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망우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누울 자리(동구릉)를 정하고 환궁하는 길에 '이제야 근심을 잊었다(忘憂)'며 멈춰선 데서 유래한 동네가 바로 서울 중랑구 망우동이고 이곳에 자리잡은 학교가 망우초등학교입니다. 근심을 잊은 이 좋은 초등학교가 봄 가을로 소풍을 갈 때면 웬일인지 비가 내렸습니다. 나들이가 사치이던 그 시절, 봄 가을 소풍은 그야말로 어린이들의 로망이었기에 이날 내리는 비는 아이들 입장에서는 하늘의 저주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학교는 '망할 망에 비 우(亡雨)'인가 보다 하는 자조 섞인 푸념과 함께 교실에 앉아 슬픈 김밥을 사이다의 탄산으로 넘기곤 했습니다. '세상 일 뜻대로 안된다'는 진리를 어린 나이에 깨우친 셈입니다.
그로부터 35년! 정말 비 때문에 망(할 뻔)했습니다.
벼랑끝에 선 병암정의 절경도, 담장이 예쁜 금당실마을도 비와 추위에 지친 '철 모른' 상춘객들에겐 별다른 감흥이 되지 못했습니다. "에고 추워, 사진 몇 장 찍고 빨리 차에 타자!"
사실 저는 그다지 춥지 않았습니다. 속에서 천불이 솟았는 걸요!
'하늘이시여! 망우의 저주는 언제까지입니까? 내일은 정녕 내일의 태양이 뜨는 겁니까?'
떴습니다! 내일의 태양, 아니 오늘의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병산의 새벽 안개를 걷어내며 꽃중년의 싱그런 미소와 함께 오늘의 태양이 밝게 떠올랐습니다.
마님도 좋아라하십니다.
대감도 좋아라하십니다.
'가만보니 돌쇠로구나!'
맘 속으로 지옥과 천당을 오가며 산너머살구의 2차 여행 예천・안동을 다녀왔습니다.
아침 7시에 밥도 안 먹고 먼저 떠난 대구팀, 오송팀 7명은 단체사진도 별도로 찍었습니다. 첫날 악천후에 전체 사진 찍을 여력이 없었거든요.
우리의 첫 일정, 회룡포를 흐릿하게(?) 전망하고 '명물' 뿅뿅다리를 건너 들어선 회룡포마을에 홍매가 굳센 자태를 드러냅니다. 하긴 눈 속에서도 피어난대서 설중매(雪中梅)라고 하는데 이깟 4월의 비바람쯤이야! 정말로 굳센 것이 아름답습니다.
굳세기로는 이 여인들도 빠지지 않습니다. 프로 냄새를 물씬 풍기는 이들이 비바람을 뚫고 렌즈에 담아낸 것은?
설마 '차량 진입금지'?
회룡포에는 2개의 뿅뿅다리가 있습니다.
걸으면 다리 상판이 출렁거리며 '뽕뿅' 소리가 난다고도 하고 물이 많아지면 철판 구멍 사이로 물이 '뿅뿅' 올라와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합니다. 속칭 '아시바'를 엮어 만든 볼품 없는 철판 다리인데 이름을 예쁘게 붙이고 애정을 건네면 이렇게 명물이 됩니다. 이런 얘기 할 때면 에펠탑 사례를 흔히 들지 않습니까? 건립 당시엔 에펠(Eiffel) 빼놓고는 한 목소리로 욕하던 흉물이었는데 애정과 관심 속에 지금은 파리의 상징, 아니 프랑스의 상징이 되었으니까요. 프랑스의 지성 '아무개'는 당시에 이렇게 멋진(?) 혹평을 했다지요? "저 흉물을 보지 않으려면 내가 저 곳을 오르는 수밖에…"
드라마 황진이(하지원 주연)로 유명해진 금당실의 병암정입니다. 이름 그대로 벼랑 끝에 선 정자가 절경입니다. 뿌리를 과연 어디에 내렸을까 궁금해지는 낙락장송도 예술입니다. 다만, 콤파스로 도려낸 듯이 반듯하게 원을 그린 저 경계석이 경악스럽습니다.
정자와 연못과 섬 그리고 주변의 꽃과 나무까지 한 앵글로 담고픈데 광각렌즈가 없어서 한스럽네요. 어떨 때는 폰카메라로 찍은 작품이 더 낫더라는 역설을 증명하려는지 이 분들의 자세는 프로페셔널 포토그래퍼입니다.
담장길이 아름다운 금당실과 소년의 천진스런 표정이 동화처럼 어울립니다.
금당실은 병화가 들지 못한다는 정감록 십승지 중 한 곳입니다. 그래서 임진왜란의 화를 면했다는데 쉽게 말해 살기 좋고 유사시 피난 가기 좋은 곳이 십승지입니다.
금당실의 별칭이 반서울이랍니다. 조선을 건국했을 때 이곳과 근방의 맛질을 합하여 도읍을 정하려고 했다가 앞쪽으로 큰 물이 없어서 한강이 있는 지금의 서울로 눈길을 돌렸다고 합니다. 그러니 半서울 아니겠습니까? 더 그럴 듯한 얘기는 부산을 출발해서 금당실에 오면 서울 절반 온 거리라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학창시절 집에서 학교 갈 때 버스 갈아타려고 미아리에 내리면 절반 간 거리였는데, 그렇게 보면 저에겐 미아리가 반학교였습니다.
금당실엔 볼 곳이 많습니다. 금당실마을과 금당실송림 외에도 방금 보고 온 병암정, 우리 코스에선 빠진 초간정, 금곡서원, 추원재 등 하루 일정으로 손색이 없는지라 병산서원이 불발일 경우 이 곳에 숙소를 잡을까도 생각했었습니다. 병암정, 금당실마을과 송림을 묶어서 2시간 반 일정을 잡았었는데 비바람에 맞선 우리 회원들의 엄청난 속도전으로 1시간에 해치워 버렸습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이어진 금당실송림에서 연리지를 발견했습니다. 나뭇가지가 서로 붙은 것을 연리지라고 하는데 부부의 금실을 상징한다고 하자 '우리가 빠질 수 없다'며 웨딩포토 연출해 주십니다. ^^ 이 분들 주목해주세요. 애정행각(?) 또 나옵니다.
달빛 비치는 다리, 월영교에 빗방울만 내리칩니다. 그래도 아직 남은 벚꽃이 마지막 운치를 더합니다.
월영교와 원이엄마 얘기는 생략! 인터넷을 참고하세요.
잠겨 있는 임청각의 문을 열어 달라며 '연리지 부부'가 과감히 나섰습니다. "보이시더"
근데 임청각은 저 아래쪽이고 이곳은 고성이씨 종택이었습니다. 고생했니더!
중앙선 철로가 훼손하기 전 99칸 대저택이었던 임청각에서 관람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바로 이 우물방입니다. 고성 이씨 가전에 따르면 이 곳에서 출산한 아이 중에 3명의 재상이 나온다고 했답니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선생을 비롯하여 재상 3분이 나왔으니 약발(?)은 이미 다 한 셈인데 여전히 이 방에서 잠자고 싶어하는 커플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의 숙소 병산서원입니다. 한옥이 불편하다는 건 지니고 살 때 하는 얘기이고 하룻밤 묵어가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힐링 코스입니다. 요즘엔 꽤 세련된 목욕시설을 갖춘 한옥들도 많지만 편의시설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병산서원을 숙소로 선택한 건 고즈넉한 아침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서입니다. 만대루에 올라 마주선 병산과 서원의 치밀한 조화를 느껴보고 배롱나무, 매화, 살구나무(@@ 여기 밑줄 쫙!) 등 유서 깊은 나무들을 감상합니다. '한국 건축은 멀리서 바라보는 건축이며, 일본 건축은 가까이에서 쓰다듬는 건물이다'고 했다던 서양 어느 건축가의 탁견을 눈으로 확인합니다. 자연을 위압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에 순응하는 건축, 그 백미가 바로 병산서원입니다.
카페 대문에 걸린 이 사진을 찍겠다고 이렇게 배깔고 만대루에 누웠습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소개된 병산서원 지킴이 류시석 선생과 인증샷 한 컷을 남기고 서원을 나서 하회로 향합니다. 승용차로 와서는 좀체로 가기 힘든 길, 일명 유교문화길 4km를 걸으니 저 멀리 논밭 너머 하회가 보입니다.
하회로 향하는 길에서 만난 여러 풍경 중에 저 조그만 새둥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작은 사과만한 둥지가 하도 앙증맞아 가까이 가보니 갖출 것은 모두 갖춘 완벽한 새집이었습니다. '집주인은 어디 갔을꼬'
하회의 옛집들이야 사진으로 올리는 것이 새삼스러울 거고, 많은 사람들이 놓치는 포인트가 바로 마을 앞 백사장에 조성한 방풍림입니다. 방풍림이니 바람도 막아주지만 풍수 상 마을의 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잡아준다고 하네요.
오른쪽은 부용대에 올라 내려다 본 방풍림입니다.
부용대에 올라 하회를 조망하지 않았다면 하회를 절반만 본 겁니다. 얼마나 좋았는지 이 분은 벼랑 바로 앞에까지 진출하여 여유롭게 감상(?) 중이십니다. 남편은 난리 났습니다. "자기야, 위험한 데는 가지 말랬지!"
서애 류성룡 선생이 징비록을 집필했다는 옥연정사에서 잠시 여유를 즐기며 산 너머 살구 1박2일 일정을 마무리합니다. 오후 2시의 하회탈춤 상설 공연이 보고 싶지만 우리는 어서 순대국밥 먹으러 가야 합니다.
아 그렇지! 산 너머 살구는 밥이 중요하지요! 첫날 점심, 저녁, 다음날 아침, 점심 순으로 삼일분식의 따로국밥, 대마갈비의 소갈비구이, 하회식당의 간고등어정식, 단골식당의 순대국밥과 오징어숯불구이를 즐겼습니다. 비바람 몰아쳐도 음식 맛이 변하지는 않잖아요? 나름 경상도 음식의 편견을 깨주는 메뉴들이라고 골랐는데, "입에 맞니껴? 우짜니껴?"
5,000원의 자존심! 삼일분식의 단일 메뉴, 따로국밥입니다. 제 아무리 손님이 줄을 서도 호박전과 고등어구이 반찬만큼은 주문과 동시에 조리한다는 음식 철학! 게다가 협찬 받은 달력으로 온 벽면을 화환 세우듯이 장식한 고집스런 인테리어 센스! 진한 국밥만큼이나 쥔장이 예삿분은 아닙니다.
오후 2시가 넘은 시각에 오징어구이와 순대국밥 한 그릇 먹겠다고 번호표 들고 서성이는 사람들. 근처의 다른 식당도 다 맛있다던데 왜 단골식당에만 줄을 서는 걸까요? '하긴 우리도 줄 섰는데 뭐!'
경상도 맛기행의 하이라이트, 안동 대마갈비는 '먹어봐야 맛을 알지!' 사진으로 전달되는 감흥이 없는지라 생략! 같이 다녀온 분들에게 한 가지만 얘기하자면, '고급 생갈비는 앞뒤로 살짝만 익혀서 드세요. 속까지 바짝 익히면 냉동 수입고기랑 구별도 안돼요!!!'
마지막! 우리가 타고 다닌 요 녀석이 명물입니다. 저도 태어나서 처음 타 본 22인승 우등버스입니다. 일반 우등에서 여섯 자리 즉, 2줄을 덜어 낸 개량 우등버스인데 열 명 남짓한 단체 골프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버스라고 합니다.
아쉬움에 내내 입맛을 쩝쩝 거리게 되지만 악천후에도 무사히 다녀 온 것에 만족합니다.
다음 달에 강릉으로 커피 마시러 가입시더!
첫댓글 제가 제낀 일정중에 닭살부부의 무수히 많은 애정행각이 있었구료.. ㅠ금당실 마을보다, 월영교보다 그저 아쉬울뿐입니다.. ㅋ
몇 개 더 있어요. 특집 하나 꾸밀까?
1박2일을 아주 잘 정리하셨군요
재미있게 읽으며 다시 여행을 떠 올립니다.....
맘에 드십니까 마님
수고많으셨어요. 이제야 제대로 읽고 댓글답니다.
사진이 프로이신 거 같던데 후기 하나 올리시면 어때요?
에고.........전 여행가가 아니라서 사진은 늘 감성 위주의 사진만 담다보니..............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