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스런 목소리와 화려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김지애에겐 왠지 조용한 슬픔이 느껴진다.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초등학교도 못 마치고 9살 때부터 무대에 올라야 했던 유년시절의 아픔 때문일까? 아니면 <지구촌 영상음악>의 MC였던 남편 권오규씨와의 기약없는 별거 때문일까? ‘악바리’ ‘깐돌이’란 별명이 말해주듯 일처리가 야무진 그녀는 지인들에게조차 속마음을 털어 놓는 일 없이 그렇게 조용히 살아왔다.
목숨까지 잃을 뻔했던 큰 사고를 당하고 지난 3년간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지만, 그 흔한 해명이나 남편에 대한 원망 한마디 없이 혼자 야무지게 자신의 문제를 매듭짓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김지애. 그녀가 죽음보다 깊은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딸 누리(7)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 제가 통원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누리는 경주에 있는 시댁에서 돌봐주셨습니다. 주로 전화로만 대화를 나눴는데 이제 엄마와 함께 살게 되니 몹시 좋은가 봅니다. 딸아이에겐 공부를 많이 시키고 싶어요. 본인도 공부에 흥미를 느끼고 있어 다행입니다. 내년에는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사립 초등학교에 보내는 게 제 바람이에요.”
늦게 얻은 자식이라 그런지 김지애의 딸사랑은 아주 특별했다. 3살 때부터 아빠와 떨어져 사는 딸 누리가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무조건 OK하며 응석받이로 키울 생각은 전혀 없다고 한다. 얼마전 두 모녀가 롯데월드에 놀러간 장면이 KBS 주부 프로 <행복채널>에 공개되었다. 아이가 칭얼거릴 때마다 물건을 사주는 보통 부모와는 달리 절제있게 꼭 필요한 것 한가지만 고르게 하는 김지애의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엄마 따라 방송국에 놀러온 누리는 오목조목 예쁜 이목구비가 아빠를 많이 닮은 듯했다. 엄마가 TV 카메라에 잡히는 모습이 신기한 듯 구경하는 누리. 리허설과 녹화시간 내내 조용히 엄마 곁을 지키는 의젓함이 돋보였고, 휴식시간에는 어린아이답게 대기실 구석구석을 뛰어다녀 현철, 김국환, 정수라 등 스타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김지애와 PD, MC 출신의 남편 권오규씨는 같은 프로에서 가수와 진행자로 자주 만나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특히 권씨가 바쁜 스케줄에 힘겨워하는 그녀를 따뜻하게 격려해주고 조언해주면서 먼저 관심을 표했다고 전해진다. 92년 5월 SBS라디오 미주공연을 함께 갔다온 뒤 결혼할 사이로 발전한 두사람은 2년여의 연애 끝에 94년 1월 결혼식을 올렸고 그해 10월에 딸 누리를 얻었다.
그러나 단란했던 시절은 잠깐, 두사람 사이에는 끊임없이 불화설이 나돌았다. 권씨가 아내와 딸을 서울에 남겨두고 유선방송사업 구상차 뉴욕으로 떠나면서 파경설이 더욱 구체화된 것이다. 소문의 진상에 함구한 채 의연히 활동하던 김지애였지만, 많은 돈을 투자한 남편의 사업이 크게 실패하자 권씨를 만나기 위해 97년 2월 하와이로 달려갔다. 와이키키 해변에 위치한 한 호텔에서 남편을 만나 크게 다투었고, 이성을 잃고 싸우다가 그만 실족하여 밖으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자살이다, 또는 남편이 저를 밀었다라는 추측이 난무했지만 그건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단순한 실족사고였어요. 하와이의 호텔은 2층이 우리나라의 3층 높이만큼 높은 곳이 많아요. 그날 2층의 창쪽 복도에서 남편과 심하게 다투다 그를 피해 뒤로 물러나면서 허리 높이의 난간 밖으로 거꾸로 떨어진 거예요. 당시 밑은 콘크리트 바닥이었는데 거기에 머리와 오른쪽 다리가 위로 꺾인 채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많이 다쳤어요. 다리가 부러지고 앞니가 두개 빠졌고, 턱과 골반이 많이 상했었지요. 턱과 이가 상해 가수생활에 치명적일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노래하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모니터에 비친 제 얼굴이 예전 같지 않은 것 같아서 TV 출연하기가 두렵습니다.”
김지애의 추락사고 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권오규씨는 친척이 있는 독일로 건너가 케이블 TV사업을 구상중이라고 한다. 불미스런 사고 이후 공공연히 두사람의 이혼설이 거론되었지만 김지애는 ‘결코 헤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단호히 말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혼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남편과 저의 철칙입니다. 지금은 사정상 각자 떨어져 살지만 언제가는 우리 세식구가 함께 할 날이 올 겁니다. 딸 누리가 있는데 왜 안 오겠어요. 사고 이후 현재까지 남편의 전화는 한 번도 없었지만 그 사람을 이해하니까 야속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저의 흉한 모습을 안 보일 수 있어 다행이에요. 낯선 이국에서 성공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을 남편이 식사라도 제때에 챙겨먹어야 할 텐데, 그게 걱정입니다. 남편의 사업이 잘돼서 하루 속히 우리가 한 가정을 이루길 고대합니다. 그때까지 저는 가수활동 열심히 하며 누리를 예쁘고 훌륭하게 키울 겁니다.”
시종일관 권씨를 감싸주고 걱정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여전히 남편에 대한 사랑이 두터움을 느낄 수 있었다.
84년 미국 뉴욕의 한 클럽에서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에게 발탁되어 방송생활을 시작한 김지애는 승승장구의 인기를 누렸다. 85년 ‘물레야’, 88년 ‘무명초’, 89년 ‘얄미운 사람’, 91년 ‘몰래한 사랑’이 대히트하면서 밤무대에서 그녀의 몸값은 그야말로 천정부지였다.
엄청난 앨범판매와 밤무대 출연으로 큰 돈을 벌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신혼시절도 셋방살이로 초라하게 보냈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레코드회사인 P사, D사에 이중계약이 되는 바람에 많은 돈을 날린 것이다.
“그동안 제가 너무 원칙주의자로, 깍쟁이로 산 것 같아요. 잘 나가던 시절엔 개런티도 정해진 가격 이하로 준다고 하면 절대 안 갔어요. 사람이 융통성이 없으니까 정작 어려울 때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가 없더라구요. 사고 후 많은 것을 깨달았어요. 올해 1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젠 빚을 갚는 마음으로 무료로 노래를 불러주고 다닌답니다.”
아이들도 아픈 후 한걸음 성장하지만, 어른들도 큰병이나 사고를 겪은 뒤 정신적 성숙을 얻는다. 김지애 역시 추락사고 후 생명의 의지를 불태우며 오랜 투병생활 끝에 많은 삶의 지혜를 얻었다고 했다. 사고는 하느님의 뜻으로 여기며 다시 태어나는 기분으로 세상을 살아가겠다는 그녀는 아직 몸이 100% 회복된 단계가 아니라 자주 피곤을 느끼지만 주위의 사람들과 일을 소중히 여기며 기쁘게 하루하루를 지낸다고 했다. 우울증에서 벗어나 아주 오랜만에 특유의 보조개 웃음을 짓는 김지애의 모습이 이른봄의 개나리처럼 반갑고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