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신(山神)과 산신령(山神靈)
산(山)을 맡아 수호(守護)하고 있는 신령(神靈)으로,
산신령(山神靈) 또는 산신(山神)이라고 부른다.
산신은 농경민(農耕民)에게 물이나 비를 내리는 강우신(降雨神)이나,
풍산신(豐産)의 성격을 띠고, 유목민에게는 대체로 사냥감을 풍부(豊富)하게
내리는 은혜(恩惠)자이면서도 노여움을 내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에게는 아이를 가져다주는 신(神)이자 그 생명을 악귀(惡鬼)들로부터
보호하는 수호신(守護神)이다. 산신의 신체는 호상과 신선상이며,
산신에게 제사하는 일을 산제, 산신제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산신제(山神祭)를 지냈으며,
지금까지도 그 풍습(風習)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산신(山神)은 산령대신(山靈大神)이라고도 하며, 행운,
수명장수 및 부(富)를 관장하는 무속의 신령(神靈)이다.
또 무속의 산신도에서는 대부분 호랑이와 동자를 데리고 있는 모습이다.
산신은 산에서 산을 지키며 산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장한다는 신으로
산신령(山神靈)이라고도 한다. 모든 자연물에는 정령(精靈)이 있고
그 정령에 의하여 생성이 가능하다고 믿는 원시신앙인 애니미즘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 몸을 대개 호랑이의 모습이나 신선의 모습으로 나타낸다.
산신에게 제사하는 일을 산신제 또는 산제(山祭)라 하며,
우리 민족이 이 산신제(山神祭)를 지낸 것은 그 기원(祈願)이 매우 오래되었다.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백제는 “먼저 천신(天神)과 지신(地神)을 제사지내고
산곡 신(神)에게까지 미쳤다(先祠神祗及山谷之神).”고 하였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오악(五嶽)의 세 산신(五岳三山神)에게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삼산신(三神山)은 중국식으로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州山)으로 정하고, 오악(五岳)은 동은 토함산(吐含山),
남은 지리산(智異山), 서는 계룡산, 북은 태백산(太白山), 중은 부악(父岳: 大丘)으로
정하고 나라에서 주관하여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행운을 빌었다.
민속신앙(民俗信仰)에서 산신(山神)
민속신앙에서 산악과 산신은 지역수호신의 성격을 가장 강하게 가지고 있다.
이 경우, 산신은 산신령, 신령 등으로 불리고, 때로 노인으로 관념되거나
아니면 호랑이로 관념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호랑이는 단순히
산신의 말 정도로 관념되는 경우도 있다. 산신령이 노인,
그것도 흰 수염의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노인으로 관념될 때,
산신숭배는 신선사상과 같은 유대를 가지게 된다.
가령, 선산(仙山)이라는 개념이 전해진 것과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崔致遠)이
입산화선(入山化仙)하였다든가 하는 믿음이 이 경우에 속한다.
지역수호신으로서의 산신은 서낭신과 겹쳐서 동신,
곧 마을신으로 섬겨지면서 동신제(洞神祭), 서낭굿, 별신굿,
당산굿 등의 주신(主神)이 되어 민간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신으로 부상하게 된다.
지역에 따라서는 동신제가 아예 산신제로 관념될 정도이다.
불교(佛敎)속의 산신(山神)과 산신도(山神圖)
현재 불교에서는 산신을 가람수호신과 산 속 생활의 평온을 지켜주는
외호신(外護神)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 대부분의 사찰에는 산신각이 있으며,
자식과 재물을 기원하는 산신기도가 많이 행해지고 있다.
산신각은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을 모시는 건물이기 때문에
전(殿)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각(閣)이라고 한다.
'산신각' 안에는 드물게 호랑이를 타거나 호랑이에 기대앉은
'산신 상'을 봉안하기도 하나 대개는
그러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낸 탱화를 봉안한다.
그 신상이나 탱화를 보면 산신이 남자인 경우가 많지만 때로는
여자인 경우도 있어 전통적으로 여성 산신이 관장하는 것으로
믿는 산들인 지리산, 계룡산, 속리산 등의 절에는 노파의 모습을 한
여성 형 산신 탱화나 소상(塑像)을 드물게나마 만날 수 있다.
여성 산신은 트레머리를 댕기를 둘렀으며 치마저고리를 입은
인자한 모습으로 호랑이를 타거나 기대어 있고, 손에는 불로초를 들고 있다.
남자인 산신의 탱화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그 첫째인 도교적 산신 탱화는 대머리에 백발 수염을 늘어뜨린 채
긴 눈썹인 신선의 모습이며, 손에는 하얀 깃털 부채나 파초선,
불로초 등을 들고 있다. 그리고 산신 그림의 배경에는
신선 세계의 산이라 하는 봉래산(蓬萊山), 영주산(瀛洲山),
방장산(方丈山) 등 삼신산(三神山)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였다.
또 하나는 유교(儒敎)적 산신 탱화인데, 머리에 복건(福巾),
유건(儒巾), 정자관(程子冠) 등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있는
신령(神靈)스러운 노인으로 묘사되며, 노인 신선의 주위에는
책거리나 대나무, 차를 달이는 도구 등이 배경 그림으로 나타난다.
마지막 한 가지는 불교(佛敎)적 산신 탱화로 삭발한 스님의 모습이며
손에는 법화경(法華經) 등 불경(佛經)이나 단주를 들고 있는 경우가 흔하며,
옷은 대개 적록색에 금박이나 노란 색깔로 그린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경우가 많아 변형(變形)된 가사의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이들 탱화 속에 산신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하여
나타나는 그림이 호랑이인데, 백호(白虎), 흑호(黑虎), 갈범, 표범,
줄범 등이 흔하고, 때로는 산신이 탈 수레를 끄는 호랑이로 묘사되는 등 다양하다.
또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백수(百獸)의 왕으로
산신령 그 자체이거나 혹은 신령의 인도자로 일컬어지는
그 영험(靈驗)스러운 호랑이가 항상 무섭고 위엄 있는
모습이 아니라 어쩌면 조금은 장난스럽고 애교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 아주 친밀감을 주는 것이 특이하다.
이왕 신령님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산신령님에 대하여 좀 더 밝혀 보기로 한다.
산신각에는 산신도가 걸려 있는데, 산신도에는 호랑이 1마리와
산신을 함께 그린 산신도와 호랑이 2마리가 산신의 좌우에 함께 있는
산신을 그린 산신도의 2종류가 있다. 산신의 곁에는 동자가 1명 그려져 있거나,
부인 1명이 그려져 있거나, 부인 2명이 그려져 있다.
산신은 산해경(山海經)에서는 대인(大人)으로 불린다.
대인은 발이 큰 사람이라는 뜻이다. 배달나라시대에
배달나라를 다스리는 천왕天王의 직에 있던 분들을 대인이라고 하였다.
이분들의 후손을 발족(發足-發族)이라고 했는데,
발족을 달리 발인(發人)이라고 하였다.
관자(管子)는 발인을 동이(東夷)라고 하였다.
산신도에 그려지는 호랑이는 백호이다.
백호는 서쪽과 금성(金星)을 의미한다.
하늘에서 천제(天帝)의 호위를 담당하는 별이 금성이다.
그러므로 산신도에 모셔진 산신이
금성의 호위를 받는 천제의 화신임을 알 수 있다.
천제의 화신은 곧 천자(天子)이다. 호랑이 2마리가 호위하는 대인,
즉 천제의 화신은 한웅천왕이고, 호랑이 1마리가 호위하는 대인도
천제의 화신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이다.
동자는 마고의 외동아들을 상징한다. 그를 막동이라고 한다.
막동이는 막동이(邈東夷), 즉 마고에게서 태어난 동이족을 의미한다.
부인 1명은 한웅천왕의 부인인 매화부인, 즉 직녀이고,
부인 2명은 단군왕검의 2 부인, 즉 웅심국왕의 딸인
웅녀(熊女)와 하백 부소갑의 딸인 하백녀(河伯女)이다.
한웅천왕과 단군왕검이 산신으로 모셔지는 이유는
한웅천왕이 태백진교를 창교(創敎)한 분이고,
단군왕검이 덕교를 창교한 분이기 때문에,
두 종교의 교조로 모셔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팔도명산에 모셔지는 산신령들과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팔도명산에 모셔지는 산신령들은 그 고장에 처음 터를 잡은
종족의 우두머리이거나, 역사에 위인으로 남은 분들이다.
개성 덕물 산에 모셔지는 최영 장군과 같은 분이 그러한 분이다.
신령님을 청배할 때는 먼저 팔도강산 신령님을 청배한다.
이들 산신령님을 청배하면서, 가까운 산의 신령님을 함께
청배하겠다는 허락을 받아(이를 화해 받는다고 한다)
인근 산의 산신령(山神靈)을 함께 청배한다.
예컨대 황해도 구월산 산신령의 화해를 받아 인천 문학 산에
수봉산 산신령과 응봉산 산신령을 하강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황해도 구월산 산신령의 화해를 받아,
강화도의 마니산 산신령과 김포 통진의 문수산
산신령을 하강하게 하는 것이다.
(김황룡의 고창 굿 산거리) 이렇게 하강하는 산신령에는 3종류가 있다.
첫째는 본산신령, 둘째는 먼 산신령, 셋째는 본향산 산신령이다.
본산신령은 무당이 직접 청배하여 모시는 천산, 태백산,
아사달의 산상부군신이고, 먼 산신령은 팔도명산에 은거하는
팔도명산산상부군신이고, 본향 산 산신령은 굿을 하는 곳
부근 산에 은거하는 산신령이다.
그러나 후 조선시대에 와서, 사대주의와 타종교가
굿에 덧씌워져 굿은 본래의 모습이 많이 변질되었다.
불필요한 불교와 도교가 과도하게 덧씌워져 있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 보기로 한다. 건곤이 개벽 후에 명제산천이 생겼구나 /
수미산이 제일이라 / 동악태산 / 남악화산 / 서악으로 금산이요 /
북악으론 형산이요 / 중앙으론 고산이라 / 산악지의 조종이요,
(김황룡의 곶창 굿 산거리) 라고 한 것이다.
우리 팔도명산은 이들 산이 거론된 이후에 나온다.
불교의 수미산을 가운데에 두고 도교의 오악이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다.
이들 산은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산들이다.
앞으로 불필요한 이러한 사설은 우리 굿에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남산신(男山神), 여산신(女山神)
산은 인간에게 성스러운 곳이다.
인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산을 신성하고 거룩한 곳으로 믿어왔다.
대지에서 바라보면 산은 점점 뻗어 하늘로 올라간다.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인간의 세상은 모두 발아래 펼쳐져 한눈에 들어온다.
그곳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지점이다.
산은 때때로 구름에 휩싸여 있고 안개와 물을
내려 보내기에 신비롭고 고맙기 그지없다.
그리하여 산은 하늘과 땅이 연결되어 통하는 곳으로
신성한 성격이 구체적으로 인식되어 계시의 장소,
신령의 거처, 생산의 주관자,
생명의 부여자, 망자의 거소 등이 그런 것들이다.
산이 많은 우리 국토에서 산악을 신성한 곳으로 여겼으며
산신(山神), 산령(山靈), 산신령(山神靈), 산군(山君) 등으로
산신을 일찍부터 숭배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이때 산은 우주의 축(軸)으로 “세계산”을 뜻한다.
우주의 중심인 산은 질서와 안녕을 관장하는 중심으로
생명력이 모인 산은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키는 영산(靈山)인 것이다.
서민들의 질병(疾病)을 막아주고 재액(災厄)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무병장수와 길흉화복을 누리는 근본은 신이 점지하고
자손의 번창과 입신출세와 재산이 풍부하여지고
부귀영화를 이루게 해주는 신이며 나라를 외적으로부터 수호하고
백성들을 돌보는 것은 하늘에 달려있어
사람의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믿었다.
언제부터인가는 모르지만 인간은 오로지
산신의 힘을 빌어야만 소원(所願)이 성취(成就)되고
행복(幸福)하게 살 수 있다고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산신제를 올리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성계가 산신(山神)의 도움을 받은 이야기,
우왕(禑王) 6년(1380년) 고려를 침공한 왜구의 장수는
아기장사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16세의 아기발도(阿拔都)였다.
아기발도는 부모가 구리를 먹고 잉태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온몸 전체가 쇠와 같이 단단하여 화살이
살갗을 뚫지 못하여 죽일 수 없는 인물이었다.
아기발도가 고려를 침공하러 떠날 때 누이는 전쟁을 만류하였으나
듣지를 않자 “황산을 조심하라”고 당부하였다.
대장부가 먼 길을 떠나는데 여자가 재수 없이
간섭한다며 누이를 칼로 베어 죽여 버렸다.
전쟁은 승승장구 승리를 하며 함양을 거쳐 팔령재를 넘다가
쇠 지팡이를 짚고 가는 노파를 만났다.
아기발도는 노파에게 “황산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노파는 “이 나이 될 때까지 쇠 지팡이가 닳도록
돌아다녔지만 황산이란 곳은 없더라”고 하며 안심을 시켰다.
왜구들이 고갯마루에서 쉬고 있을 때 팔령재의 맞은편에
잠복하고 있던 이성계(李成桂)와 신궁으로 이름난
이두란(李豆蘭)이 활을 쏘아 다른 왜장의 투구를 떨어뜨렸다.
아기발도는 활이 날아가는 소리를 바람소리로 알고
아~ 하며 입을 크게 벌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성계가 얼른 활을 쏘아 아기발도의 목구멍에 명중시켰다.
아기발도는 피를 흘리며 말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그 핏물이 묻은 바위가 바로 황산 아래 피 바위라고 전한다.
이때 쇠 지팡이를 짚은 노파는 지리산의 여신으로
이성계가 산신의 도움으로 왜구를 물리쳤다는 이야기다.
이 일을 기념하여 이성계는 운봉 황산에 대첩비를 세웠다.
여성(女性) 산신(山神)
산을 지칭할 때 대산(大山), 소산(小山)이라는 말을 한다.
대산은 남성의 산을 말하며 소산은 여성의 산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산세 중에서 지리산, 속리산, 계룡산은
소산에 속하는 여성 산이며 산신 중에서도 여성 산신이 모셔져있다.
여성 산신은 산신 마누라, 산신아기씨(山神阿只氏), 부군아기씨(府君阿只氏),
산신 할머니. 여 산신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주 먼 옛날에 산신의 이름이 여성이었다는 것은
산신이 계신다는 산의 명칭이나 설화(說話)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한성부 산천조 도성의 서쪽에 모악(母岳)이 있으며
◈강주속 산천조 주남 삼십리에 대모산(大母山)이 있으며
◈청풍군 산천조 군서 오십리에 부산(婦山)이 있으며
◈공주 산천조 주북 십리에 모악산(母岳山)이 있으며
◈결성현 사묘조에 모산당(母山堂)이 있으며
◈금구현 산천조 현부1리에 모산(母山)이 있으며
◈평산 도호부 고적조 부남 70리에 자모산(慈母山)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산의 명칭은 어미산, 할미산, 애미산 등으로 불리었으며,
여성이 산의 주인이며 여성이 산신령이었으며
특히 무속 인들의 무조신(巫祖神) 중에는 여성이었던 경우가 많다.
옛 산의 이름이나 전설로 보아도 고대의 산신은 오늘날과는 반대로
여성이었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부권(父權) 사상이 발달하면서
여성 산신이 산신할아버지와 같은 남성으로 변하고 그
러다 남신이 주신이 되고 여신은 단지 산신의 처(妻)란
지위로 하락된 것이 오늘날의 현상이라 하겠다.
이렇다 보니 모셔진 산신도는 남신으로 모두 변해버려
여성의 산신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근래에 제작되는
산신도는 모두 남성상(男性像)으로 제작되고 있어
여성상(女性像)의 산신도 제작은 명맥이 끊어져 버렸으니
이러한 점을 참작하여 여성상의 산신도에도 관심을 가져야 되리라 믿는다.
무속산신(巫俗山神)
우리 민족의 산신 숭배는 먼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
민족 고유의 신앙 형태로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전통 신앙이자 기층신앙(基層信仰)인 무속에서
산신 숭배(山神崇拜)는 오늘날에도 활발하게 지켜 내려오고 있다.
무녀(巫女)는 제 의식에서 각처 명산(名山)의 산신을 부르며
기원을 하고, 모든 것을 산신께 의존하며
산신이 이루어 주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산은 생명(生命)을 부여하는 것에서부터
망자(亡者)의 거소에 이르기까지 산신의 주관자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믿고 산신을 숭배하게 되는 것이다.
산신은 질병(疾病)을 막아주고 재액(災厄)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무병장수와 길흉화복을 누리는 근본의 신으로 자손의 번창과
입신출세와 재산이 풍부하여 지고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이루게 해주는 신(神)으로 산신의 힘을 빌어야만 소원이 성취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무속(巫俗)에서
산신(山神)을 숭배하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무속에는 다양(多樣)하고 많은 종류(種類)의 신이 모셔져 있지만
그 가운데 산신이 가장 오랜 역사와 높은 영험이 있어
오늘날에도 무속인은 산신을 높이 받들고 숭배하는 것이다.
산신각(山神閣)
우리나라에서 영산(靈山) 또는 명산(名山)이 도처에 있으며
그런 곳에는 예외 없이 산신각(山神閣)이나 산신당이 있게 마련이다.
불교와 관계없는 산신각은 자연환경에서 발생된 무속의 신앙 물이었으며
무속 신앙의 산신이 불교와 접하면서 사찰 전각의 호신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어느 사찰이나 산신각이 있으며 이러한 산신각이나 산신도가
어떠한 형태를 통해서 사찰 내에 정착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산신각(山神閣)과 산신도는 일찍부터 무속 인들의 호법신(護法神)의 존재였다.
아담하고 작은 한옥의 모양처럼 보이는 산신각은
사람이 안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초와 향을 사르며
전각 앞에서 제를 올리거나 합장하는 용도로 이용되었다.
산신기도(山神祈禱)는 정갈하고 부정(不淨)을 타지 않아야
효험이 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들어갈 수 있도록 점점 커지고 있다.
산신각을 찾는 신도들의 기호에 맞도록 변질되고 있는 실정이다.
산신도(山神圖)
산신을 모시는 곳이면 산신도(山神圖)가 있으며
불교사찰의 산신각이나 무녀의 신당(神堂)이나
굿당 등에도 산신도(山神圖)가 있게 마련이다.
산신은 선신(善神)이 수호하는 길지(吉地)에 살고 있는 신령을 말한다.
산신은 깊은 산 그윽한 골짜기인 묘산묘봉(妙山妙峰)의
넓은 반석위에 착하고 순하게 길들여진 호랑이를 거느리고 앉아 있다.
천년(千年) 고목이 된 소나무 아래 길상초(吉祥草)등의
기화요초(琪花瑤草)가 피어 있고, 신기한 과일이 항상 풍부하며
폭포수 아래를 흐르는 개천이 있고, 상서로운 서기(瑞氣)가 감도는
자비스러움이 넘치는 상상의 세계가 산신이 거처하는 곳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신선 계와 같은 환상의 세계가 전개되는 산신도의 형상은
오랜 세월의 변화과정(變化科程)을 거쳤으리라 생각된다.
현재 무속에서 사용되는 초기의 산신도는 영험을 통하여 그려졌으나
불교와 자연히 어우러지면서 오히려 불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며
근대에는 불교와 도교, 유교 등이 모두 함께 모셔진
복합(複合)양식의 산신도가 등장 하였다.
1), 산신의 지물
산신도(山神圖)에 등장하는 산신이나 동자가 손에 들고 있는
물체들은 반드시 상징성의 ,의미가 있어 산신의 성격을 읽을 수가 있다.
태극선(太極扇), 익선(翼扇,부채), 파초선(芭蕉扇), 불로초,
모란꽃, 불경(佛經), 불자(佛子), 염주, 지팡이 등이 있다.
동자(童子)가 들고 있는 물체는 천도(天桃), 책, 호리병, 찻잔, 차 주전자,
도끼, 향로, 우산, 깃발, 해태, 거북, 학, 어피, 인장함, 용 뿔 등이다.
산신의 손에 가장 많이 들려 있는 것이 부채와 파초선, 불로초 등인데,
악신을 털어버리고, 선신을 불러들이는 용구로서,
바람을 만들어 내는 부채 속에는 천하가 들어 있다고 믿었다.
무녀(巫女)가 굿을 할 때 부채를 손에 들고 춤을 추며 점복(占卜)하는데
이것은 산신령(山神靈)의 부채도 동일한 의미의 상징으로 생각할 수 있다.
* 태극은 하늘과 땅을 상징 하고
* 파초선은 하늘의 학문을 상징하며
* 부채는 새와 같이 하늘을 상징하고
* 복숭아, 불로초, 지팡이, 모란꽃, 거북, 학, 등은
부귀와 장수, 장생을 상징 하고
* 유자, 석류, 수박, 참외, 가지, 죽순, 도끼, 등은
씨앗이 많아 다자다손 의 상징으로 번영을 뜻하고,
* 호리병, 약함, 향로, 찻잔, 차 주전자, 지팡이, 여의주, 용 뿔 등은
신비의 영약을 상징하며,
* 불경, 불자, 염주, 우산, 깃발, 등은 믿음과 신령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고,
* 두루마리나 책은, 인간의 선악과 죄업을 지어 죽은 후에 심판에 사용 하는 것이고,
* 산신령이 새끼호랑이를 안고 있거나 어린아이를 안고 있어 자식을 점지하는 능력도 과시 하는 것으로 보이며 잉어가 산신도에 나타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2), 동자(童子)
산신도(山神圖)에 나타나는 동자는 시중을 드는 동자의 역할이고
동자 하나에서, 일곱 동자 까지도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초기형의 산신도에서는 동자 대신 신장이 있었으나
형식이 점점 변화 하면서 동자상도 지역이나 계열,
시대에 따라 등장하는 수가 다르다. 산신령과 호랑이를 주 신상으로
화면 가득 크게 그렸고 동자는 귀엽고 작게 그려 산신령에게
공양물(供養物)을 올리거나 물체를 들고 호위(護衛)하는 형상이다.
바위(巖)에 새겨진 산신(山神)
산신을 숭배하고 신령시하는 믿음으로 산에 있는 바위를
정령숭배의 대상으로 삼아 바위 전체를 신(神)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바위에 선각이나 양각으로 새겨진 마애산신도(磨崖山神圖)는
서울 정릉 심곡사, 북한산 영불사,
속리산 삼신사, 주왕산 대전사 등에 남아 있다.
정릉 심곡사의 산신도는 화강암에 자연석으로 된
바위 중심부에 마애산신이 조각되어 있다.
호랑이에 걸터앉은 산신은 머리에 고깔 형 의관을 썼으며,
붉은 도포에 손에는 불로초(不老草)와
부채를 들고 있어 일반적인 산신도의 내용과 같다.
좌우 양쪽에 명문이 있는데 오른쪽에는 청혜당(淸惠堂).
왼쪽에는 진사 조정섭 양천인 을사생 정월 이십일 인시 수복부귀다남
축원(進士 趙定燮 楊川人 乙巳生 正月 二十日 寅時 壽福富貴多男 祝願)이라 적혀 있다.
조정섭이 진사 시험에 합격한 후 오래 살고 아들을 많이 낳아,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리기를 축원(祝願)하는 개인의 기도 도량인 듯하다.
개인 사찰인 심곡사는 산신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무속인 들의 산신 기도가 매일 이루어지는 곳이다.
첫댓글 배움의 말씀 감사히 보고 갑니다._()_
소중한 자료 올려주심에 고맙습니다_()_
감사드려요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