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달에
박기옥
세상의 빛을 본지 7개월,
상현의 달빛이 검은 구름의 틈을 헤집고 평화스런 우리 마을을 줄기차게 뿌려대고 있었다. 200호 정도, 시골 마을치고는 꽤 큰 마을이다. 자연 부락단위 사랑방마다 가을걷이를 끝낸 청장년이 모였다. 지붕을 이을 새끼 꼬기, 가마니와 멍석을 짜기 위한 사전작업, 짚신 엮기 등이었다. 묻어 둔 무나 고구마를 어썩어썩 씹으면서 구수한 삶의 이야기는 농촌의 밤을 훈훈하게 데운다.
해방을 맞기는 하였으나 지리산을 본부로, 좌익의 빨치산은 남쪽지방 요소요소에 아지트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 세력들이 남한체제를 무너뜨리려고 경상도와 전라도 일원에서 빈번한 약탈과 선동으로 양민을 괴롭히고 있었다.
우리 동네의 참혹한 사건의 발단은 팔공산 양시 골짜기에서 활동하던 좌익 세력의 근거지가 나무꾼에게 발견되었다. 공비들은 나무꾼에게 "갓나새끼, 어디에 사느냐? 신고하면 모두 몰살시키겠다."라는 위협을 하였다. 겁에 질려 실제로는 동강리에 살면서 보복이 두려워 얼떨결에 박사리에 산다고 거짓 대답을 하였다. 신고를 받은 당국은 군경 합동으로 좌익 소탕 작전을 펼쳐 78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잔당들을 완전 섬멸은 어려웠다. 언젠가는 잔당들의 보복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으로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던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무리는 청도 운문산에 있는 두둔 세력과 합세하여 우리 마을을 습격한 것이다.
문종이가 군데군데 뚫린 문구멍 사이로 호롱불이 흔들리고, 문밖에 수상한 그림자가 두세 겹 사랑방을 에워쌌다. "반동 갓나 새끼들 꼼짝하면 죽이다! 중요한 연설을 할 것이니 모두 논 마당으로 나와랏!" 라고 위협하였다. 그 자리에 청장년을 모두 엎드려뻗쳐 시키고 "반동새끼들 신고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보여 주겠다."라고 일갈하면서 일차로 몽둥이로 갈기고, 2차로 칼과 죽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다. 도망자가 있으면 장총으로 갈겨 대었다. 그날 하룻저녁에 38명이 사망하고 28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가옥 108채가 불에 타 없어졌다.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도랑에는 핏물이 범벅되어 흘렀다. 부상자의 신음 소리, 여보, 아버지, 형님 부르며 통곡하는 소리, 우지직우지직 초가집 불타는 소리, 소 돼지 우는소리 이에 덩달아 개 짖는 소리, 닭이 홰 치는 소리 정말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나의 당숙은 몽둥이로 맞고 죽창에 찔렸다. 피가 전신에 흥건이 젖어도 죽은 듯 엎드려 있었다고 하였다. 동리를 초토화한 공비들이 물러나고 정신을 수습하니 오른쪽 옆구리로 찌른 칼끝이 왼쪽 배로 관통하여 감싸 안은 왼손까지 상처를 입었다. 트럭에 실려 병원에 후송 도중 자장면을 먹었는데 국수 가락이 옆구리에 나오더란다.
다른 부상자들은 어떠하였는가. 어떤 이는 뒷목을 칼에 맞은 채 도망을 쳐 목숨은 건졌으나 머리가 기운 채 한평생을 고생하셨고, 어떤 이는 담을 넘고 도망치다 공비들의 휘두르는 칼을 막다 오른 팔목을 잃어버린 유일한 생존자다. 또 한 사람은 몽둥이 세례로 전신을 깁스를하였는데 그 속으로 이가 번식하여 가려움의 고통도 참기 어려웠단다. 전신이 골병 든 그 어른은 평생을 지팡이에 의지하고 바깥출입을 못한 채 일생을 마감하였다. 크고 작은 부상으로 죽을 때까지 고생한 분들의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사건으로 30여명의 청상靑孀되어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수절하였다. 그녀들의 삶은 어떠하였는가. 인고의 긴 세월을 어린 자식들 바라보면서 바느질, 다듬이질, 길쌈에 매달려 원과 한을 안으로 삭였으니 내장은 많이도 상했으리라.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아버지는 나 때문에 살았다고 하였다. 아버지도 그날 사랑방에 놀러 가셨는데 일찍 집에 오셨더란다.
"이녁! 와 그래 일찍 왓심니껴?"
"얼라가 감기 기운이 있어 걱정시러버서 왔다"
줄줄이 딸만 생산하시다 아들을 봤으니 어쭙잖은 고뿔에도 걱정이 많이 되셨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가끔 "니가 너거 아부지 살렸다."라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괜히 어깨가 으쓱 올라가는 기분도 더러는 들었다.
우리 동리 청장년들은 애초부터 좌익 우익 좌익 같은 것은 몰랐다. 부르주아니 마르크스 레닌주의 등은 더더욱 몰랐다. 그저 선량한 촌부일 뿐이었다. 귀중한 생명을 이렇게도 참혹하게 살상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국가관은 어떠한가. 분단된 현실에서 인도적인 차원으로 많이 퍼 주었다. 모두가 엉뚱한 곳에 쓰이고 있으니……. 이 것을 논論하면 구시대적 인물이라고 몰아세우면서 진보의 잣대로 갖다 대는 것은 정말 곤란하다. 적어도 그 시대로 한 번쯤은 거슬러 올라가 오늘을 조명해 보는 냉철함도 필요치 않을까.?
반공혼비에 새겨진 38명의 이름을 두 손으로 보담은 나의 가슴은 아려온다. 상현의 비슴한 월광의 달 그림자를 앞세우며 마을 어귀를 드는 처연한 내 마음을 읽었는지, 아니면 비명에 간 38명의 고혼을 달래려 함이지 개구리의 합창은 흐느낌이다. 저녁 제祭 맞추어 울기 시작한 개구리는 별똥별이 포물선을 그리며 꽁지를 내리는 자정쯤이면 그 소리는 잦아든다 하였는데, 오늘은 왠지 축시丑時가 기울어도 와공蛙公들의 호곡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호국의 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