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강씨 공목공(姜蓍, 강시) 종중 700년 인맥
晉州姜氏, 恭穆公 後 通亭公派 先祖 諸位 內外戚考(진주강씨,공목공 후 통정공파 선조 제위 내외척고)
진주강씨의 시조, 고구려 구국공신 병마도원수 姜以式(강이식) 장군 이후 名公巨卿(명공거경)과 忠臣烈士(충신열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 중에서 傑出(걸출)한 先祖(선조) 恭穆公(공목공; 휘, 시)이 계시다. 공목공은 진주강씨 大宗派(대종파)의 1세조이신 博士公(휘, 계용)의 5대손이시다. 공목공의 아버지는 문경공(휘, 군보)이며 고려조에 문하좌시중을 지냈고 진산부원군에 봉해지셨다.
공목공은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찬성사를 지내고 진산부원군에 봉해지셨다. 배위는 진주하씨 찬성사 원정공(휘; 집)의 따님이시다. 원정공의 증손에 영의정(하연)이 나왔다.
공목공의 동생 양희공(휘, 서)은 공양왕 때 경상도병마도절제사를 거쳐 검교의정부 찬성사를 지내셨다. 조선이 개국한 뒤 태종이 좌의정으로 불렀으나 稱病(칭병)하고 致仕(치사)하셨다. 양희공은 문경공, 공목공과 함께 3부자 재상이시다. 양희공의 외동 따님은 전주최씨 좌찬성 경절공(휘, 사강)에게 출가하셨다. 전주최씨 경절공 후손에 祖孫(조손) 대제학에 祖孫(조손) 영의정(최명길, 최석정)이 배출되었다.
공목공 맏아드님은 통정공(통정공; 휘 회백)이며 성균좨주를 거쳐 정당문학을 지내셨다. 공목공의 둘째 아드님은 통계공(휘; 회중)이며 고려조에 보문각 대제학을 지내셨다. 셋째 아드님(휘; 회순)은 사재소감을 지내셨으며 넷째 아드님(휘; 회숙)은 一作宰臣(일작재신)이라 했다. 다섯째 아드님 진원군(휘, 회계)은 공양왕의 따님 경화궁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고 정당문학을 지내셨다. 그래서 공목공은 공양왕과 사돈간이다.
공목공의 맏손자(휘; 종덕)는 장령을 지내셨고 둘째 손자(휘;우덕)는 예안현감을 지내셨다. 현감공 큰아드님(휘,맹경)은 영의정을 지냈으며 진산부원군에 봉해지고 문경공이라는 시호를 받으셨다. 셋째 손자(휘, 진덕)는 좌승지를 지내셨다. 배위는 검한성사(유원현)의 따님 문화유씨이다. 검한성사공(유원현)의 동생이 영의정(유정현)이다. 승지공(휘, 진덕)의 맏따님은 광주정씨(생원,정조우)댁으로 出家(출가)했다. 광주정씨 생원공(정조우)은 양관대제학(정구진)의 손자이다. 승지공의 셋째 따님은 용인이씨 부사공(이수강)댁으로 출가했다. 용인이씨 부사공의 후손에 영의정 3명(이세백, 이의현, 이재협), 대제학 2명(이의현, 이의철)이 나왔다.
공목공의 넷째 손자는 玩易齋(완역재;휘,석덕)이며 세종조에 자헌대부 지돈녕부사에 이르렀고 진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대민공이라는 시호를 받으셨다. 완역재는 영의정(심온) 청송심씨댁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니 배위 청송심씨는 세종대왕의 정비 소헌왕후와 형제간이다. 다시말해 완역재는 영의정 안효공(심온)의 사위이자 세종대왕과 동서지간이다.
완역재 맏따님은 대사헌(남간) 의령남씨댁의 며느리가 되었다. 의령남씨 대사헌공(남간)은 開國功臣(개국공신) 영의정(남재)의 손자이다. 완역재 둘째 따님은 판서(신숙) 영산신씨댁으로 출가하고 넷째 따님은 열성공 영의정(황수신) 장수황씨댁의 며느리가 되었다. 열성공(황수신)은 영의정 익성공(황희)의 아드님이다. 완역재 다섯째 따님은 좌찬성(박중손) 밀양박씨댁의 며느리가 되었다.
공목공의 증손 仁齋(휘, 희안)는 완역재 맏아드님이며 시, 서, 화로 三絶(삼절)의 稱(칭)이 있다. 배위는 좌의정 용헌공(이원)의 따님 고성이씨이다. 막내 따님은 좌의정(어세겸) 함종어씨댁 며느리가 되었다.
공목공의 증손 문량공(휘, 희맹)은 인재공의 동생이시다. 형조판서, 이조판서, 우찬성을 거쳐 좌찬성에 이르셨다. 經史(경사)와 諸子百家書(제자백가서)에 통달하셨다. 문량공은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3대가 문장이 뛰어나 세 분의 글이 모두 기아동문선에 들었다. 이로써 ‘3대 문장가’에 ‘시, 서, 화 형제 三絶(삼절)’이 나셨다.
문량공은 따님이 네 분이 있다. 맏따님은 대제학(성임) 창녕성씨댁의 며느리가 되었고 둘째 따님은 좌의정(김질) 안동김씨댁 며느리가 되었다. 셋째 따님은 부사(신렴) 고령신씨댁으로 출가했다. 고령신씨 부사공(신렴)은 영의정(신숙주)의 증손자이다. 넷째 따님은 안동권씨 이조판서 화천군(권함)의 며느리가 되었다. 화천군 7대 손에 좌의정 수암(권상하)이 나왔다.
성종 때 일이다. 원자아기(연산군)가 아파서 避接(피접)을 할 곳을 물색하고 있었다. 병중인 원자가 자리를 옮겨 요양하자면 우선 나라 안에서 禮儀凡節(예의범절)이 出衆(출중)하고 家風(가풍)이 훌륭해야 한다.
문량공은 왕실과 戚(척)이 두텁다. 문량공의 이모가 소헌왕후이며 이모부가 세종대왕이다. 세조는 문량공과 姨從間(이종간)이다. 문량공 배위 봉보부인은 호조참판 한백당(안숭효)의 따님 순흥안씨이다. 한백당의 형은 대제학 문숙공(안숭선)이다.
문량공집이 文章(문장) 學德(학덕)으로 名望(명망)이 높은데다가 봉보부인 친정 순흥안씨댁도 장안에 名聲(명성)이 있었다. 특히 봉보부인이 훌륭하셨다. 열네 살에 시집을 온 안씨 할머니는 法度(법도)가 있고 行誼(행의)가 갸륵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에 궁궐에서는 兩家(양가)의 凡節(범절)을 중히 여겨 원자의 피접은 ‘숭례문 밖 순청골 강희맹 집’으로 하라는 御命(어명)이 내렸다.
봉보부인 안씨 할머니는 원자아기를 온갖 정성으로 키웠다. 몇해 동안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가르쳤다. 어느날 성종이 순청골에 원자 문병을 왔을 때 네 살에 불과한 원자가 그 책들을 줄줄 외웠다. 그뒤 봉보부인 품에서 자라다가 원자는 還宮(환궁)했다. 성종은 원자를 잘 키워준 봉보부인을 극구 칭찬했다.
공목공의 현손인 숙헌공(휘, 귀손)은 문량공 맏아드님이다. 원자가 문량공댁으로 避接(피접)을 나왔을 때 숙헌공은 청년이셨다. 그뒤숙헌공은 부제학, 이조참의를 지내셨다. 원자가 자라 등극했다. 숙헌공은 연산군이 등극한 3년차에 경기도 관찰사로 나가시었다. 1498년 무오사화에 대사헌으로 김일손 등의 처벌을 가벼이 할 것을 주장하셨다. 이어 형조와 이조의 판서를 지내고 1505년 우의정에 오르셨다.
숙헌공 배위는 은진송씨 목사공(송요년)의 따님이시다. 은진송씨 목사공(송요년)의 맏며느리는 광산김씨 좌의정(김국광)의 따님이며 둘째 며느리는 태조 현손 아림군(이정)의 따님이다. 은진송씨 목사공(송요년)의 후손에 뛰어난 인물이 많다. 동춘당 송준길, 대제학 송상기, 예조판서 송규렴, 금곡 송내희 등 다수이다.
공목공의 현손 사평공(휘, 학손)은 우의정 숙헌공(휘, 귀손)의 동생이시다. 사평공은 한훤당 김굉필, 주계군 이심원, 문평공 이계맹 등 당대의 道德君子(도덕군자)로 명성이 높은 淸流(청류)들과 함께 修業(수업)하며 도의로 사귀셨다. 사평공은 아드님 8형제를 낳아 진주강문을 크게 번창케 하셨다. 그 아드님들이 모두 글 잘하고 孝友(효우)가 지극하여 筍氏八龍(순씨팔용)에 비유되었다. 따님이 덕림군(이자)댁으로 출가하였고 사평공 외손녀(덕림군 따님)는 좌의정(심통원) 청송심씨 댁으로 출가했다. 사평공의 손녀(사과공 따님)는 덕성군(기진) 행주기씨 댁으로 출가했다. 행주기씨 덕성군(기진)의 아드님 고봉(기대승)은 사평공의 외증손자가 되며 사과공(휘, 영수)의 외손자이시다.
사평공의 셋째 아드님(휘, 태수)은 백부 숙헌공의 後(후)로 入養繼代(입양계대) 되시었다. 사평공 셋째 아드님(휘, 태수)은 공목공 5대손이며 순천도호부사를 지내셨다. 부사공(휘, 태수) 배위는 직제학(정회)의 따님 연일정씨이다. 연일정씨 직제학공(정회)의 증조부(정연)는 병조판서를 지냈고 안평대군의 장인이며 송강 정철의 고조부이다. 사평공의 현손 수은공(휘, 항)은 강문을 크게 빛내신 어른이시다. 수은공은 호남에 명성을 떨친 碩儒(석유)로 임진왜란을 당해 보이신 忠節(충절)이 저서 간양록에 잘 기록되어 있다.
공목공 6대손(휘,복)은 부사공 맏아드님으로 부사용을 지내셨다. 배위는 좌찬성 모재(김안국)의 따님 의성김씨이다. 부사용공의 맏아드님 취죽공(휘, 극성)은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서 賜家讀書(사가독서)했으며 경연시강관을 지내셨다. 부사용공의 따님은 양천허씨댁(별좌 허강)으로 출가했다. 양천허씨 별좌공(허강)의 손자가 우의정 미수 문정공(허목)이다.
부사용공(휘, 복)의 현손(휘, 유후)은 관찰사를 지냈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관찰사공 아드님(휘,석범)도 淸白吏(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부자 청백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