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평산(淸平山)과 진락공(眞樂公)
청평산은 경운산(慶雲山) 이라고도 하였는데 지금은 오봉산(五峰山)이다. 이곳에 청평사 절이 있다. 1068년(고려 문종 22) 이의(李顗)가 폐사 되었던 백암선원(白岩禪院)을 중건하고 보현원(普賢院)이라 하였으며, 1089년(선종 6) 이의의 아들인 이자현(李資玄)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며 사찰 일대를 하나의 정원으로 꾸며놓았다. 청평산과 청평사라는 이름은 이자현의 호 청평거사(淸平居士)에서 유래된듯하다.
그가 남긴 시에는 이곳에 거처하면서 소박한 음식에 베옷차림으로 선도(禪道)를 낙으로 삼았던 정경이 오롯이 담겨있다. 「따뜻한 기운 계곡과 산에 퍼져 봄으로 바뀌는데, 홀연히 지팡이 집고 그윽한 곳 찾은 이 사람, 백이숙제 세상피해 본성을 보존했고, 직과 설의 나라위한 일 제 몸 위해서가 아니다, 조서 받든 이때 옥패 소리 울려오지만, 관 벗어 건 그날 이미 옷에 세상 먼지 털었지, 언제나 이곳에서 함께 은거하며, 수양하다 마침내 불사신 될까.」 「暖遍溪山暗換春(난편계산암환춘) 忽紆仙仗訪幽人(홀우선장방유인) 夷齊遁世惟全性(이제둔세유전성) 稷契勤邦不爲身(직설근방불위신) 奉詔此時鏘玉佩(봉조차시장옥패) 掛冠他日拂衣塵(괘관타일불의진) 何當此地同樓陰(하당차지동루음) 養得終來不死神(양득종래불사신)」 여기서 직설은 요(堯)의 신하로 농사를 관장했던 직(稷)과, 우(禹)를 도와 치수(治水)를 잘하였던 설(契)을 일컫는다. 설은 은(殷) 나라, 직은 주(周) 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의롭지 못한 세상에서는 백이숙제처럼 은둔하고, 성군의 세상에서는 직과 설같이 힘쓸 것이로되, 지금같이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모두 벗어 던지고 고요히 수양하여 신선같이 되고자 하였다.
1130년 나라에서는 그가 죽은 뒤 진락공(眞樂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의 사적을 새겨 비를 세웠다. 비문은 김부식(金富軾)의 아우이자 문장가인 김부철(金富轍)이 지었고 글씨는 당대 행서의 대가 탄연(坦然)이 왕희지의 필체로 썼다. 그 후 파괴된 비를 근래 복원하였는데 비에는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가 새겨져 있다. 사찰 아래쪽에는 당시 만든 고려 정원이 우리나라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아직까지 남아 천년의 역사를 고요히 비춰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