
부인(23세‧밀직) |
변방 경원이 오랑캐에 함락되자 적을 물리쳤다. |
여석(23세‧퇴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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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주의의 난에 유필상 종사군으로 군무를 담당. 이시애의 난 토벌로 정충출기표의 적개공신 1등이 되다. |
24세
위(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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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6형제가 의병을 모집하고, 의병장 김제민과 함께 전공을 세워 병절교위가 되었다. |
해(밀직) |
경상우도 의병 대장 |
홍우(전리) |
임진란 때 장성 남문에서 의병 1651명을 모집 |
강(밀직) |
임진란 때 종형 근시재(해)를 따라 전공을 세웠다. |
정일(의랑) |
병자호란 때 삼종질 취지와 함께 창의 |
득선(의랑) |
병자호란 때 종질 취지와 함께 창의, 통훈대부가 되다. |
기수(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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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2-1626년 아버지 도사 구, 어머니 공인 경주 김씨. 학문이 높고 효성이 지극하여 기자전 참봉이 되고 선조 4년에 병절 교위가 되었다. 선조 26년 임진란 때 김홍우와 같이 창성 남문에서 창의하여, 의곡유사(군량담당)가 되어 서곤과 같이 재행소(임금이 머무는 곳)로 운반하였다. 의병 80명을 모아서 고종후 막하로 보냈고, 달천에서 적병을 만나 수십 명을 베었다. |
덕우(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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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용언, 호는 양촌, 아버지는 생원 경희, 어머니는 전주 이씨. 선조 26년 장성 남문에서 창의하여 의병을 모아 진주성으로 보냈다.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아 재행소로 보냈다. 인조 25년 병자호란 때 호남우도 의곡장으로 천거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강화도로 보냈다. 의병을 인도하여 여산까지 갔으나 화의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하였다. 가선대부에 제수되고 오산사에 배향 |
수연(사온승) |
열부 김씨, 5부자 고부의 순절 |
의정(의랑) |
병자호란 때 재종질 취지와 같이 창의 |
성진(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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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4-1597 아버지 참봉 한련, 어머니 영월 신씨. 1592년 임진란 때 제종형 홍우와 함께 창의하여 왜적을 토벌하였다. 의병과 의곡을 모집하고 장성 남문 창의소에 나가 왜적을 물리칠 계략을 세우고 장성을 출발하여 직산에서 적을 수백 베었다. 진위에서 왜적 정탐자를 잡아 죽이고 용인에 와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귀가하였다. 선조 31년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인솔해 진주성에서 안성을 거쳐 소사까지 진격하였다. 갑자기 적의 응원부대가 몰려와 고전 분투하다가 순절하니 장성 오산사에 배향 |
여호(의랑) |
병자호란 때 안방준과 의거 |
계(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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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란 때 형제가 같이 창의하여 의병장 김제민과 같이 창의하여 의병장 김제민과 더불어 전공을 세웠다. 부장이었다. |
보원(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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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 때 중봉 조헌과 같이 청주에서 왜적을 소탕,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성이 함락되자 죽었다. 김천일, 최경회와 장성 장천사에 배향, 묘는 영남 삼남 기동에 초헌장, 요전에 순의비가 있다. |
영(밀직) |
병자호란 때 가재를 털어 군비 보조, 평생 오랑캐 쪽을 향해 앉는 일이 없었다. |
25세
광계(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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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향인이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풍기에 이르러 남한산성의 화의 소식을 듣고 서향 통곡하고 돌아와 낙동강 가에 참락정을 짓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집의에 추증, 매원유고 |
광악(밀직) |
야일재 |
남철(전리) |
호란 때 고창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형조 참의 추증 |
대성(사온승) |
병자호란 때 전사 통훈대부 |
동준(문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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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란 때 세자를 전주로 호종, 병자호란 때 어가를 남한산성으로 호종, 벼슬을 주려 했으나 거절하고 황명처사라 자칭 전주 인봉서원‧호산서원에 배향 |
설(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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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어가를 남한산성에 호종, 인조가 승하하자 토산에 단을 쌓고 북향망곡하고 종신토록 추모하니 사림이 유허비를 세웠다. |
춘남(의정) |
임진란 때 전사 증참의 |
숙남(퇴촌) |
정묘란 때 의곡을 재행소에 보냈다. |
여강(전리) |
의곡을 모아 올렸다. |
운해(삼사) |
이괄의 난 때 가선대부가 되고 공로가 특이하여 전마와 갑주, 화살통을 받았다. |
윤국(총제) |
명의사신 심유겸의 접빈관이 되고 선무원 종훈에 녹선 |
득종(녹사) |
임진란 때 고경명과 더불어 금산에서 순절, 돈령부 도정에 추증 |
민선(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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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란 때 왜적을 토벌하는데 공이 있었으나 1593년 7월 13일 병으로 죽으니 도승지 추증 |
승선(밀직) |
병자란 때 의주 전투에서 전사 |
회(의정) |
왜적과 싸우다 전사 |
승남(전리) |
정묘란 때 의곡을 모았다. |
경남(삼사) |
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싸웠다. 증 참판 |
광운(삼사) |
임진란 때 최경희 등과 의병을 모아 김천일 막중에서 싸웠다. 증 참의 |
요형(밀직부) |
정묘‧병자란 때 의병을 모집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
해수(판도) |
정묘란 때 사계선생의 호소사가 되어 창의관으로 삼았다. |
취지(의랑) |
병자란 때 안방준을 따라 창의하여 참전 추증 참의 |
여성(전리) |
정묘란 때 호소사 김장생의 명을 받아 의병을 모집하고 전주에서 세자를 배알 |
득선(의랑) |
병자호란 때 종질 취지와 창의 통훈대부 |
몽룡(사온승) |
왜란 때 남한산성에서 4부자가 순절 |
여진(전리) |
정묘호란 때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아 전주에 있는 세자를 알현 |
영남(직제) |
사천에 있는 왜병을 소탕하고 군량미 수천 석을 서울로 운반 |
지남(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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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 때 군무로 많은 공적을 남겼다. 광해군 때 간신들이 폐모론을 주장하자 반대하면서 식음을 전폐하며 일생을 마쳤다. |
위남(직제) |
지남과 형제로 광해군 때 폐모론을 반대하였다. |
26세
질(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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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면종6)-1593년(선조27)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여빈, 호는 절재. 아버지는 참봉 군헌, 어머니는 합전 이씨. 1592년(선조26) 내금위 봉사로 있을 때 임진란이 일어나자 김성일‧곽재우와 더불어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모집하였다. 의병장이 되어 피로써 맹세하고 군사를 통솔하여 진주로 가는 도중 단성에 이르러 왜병을 만나 수십 명을 베고 임곡에 이르렀다. 이때 수많은 왜적에 포위되어 대적할 수 없음을 미리알고 편지를 써서 웃옷과 같이 말안장에 얹어 집으로 보냈다. 곧바로 칼을 빼어들고 적진에 돌입하여 많은 왜적을 죽이고 장렬히 전사하니 동년 6월 5일이다. 말이 집에 도착하니 박씨는 옷과 신을 무덤에 묻고 초혼장을 지내고 소‧대상을 마친 후 “내가 지금까지 죽지 않고 참아온 것은 너의 아버지가 떠나갈 때 약속을 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너희들이 할아버지를 봉양해야 한다.”라고 자식들에게 이르고 곡기를 끊은 지 10일 만에 죽었다. |
천수(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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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형 만수, 아우 백수, 구수와 함께 봉산에서 의병을 모았다. 임진강 싸움에서 조방장 유극량의 군사와 함께 싸웠으나 패전하였다. 아우 구수와 더불어 의병을 수합하여 풍덕현 전투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으나 총에 맞아 부상하였다. 형조 참의에 추증되고 봉산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
초(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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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백부 매원공의 막에서 의병장 일을 도우니 연소한 나이로 용맹함이 있었다. |
춘남(의정) |
임진왜란 때 전사, 증: 참의 |
택남(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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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에 백진남‧정명열과 더불어 충무공을 후원하여 명량대첩을 이루게 하였다. |
헌(사온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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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자는 희도. 아버지 증 참판 광진, 어머니는 증 숙부인 영광 김씨. 중봉 조헌의 문인이며 1591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에 조헌이 의병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의병을 모집하여 조헌 막하에 들어가 참좌가 되어 청주에서 크게 전공을 세웠다. 이때 왜적이 금산에 주둔하여 세력을 떨치는데 의병이 왜적을 치다가 여러 번 패하였다. 의병장 조헌‧승장 영규‧참좌 헌 등이 70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금산성 밖 10까지 진격하였다. 후원부대가 없는 것을 안 성내 왜군은 몰래 군대를 뒤로 보내어 길을 차단하며 좌우로 공격했다. 의병은 지치지 않고 육탄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조헌을 비롯하여 700명이 전원 전사하였다. 선조 37년 서무원 종훈에 기록되고 군자감정에 추증되었다. 정조 22년 장흥의 행원사에 조헌과 같이 배향되고 묘는 의리(의복과 신발)로 장흥 행원에 예장하였다. |
득연(퇴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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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의창을 설치하니 명나라 장수 양호와 장무덕이 크게 경복하였다. |
만수(전리) |
의병 900명을 모아 대장이 되었다. |
효성(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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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아들을 근왕병으로 남한산성에 보냈고 하성후의 공산 동쪽의 절촌에 숨어살았다. |
의길(의정) |
임진란 때 전사 |
인방(의랑) |
이괄의 난에 원종훈에 녹선 |
구수(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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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만수와 더불어 의병을 모아 부차 싸움에 전공을 세웠다. 의열사 배향 참의 |
난(전리) |
임진란 때 군공으로 오산사 배향 |
흥윤(전리) |
병자호란 때 전사 증 첨정 |
남식(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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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년-1683년 절의신 아버지는 증 지평 여성, 어머니는 증 공인 창령 조씨. 신독재 김집의 문인으로 인조 15년 병자호란 때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의병을 일으키니 따르는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의병 통솔하여 청주에서 적 90여명을 참하였고, 남한산성에 가려 했으나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에 통곡하며 귀향. 과거를 버리고 정읍군 소성면 개령산 아래 집을 짓고 대명유계라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강학당을 지어 옥산정사라 아름하고 후진을 가르치니 문하생을 100여명 배출하였다. 세칭 숭정처사라 하며 순조 5년 집의에 추증, 충신의 정려를 명받았다. 옥산서원에 배향 |
은휘(의정) |
의병을 모집하고 송강과 함께 군공을 세웠다. 중추부사 |
의길(의정) |
무과 급제, 임진란 때 순절 |
남철(전리) |
고창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증 참의 |
순(문숙) |
적을 토벌한 군공으로 녹권이 있다. |
덕란(공안) |
병자란 때 조카 자빈과 순절, 초혼장을 지내고 군자감 주부에 추증 |
득의(퇴촌) |
형 갈봉‧득연과 같이 의병으로 진출 |
신(척약재) |
어가 호종으로 훈련원 판관 |
성하(문인) |
정묘란 때 사계 막하에서 일하고 호조 참판에 증직 |
덕평(공안) |
임진난 때 전사 증-집의 |
성휘(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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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 의병장 조헌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하고, 많은 재산을 희사하였으며, 의병을 격려하여 크게 군공을 세웠다. 집안의 노복을 시켜 군량미를 호남에 보내어 독전하였다. 7년 동안의 병화에 시달리는 백성이나 병사 의병의 가족에게도 곡식과 포백을 나누어 주었다. |
백수(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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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조정에서 군량 운송을 담당. 정묘호란 때 호남 좌우로의 호소사로 의병을 모집 |
흥윤(전리) |
병자호란 때 전사, 증-첨정 |
장(퇴촌) |
통정으로 형 찰방공 광과 같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귀국 |
대덕(사온직) |
이괄의 난 때 임금을 공주로 호종 |
득렴(퇴촌) |
근시재 해와 같이 창의하고 곽재우와 함께 화황 산성에서 활약 |
공휘(의정) |
정여립의 난을 토평하여 원종훈에 녹선, 휴정서원 배향. |
흥윤(전리) |
병자호란 때 전사. 증-참정 |
득신(문간) |
병자란 때 호종공신 |
광(퇴촌) |
동생 장과 같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국. |
대덕(사온직) |
이궐의 난 때 임금을 공주로 호종 |
득렴(퇴촌) |
근시재 해와 같이 창의하고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성에서 활약. |
27세
장생(의정) |
80나이에 정묘호란 때 호소사가 되어 활약 |
현(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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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선생을 따라 적을 토평하니 선생이 그 충의를 장계하였으나 벼슬을 내리니 받지 않았다. 논산 휴정서원 배향 |
광익(전리) |
병자란 때 전사, 첨정에 추증 |
감(낭장) |
서천 군수 재직 시 왜병을 물리침, 공조참의 |
효신(사온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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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을 순찰할 때 상의원에 화재가 나자 열성조의 면복이 든 금궤를 꺼낸 공으로 절충장군에 승진. 이괄의 난 때 적당 강작의 목을 베어 바치니 금은단자와 금창약을 하사받았다. 진무원 종훈에 기록되고 장흥 행강사에 배향. 병조참판 추증 |
각(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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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고제봉 막하에서 종사하였고 전략장군이 되었다. 공의 휘는 각이요, 자는 중온이다. 자라서 여러 차례 향시에 합격, 대과는 참여치 않고 농사에 전력하였다. 어버이를 효도로 봉양하고 명절 때면 별식을 장만하여 올리고 마음을 항상 즐겁게 해드렸다. 형제간에도 우애가 극진하여 형제의 자녀를 친자식같이 여겨 남혼여가에 보조해주며 친척과 친구에까지도 정분을 다하였다. |
결(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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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복 조헌 문하에서 수업하고 임진왜란에 군량과 의병을 모집하여 선생의 청주싸움에 큰 공을 세웠다. 충효와 학행으로 천망되어 태릉 참봉이 되고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공의 휘는 결, 자는 여성, 젊어서 학업을 버리고 전원에 어버이를 봉양. 만년에 은진 쌍동에 집을 짓고 그림과 글씨며 화죽(花竹)으로 평생 사업을 삼았다. 무오년 태릉 참봉이 되고 이듬해 기미년 임소에서 졸하였다. 공의 천성이 순후하여 형제간에 우애하고 친척 간에 화목하여 조상의 제사에 더욱 삼가 몸소 친히 살피며 평생에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다. 술과 음식을 대접하되 귀천을 가리지 않으므로 남의 환심을 얻었다. 일찍 이르되 윤기를 바르게 하려면 먼저 세계를 밝혀야 한다며 널리 상고하여 족보 7권을 만들었다. |
경조(퇴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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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창의하였고 난리가 한창일 때 노모를 잘 받들기 위해 무주 덕유산 백운암에 들어가 단을 쌓고 모친의 만수무강과 난리가 평정되어 임금이 환궁할 것을 빌었다. 남전 여씨 향약과 향음 주례로 풍속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
광원(사온승) |
선전관으로 병자호란 때 전사하였고 훈련원정에 추증되었다. |
광주(퇴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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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의 침공으로 나라가 불리하게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다가 죽었다. |
광협(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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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 임금을 평양으로 호종하다가 임진강 전투에서 패전하였다는 아버지 만수의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풍덕에 합류하여 왜적을 크게 격파하고 부차 싸움에서 아버지를 도와 삼전삼승 하였으나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병조 참의에 추증되어 의열사에 배향 |
명(녹사) |
직장으로 정유재란 때 순절하니 공조참의에 추증 |
몽성(문민) |
판관을 지내고 노량전투에서 순절하였다. |
백웅(퇴촌) |
임진란 때 의병제장으로 경차 되었다. |
부(녹사) |
훈련원정으로 정유재란 때 남원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
언욱(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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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사림과 더불어 의거를 도모하고 어가를 호종하였다. 선무원종 공신에 녹선 되고 의정부 좌참찬에 추증되었다. 오산 창의사에 배향. |
응생(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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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정으로 임진왜란 때 족숙 희도와 문기방과 창의하여 금산에서 적을 맞아 악전고투하다가 중과부적으로 조중봉 선생이 전사하고 공과 족숙 히도 및 700명이 순절하였다. |
두경(사온승) |
병자호란 때 아버지와 형을 따라 전쟁에 나가니 나이가 15세였다. 무과로 첨지중추부사 |
유신(사온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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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4년(1636) 병자란 때 의병을 모아 안방준 막하에서 종사관으로 여산에 있을 때 화의 성립의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귀향하였다. 벽에 “대명(大明)”이라는 두 글자를 써 붙이고 “청(淸)”자가 든 문구는 사용하지 않았다. 병조참의 추증, 장흥의 행원사에 배향 |
재관(문민) |
병자란 때 어가를 호종 |
일(직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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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 때 신립장군 막하에 참전하여 충주 달천강 전투에서 순절 판결사에 추증 |
자빈(공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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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하고 사계 선생에게 학문을 배우니 경사와 사기에 능통하였고 병서를 연구하여 육도삼략의 뜻을 해석하였다. 병자호란 때 충청감사 정세규의 추천으로 종사관이 되어 의병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가려다 숙부 덕란과 연산 현감 김홍익과 같이 광주로 출전하던 길에 접전이 벌어졌다. 안개가 많이 끼어 앞뒤를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 적의 기습을 받아 분전하였다. 칼이 부러지고 화살이 떨어져 적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김홍익과 함께 굴하지 않고 화를 당하였다. 인조 15년 판부사 이상진의 계청으로 훈련원 판관에 추증되고 순조 34년 도백과 양호 선비들의 주청으로 조정에서 충신의 정려를 내렸다. 논산 충곡 서원에 배향 |
28세
득남(직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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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가 여자를 포로로 잡아가자 추적하여 데려오니 세자가 활‧말‧갑옷을 주었다. 전쟁터에서 죽으니 충신의 정려를 받고 강화 충렬사‧무안 모충사 및 표충단에 배향 |
축(의정) |
병자란 때 군량관으로 수송을 하다가 바다에서 죽었다. 좌윤에 추증 |
득효(밀직) |
왜란 때 종군하여 군공을 세우고 죽으니 선무원 종훈에 추증 |
수(척약) |
왜란 때 군량미를 운반한 공으로 진권관을 제수 받고 중추부사가 되었다. |
곤보(의정) |
이괄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병기와 군량을 수송 |
헌(사온승) |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 첨정 추증 |
임씨(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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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가 강화도를 침범하여 부인이 적을 치려 맞섰으나 역부족으로 강물에 투신 순절, 의복으로 예장 |
반(의정) |
병자호란 때 활약 |
29세
익겸(의정) |
병자란 때 강화도에 김상용과 같이 자폭 |
익희(의정) |
병자란 때 임금을 보필하고 효종 때 북벌 계획에 참여 |
익렬(의정) |
병자호란 때 활약 |
기(문민) |
임진란 때 의병을 일으킴 |
정립(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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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4년 어영아관으로 오랑캐와 싸워 적 수백을 참하고 적장의 투구와 철갑을 노획하는 전공을 올렸으나 이때 친상을 당하여 거상과 시묘를 하느라 논공행상에 참여치 못해 훈작을 받지 못하였다. |
충국(공안) |
훈련원 청정, 임진왜란 때 증봉 조헌을 따라 창의, 남하에서 전사 |
치원(녹사) |
훈련원 청정, 임진왜란 때 금산에서 순절 |
후경(사온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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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아버지와 형을 따라 의병이 되니 나이 15세였다. 벼슬 중추부사, 증 병조참판 |
혼(문민공파) |
임진왜란 때 전사하니 충절을 기려 충의각을 세웠다. |
천환(퇴촌공파) |
이인좌의 난에 창의하여 난을 평정, 저서: 덕현유고집 |
30세
계(전리) |
이인좌가 모반하여 안의를 점령하였다. 이때 천총(정 3품의 장수관직)이 되어 이인좌의 일탕을 소탕하였다. 원종 공신에 녹선, 첨지중추부사 제수, 합천읍에 공적비가 있다. |
성원(낭장) |
제원 찰방(역장)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량을 조달, 의병을 도왔다. 종질 김덕령 장군에게 병기와 군량을 공급, 저서: 서하당 유고 2권 |
치장(퇴촌) |
이인좌의 난에 창의 협찬, 후진양성 |
31세
덕령(낭장) |
호남 지방의 의병대장 |
덕보(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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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때 우산 한방준과 의병을 일으켰다.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고, 광주 의열사에 배향, 저서로 유적 1권이 있다. |
덕유(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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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의병장 최대성과 더불어 수천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한산도에 나가 싸우다가 순절 |
덕홍(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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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 때 초로사 고경명과 더불어 군산 전투에서 순절 증 사헌부 지평, 광주 의열사에 배향, 유고집 1권 |
덕휴(낭장) |
주부로 종형 김덕령 장군의 군중에서 협조,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 |
박(퇴촌) |
이인좌의 난에 창의, 학문에 조예가 깊어 세칭「농아처사」라 하였다. |
수견(녹사) |
이인좌의 난에 적괴를 사로잡은 공으로 증 판관 |
호결(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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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 이괄의 난 때 공으로 금관 옥대를 하사받다. 병자호란 때 토산 전투에서 싸우다 죽으니 좌윤에 추증 |
경화(녹사) |
이인좌의 난에 창의, 판관 |
명(진사) |
왜란 때 백형과 종군하여 순절 증 참의 |
태련(감찰) |
병자호란 때 수원 산성에서 전사(기 10세) |
부(진사) |
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남원에서 전사, 훈신에 책녹, 증 참의 |
순창(판도) |
인좌의 난에 참전하여 분무 원 종훈 책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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