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학 ‘진주향토시민학교’를 지켜주세요
24년을 이어온 배움터…재정난에 폐교 위기
제대로 된 간판조차 없어 찾는데 한참을 걸렸다. 혹시나 해서 오른 건물 계단에서 한 할머니와 마주쳤다. “학교 찾아왔어?” 그 말을 듣고서야 찾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진주시 봉곡동의 한 건물에 입주해 있는 20평 남짓의 아담한 공간은 24년을 이어온 ‘진주향토시민학교’. 서부경남의 대표 야학이던 곳이다. 학교 문을 열자 수업준비 중인 김민창(42)씨가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김씨는 이 학교의 교장이자 교사이며 행정직원이다.
사무실 옆 공간은 교실이다. 작은 칠판과 2인용 책상 6개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장소만 보자면 학교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좁은 곳이다. 하지만 이 곳은 배움이 간절한 이들의 안식처다. 학교에선 중학교 과정반과 고등학교 과정, 영어교실을 운영 중이다. 전교생은 12명. 10년 전 3~40여명이던 숫자와 비교하면 조촐하다.
일반학교에서 중퇴한 20살 학생 2명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40~70대의 늦깎이 학생들이다. 돈이 없어 배우지 못했던 근로청년을 위해 생겼던 야학이지만 이제는 그런 사람을 찾기 힘들다. 김 교장은 “몇 해 전 공단지역에 근로청년을 모집하기 위해 전단지를 뿌렸지만 연락이 한 통도 없었다”며 달라진 야학현실을 말했다. 대신 만학의 꿈을 가진 이들의 공간이 되었다.
진주향토시민학교를 거쳐간 학생은 800명이 넘는다. 이중 고입검정과 고졸검정고시를 통과한 졸업생은 400여명. 사천, 산청은 물론 합천, 함양, 고성, 남해에서 학생들이 다녀갔다. 연령은 1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했다.
김 교장은 한 졸업생이 고맙다며 저녁식사에 초대했던 일화를 꺼냈다. 졸업생은 향토학교를 통해 2가지를 얻었다고 한다. 첫째는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우울증을 치료하게 됐다. 또 하나는 배움을 통해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며 많은 지식을 얻게 되었다고 전했다.
김 교장은 아직도 그 졸업생의 말을 잊지 못한다. “야학을 통해 졸업하신 분들은 모두 대단한 분들이에요. 배움에 한이 맺혀 오신 분들이거든요.” 김 교장은 이곳에서 청춘을 받쳤다. 향토학교와의 인연은 지난 88년 경상대 전자공학과 신입생 시절이다. 친구의 요청으로 학생모집 전단지를 붙이는 일이었다.
그땐 자신이 향토학교와 계속 인연을 이을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2006년 학교를 졸업하고 구미에 있는 유명 전자회사에 지원했지만 면접에서 낙방했다. 때마침 평소 알고 있던 교수로부터 향토학교를 도와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발을 내디딘 것이 벌써 15년이 됐다.
학교 운영은 쉽지 않았다. 학교를 갓 졸업한 그가 감당해 내기에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금난이 계속되었지만 안먹고 안쓰며 버텼다. 김 교장 처럼 주업으로 야학을 운영하는 곳은 전국에서도 찾기 힘들다. 그도 돈을 벌면서 해볼까 싶었지만 오전, 오후, 저녁까지 수업을 하는 상황에서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4년 전부터 매년 경남교육청에서 보내오는 평생교육시설 지원금 500만원은 단비와도 같다. 상평동에 위치한 대림화학 김명신 사장이 설립한 대림덕산장학회에서도 많지는 않지만 매년 지원해 오고 있다. 그에게 김 사장은 천사 같은 존재다. 이외에도 봉사단체가 간간히 도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학교를 정상적으로 꾸려가기 힘든 상황이다.
재정상태가 이렇다 보니 김 교장은 학교 운영을 위해 학생들에게 학비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1인당 매달 6만원. 한 사람이 다른반 수업을 중복해서 들어도 더 이상 받지 않는다. 그는 “어렵게 공부하는 분들께 부담주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현실적 어려움에 고민하면서도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학교를 포기할 수 없는 심정이다.
때마침 오후 영어수업을 듣기 위해 학생들이 하나둘 등교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온 이경자(72.가명) 할머니는 어린 시절 공부가 싫어 중학교 진학을 하지 않았다. “집이 가난하지도 않았는데 그땐 왜 그렇게 공부가 싫던지.. 내 고집에 부모님도 포기하셨지.” 할머니는 60년이 지나서야 공부에 욕심이 났다. 중3과정을 공부중인 할머니는 내년 초 고입검정 합격이 목표다. 하지만 학교 형편을 알고 있어 걱정이 앞선다. “학교가 없어지면 안돼요. 우리 같은 사람 어디 가서 공부해.” 김 교장을 쳐다보는 할머니의 눈이 안쓰럽다.
같은 반 김미숙(54.가명)씨는 “선생님이 열정적으로 가르친다”고 말한다. 김씨는 “봉사정신 없이 이렇게 못한다. 제 월급도 못 받으면서 이렇게 일하는 게 쉽지 않다. 나라에서 상을 줘야 할 사람”이라고 전했다.
수곡에서 농사중인 정만열(53)씨는 지각을 했다. 정씨는 이곳에서 고졸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올해 진주산업대 원예학과에 입학했다. 정씨는 처음부터 목표를 가지고 이곳을 찾았다. 대학에서 유기농 재배기술을 배워 농사에 접목할 생각이다. 그는 이미 졸업했지만 영어공부를 위해 이곳을 계속 찾는다. 서른살이나 어린 대학동급생들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다. 이런 열정 덕분인지 그는 향토학교 우등생이다. 고졸검정도 속성으로 통과했다. 정씨는 “수업을 알아듣기 쉽게 해준 김 선생님 덕분”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자신들 같은 늦깎이 학생을 위해서라도 이 학교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배움의 소외계층에게 열려있는 학교는 드물기 때문이다. 학교는 김 교장이 청춘을 바친 곳이기도 하지만 서로에게 위로와 희망을 준 공간이다. 서부경남 ‘배움의 등불’이었던 진주향토시민학교. 재정난이라는 파고 앞에서 희망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도움전화주실 곳: 055-748-4022, 010-8248-4014(김민창)
김민창 교장은 사실 향토학교와의 인연을 운명처럼 생각해왔지만 지난해 4월 폐교를 생각했었다. 셋째딸 은지(5) 때문이다. 2008년 아장아장 걸으며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 하던 은지(당시 3살)가 길에 떨어진 놀이용 고무공을 삼켰다. 눈깜짝할 새였다. 공은 은지의 기도를 막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등을 내려쳐도 소용없었다. 병원으로 옮겨진 뒤 공을 꺼내고 심폐소생술을 했다. 그래도 의식이 없는 은지를 살리기 위해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3살배기 딸을 잃을 것 같아 평생 흘려야 할 눈물이 나왔다. 그때 기도가 통했을까 기적처럼 살아났다.
하지만 산소공급 부족으로 뇌기능이 온전치 못했다. 사고 이후 은지는 목을 가누지 못한다. 앉지도 서지도 못해 항상 엄마품에 안겨있다. 은지는 뇌병변1급으로 장애인보육시설에 다니고 있다.
은지가 아프자 모든 것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하던 동갑내기 아내 마사코가 일을 그만 뒀다. 수입이 줄지만 아이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김 교장 역시 지난해 4월부터 야간반 수업을 폐지했다. 아빠가 없으면 불안해 하는 은지를 위해서다. 김 교장은 자신의 과거를 다시 돌아보게 됐다. 학교를 운영하느라 제대로 된 월급을 가져다 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심한 가장이 될 수 없어 학교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지금보다는 경제사정이 더 나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배움에 대한 간절한 요구를 뿌리칠 수 없었다. 학교와 가정을 두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때 아내가 힘이 되었다. 남편에게 학교가 어떤 의미인지 알기 때문에 계속 운영하라고 용기를 줬다. 씀씀이는 더 아끼기로 했다. 학교를 지키자고 결심을 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형편은 어렵지만 집안엔 웃음이 다시 흘렀다. 씩씩한 큰아들 수성(12)이와 깜찍한 둘째딸 은선(9)이는 은지 돌보는 일을 곧잘 돕는다. 14개월 된 막내딸 은화는 재롱둥이다. 은지는 병원에 다니며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 그는 경제사정으로 또다시 학교를 포기하는 결심을 할 지 모른다. 하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겠다는 각오다. 그에겐 슬퍼만 하기엔 해야 할 일과 사랑할 존재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강진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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