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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의 정귀보
무명이었다가 사후에 유명해진 화가 정귀보(鄭貴寶, 1972-2013)의 인생은 놀랄 만큼 단조로운 것이었다. 나는 미술을 전문으로 하는 모 출판사의 다급한 청탁을 받고 화집을 겸한 평전 집필에 착수했지만, 특기할 만한 것이 없는 이력 탓에 고민에 빠졌다.
정귀보가 태어난 곳은 담양이었지만 그건 정귀보를 설명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당시 시내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초등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운영했는데, 문방구라는 가게는 특별히 영업 수완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약간의 부지런함만 있으면 되었기 때문에 운영에 큰 문제는 없었다. 부모 모두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심각한 원한을 산 적도 없었고, 특별한 인생관을 가진 적도 없었으며, 삶의 의미 같은 걸 추구한 적도 없었다. 그런 건 그냥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옆의 가게들이 백반 집에서 떡볶이 집으로, 떡볶이 집에서 오락실로 바뀌는 동안, 그들은 유리 진열장 하나 바꾸지 않고 문방구를 지켰다.
하지만 정귀보가 태어난 후 말을 채 배우기도 전에 그의 부모는 서울로 이주했다. 그의 모친 말로는 “벨다른 이유는 읎”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1974년 가을의 어느 아침, 지금은 고인이 된 부친이 가게 셔터를 열고 돌아서다가 차양 끝에서 톡, 톡,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빗방울에 얼비친 햇빛이 하도 애처로워서, 문득 이사를 가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왕이면 서울로,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는데, 뜬금없다는 느낌보다는 아 왜 이제야 이런 생각이, 하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훗날 정귀보의 모친은 혼자 앉아 뜨개질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다가 그 시절이 생각나면, 그 양반이 그날따라 쪼까 바람이 들었제―라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할 때 그녀의 입가에는 쓸쓸한 미소가 살짝 스쳐 갔는데, 그녀 자신은 그걸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부모를 따라 서울로 옮겨온 후 정귀보는 담양에 간 기억이 거의 없었다. 상경 후 일을 못 찾아 막노동까지 하던 부친이 다소 이르게 세상을 뜬 탓도 있고, 담양에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친척들 역시 광주나 서울, 또는 인천 같은 곳으로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1974년 가을에 그의 부친이 망연히 바라보던 비 내리는 아침이라든가, 그 아침의 차양 끝에 매달려 있던 작은 빗방울이라든가, ‘담양 태생’이라는 약력은, 정귀보라는 인간을 설명하는 데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후에 정귀보는 서울 변두리, 이를테면 하계동이나 방학동 또는 장위동 부근에 살면서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정귀보는 남들이 학교에 들어갈 때 들어갔고, 졸업할 때 졸업했으며, 인생의 중대한 결단 같은 것에 직면한 적도 없었다. 학창 시절의 성적은 중위권 정도로 아무도 성적 같은 것으로 그를 주목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중학교 3학년이던 87년에 고등학교 선배들을 따라 시위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곧 다음 날의 국사 숙제에 몰두했다. 고교 입학 후에는 점심시간에 벌어진 몇 번의 패싸움에 휘말린 적이 있고, 2박 3일 동안 가출해서 서울역 근방의 뒷골목을 전전한 일도 있었다. 물론 그건 그 시절 그 또래의 남학생들이라면 누구나 작은 훈장처럼 이마에 붙이고 다니는 사건이었다.
교내 합창대회 우수상이나 1년 개근상 상장을 받은 적도 있지만, 그건 버리기도 그렇고 오랜만에 꺼내 봐도 별다른 감회가 들지 않는 기념품들이었다. 사생대회 같은 곳에는 나간 기록조차 없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드로잉에 재능을 보여” 등등의 빤한 문장조차 쓸 수 없었다. 생활기록부에는 ‘성격 활달하지만 말이 없는 편’이라든가 ‘의외로 내성적이지만 인사성 밝음’ 따위의 알쏭달쏭한 평들이 쓰여 있었다. 그건 고등학교 시절 정귀보의 담임을 맡은 교사가 우연히도 3년 내내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교사는 고질적인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데, 인간은 언제나 양면적이며 모순적이기 때문에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그 무렵 신춘문예에 매년 소설을 투고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작가지망생이었던 셈인데, “이 응모자는 소설이 인생을 닮으려 하면 할수록 인생과 멀어진다는 점을 유념하라”는 이상한 평을 받고 그 평을 쓴 원로작가에게 항의전화를 걸기까지 했다. 그는 그런 말도 안 되는 평을 듣느니 소설을 때려치우겠다고 선언했는데, 원로작가는 그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침착하게 듣고 난 뒤에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고 한다.
“그렇습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정귀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근교에 위치한 한 대학의 서양화과에 들어갔다. 입학이 그리 까다롭지 않은 학교였기 때문에 실기가 부실했는데도 무난히 들어간 모양이었다. 정귀보가 그린 아그리파는 여러모로 단순하고 서툴러 보였는데, 평점을 매기던 세 명의 교수들은 정귀보의 그림이 다른 응시생들의 작품에 비해 기본기가 떨어진다는 점에 충분히 동의했다. 다만 그들은 정귀보의 아그리파에서 다소 묘한 점을 발견했다. 다른 조각상에 비해 아그리파는 깊이 파인 눈의 어둠을 표현하는 게 중요한데, 정귀보의 데생에서는 눈뿐 아니라 코와 입술 등 여러 곳의 명암이 논리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교수들은 그 어긋남이 이상하게 생동감을 준다는 점에 동의했으며, 전날 회식 자리에서 자신들이 나눈 이야기, 즉 기본기의 완성도보다는 향후의 가능성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동시에 떠올렸다. 그리고 명암조차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그 학생에게 자신들도 놀랄 정도로 후한 점수를 주었던 것이다.
대학에 입학한 정귀보는 저학년 시절에 한두 번 연애 비슷한 것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던 모양으로, 정귀보 스스로 그 시절 만났던 여자들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건 정귀보의 기억력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여자들이 정말 그의 마음을 살짝 스쳐 간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정귀보의 인생에서 ‘심각한 연애’로 기억되는 여성은 세 명 또는 네 명이었다. 세 명 또는 네 명이라고 애매하게 말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 가운데 두 사람이 쌍둥이였기 때문이다. 정귀보가 쌍둥이 자매를 한꺼번에 좋아했기 때문에, 세 명 또는 네 명이라는 표현은 어느 정도는 사실에 근접한 것이었다. 쌍둥이를 한 사람으로 느꼈는지, 전혀 다른 둘로 느꼈는지는 지금까지도 명백히 밝혀진 바 없다. 아마도 정귀보 자신조차 확언하기는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심각한 연애 상대가 세 명 또는 네 명이라면, 그리 많지도 적지도 않은 숫자라고 할 수 있겠다.
대학 시절의 연애 상대는 조영숙(가명, 1973~)이라는 같은 과 후배였다. 조영숙은 정귀보의 애정 고백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키스를 해주었다고 술회했다. 정귀보는 3학년이었고 그녀는 2학년이었으며, 장소는 방과 후의 실습실이었다. 그는 실습용 앞치마를 두른 채 조영숙의 입술을 허겁지겁 핥았다.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놓지 않았다. 아, 그때 그 사람, 온몸을 부들부들 떨더라니까요. 그게 귀여웠지. 너무 진지하고 순진하달까?
그렇게 말할 때 조영숙의 표정에는 약간의 자부심과 함께, 회상하는 사람 특유의 습기 찬 눈빛이 스쳐 갔다. 그녀는 이어서 정귀보의 손이 어떻게 자신의 가슴과 엉덩이를 만졌는지, 그 손길이 얼마나 예민하게 떨렸는지, 텅 빈 실습실의 이젤 쓰러지는 소리가 어땠는지 등을 다소 지나칠 만큼 세세하게 묘사했다.
하지만 대학 시절의 연애가 대개 그렇듯 그들은 헤어졌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는 정귀보를 만날 때마다 이상하게도 감정이 휘발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정귀보가 눈앞에 없을 때는 견딜 수 없는 그리움이 차올랐지만, 정작 그와 함께 있으면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곁에 있으면 감정이 사라지는 사람을 일생의 연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 그렇다고 제가 특별히 열정적인 사랑을 원한 건 아니에요. 취향상 나는 미친 사랑의 노래보다는 따뜻하고 지속적인 감정 쪽을 좋아하니까. 미친 사랑의 노래는 대개 자기최면에 불과하잖아요.
조영숙은 다소 수세적으로 그렇게 설명했는데, 그러면서 인생을 아는 사람 특유의 쓸쓸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눈가의 주름이 미세하게 떨렸다. 자신의 내면을 드러낼 때의 긴장감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인생이라는 것이 결국, 불꽃이 점화되었다가 천천히 식어가는 과정이라고 믿는 낭만적 허무주의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정귀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귀보 씨는…… 멀리 있어야만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런 이유로 그녀는 정귀보를 떠났다. 이별의 과정은 상투적이었다. 정귀보가 군대에 갔을 때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것이다. 그녀는 그간의 사정과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설명하는 편지를 정귀보에게 보냈다. 하필이면 힘든 곳에 있을 때 이런 편지를 보내서 미안하다는 말은 ps.로 덧붙였다.
정귀보는 탈영을 하거나 자살 소동을 벌이지는 않았다. 애수에 찬 답장을 적어 보내지도 않았으며, 원한에 사무친 표정으로 그녀의 집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휴가를 나왔을 때 홍대 앞 카페에서 그녀를 만나 아쉬움을 표한 적이 있지만,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조용히 모든 것을 수긍하고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정귀보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남긴 말은 여러 면에서 암시적인 것이었다.
안녕. 아름다운 동화에서 한 페이지를 찢어냈는데도 이야기가 연결되는 느낌으로, 그렇게 살아갈게.
이 고별사는 조영숙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녀는 슬픈 동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잠겼다. 영원히 찢어진 한 페이지라는 로맨틱한 비극의 세계로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그것은 쓸쓸하면서도 달콤한 고독의 감정을 그녀에게 남겨주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그녀는 정귀보를 자꾸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아직 남아 있는 사랑의 감정 때문은 아니었다. 그 사람,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지만, 지금도 내 주변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요. 날 스토킹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냥 그런 느낌이 든다니까요. 내 삶의 모든 페이지에서 여전히 그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페이지를 넘기면 그 자리에서 숫자가 차례차례 바뀌듯이 말예요. 물론 어느 페이지는 찢어진 채 버려져 있겠지요…….
3학년 2학기에 휴학을 하고 현역병으로 입대한 뒤 실연을 당했으니, 정귀보로서는 쓸쓸한 청춘이라고 할 만했다. 처음에는 연인의 변심 때문에 약간의 고통을 받았지만 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밤에 불 꺼진 내무반의 캄캄한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슬픔과 쓸쓸함이 함께 몰려왔다. 하지만 우울과 고독을 가만히 느껴볼 겨를도 없이…… 잠이 쏟아졌다. 그것이야말로 병영이라는 곳의 지극한 장점이다―라는 것이 후일 정귀보의 회고였다.
그 후 군 생활은 대체로 순조로웠다. 이병 때 사수의 집요한 괴롭힘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건 흔하디흔한 고충일 뿐이었다. 나중에 상병이 되었을 때는 정귀보 역시 후임을 갈구거나 심지어 구타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군 전체에 데프콘 3이 떨어졌던 것, 야간 행군 때 뒤꿈치가 상한 걸 방치한 탓에 파상풍 판정을 받고 서울 창동에 위치한 국군병원에 입원했던 것 등이 그나마 기억할 만한 사건이었다. 말년에는 외박을 나갔다가 임질을 얻어온 일도 있었지만, 그건 전역이 얼마 안 남은 사병들에게는 흔하디흔한 추억이었다. 정귀보 역시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고 습관적으로 중얼거리는 대한민국 육군의 일원이었으나, 그렇다고 그의 국가관에 문제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나중에 2002년이 되었을 때는 거리에 나가 ‘대~한민국’을 목청껏 외치기도 했던 것이다.
정귀보는 제대하자마자 복학을 했고 졸업할 때가 되어 졸업했다. 회화 작업을 했지만 별다른 열정은 없었다. 열정이 없었으니 눈에 띄는 진전도 없었다. 졸업전시회에도 참여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서울 변두리 도로변을 걸어가는 행인들의 모습을 전통적인 유화 작법으로 재현한 그의 작품은 말 그대로, 눈에 뜨이지 않았다. 그것은 가운을 빌려 입고 찍은 졸업사진 속의 정귀보가 눈에 뜨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정귀보는 취직이냐 예술이냐, 유학이냐 국내 잔류냐 같은 고민도 해본 일이 없었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았는데도, 아는 선배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중견 가구업체에 계약직으로 자리를 잡았다.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IMF가 터졌으니 불행이 그를 간신히 비껴갔다고 할 만했다. 까탈스러운 선임 디자이너 밑에서 정귀보는 성실하게 일했다. 트렌드 조사에 심혈을 기울였고 모델하우스에도 열심히 나갔다. 덕분에 그는 2년간 계약을 연장할 수 있었고, 그 뒤에는 정규직으로 자리를 잡았다. 회사 사람들의 평판도 나쁘지 않았다. 정귀보 자신도 회사라는 조직에 그리 큰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당시 그 가구업체는 싱크대 등 시스템키친의 점유율이 업계 상위권이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정귀보의 손길이 곳곳에 배어 있는 집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그런 싱크대에서 설거지는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2002년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정귀보는 불현듯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갑자기 예술에 대한 열정이 샘솟았다거나 조직생활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은 아니었다. 싱크대와도 무관한 일이었고 월드컵 4강의 환호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어느 비 내리는 아침 출근길 버스 정류소의 표지판에서 톡, 톡,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벨다른 이유는 읎”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정귀보가 그리 충동적인 유형의 인간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충동적인 성향을 예술적인 성향으로 미화하는 미술대학의 분위기에 비판적이었다는 회고도 있다. 특히 예술가입네 폼을 잡으며 충동과 욕망을 제어하지 않는 동료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충동과 욕망이란 그저 동물적인 것이며 동물적인 것이 곧 예술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다소 허술한 논리가 그의 주장이었다. 정귀보 역시 술자리에서 욱하는 성질을 못 이겨 선배와 주먹다짐을 벌인 적도 있지만, 곧바로 사과하고 예전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정귀보가 경기도의 한 갤러리에서 개최한 공모전에 입선한 것은 가구회사를 그만둔 직후였다. 그게 아니라 공모전에 입선했기 때문에 가구회사를 그만둔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으나, 사직서의 날짜와 공모전 날짜를 따져보면 그건 확인되지 않은 추측에 불과했다. 공모전을 연 갤러리가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탓에, 그해에는 지원작이 적었고 선정작은 유난히 많았다. 정귀보의 작품은 일러스트 느낌이 나는 인물화―지금도 정귀보 예술의 득의의 영역으로 인정되고 있는 바로 그 장르―였다. 왜 이런 터치로 인물화를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별로 없는 관습적인 작품이라는 혹평이 있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인물이 살아 있다는 반론도 있었다.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는 누군가의 불만 섞인 질문에, 옹호론을 편 인사는 정귀보가 제출한 포트폴리오를 가리키며 이렇게 답변했다. 이 얼굴을 잘 보세요. 이 얼굴은 인간의 얼굴이 아닙니까? 가장 인간적인 인간의 얼굴 말입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을 이런 방식으로 파고든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반론 쪽 인사는 이게 무슨 해괴한 동어반복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옹호 쪽 인사가 대학 선배였기 때문에 그쯤에서 논쟁을 접었다. 어쨌든 혹평 쪽이나 옹호 쪽이나 정귀보의 작품에 “별다른 미적 특장이 없음”에는 손쉽게 동의한 셈이었다. 그의 작품은 논란 끝에 다수의 선정작 가운데 하나로 뽑혔으며, “관람자들은 이 인물화에서 인간의 본질도 아니고 인간의 가면도 아닌 제3의 무언가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무언가를 담고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보기 드물게 애매한 심사평을 얻었다.
그렇게 해서 정귀보는 생각보다 늦지 않은 나이에 ‘작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후 소규모 갤러리와 카페에서 개인전을 두어 차례 열었으나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파주에 위치한 개인미술관에 관리인 겸 도슨트로 들어간 것은 그 무렵이었는데, 예전에 근무하던 가구회사의 오너가 바로 그 미술관의 소유주라는 인연 덕분이었다.
박봉이었지만 정귀보에게는 그런 것을 가릴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새 일터가 된 미술관은 정귀보의 마음에 쏙 들었다. 연면적은 작았지만 이동식 벽을 설치해서 꽤 많은 작품들을 전시할 수 있었다. 전시가 끝난 뒤 작품들을 철거하면 미술관에는 흰 벽에 불과한 민무늬 구조물만 남았다. 백색 패널로 된 벽은 구불구불하고 길고 하얀 미로를 이루었는데, 정귀보는 그 텅 빈 미로를 천천히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 같은 곳을 지나면서도 같은 곳인지 모르겠고, 다른 곳을 지나면서도 다른 곳 같지 않은 길을 그는 천천히 걸었다. 비가 내리는 날 아무것도 전시되어 있지 않은 그 미로를 거닐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깊은 상념에 젖어들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다소 감상적인 톤으로 이렇게 덧붙였던 것이다.
아아, 이것이 곧 인생이요 세계가 아닌가.
정귀보는 미술관 일을 하면서 회화 작업을 병행했다. 12호의 균일한 크기에 상식적인 앵글과 드로잉이 대부분인 그의 인물화나 풍경화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눈이 있을 자리에 눈이 있고, 코와 입이 있을 자리에 코와 입을 그린 것뿐이라는 식이었다. 가로수와 자동차, 건물과 횡단보도 등도 역시 그런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그 이미지들에는 다소간의 쓸쓸함이 배어 있었는데, 그건 그 무렵 정귀보가 세 번째와 네 번째 여자, 즉 쌍둥이 연인과 이별한 뒤였기 때문이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이 대목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조영숙 이후 두 번째 여자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말하지 않은 것은 두 번째 여자가 아니라 첫 번째 여자라는 점을 유념해주기 바란다. 헷갈리시는가? 대학 시절의 조영숙 이전에 또 한 여자가 있었다는 뜻이다.
정귀보의 첫사랑은―이런 것을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고교 시절 가출했을 때 만난 ‘불량소녀’였다. 그때는 88올림픽의 흥청거리는 분위기가 채 가시지 않은 시절이었다. 정귀보처럼 평범한 가출고교생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귀보는 서울역 근처의 심야 만화방에서 동갑내기 소녀를 만났다. 그 ‘불량소녀’는 발정기의 섬세하고 어린 수컷이 그릴 수 있는 이상적이며 비극적인 여성의 이미지에 정확하게 부합하였다. 깊이 덮어 쓴 후드, 그 안에서 음울하게 빛나는 두 눈, 귀 쪽에서 빠져나온 워크맨 이어폰의 하얀 줄,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빈티지 청바지와 낡은 아이 러브 뉴욕 후드티, 거기에 마르고 하늘거리는 몸매까지. 그 모습은 정귀보의 환상 속에나 존재하던 미지의 소녀와 동일했는데, 그런 소녀가 문득 눈앞에 나타나 이렇게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야, 너 담배 있냐?
아, 아니. 사, 사, 사줄까?
그렇게 시작된 소녀와의 짧은 만남은 정귀보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들은 추운 겨울밤의 회현동을 헤매다가 남대문시장 부근의 한 여인숙에서 함께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소녀는 무일푼이었고, 정귀보의 수중에는 집을 나올 때 챙긴 약간의 돈이 남아 있었다. 그 밤은 도무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사건으로 정귀보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소녀의 비극적인 아우라가 정귀보를 매혹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강렬한 성욕에 이끌려 진정으로 순수한 짐승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작은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그 춥디추운 겨울밤, 남대문시장 뒷골목의 냄새나는 여인숙에서 고교생 정귀보가 알몸이 되어 그 신비로운 소녀를 덮쳤을 때, 정귀보라는 순수한 짐승의 귀에 들려온 것은 이런 말이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의 기억 속 깊은 곳에 남아 있다가 불쑥불쑥 튀어나올, 낮고 건조한 목소리.
야, 씨발아. 안 내려와? 난 여자만 좋아해.
정귀보는 그 말이 무얼 뜻하는지 미처 이해할 여유도 없이 소녀의 몸에서 내려왔다. 소녀의 단호한 명령과 선언에 압도된 채로, 그는 자신이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세계를 만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소녀가 한 말의 의미보다는 그 말의 어조와 뉘앙스와 목소리 자체에 매료되었다. 그 순간 그는 어둡고 이질적이며 매혹적인 하나의 세계가 자신의 마음속에 태어났다는 사실만을, 희미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위대한 화가 정귀보는 십 대 시절, 남대문시장 부근의 여인숙 그 황량한 어둠 속에서 만난 이름 모를 소녀와 그 소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알 수 없는 문장을, 깊이깊이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실제로 그는 문득문득 “야, 씨발아. 안 내려와? 난 여자만 좋아해. 야, 씨발아. 안 내려와? 난 여자만 좋아해.”라고 중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는 자신이 그 소녀를 사랑하는 것인지, 그 소녀가 내뱉은 그 말을 사랑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 밤의 낯선 어둠과 뼛속 깊이 스미던 추위를 오래오래 기억하게 되었다. “야, 씨발아. 안 내려와? 난 여자만 좋아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문장과 함께 말이다.
정귀보의 세 번째와 네 번째 여자는 앞서 말한 대로 쌍둥이였다. 약간 부은 눈에 오동통하고 아담한 몸매까지 분간이 쉽지 않은 일란성 자매였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면서 화장을 해요. 이건 유쾌하고 장난기 많은 자매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즐겨 하는 농담이었지만, 정귀보는 그 광경을 진지하게 상상해보고는 모종의 매혹을 느꼈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화장을 하는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이라니!
정귀보가 먼저 좋아한 것은 언니 박순옥(가명, 1975~) 쪽이었다. 박순옥은 가구회사의 후임 디자이너였는데, 그녀는 참으로 정감 있는 표정을 지을 줄 알았으며,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뒷담화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 무렵 정귀보는 뒷담화를 즐기는 모든 종류의 인간을 혐오하기로 결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정귀보가 용기를 내어 애정을 고백한 것은 초겨울의 어느 토요일, 회사의 직원휴게실에서였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오후의 텅 빈 휴게실에서 그녀를 마주쳤을 때는 마침 창밖에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정귀보는 그것을 하늘의 계시라고 해석했다. 나란히 서서 창밖을 바라보던 정귀보가 먼저 수줍게 애정을 고백했고, 역시 바깥에 시선을 두고 있던 그녀는 예의 그 정감 어린 표정으로 정귀보를 돌아보았다. 한 가지만을 제외한다면 모든 것이 좋았다. 그가 마음을 고백한 상대가 박순옥이 아니라 박순옥의 동생 박진옥(가명, 1975~)이었다는 점 말이다. 그녀 역시 다른 부서에 근무하는 동료였던 것이다.
그 순간, 어쩐 일인지 박진옥은 마치 자기가 언니 박순옥인 것처럼 미소를 지었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소담하게 내리는 첫눈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고, 정귀보의 기분을 해치고 싶지 않다는 선량한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무수히 반복해온 역할 바꾸기 놀이의 습관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정귀보와 헤어지고 나서 곧바로 언니에게 사태의 전말을 고했다. 동생의 이야기를 들은 박순옥은 화를 내지는 않았다. 상대가 그들을 헷갈려 하는 상황에 익숙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동생이 정귀보에게 보인 호의적인 반응은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똑같았을 것이니까.
이것은 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에나 나올 법한 희극적 상황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점점 심각한 쪽으로 흘러갔다. 당사자인 언니뿐만 아니라 고백을 들은 동생 역시 정귀보에게 제법 깊은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귀보와 함께 있으면 캐시미어 모포로 몸을 감싼 듯 편안한 감정에 빠져들 수 있었다. 아 정말이지 부드러운 늪에 빠져드는 느낌이랄까요?―라는 것은 언니의 말이었고, 동생 쪽은 다소 관념적인 표현을 써서 이렇게 설명했다. 뭐랄까, 자아라는 갇힌 틀을 넘어서 편안하고 평화로운 대기를 경험하는 기분과 유사하달까요?
정귀보는 며칠 후 자신이 좋아하는 이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며, 자신이 그들을 헷갈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예상치 못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혼란은 쉽게 수습되지 않았는데, 둘이면서 또 하나인 마음이 이미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았던 탓이다.
물론 정귀보가 자매를 동시에 사랑했다고 단정하기에는 여러 난점이 남아 있다. 그가 사랑한 것이 정말 두 사람이었다는 말인가? 사랑을 하는데 어떻게 대상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것을 과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후일 몇몇 지인들이 이런 정당한 의문을 제기했을 때, 정귀보는 우수 어린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세 번째와 네 번째라고 할 수 있는 이 연애가 오래가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귀보는 어느 정도 자매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조금씩 상해가는 과일처럼, 정귀보의 마음은 형태와 빛깔이 변질되고 있었다.
스스로를 견디지 못한 그가 결별을 선언했을 때, 자매의 반응은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었다. 두 사람을 한 사람처럼 사랑하면 안 돼? 그건 언니 박순옥의 말이었다. 그냥 두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사랑해도 좋지 않아? 이건 동생 박진옥의 말이었다. 정귀보는 둘 모두를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내부에서 피어오르는 모멸감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사랑이란 단 한 사람만을 향하는 것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 이 감정은 결코 진실한 것이 아니다. 그게 그의 결론이었다.
그는 자매에게 결별을 통보하고 전격적으로 회사를 사직했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정귀보가 회사를 그만둔 것은 차양에서 톡, 톡, 떨어지는 빗방울 때문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 희비극적인 연애에 대해서는 특별히 덧붙일 말이 없다. 굳이 부연하자면, 그 자매를 실제로 만나본다면 누구도 정귀보를 손쉽게 비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모든 면에서 정귀보는 사랑에 충실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충실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정귀보의 세 번째 또는 네 번째 사랑은 모두에게 상처만 남기고 물거품이 되었다.
회사를 그만둔 이후 정귀보가 본격적으로 회화 작업에 매진했기 때문에, 이 실연은 오늘날의 미술애호가들에게 어떤 면에서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정귀보는 장위동 근처의 낡은 빌라에서 살면서 주변 사람들의 얼굴과 집 주위의 풍경을 그렸다. 버려진 옷이라든가 이불보 같은 것을 캔버스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과거의 화풍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의 인물화와 풍경화는 이 세상 어디에나 있는 이미지 같았는데, 묘하게도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관람객들은 누구나, 이건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 얼굴이 아닌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렇게 덧붙이곤 했다. 이건 어딘지 나를 닮았는데…….
정귀보의 후기 예술을 장위동 시대라고 명명할 수 있다면, 그는 그 시대까지도 자신의 미래를 모르고 있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를 잇는 뉴욕 평단의 거장 빈센트 호크의 주목을 받아 세계적 작가로 거듭난 아시아의 천재. 그게 바로 자기 자신일 줄은 예측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여기서 잠시 빈센트 호크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빈센트 호크는 오하이오 출신으로 2000년대 이후 뉴욕 현대미술을 이끌어온 독보적인 미술평론가이다. 「뉴욕타임스」의 어떤 칼럼니스트는 “아무리 도로를 달려도 옥수수 밭만 이어지는 시골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 ‘호크’(매)가 필명이 아니라 본명이라는 점은 충분히 주목받아야 한다. 특히 이 ‘호크’는 아시아라는 옥수수 밭을 날아다니는 데 천부적이었던 것이다”라고 적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호크’가 어쩌고 한 것은 그게 매처럼 날카로운 눈을 가진 비평가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아시아라는 옥수수 밭을 날아다닌다는 것은 아시아의 무명작가들을 발굴해내는 데 날카로운 식견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이 칼럼니스트의 문장에는 지역적, 인종적 편견이 배어 있었지만, 기이하게도 이를 지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유의 성실한 리서치를 통해 정귀보의 포트폴리오를 접한 빈센트 호크는 곧바로 뉴욕의 큐레이터들에게 그를 추천했다. 그렇게 해서 정귀보는 저 유명한 모마(MoMA:뉴욕 현대미술관)의 <21세기, 내일은 어디서 오는가?> 전에 초청을 받게 된 것이다. 모마의 이 야심 찬 기획에 초대된 아시아계는 정귀보가 유일했다. 중국 작가가 포함되지 않은 것은 중국의 인권 상황에 대한 뉴욕 화단의 항의 표시이며, 무명의 한국 작가가 포함된 것은 모마에 재정적 후원을 약속한 한국 대기업을 고려한 결과라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도 있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 작가에게 자리가 돌아온 것은 행운이었다. 정귀보로서는 중요한 도약의 기회였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정귀보는 모마의 초대장을 받자마자 자살로 추정되는 의문의 사고로 실종됨으로써 더욱 신비로운 이미지를 남겼다. 일종의 유작전이 된 그 전시회에서 정귀보는 현대회화의 새로운 장을 연 미래의 아티스트라는 평을 얻었다. 뉴욕 모마의 홈페이지에는 그의 작품 일부와 함께 다음과 같은 다소 난해한 추천사가 게재되었다.
설치, 개념 및 비디오 아트가 주도하는 현대회화에서 프랜시스 베이컨과 루치안 프로이트의 신표현주의 이후 정귀보만큼 회화의 구상적 본질에 도달한 화가는 없었다. 캔버스로 선택된 낡은 옷과 버려진 침대보는 고도로 계산된 정귀보의 페이셜 이미지와 절묘한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일본의 모노하(物派)를 비롯한 탈주관주의의 동양적 흐름에 휩쓸리지도 않고, 잭슨 폴록의 드리핑이 대변하는 소위 ‘과정의 미학’에 종속되지도 않으면서, 정귀보는 인간의 얼굴을 보편적 궁극의 상태로 밀고 간 유일한 작가라고 할 만하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화가, 그것이 정귀보인 것이다.
빈센트 호크의 평은 “매의 날카로운 눈”을 느끼기에는 지나치게 일반적이고 서구중심주의적이었지만, 정귀보를 주목의 대상으로 만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국내 갤러리에 ‘퀴포청’(Kui-Po Chung)의 작품을 찾는 외국 화상들의 문의가 심심치 않게 이어진 것은 물론이다. 부재하면서 존재하는 화가, 죽은 채로 미래가 된 화가, 무상(無償)의 터치가 창조하는 급진적인 전위성으로 인간을 재해석한 화가. 그런 표현들이 정귀보를 수식하기 시작했다.
이후 나온 언론의 문화면 기사들은 정귀보에 대한 뉴욕 평단의 평가를 비중 있게 소개했지만, 그의 인생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정보를 알려주지 못했다. 정귀보가 만 41세, 즉 한국인 평균수명의 대략 절반만 채운 뒤에 인생을 마감했다는 것이 그 기사들에 나오는 유일하게 올바른 정보였다. 게다가 그 기사들은 그의 죽음이 자살인지 아닌지 단정 짓기 어렵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정귀보는 서해안 하구의 한 계곡에 있는 구름다리를 건너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고도 15미터, 길이 25미터의 제법 아찔한 다리였다. 시간은 목요일 오후 3시, 날씨는 약간 흐린 정도로 사람들에게 이렇다 할 인상을 남기기 어려운 하늘빛이었다. 목격자들의 증언은 간단했다. 정귀보보다 먼저 구름다리를 건너갔던 중년 여성의 말이다.
“건너면서 뒤를 돌아봤지. 마흔이나 됐을까 싶은 남자가 막 다리에 들어섰는데, 평범한 등산객 차림이었어요. 뭐 요즘엔 회사 잘리고 평일에도 산에 오는 남자들이 많으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다리 가운데서 걸음을 멈추더니 상체를 내밀고 물을 지그시 바라보는 거야. 아이고, 저거 위험한데, 호기심 많은 양반이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분 거예요. 다리가 흔들렸지. 아무래도 출렁다리니까. 어, 저 양반 발바닥이 허공에 떴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순식간에 사라진 거야. 그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감이 안 왔어요.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져서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는 생각도 못 했다니까.”
이 목격자에 따르면 정귀보는 다리 아래의 가파른 계곡을 자세히 보려다가 실수로 추락사한 것이 틀림없었다. 마침 그 시간에 바람이 강하게 불었고 다리가 심하게 흔들렸다는 증언은 그 외에도 더 나왔다. 구름다리의 사고 위험을 지적하는 청원이 평소에도 많았다는 사실이 추가로 밝혀졌다. 신발을 벗어놓고 뛰어내린 것도 아니고 유서를 남긴 것도 아니었으니 경찰 입장에서는 실족사로 처리하는 게 순리였다.
하지만 그 순간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다른 등산객의 진술은 달랐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는데, 그는 전직 교수인데다 깊은 주름과 중후한 목소리를 갖고 있어서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정귀보의 뒤를 따라 다리를 건너다가 추락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중년 여성의 반대편이었던 셈이고, 정귀보와는 5~6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이 산을 12년째 다녀. 산에 대해서는 잘 알지. 거긴 그런 사고가 일어날 만한 데가 아니야. 일부러 그러지 않는 한 떨어질 수가 없는 곳이라고.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건, 구름다리 한가운데 서 있는 그 사람 표정을 봤기 때문이우. 어딘지 어두운 표정이었어. 난간을 꼭 쥐고는 일부러 상체를 밖으로 내민 것 같았다니까. 물을 바라보는 듯하더니, 순간 펄쩍 뛰어서 떨어진 거야. 그건 몸을 던진 거예요 분명히. 내가 나이가 일흔둘이야, 일흔둘. 확실해요.”
자살이라는 얘기였다. 정귀보는 신발도 벗지 않았고 유서도 남기지 않았지만, 확실히 그것으로 자살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바람이 불었다고는 하나 느끼기에 따라서는 산들바람 정도였다. 그 다리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은 사례는 지금까지 두 건밖에 없었다. 둘 다 자살이었다. 구름다리는 폭 1.5미터 정도로, 양쪽에 밧줄로 된 난간이 설치돼 있었다. 난간 높이는 어른 가슴께까지 오는 정도였고, 난간 아래로도 촘촘히 그물이 설치돼 있었다. 일부러 뛰어넘지 않는 한 추락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군청 직원의 말에 따르면, 그때는 민원을 접수하고 구름다리의 전면 보수공사를 끝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다리가 위험했던 건 아니라는 뜻이다. 앳된 얼굴에 이제 막 공무원 느낌이 배어들기 시작한 그 군청 직원은 구름다리라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그 때문에 나는 산 위의 구조물들에 대한 의외의 지식까지 얻게 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산에는 나무와 바위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인간이 만든 산장도 있고, 인간들의 무수한 도전과 실패가 있으며, 헬리콥터가 커다란 철근을 매달고 허공을 날아가는 시간도 있는 것이다.
자살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정황증거는 그 외에도 여럿이었다. 우선 정귀보는 평소 산행에 취미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특별한 계기가 없이는 혼자서 산을 탈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게다가 그의 풍경화는 산이나 바다가 아니라 주로 도시 변두리를 대상으로 삼았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그는 한 번도 자연을 그린 적이 없었다. “자연에서는 표정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작업을 하러 갔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 평일 낮에 혼자서 산에 올라갔다면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그 전날 산 아래 주점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는 증언도 확보되었다. 분명히 혼자였다고 증언한 주인 남자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여긴 혼자 오는 손님은 드문 편이라 기억이 나요. 그냥 얌전하게 소주 두 병을 비우고 나갔지. 스마트폰도 들여다보고 하면서 멍하니 마셨어요. 어디다 전화를 걸어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고, 행패도 부리지 않았어. 안주는 도토리묵과 김치전이었고. 아, 도토리묵은 우리가 서비스로 준 거야. 자살할 표정이었냐고? 에이,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얼굴에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근데…… 또 그렇다고 생각해보면 확실히 그런 표정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모마의 전시를 위한 작업이 잘 되지 않아서 자살했을 거라는 언론의 추측성 기사가 반복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기사의 표제는 <이것이 천재 예술가의 비극인가?> 식이었는데, 말미에는 애도이기도 하고 영웅화이기도 한 관습적인 찬사를 덧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구구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정귀보 자신이 작성한 유서였다. 유서는 장위동 정귀보의 방, 그것도 책상 위에 놓인 책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친필이었고,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이루어진 글이었다.
<죽음은 삶 전체를 드러내는 무한한 거울이다>
<죽음은 단순한 없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신비이자, 무한한 사건의 발생 가능성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을 것이며, 죽음이 오면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등등.
조간들은 정귀보의 유서가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쏟아냈다. 천재 작가다운 혜안으로 빛나는 글이라는 찬사와 함께였다. 확실히 죽음에 대한 그 문장들은 정귀보가 왜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암시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 유서의 전문을 여기에 인용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로서는 매우 실망스러운 글이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 그 유서가 꽂혀 있었다는 책은 『세계 잠언집』이었는데, 그건 편자조차 ‘편집부’로 되어 있는 싸구려 책이었다. 북 디자인이나 종이의 질이 조악했을 뿐 아니라, 인용문들에는 출처조차 없었다. 흔히 중고서점 1천 원 코너에서 파는 책이 틀림없었다.
둘째, 그 유서에 감명을 받아 문화면에 전문을 게재한 신문들은 다음 날 다소 충격적인 제보를 받아야 했다. 제보전화는 문화부 데스크로 하루 종일 이어졌다. 제보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증언한 것은, 정귀보의 유서라고 보도된 그 문장들이 실은 정귀보가 읽던 바로 그 책 『세계 잠언집』에 실려 있는 글귀라는 것이었다. 대개 나이 지긋한 독자들이 전화를 걸어왔는데, 그들은 문제의 유서가 사실 그 책의 일부이며 어떤 문장은 잘못 옮겨지기까지 했다고 주장했다. 70대라는 한 독자는 자신이 문제의 『세계 잠언집』을 아침마다 하나씩 골라서 낭송하기 때문에 기사를 보자마자 금방 알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심지어 그는 그 책에서 가훈을 뽑아 액자로 걸어놓았다는 점을 강조하기까지 했다. 이 제보가 사실이라는 것은 금방 확인되었다. 책을 입수해 대조해보면 되었기 때문이다.
정귀보가 왜 삶과 죽음에 관한 선인들의 잠언을 베껴 쓰고 거기에 ‘유서’라는 제목을 붙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가장 단순한 주장은 이런 것이었다. 이것은 진짜 유서가 아니며, 단지 책의 내용을 메모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얘기였다. 『세계 잠언집』의 5장이 바로 ‘예술가들의 유언’이라는 소제목으로 돼 있다는 설득력 있는 근거도 제시되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정귀보가 왜 ‘예술가들의 유언’이 아니라 ‘유서’라고 적어놓았는지, 왜 5장뿐 아니라 다른 곳의 문장들도 섞여 있는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매력적인 해석도 있었다. 천재 예술가답게 정귀보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유머를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투적인 잠언들을 진지한 죽음과 겹쳐놓는 고급스러운 농담이라는 해석이었다. 하지만 그런 농담이 정말 ‘고급스러운’ 것이냐는 냉소적인 반론이 있었고, 그 잠언들이 당신 눈에는 상투적으로 보이느냐는 다소 감정적인 반론도 있었다. 정귀보가 그런 식의 말장난을 좋아하는 타입의 천재는 아니었다는 주장도 추가되었다. ‘고급한 유머’ 론은 금방 힘을 잃었다.
그 외에도 여러 견해가 제출되었다. 죽음에 대한 글을 너무 열심히 읽다 보면 정말 죽음에 대한 충동을 느낄 수 있다는 정신과 의사의 칼럼이 게재되었고, 잠언은 교훈과 가르침을 담은 문장이기 때문에 유서에 잠언을 베껴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한 대학 교수도 있었다. 이 모든 게 악의적인 정치적 조작이라는 극단적인 견해는 SNS에서조차 야유를 받았으며, 자살은 그냥 자살이지 뭐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느냐는 근본적인 주장은 홍대 앞 술집 같은 곳에서 잠깐 흘러나왔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이 사건의 더 큰 난점은 다른 곳에 있었다. 사건 발생 후 한 달이 다 되었는데도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구름다리에서 추락해 바위에 두 차례 부딪힌 후 급류에 휩쓸려간 것은 틀림없는데, 정작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수중탐색 전문요원들이 포함된 군경 합동수색팀이 하구를 이 잡듯 뒤졌는데도 아무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바위에 남은 핏자국이 증거의 전부였다. 배낭이나 신발 같은 것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하구는 바다와 만나면서 물이 넓고 깊어진다. 시신은 해류의 지배를 받게 되고, 그때부터는 강바닥이 아니라 바다라는 거대한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정귀보는 이미 그 거대한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시신을 찾는 것은 사막에서 모래알 찾기라든가 갈대밭에서 바늘을 찾는 일에 가깝다. 이것은 시신 확보에 생각보다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면서 덧붙인 경찰 고위관계자의 비유였다.
하지만 정귀보는 사건 발생 4개월이 지난 뒤, 넓고 깊고 어두운 그 바다의 심연에서 자신을 드러냈다. 마침내 시신이 발견된 것이다. 내가 연락을 받은 것은 정귀보가 실종된 후 정확하게 120일째가 되던 날의 저녁 무렵이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의 창밖에는 황혼을 배경으로 낙엽이 정말 그림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만물의 조락은 그렇게 자신만의 표현법을 갖게 되는 것이다. 팔짱을 낀 채 나는 그런 쓸쓸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즈음 나는 평전 집필을 중단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정귀보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할 말이 없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계약금을 받은 마당에 무책임하고 성급한 판단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할 말이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나는 무엇보다 빈센트 호크가 아니기 때문에 추상적이고 현란한 논리로 그의 작품을 변호할 생각이 없었고, 정귀보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우리 민족이 낳은 천재니 뭐니 하는 과장과 미화를 일삼고 싶지도 않았다. 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출판사 사장의 다급한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와는 미대 동창이기도 한 사장은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급보를 전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이봐, 빨리 취재 시작하라고. 다른 데서 손쓰기 전에.
시신을 발견한 것은 바닷가에서 놀던 오누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3학년 여자아이와 5학년 남자아이였다. 부모는 수협공판장에 일을 나간 뒤였고, 학교에서 돌아와 해변에서 놀다가 정귀보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리 신빙성 있는 진술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정귀보가 처음에는 시신 상태가 아니었으며, 바다에서 ‘비틀거리면서 걸어 나왔다’고 증언했다. 처음에는 동네 아저씨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힘없이 고개를 숙인 채였고, 옷은 수영복이나 잠수복이 아니라 등산복이었다. 정귀보가 산에 올라갈 때 입고 있던 바로 그 옷이었다.
해변으로 걸어 나온 정귀보는 너무 오래 수영을 해서 기진맥진한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푹, 허물어졌다. 오누이는 바다에서 걸어 나온 남자가 자기들을 빤히 바라보다가 쓰러졌으며, 그래서 아무런 말도 나눌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이 진술에 의하면, 정귀보는 120일 동안 바닷속에 잠겨 있다가 산 채로 걸어 나온 것이 된다. 아마 애들이 공포에 질려 잠시 착각한 거겠지. 사장은 그렇게 덧붙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도를 타고 해변에 밀려온 시신을 본 초등학생들이라면 그런 환상에 사로잡힐 수도 있을 것이다. 공포라는 감정은 우리에게 어떤 종류의 환상이든 만들어내지 않던가.
전화를 끊었을 때, 나는 뜻밖의 욕망에 휩싸여 있었다. 멈췄던 심장이 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귀보의 시신을 직접 볼 수 있다면 평전을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시신은 정귀보에 대한 기나긴 글의 유일한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차올랐던 것이다. 그것은 나로서도 갑작스러운 열망이라고 할 만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나에게 그 열망은 사랑이라든가 증오 같은 감정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것은 집착 같은 감정이 아니며, 호기심이나 의무감 같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것을 ‘영원한 탐구열’이라고 말하겠다.
나는 정귀보의 시신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그가 안치돼 있다는 해안가 소도시의 한 종합병원으로 달려갔다. 기자들도 오지 않았고, 심지어 빈소조차 차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깊은 밤에 관리실 유리창을 두드려야 했다. 선잠에서 깬 근무자가 쪽창을 열었다. 육십대 중반쯤의 피로한 얼굴에 드문드문 검버섯이 피어 있었다. 잠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인, 그런 얼굴이었다.
그는 정귀보의 시신을 보고 싶다는 나의 청을 한마디로 거절했다. 규정상 불가능하다는 것인데, 그건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에게 생각보다 많은 액수의 사례를 한 뒤에야 나는 정귀보의 시신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고, 바닷바람이 귓가를 스치는 적막한 병원의 적막한 영안실이었다. 관리인이 열쇠 꾸러미를 뒤져 안치실 문을 따고, 3번이라는 번호가 붙은 냉장고를 꺼내는 시간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엠바밍을 한 것도 아닐 텐데 시신은 말끔한 상태였다. 익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심지어 싱싱한 느낌까지 들었다. 피부가 불지도 않았고, 상한 곳도 없었다. 눈과 코와 입이 정확하게 있어야 할 곳에 위치해 있었다.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상체를 일으켜 “누구요?” 하고 물어볼 듯한 얼굴이랄까. 정귀보는 생전의 모습 그대로. 172센티미터에 71킬로그램의 체형조차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렇게 누워 있었다.
무슨 처리를 어떻게 했느냐는 내 질문에, 관리인은 자기가 방금 근무 교대를 했기 때문에 답해줄 수 없으며, 내일 아침에 직접 병원 측에 문의하라고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열쇠를 짤랑거리며 안치실 문에 기대선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나는 시신 쪽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이것이 백 일이 넘는 동안 바다 밑을 떠돌아다닌 시신이란 말인가? 아니면 그가 살아서 걸어 나왔다는 아이들의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나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참을 수도 없었다. 기묘한 슬픔이 가슴속에서 배어 나왔다. 나는 안치실의 희미한 형광등 불빛 속에 망연히 서서 오랫동안 정귀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밤이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음 날 나는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정귀보에 대한 글을 다시 시작해보겠노라고 말했다. 사장은 아 그럼 안 하려고 했단 말이냐?―라며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듯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물론 그 후로도 책은 지지부진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귀보의 예술이야 평론가들이 설명할 문제지만, 정귀보의 인생을 탐구하는 것은 소위 평전을 쓰겠다는 나의 몫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의 인생을 연대별로 정리할 것인지, 큰 사건별로 정리할 것인지, 몇 개의 시대로 나눌 것인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대체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에 얼비친 햇빛이라든가, 야이 씨발아 난 여자만 좋아해―라든가, 쌍둥이를 동시에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 것일까? 그런 것에 의미를 부여해서 이렇게 저렇게 정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런 것을 쓰려는 나라는 인간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평전이 아니라 차라리 연보만으로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게 낫지 않겠는가? 시간 순서에 따라 철저하게 객관적이며 확인 가능한 정보만으로 이루어진 책을 말이다. 설령 그것이 단 한 페이지로 이루어진 책이라고 할지라도……
지금 나는 정귀보가 죽음을 맞기 전날 밤 혼자 술을 마셨다는 주점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낡은 나무탁자 여섯 개와 통나무 의자들이 아주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왔다는 듯 눅눅한 향기를 내뿜고 있다. 뜨내기 등산객들을 받는 주점답게 안주는 다양한 편이어서, 도토리묵도 있고 김치전이나 파전도 있으며, 심지어 고등어구이도 있다.
죽기 하루 전의 정귀보가 된 듯이, 나는 도토리묵(주인장이 서비스로 준 것이다)과 파전을 앞에 두고 막막한 감정에 잠겨 있다. 특별히 비관적인 기분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언성을 높이지도 않을 것이고, 만취해서 행패를 부리지도 않을 것이다. 단지 나는 무언가가 내 안에서 조금씩 피어오르고 있다는 것은 깨닫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정귀보의 인생에 대한 기나긴 글의 첫 문장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문장이 없는…… 짧고 건조한…… 첫 문장 말이다. 첫 문장에서 두 번째 문장이 나오고, 두 번째 문장에서 세 번째 문장이 이어지고, 세 번째 문장에서 또 다른 문장이 태어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거기서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나오는 정귀보를 보게 될는지도 모른다. 해변에서 놀고 있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우리 모두의 정귀보를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