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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의 일류 문명국들(5)
(11)로마
10월 11일(토) 드디어 세계의 제국 로마를 구경하는 날이다.
일찍 일어나 호텔 부근 공원에 올라 갔다. 관리인 2명이 손수레형 모타청소기로 낙엽을 쓸어 담고 있는데 낙엽이 쏙쏙 잘 들어간다. 부근의 고성(古城)도 인상적이다.
피렌체관광은 뒤로 미루어 지고 아침식사후 바로 로마로 이동하였다. 피렌체-로마 구간도 300km나 되어 11시경이 되어서야 로마에 도착하였다.
로마시내 북서쪽 언덕에 있는 바티카노(바티칸)시국에서 미술관부터 구경할 순서였으나 가는날이 장날이라 미술관은 휴관일이므로 담을 돌아서 산.피에트로(베드로) 광장부터 시작했다.
바티카노 시국은 산.피에트로 성당을 중심으로하여 광장, 교황청, 미술관, 기타 부속건물로구성되어 있는데 0.44평방km에 불과하다.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로마에 거주하는 추기경과 국무장관 또는 지사의 허가를 얻어 시국에 정주하는 교황청 봉사자와 그 가족으로서 인구 1,000명 정도이다. 주 수입원은 신자들의 기부금, 부동산 임대수입, 은행이자, 우표와 출판물의 판매대금, 관광객입장료등이다. 세출의 대부분은 고용원 3,000명의 임금, 해외공관유지비, 집회 비용등에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산.피에트로 대성당은 1506년에 시작하여 120년 후인 1626년에 완공되었는데 높이 132.5m 의 돔이 있고 대성당안에 작은 예배당이 여러개 있다. 성당앞 원주형 광장(산.피에트로 대광장)은 1667년에 완성되었는데 한가운데의 오벨리스크가 유명하다. 미켈란제로의 명작 <천지창조>(천장화 1508-1512년제작) 와 <최후의 심판>(벽화1535-1541년제작)은 교황전용예배당인 시스티나성당에 있어서 관람하지 못했다.
산.피에트로 광장과 성당내부를 관람하고 근처의 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 카타콤베로 향했다.
카타콤베(Catacombe)는 가난한 서민들이 지하자연 동굴을 이용한 지하무덤인데 1세기 중엽부터는 자연동굴이 모자라 굴을 파고 무덤을 만들었다. 기독교 박해가 심하던 3세기에는 교인들의 은신처로 이용되었고 밀라노칙령이후 교황이 성세바스티아누스의 무덤 근처를 정비하여 “카타쿰바스”라고 한 데서 관심을 끌게 되었다 한다. 카타콤베는 로마주변에 약 60개소가 발견되었는데 그중에서 주 관광명소이며 가장 규모가 큰 <성.칼리스투스의 카타콤베>는 순교자인 교황 성칼리스투스(217-222)의 이름을 딴 것이다. 지하에 있는 묘역만 45,000평, 갱도 20km라고 한다.
좁은 통로계단으로 내려 가면 9명의 성인 교황들의 공동무덤과 성녀 체칠리아의 무덤이 있다. 무덤안은 희미한 전등이 군데군데 켜져 있지만 안내자가 없으면 밖으로 나오지 못할 정도로 미로의 연속이다. 무섭다.
이런 개미굴같은 대규모의 땅굴이 좌우상하로 버팀목하나 없이 어떻게 파여 질 수 있었을까? 왜 오늘날까지 무너지지 않았을까?
다시 시내로 들어와서 하차하여 조금 가다가 20여 계단을 내려가니 사진에서 많이 본 콜로세오(Colosseo콜로세움)의 웅장한 모습이 나타 난다. 원형의 절반 정도가 무너져 없어졌지만 가로 190m, 세로155m인 이 원형경기장은 AD80년에 건축된 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건축물이다. 로마인들이 조련한 각종 동물의 묘기를 관람하거나 용기를 자랑하는 검투사들의 경기를 관람하던 곳이다. 노예나 기독교인의 처형을 위한 죽음의 공연은 과장된 것이라 한다. 1900여년이 지난 오늘날의 로마인들이 네로황제의 복장을 하고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으며 5유로씩 돈을 벌고 있다.
콜로세오의 앞 광장에는 콘스탄티누스대제의 개선문이 있다. 파리 개선문의 모델이 된 이 개선문은 대제가 황위 쟁탈전에서 승리한 후인 AD315년에 원로원이 건립하였다. 전쟁에서 살인을 한 병사들이 이문을 지나가면 죄의식을 씻게 된다는 뜻의 改善門이라고 하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이 개선문에서 서북쪽으로 작은 언덕을 넘으면 포로 로마노(Foro Romano로마공회장)가 전개되는데 티투스황제개선문을 시작으로 막센티우스 바질리카의 공회당,안토니우스황제와 파우스티나황비의 신전, 줄리우스 씨저의 묘, 원로원 등 20여개의 유적들이 있다. 씨저의 묘는 초라하였다.
(시저의 묘)
이렇게 웅장하고 육중한 고대 로마의 건축물들이 시멘트 한 포대 없는 그 시대에 어떻게 지어졌을까? 유럽특유의 석회질 토양 때문이 아닌가 싶다. 카타콤베와 같은 땅굴속 흙은 물에 개어서 바르면 굳어서 단단해 진다고 한다. 카타콤베가 안 무너지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겠다.
이어서 베네치아 광장으로 나오면 빗또리오 에마누엘레 2세기념관이 우람한 모습으로 시야를 압도하고 맞은편에 1455년에 건축된 팔랏쪼 베네찌아궁이 있는데 이 궁의 발코니에서 뭇소리니가 2차대전 참전선포 연설을 하였다고 한다.
광장에서 북쪽으로 10분쯤 걸어 가면 건물들 사이에 관광객이 꽉 들어차 있는 트레비(Trevi)분수가 나온다. 정면에는 바다의 신 넾튠과 트리톤신의 조각이 있고 물에는 동전이 많이 던저져 있다.
이 분수는 30년공사 끝에 1762년에 완성된 바로크양식의 걸작품으로 영화<로마의 휴일>의 촬영지로 더욱 유명해졌다고 한다. 좁은 공간에 수백명이 득실거리니 소매치기의 천국이 되고 인파구경이 더 볼거리가 되었다.
오늘은 시내에서 걷는 시간이 많았다. 교외에 있는 Centrale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12)나폴리, 폼페이, 쏠렌토
10월 12일(일)
오늘도 이 호텔에 유숙할 것이므로 간단한 차림으로 버스에 올랐다.
로마에서 동남쪽으로 245km 떨어진 나폴리는 시드니(오스트랄리아), 리오데자네이로(브라질)와 같이 세계 3대 미항의 하나이다.
고속도로에서 왼쪽으로 멀리 그 악명 높은 베스비오화산이 보이고 오른 쪽으로 바닷가에 넓게 뻗어 있는 항구가 나폴리인가 보다. 나폴리는 인구 100만명(2000년)으로 이탈리아 제 3의 도시다. 시내로 들어 갈 수록 화려한 미항이라기 보다 낡은 옛날 건물과 빈민촌같은 아파트들이 눈에 뜨인다.
“잔잔한 바다위로 저 배는 떠나가며 노래를 부르니 나폴리라네, 황혼의 바다에는 저 달이 비치고 물위에 돛빛 하얀 안개속에 나폴리는 잠잔다. 산타루치아, 잘 있어 서러워 마라 다오...” (나폴리 연가)
옛날 국민학교 4학년때 “나폴리” 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행사때마다 부르던 노래인데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고 생생하게 끝까지 부를 수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유럽에 대한 동경심 때문이었을까?
민요<산타 루치아>로 유명한 산타루치아항구는 황혼무렵에 바라 보면 석양빛에 붉게 물든 카스텔 델로보(Castel Dell Ovo달걀성)의 모습이 환상적이라 한다. 산타루치아해안에서 사진 한 장 담고 버스로 시내중심가를 한 바퀴돌아 교외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베스비오 화산을 동쪽에 두고 동남쪽으로 역ㄷ자를 그리며 굽어있는 나폴리만의 남단 해안절벽, 쏠렌토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버스가 멈추었다. 쏘렌토는 아말피해안 단애위에 있는 인구 17,000명의 휴양도시이며 <돌아오라 솔렌토로>라는 노래 한 곡이 한국의 관광객을 이 먼 곳까지 불러 들인 것이다. 자연경관으로는 부산의 태종대나 동해안의 의상대가 더 멋진 곳이 아닐까?
온 길을 되돌아 동북쪽으로 조금 가면 폼페이유적지가 나온다. 나폴리 동남쪽 23km지점에 있던 고대 도시로 AD79년 베수비오화산의 폭발로 3m이상 매몰되었다. 화산은 2,700m에서 1,244m로 낮아졌다고 한다. 1748년 한 농부에 의해서 대리석 파편이 발견된 후 1763년에야 그곳이 폼페이임이 밝혀졌다. 현재도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4분의 3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광장, 상점, 목욕탕, 빵집,사창가등 현장과 유물전시관을 둘러보고 폼페이의 생활과 최후의 날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반 유물은 몇 년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순회전시할 때 관람한 적이 있다.
폼페이를 현장에서 보고 의문점 2가지가 생겼다. 하나는 베수비오화산과의 거리가 12km나 되는데 폼페이가 그렇게 깊이 묻힐수 있는지? 폼페이가 그 정도로 묻혔다면 더 가까운 곳들은 얼마나 묻혔으며 다른 작은 도시 2개도 같이 묻혔다고 하지만 그 외에는 없었는지? 그리고 폼페이는 언덕위에 있는데 언덕아래 다른 곳들은 어찌 발굴하지 않고도 들과 강이 그대로 있는지?
그리고 또 하나는 1,700년 동안이나 왜 아무도 모르고 지냈는지? 한 도시와 주변일대가 매몰된 엄청난 사건이라면 1,2백년 동안에는 사람들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고 그 후 차츰 관심밖으로 밀려 나더라도 그만한 사건이면 기록이 남아서 당시의 상황이나 매몰위치등 자료가 전해 왔을 터인데 어찌하여 전설정도로 남아 있었을까? 현지가이드도 모르고 이해를 할려면 더 깊은 연구와 현장접근이 있어야 할 일이기에 궁금증만 안고 발길을 돌렸다.
(13)피렌체
10월 13일(월)
오늘은 다시 피렌체 와 밀라노로 가서 관광일정을 마무리 하는 날이다.
로마로부터 4시간 여행하여 피렌체에 도착하였다. 피렌체는 인구 37만명으로 옛날 중학교 서양사 시간에 영어로 플로렌스라고 배운 르네상스 발상지이다.
르네상스(Renaissance)는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착공한 1420년부터 마니에리스모(manierismo)로 옮겨가는 1525∼30년경까지의 시기에 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의 경향인데 ‘재생’을 뜻하는 말이다. 고대의 그리스·로마 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이들을 부흥시킴으로써 말살된 인간성을 되찾고 새 문화를 창출해내려는 운동으로, 그 범위는 미술, 건축, 문학,사상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19세기 이후에는 15∼16세기 유럽의 문화현상을 통털어 르네상스라고도 쓴다.
조각에 미켈란제로, 회화에 레오날도.다.빈치, 건축에 산.피에트로성당, 문학에 페트랄카(서정시), 보카치오(데카메론), 마키아벨리(군주론), 단테(신곡)등이 대표적이다.
버스는 피렌체에 도착하자마자 미켈란제로 언덕으로 갔다. 미켈란제로의 작품 다비드상(모조품)이 공원중앙에 있고 기념품 상점들도 있다.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고지인데 아르노강건너 성모마리아성당(두오모)의 갈색돔이 크게 보인다.
시내로 내려가서 성모마리아 성당, 지오토의 종탑, 시뇨리아 광장, 단테의 집을 관람했다. 시뇨리아 광장에서 처음으로 PC방을 보았다. 마지막 쇼핑센터에도 들렸다.
식사후 다시 5시간을 달려 저녁때가 되어서야 밀라노에 도착했는데 바로 두오모대성당, 스칼라 극장, 비토리오 에마누엘레2세 회랑등을 외부만 구경하고 일전에 묵었던 Cristallo호텔에 다시 여장을 풀고 이탈리아에서의, 아니 유럽에서의 마지막 밤을 맞이 했다.
10월 14일(화) 12;25분발 SU286 편으로 모스코바도착,
10월 15일(수) 11:05분 SU599편으로 인천공항 도착.
맺는 말
유럽은 인류문명의 발상지는 아니다. 기독교의 발상지도 아니다. 기후 풍토가 썩 좋은 대륙도 아니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가장 인류문명이 꽃핀 지역이다. 정치,경제,종교,예술,학문등 어느 분야에서나 유럽을 빼 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의 선두그룹이 되어 왔다. 유럽인들은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우수한 민족들이다. 앞으로도 모든면에서 우리보다 앞서 갈 것인가?
유럽의호텔이나 거리에 PC방이 없는 걸 보면 인터넷과 IT산업은 한국이 분명히 앞서 있는것 같다.
전통과 문화를 중시하고 지키는 것은 한편으로는 변화와 발전이 없다는 것과 같다. 한국에서는 해마다 다르게 구 시가지가 없어지고 신도시가 생긴다. 정보화 사회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과학기술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치닫고 있는 걸 보면 머지 않아 유럽선진국 수준이 될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러나 좀 나아졌다고 교만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면 절대 안된다. 꿈에서라도 중남미국가들의 전철은 밟지 말아야 한다.
물질적인 선진국이 되기전에 정신적인 선진국이 되어야 할 것이다. 거리에 쓰레기가 나 뒹굴고 교통질서와 사회질서가 엉망이고, 부정부패가 판치는 사회에서 나만 고급차를 타고 다니고 호화로운 집에서 산다고 행복할까?
우리는 철저하게 유럽선진국의 질서의식과 합리적인 생활태도를 배워야 할 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