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우리 옛도자 표정 원문보기 글쓴이: B612
[밀착취재]고종 황제어새 “가짜 가능성 크다” | ||||||||||
2009 04/07 위클리경향 819호 | ||||||||||
1차 평가 참여했던 평가위원 주장… 국립고궁박물관 태도도 석연치 않아
3월 17일부터 1주일여간 주요 언론을 장식한 기사다. 문화재청과 국립고궁박물관이 한 재미교포로부터 구입한 ‘황제어새(皇帝御璽)’가 진짜 국새였다는 발표였다. 현존하는 대한제국의 유일한 국새라는 주장도 나왔다. 한일강제합방문서에서 사용한 국새인 ‘대한국새(大韓國璽)’의 현존 여부가 아직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국보로 지정하는 절차를 밟겠다는 발표도 있었다. 하지만 이 국새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것도 평범한 사람이 아닌 감정에 관한 당대 최고전문가의 지적이다. “용어 선택이나 발표 절차가 석연찮은 문제가 있다. 만약 ‘진품으로 볼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로 발표했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런데 틀림없는 진품이며, 또 국보 지정까지 성급히 운운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진짜를 가짜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무슨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연구자료로 소장가치는 있다” 농산 정충락(66)씨는 이번 ‘황제어새’ 1차 평가에 참여했다. 유명 서예평론가이기도 한 정씨는 전각 분야에서 국내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정씨는 ‘안품(가짜)일 가능성이 있다’와 ‘안품이다’ 둘 중에서 결론을 내린다면 ‘안품이다는 쪽으로 기운다’고 말했다. 정씨는 근거가 되었던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유리원판 사진과 인면(도장이 찍힌 면) 바닥의 새김이 최소 5군데 이상 차이가 있으며, 손을 탄 옆면에 비해 글씨가 거의 닳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황제어새’가 안품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소견서에 ‘왜정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적었는데, 대한제국기가 아니라 왜정시대라고 한다면 알아들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덧붙였다. 진품이다 안품이다 단언할 수 없는 분위기여서 돌려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소견서에 다만 “연구자료로서 소장가치는 있다고 썼다”고 밝혔다. 평가위원으로 참여했던 고암 정병례(62)씨 역시 비슷한 평가를 내렸다. 그 역시 전각 최고 권위자다. 정씨는 “인문(印文)도 차이가 뚜렷했고, 그때 시대의 것이 맞는지, 황제가 정말 썼는지 그것도 알 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국새라고 볼 수 없다’고 소견서에 분명히 쓰고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과반수 가까이 이건 잘 모르겠다고 점잖게 이야기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덧붙였다. 두 평가위원의 의견을 종합하면 1차 평가에 참여한 매듭 전문가도 도장의 매듭을 보고 “진짜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라고 평가했다. 이밖에도 손잡이 부분의 거북이 등의 육각형 문양이 유리원판 사진과 조금씩 다르다는 의견도 나왔다. 평가위원으로 참여한 ㅇ교수 역시 모인 자리에서 의구심을 드러냈다는 데 두 위원은 의견이 일치했다. ㅇ교수는 “지금은 입장을 표명하기 곤란하다”며 ‘노 코멘트’ 입장을 밝혔다. ‘의구심’가진 평가위원 많아
물론 1차 때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견해도 있다. 최공호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고고학)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유물임에 틀림없다”고 소견서를 적어냈다. 적어도 성연구원과 최교수는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최교수는 “실제 도장과 인주를 묻혀 찍은 ‘인영’은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1차 평가에서 대체적으로 부정적이었던 의견이 2차 평가 이후 뒤집혔다. 어떻게 된 일일까. 2차 평가 과정에 참여했던 손환일 경기대 연구교수는 “처음 평가 때는 관련 기록도 얼마 안 되고 해서 신중한 분위기였다면 검증 과정에서 헐버트 기념사업회 문서에 찍힌 인문이 발견되는 등의 우여곡절이 있었다”라며 “이밖에도 내함 통에 붙어 있는 융이 어보를 만들 때 쓴 견(명주실)과 같은 종류라는 것이 밝혀지는 등 근거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손 교수는 “문제 제기를 한 분들은 1차 평가를 한 분들이니 못 봤을 수 있지만 나는 ‘파이널 인펙터’로 20쪽가량의 내부 문건을 봤기 때문에 전 과정을 안다”라고 덧붙였다. 만약, 이게 가짜라면 누가, 어떤 목적에서 가짜를 만들었을까. 정충락씨는 “사실 그런 도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실물을 볼 수 있었던 소수의 사람 중 하나일 것”이라며 “나쁜 목적은 아니고, 고종 황제 사후에 뜻을 규합해 어떤 일을 도모할 목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번 발표를 총괄한 국립고궁박물관의 태도도 석연치 않는 부분이 적지 않아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번 발표를 총괄한 정계옥 유물과학과 과장은 “유물 감정 과정에서 항상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1~2명의 사람이 반대의견을 내는 것은 다반사”라고 말했다. 하지만 본지가 취재한 결과, 가짜라고 단언까지는 아니더라도 평가 과정에서 의구심을 밝혔던 평가위원은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그렇다면 진품 결정은 누가, 어떻게 내린 것일까. 정 과장은 “자신은 조선시대·대한제국기 유물과 관련해서 비전문가”라고 누차 강조하면서도 “선생님들은 쉽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공무원 입장에서는 목이 왔다갔다 하는 문제다. 진품임을 확신한다”고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했다. 정 과장은 진품 판단의 근거를 제시해달라는 기자의 요구에 “관례 상 공개할 수 없지만 (선생님들도) 소견서에는 그렇게 쓰지 않았다. 실제 ‘하’ 등급을 매긴 사람도 10명 중 한 사람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평가위원들의 주장은 다르다. 평가위원들은 “상·중·하 등급은 진품과 가품의 기준이 아니라 유물의 보존 상태 등을 표시하는 항목이었다”라고 밝혔다. 고궁박물관 측의 의혹은 이뿐 아니다. 소견서라는 형태로 자신의 의견을 남긴 평가위원들이 그후 박물관 측으로부터 일언반구도 듣지 못했다는 것이 찬반을 떠난 대다수 평가위원의 주장이다. 평가위원들이 자신이 낸 소견서와 배치되는 결론이 내려진 것에 대해 박물관으로부터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었다는 것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도 발견 발표 몰라 박물관 측은 비파괴 검사 등을 통해 재질이나 제작 연도를 파악하는 작업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험 결과나 소견서의 주장들은 충분히 검토했고, 관련 근거자료는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정 과장은 이와 관련해 손 교수가 봤다고 언급한 ‘내부 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이번 황제어새 발견 발표는 문화재청 관계자도 모르게 진행돼 의혹을 사고 있다. 문화재청 동산유물과 관계자는 “유물의 구입이나 감정 절차 등은 해당 박물관에 위임한다”라며 “솔직히 우리도 관련 보도자료가 나와서야 황제어새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 누군가의 성급한 과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심증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은 “상당한 의혹이 제기된 만큼 소견서나 감정결정 경위, 그리고 특히 구입 과정과 관련한 모든 정보를 당장 공개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고궁박물관 측 정 과장은 “우리가 소견서의 내용을 공개할 의무는 없다. 기자의 의도에 말려드는 것 같다. 이제부터 이야기를 공문으로 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고종의 황제어새가 찍힌 원본문서
|
외교문서에 쓴 비밀국새는 2개?
하지만 황제어새는 이 기록에 들어 있지 않다. 국새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조차 남기지 않은 채 은밀히 추진해야 했던 고종의 위기의식과 절박함을 황제어새는 보여주고 있다. 비밀로 남았던 황제어새는 이처럼 제작 관련 기록이 없는 것은 물론 누가, 언제, 어떻게 해외로 반출했는지조차 전혀 파악이 되지 않았다.
고궁박물관이 고종의 친서에 사용한 국새를 판별한 결과 두 종류가 사용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것을 박물관은 ‘제1유형 국새’(1903~1906년 사용)와 ‘제2유형 국새’(1905~1906년 사용)로 구별했다. 활자체의 미세한 차이가 있을 뿐 두 국새에는 모두 ‘황제어새’라는 문구를 새겼다. 이번에 발견된 국새는 ‘제1유형 국새’로 확인됐다. 두 과의 비밀 어새가 존재했던 셈이다.
고궁박물관은 이번에 공개한 비밀 국새가 만들어진 시기와 관련해서는 ‘문화각(文華閣)의 옥새와 책문(冊文) 등을 보수하도록 하다.’라는 고종실록의 기록(광무 5년 11월16일)으로 미루어 1901~1903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진위감정 절차와 환수의 의미
|
|
» 고종이 광무7년(1903) 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 러일전쟁을 앞두고 나라의 중립을 지키도록 도와달라는 호소를 담은 내용 말미에 ‘황제어새’가 찍혀 있다(점선 부분). 오른쪽은 일제시대 유리원판 사진에 찍힌 ‘황제어새’의 모습. 지금은 사라진 화려한 외함 속에 국새가 들어 있다. 사진 문화재청 제공 |
1903년(광무 7년) 11월 23일. 대한제국 고종 황제는 경운궁에서 쓴 친서를 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냈다.
"극동 만주지역에서 러일전쟁이 일어나려는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본디 이런 문제와 관계가 없지만 지역적으로 일-러 사이에 있어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이를 차단하여 위협받지 않기를 바라지만 현재 우리 국력은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폐하께 진실로 바라노니 서로 상조하고 깊은 배려를 해줄 것을 바랍니다."
국운이 기울어가던 힘없는 나라의 황제가 위기를 맞아 주변국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절박한 심정이 담긴 문서다. 그리고 고종은 이 문서의 맨 끝에 도장을 찍었다. 바로 17일 발견돼 공개된 '황제어새(皇帝御璽)'다.
또 하나의 국새는 여전히 행방 묘연
본래 국새는 상서원(尙書院)에서 관리하는 것이 상례였다. 하지만 황제어새는 고종이 직접 소지하고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새를 담은 내함에 인주가 들어있는 것도 휴대용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위협하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긴장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황제어새의 제작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지만, 국립고궁박물관은 1901~1903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 이유는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 과정을 기록한 '대례의궤(大禮儀軌)'에 나오는 13과의 국새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1901년 고종실록에 '문화각(文華閣)의 옥새와 책문(冊文) 등을 보수하도록 하다'는 기록이 있으며 ▲1903년 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됐기 때문이다.
고종이 외국 군주 등에게 보낸 10여 통의 친서에서는 두 종류의 국새가 확인된다. 똑같이 '황제어새'라고 찍혀있지만 글씨 형태가 다르다.
1903~1906년 이탈리아 황제, 러시아 황제, 영국인 허치슨 등에게 보낸 친서에 찍힌 국새의 경우 글씨체가 둥글며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이보다 약간 늦은 시기인 1905~1906년 독일 황제, 프랑스 대통령 등에게 보낸 친서에서는 보다 각이 진 글씨체에 반듯한 분위기의 국새가 찍혀있다.
이들 친서의 유리원판 사진을 통해 두 종류의 친서용 국새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지만, 도장 실물은 사라진 것으로 간주됐다. 그러다가 이번에 첫번째 유형의 국새가 발견된 것이다. 두번째 유형의 황제어새는 여전히 행방이 묘연하다.
‘황제어새’ 찍힌 친서 원본 고종황제가 황제어새로 인장을 찍은 친서. 1909년 1월 작성한 것으로 미국 호머 헐버트 박사에게 친척을 잘 돌봐 달라고 당부한 내용이 담겨 있다.
고종황제가 1909년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에게 보낸 친서에 찍은 인장이, 사용된 국새로는 처음 발견된 황제어새(皇帝御璽)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헐버트 박사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국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종에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것을 건의했고 3·1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친서에는 고종이 헐버트 박사에게 미국 YMCA에 연수를 가는 친척 조남복을 아들처럼 잘 돌봐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담겼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유리원판 사진 속 인장면
고종 황제가 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찍은 ‘황제어새’.
‘황(皇)’자는 ‘백(白)’자가 아니라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나타내는 가로 획이 하나 더 있는 ‘자(自)’자 아래에 ‘왕(王)’자로 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