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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13년 12월 17일(화) 오후 5시
박동호 : 천주교 서울대교구 신부, 신정동성당 주임신부
이정배 : 목사,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지 관 : 스님, 실천불교전국승가회 공동대표, 김포용화사 주지
류상태(사회) : 종교작가
▶2013년 11월 22일, 천주교정의구현전주교구사제단이 전북 군산시 수송동성당에서 신부 38명과 신자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시국미사를 열고 국정원 선거 개입과 관련해 ‘대통령 사퇴’를 촉구했다. 이 전에도 교구별로 시국미사를 열고 시국선언을 발표하며 박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문책을 요구해왔지만, 이날은 ‘박 대통령 사퇴’를 직접 요구하고 나섰다는 점에서 이전과 구별된다. 이날 시국미사에서 박창신 신부의 연평도 포격 발언이 부각되면서 사제단이 정계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보수층 전반으로부터, 심지어 천주교 내에서도 비난을 받게 되었다.
▶11월 27일, 개신교 진보 연합단체인 ‘국가정보원 선거 개입 기독교 공동대책위원회’가 서울시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회관 건물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 사퇴 촉구’ 기자회견을 가졌다.
▶11월 28일,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승려 1천12명이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에서 국가기관의 불법 선거개입 관련자 처벌과 박근혜 정부의 대국민 사과 등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국가기관 대선 불법개입 관련자 엄벌과 참회 ▲대선 불법개입 특검 수용 ▲이념갈등 조장 시도 중단 ▲기초노령연금제 등 민생 관련 대선공약 준수 ▲남북관계 전향적 변화 노력 등을 요구했다.
▶11월 29일 원불교사회개벽교무단도 전북 익산시 신용도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박 대통령의 퇴진과 특별검사제도 도입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원불교 교무 200여명은 이날 시국토론회를 연 뒤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박 대통령 퇴진 △정의를 외치는 종교인 폄훼에 대한 사과 △국가기관 대선 개입 진실 규명 △특별검사제도 도입 등을 요구했다.
▶12월 4일, 천도교 7개 단체가 오후 서울 경운동 수운회관 내 대교당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있는 결단을 촉구하며 시국선언. 사퇴를 촉구하지는 않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사퇴를 촉구하는 종교인들의 요구에 대해 ‘혼란과 분열, 국민의 신뢰를 저하’하는 행동이라고 일축했으나, 나라를 혼란하게 하고 국민의 신뢰를 저하하는 행동으로는 국가기관을 이용한 관권·부정선거보다 더한 것은 없다”고 천명.
류상태(이하 사회): 오늘의 주제는 ‘정교분리, 그 의미와 경계 그리고 범위에 대하여’입니다. 최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시작으로 주요 5대 종단이 박근혜 대통령의 대통령직 사퇴를 주장 또는 대통령의 책임지는 행동을 촉구합니다. 이에 정부와 한나라당이 종교계를 종북몰이 하자 종교계 일각과 정부여당이 갈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교분리가 어떤 배경에서 주장되고 어떤 개념인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정부와 여당의 요구대로 종교인들은 그저 정치문제에는 입 닫고 있어야 되는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를 가져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국가정보기관의 선거개입과 종교계의 비판, 그 비판에 대한 정부의 강경한 자세, 그리고 종교계의 저항 그리고 각계의 반응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는지 나눠 보겠습니다.
박동호: 인류의 지난한 역사 속에서 종교, 정치, 경제, 문화 등은 한 개인과 다른 개인, 집단과 다른 집단이 모여 사는 사회가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다양한 양식입니다. 그런데 이 양식으로 사람들의, 조직들의 삶을 구별짓는 것은 전근대적 발상입니다. 한 개인이 삶의 영역에서 종교적인 심성을 가지고 경제활동을 할 수도 있고 종교적 가치를 가지고 경제활동을 할 수도 있고 종교적 가치를 가지고 정치활동을 할 수도 있는 건데 종교는 종교인의 몫, 정치는 정치인의 몫, 경제는 경제인의 몫, 문화는 문화 전문가의 몫이라면 절대다수의 시민들은 전문가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아무 말 못하고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든 것을 독점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지요.
사회: 그럼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서는 안된다는 것인가요? 정교분리라는 말 자체가 시대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박동호: 무엇이 순수하게 정치냐는 거죠. 일반화된 우리 사회에서의 정치는 정치인들이 하는 행위를 정치이고 시민들은 소극적인 참여로 몇 년에 한 번 투표하는 것으로서 정치를 한다고 보는데요. 하지만 정치를 이렇게만 보면 정치적 자유, 정치적 권리는 없는 거죠. 절대 다수인 시민 입장에서 보면 정치적 권리는 소위 정치인들이 다 가지고 행사하고, 시민들은 거기에 따라야 되는 수동적 존재로 전락하는 거죠. 과연 현대사회에서 정치가 이렇게 협의로 규정되고 독점되는 것이 민주사회에 적절한가 하는 겁니다.
정교분리의 원래 어원을 보면 정은 정치Politics가 아니고 국가, 또는 정부States입니다. 그리고 교는 종교Relegion이 아니고 교회Church죠. 즉, 교회조직과 세속의 정부조직이 서로 결합하면 서구의 중세시대처럼 다수의 시민들을 객체로 전락시키고 종속시키기 때문인 거죠. Separation between the Church and the States.였거든요. 하지만 정교분리가 우리 사회에 와서는 religion하고 politics로 되는 거죠, 그리고 우리나라 헌법도 두번째의 해석을 따랐구요. 우리나라 헌법을 우리가 만든게 아니니까. 정교분리를 강력히 주장하는 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종교권력은 우리가 갖고, 신자들은 하라는 대로 따라오고, 정치권력은 우리가 갖고, 시민들은 따라오게 하려는 저의가 숨어있는게 아닐까 하고 해석해 봅니다.
지관: 목사, 승려, 신부들이 정치에 관여해선 안된다고 정교분리를 주장하시는 분들에게 제가 되묻고 싶은 것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종교행위로 볼 것인가요?’입니다. 대승불교의 정신이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거든요. 상구보리는 말 그대로 지혜를 구한다지만 사실은 스스로 깨닫고자하는 자각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하화중생하라는 말은 중생들을 교화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볼때 대승불교의 근간이 자각을 통한 나눔과 봉사, 참여라면 종교인들이 못할것이 아무 것도 없는 거죠. 이런 점에서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어불성설인 겁니다. 실제로 종교인의 행위 기준이 어디 있느냐, 우리가 제대로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정배: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자 종교적인 동물이죠. 삶의 행위 자체가 종교행위고 정치행위인데, 그 둘을 분리시킨다고 하는 것 자체가 시대에 적합하지 못한데 그런 말이 나오게 된 이유와 배경이 분명히 있죠. 어쨌든 최근의 사태를 보면서 그동안 종교가 등 따시고 배불러서 제대로 역할을 못했는데 1970년대로 되돌아가는듯한 현실이 종교들을 깨우지 않았는가, 박근혜 정부의 부도덕한 행위가 다시 종교를 깨워 여러 종교들이 함께 시국에 대한 인식을 같이 하고 시국성명서에 동조하고 발표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역설적으로 고맙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사실 이승만정권을 비롯하여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위해서 모든 종교의 지도자들이 복 빌어주고 조찬기도회를 열었지만 그걸 정치참여라고 말하지 않았죠. 이런 행위가 엄청난 정치 참여인 거죠. 사실 아무런 입장표명을 하지 않는 것도 정치참여고 모든 것이 다 나름 정치행위인 거죠. 정권이 자행한 불의한 일에 대해서 종교가 일어서는 것은 종교의 마땅한 본분이며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교분리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은 민족국가가 형성되면서 교황권과 다툼이 생기고 그런 흐름을 등에 업고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과거와 같이 교황이 정치를 지배해서도, 반대로 군주가 교회를 지배하는 입장도 안된다는 거죠. 하지만 정교분리를 주창한 루터조차도 종교라는 것은 세속권력이 잘못할때는 언제든지 잘못한 것을 고치는 일에 앞장서서 그 역할을 할수 있다고 이야기했죠. 서로의 영역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중세와는 다른 근대 이후의 종교와 정치의 분화의 과정이겠죠.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오늘 우리식으로 해석하듯이 이건 정교분리의 원칙에 어긋나니까 이런 데모라든가, 반국가적인 행위라든가, 그리고 반독재 투쟁이라든가, 이런걸 해서는 안된다라는 이야기는 너무나 과도한 정권의 자기중심적인 해석인 거지요.
박동호: 정치와 종교를 굳이 영역을 분리한다면 종교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상당히 많은 여러 가지 일들에, 대중교화적인 점에서는 종교와 정치를 구별하기 어렵지만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참여를 기본전제로 하는 것인데, 보수적인, 근본주의적인 신앙관을 가진 분들이 종교는 소위 ‘하늘의 일에만 신경 쓰지, 왜 세상일에 신경 쓰냐’는 식으로 생각하고 몰아가는 것이 문제라고 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태석 신부님을 본받으라는거죠. 그러니까 눈앞에 있는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하는 건 하되, 큰 정의의 문제는 세속에 맡겨라는 거죠. 배고프면 로메로 까마라 주교님 같이 배고픈 사람한테 빵을 주니까 성자라고 부르고, 자기의 기득권에 이의를 제기하며 ‘왜 배고플까’ 하고 물으면 지배자들은 ‘이 빨갱이, 커뮤니시스트’라고 몰아세웁니다.
이정배: 특히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현 교황께서 악덕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어려운 이들과 함께 나눔과 연대를 강조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삶에 힘을 불어넣어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고백했듯이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돌아가셨고 또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정과 비전을 가지고 사시다가 돌아가셨지요. 예수께서 이 땅에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낮고 천한 말구유에서 나셔서 평생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사신 것을 그 당시의 지배자들로서는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 없는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되는 거죠. 예컨대 예수께서는 아침에 온 자나 저녁에 온 자, 모두에게 똑같은 품삯을 주셨다는 것은 그 당시나 지금도 체제 내에 가진 자들로서는 있을 수 없는 체제 밖의 사유을 하신 분이죠 또한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라 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죠. 이러한 사유들이 인간을 치유하고 깨닫게 하는 거죠. 예수께서는 그 체제에 안주하지 않고 체제 밖을 바라보는 체제 밖의 사유죠. 현 교황께서도 자본주의 체제 안에 안주하는 것을 그쳐야 한다고 하는 것이 사실 굉장히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발언이면서 동시에 신앙적인 이야기죠.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동시에 신앙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것, 이제 우리가 기독교 안에서 바라는 또 하나의 바램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회: 예수께서는 오히려 교회를 떠나 세상에 직접 나가서 활동을 많이 하셨죠. 그래서 “예수는 빨갱이였다”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는 형편이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아마도 종교나 이념을 넘어서 전 지구적으로 큰 존경을 받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 교황님께서는 오히려 정치참여를 해야된다고 몇 번 발언하셨는데, 서울대교구장이신 윤수정 대주교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더라고요.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는 일종의 의무지만. 그러나 사제가 직접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애매한데요. 허용 가능한 정치참여와 넘어서는 안 될 직접적인 정치개입, 그 사이에는 어떤 구분이 있는건지 말씀해 주시죠.
박동호: 정치참여는 의무죠. 왜냐하면 개인 뿐만 아니라 사회를 하느님 나라로 또는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몸을 바쳐라, 희생하고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는 거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교님의 발언은 상당히 적절치가 않은데, 그 인용하신 대목이 교회법이에요.
가톨릭교회법에 정치적으로 적절하지 못한 처신으로 첫 번째는 정책의사결정을 집행하는 정부관료가 되면 안되는 거에요. 왜냐하면 현실에서 어떤 정책이든 누군가에게는 아픔을 줄 개연성이 충분하기 때문이죠. 두 번째로는 정당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간부가 되면 안되는 거죠. 정당은 이데올로기를 지향하기에, 현실에서 다른 이데올로기와 충돌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분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죠. 세 번째가 노동조합에서 조합원은 괜찮지만 간부로 활동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은 다른 산업분야하고도 충돌할 수 있잖아요. 예를 들어 철도노조하고 버스노조와 충돌할 경우에, 경영자나 정부관료와 충돌과정에서 미움과 증오같은 것들이 생기기 때문인거죠. 하지만 성경은 엄청나게 정치적이죠. 구약성경 자체가 정치행위고 신약성경의 예수님의 말씀도 정치적입니다. 가톨릭의 사회교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회: 그렇다면 공직에 참여한것도 아니고, 정당가입도 아니고, 노조가입도 아니고. “지금 대통령은 국정원 등 국가정보기관의 블법적 선거개입으로 인해 당선됐으니 물러나는게 옳지 않느냐.”는 발언은 전혀 교회법에 어긋나지 않는거네요?
박동호: 그렇죠, 박창신 신부님이나 저희 지난 전주대교구의 시국미사에서의 강론이 왜 정치개입이냐는 겁니다. 대주교님의 강론 원문을 보면 빠져나가는 구멍이 있어요. 해석의 폭을 열어놓고 저희들이 따지면, 나는 하지말라는게 아니라고 말하면 논란거리가 되죠. 그리고 이후, 금요일 강론에서는 아주 할 일을 했다고 하십니다. 갑자기 다른 뉘앙스로 강론을 해서 그날 미사에 있던 한 신부님도 깜짝 놀랐답니다.
이정배: 우리나라에서도 성공회 신부 중에는 국회의원도, 장관도 한 분이 계시죠, 영국은 더하죠. 성직자들의 정치 참여에서 가장 중요한건 순수함이죠. 그야말로 뭘 얻으려고 하지 않고, 시민의 의사를 대변해서 누구도 말할 수 없을 때 그걸 말하는 역할로도 중요합니다. 사실 천안함 문제도 얼마나 의혹 투성이 입니까? 이런 의혹을 제기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성직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행위 자체를 정부입장에서는 불편하더라도, 성숙하다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 어려운 문제는 종교 공동체 안의 다양한 구성원들 앞에서 모두를 아우러야 할 성직자가 어떤 정치적인 소신을 갖고 발언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정치적인 견해는 의견과 같이하는 사람들이 있고, 달리하는 사람도 있죠. 그래서 목회적 차원에서 소신을 밝히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하는지가 주변에 있는 많은 성직자들의 현실적인 고민입니다.
사회: 공동의 선을 위해서 정치인들에게 어떤 바른 태도를 요구한다거나, 바른 정책을 요구하는 것은 얼마든지 허용이 되어야 마땅한데요, 오히려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도 보편가치가 아닌 상당히 배타적인 기독교의 교리를 현실에 구현시키기 위해서 정치계로 뛰어드는 이들이 많이 있었거든요. 지난 총선에 기독당이었죠? 정당까지 만들었구요, 제가 보기엔 이건 금해야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봐야 할지요?
이정배: 김영삼, 이명박 정권때 개신교회는 보이지 않는 정치 세력화가 현실화 되었고,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개신교가 몰락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죠. 이명박 정권의 몰락과 함께 개신교, 소위 대형교회들의 몰락도 지금 함께 가시화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미 종교 스스로가 권력화되어 그 힘을 가지고 정치를 특정종교의 편으로 세우려고 하는 역사속에서 일어나서는 안되는, 종교의 타락현상들이 나타났습니다. 개신교의 타락은 지난 개신교의 두 장로님 정권 때에 심화되고 거슬러 올라가면 이승만 정권까지 가지 않습니까?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승만이 감리교인이라고 감리교 본부에 돌맹이를 던졌거든요. 지금도 역시 일차적으로 종교가 권력이 됐고, 그 권력을 정치가 두려워했고, 그래서 다시 종교와 정치가 결합을 한 형태로 역사속에서 일어나서는 안되는 상황이 된 거죠.
사회: 정교분리라는게 원래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이 힘을 합쳐 시민들을 때려잡지 말라고 만들어진 거 아닐까요? 그래서 그 경계를 더 명확히 해야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특정 교리적인 시각으로 사회를 지배하거나, 정치적인 지배력을 가지려 하지 마라는 것이 정교분리의 원칙의 중심개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관: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가 자각自覺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어떻게 깨닫는 거냐면, 바르게 알고 바르게 깨닫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승려들은 사찰에 나온 불자들 내지는 모든 중생들이 바르게 알게 하기 위해서 계속 설법을 하고, 법문을 하는 거죠. 어떤 사회 현상이든, 개인의 문제이든 바르게 알라고 하는 거죠. 성직자들이 바르게 알라고 하는 이야기를 정치적인 것으로 해석해서 저 종교인이 자기들에게는 도움이 안 되고, 도리어 위험 요소로 보고 아전인수격으로 보는 겁니다. 정치행위, 종교행위를 분리시키려는 사람들이 가지는 큰 오류입니다. 산스크리트 경전이나 팔리 경전을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나라를 지배하는 왕에게 말씀을 하셨던 기록이 나와있어요. 백성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그리고 어떻게 해야 백성들이 왕을 존경하고 따르는가에 대해서 나와 있어요. 그러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행위를 정치적인 행위로 볼 것인가, 종교적인 행위로 볼 것이냐는 거죠. 종교적인 행위이자 정치적인 행위인거죠. 순수하게 말 그대로 종교적인 영역 따로, 정치적인 영역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 거죠.
박동호: 정치, 경제 사회, 종교, 교육, 문화 등은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류사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인 보편가치로 자비, 사랑, 자유, 정의, 인간의 존엄함 등을 깨닫기 위한 도구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정치나 경제체제가 인간의 존엄함이나 공동의 선을 훼손할 때, 종교계의 역할은 지금 이 정치나 경제는 진리를 반한다, 공동선을 반한다, 인간의 존엄함을 반한다라고 말은 해야 되는거죠. 기본적으로 종교든 정치는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보편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사람들의 도구죠. 도구가 제대로 잘 쓰면 이로운 도구가 되는 거고, 아니면 흉기가 되어 사람이나 사회를 고통스럽게 하죠. 역사가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정배: 종교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 예외자들에 대한 사유와 그들과 함께 하는 게 역할이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예외자들은 기득권의 진입장벽에 가로막혀 현실속에서 대를 물려가며 사회적 약자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 정치적인 기득권자들과 삼성과 같은 경제적인 기득권자들에 이어 종교마저도 기득권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종교가 그 기득권을 과감하게 공동의 선을 위해서 내려놓을 것인지, 종교가 여전히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한다면 종교는 우리 시대에 그냥 잠잠하게 있으면 되는 거죠. 그러나 종교가 자기 기득권을 포기하고자 할 때 종교의 제대로 된 역할이 나오는 것이지요.
박동호: 박창신 신부님의 전주 교구 강론 이후 조선, 동아, 한겨레, 경향 그리고 가톨릭 계통의 평화신문 다섯 종을 모으고 있습니다. 제가 어떤 자리에서 “한국교회는 심각한 골다공증에 걸렸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요. 박창신 신부님의 사회적인 이슈가 된 발언이 나온 다음에 우리 본당 교우들 말고 다른 가톨릭신자분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 분들 가운데 가톨릭 신자로서 자기가 읽고 기도하고 성찰한 성경에 비추어 보면서 “이 문제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는 분을 만난 적이 없는 것이죠. 가톨릭의 신앙은 성경을 기반으로 신앙의 체계를 갖는데 “내가 배우고 익히고 고백한 신앙의 체계로 볼 때 이 문제는 이렇다. 그래서 난 싫어.” 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 또 우리 가톨릭교회는 그것을 더 체계화해서 교리를 만들었죠. “내가 배우고 익히고 따른 교리에 따르면 박창신 신부님은 이리저리 해서 난 마음에 안 들어.” 이런 사람도 만난 적이 없고 더 나아가서 교리보다 더 정형화시킨 교회법 같은 것으로 그것에 대해서도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앙감각으로 상식 같은 거죠. 신앙의 감각으로 볼 때 “나는 이 문제를 이렇게 본다.”라고 말한 분조차도 없었습니다. 이 다섯 가지 요소가 가톨릭신앙에서는 사물의 성찰의 기준이고 판단의 기준이고 행보의 기준인데 이 다섯 가지 요소를 가지고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말씀하신 분을 저는 만난 적이 없습니다. 겉모습은 가톨릭이죠. 성당은 오고 신앙인처럼 보이긴 하는데 사고나 행동은 조?중?동인 거예요. 뼈는 있는데 뼈를 튼튼하게 하는 칼슘 성분요소들은 쏙 빠져 나간 거죠. 교회가 교회다움은 쏙 빼고 누리고 있는 무엇을 유지하는 것으로 오랜 시간동안 익숙해지다 보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사회: 두 분 말씀에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성직자들의 책임과 문제라고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뜻이 될 수도 있는데요.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과감하게 깨우고 가르치지 못하는 것입니까?
박동호: 지금이 편하니까요. 의사표현을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정치적인데 안 하는 이유 중에 두려워서 못하는 것도 있지만 지금의 질서가 좋다고 생각하니까 가만히 있는 거죠. 그것도 상당히 정치적인 거겠죠. 기존의 질서가 나에게 좋으므로 문제의식을 안 가질뿐더러 개선하자는 말도 안하는 거죠. 지금 이대로가 좋으니까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그리고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왜 안할까를 생각해보면 제가 볼 때는 득실을 따져서 얻는 것보다 잃을 것이 많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정치적인 말을 하면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그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이 안 오게 되고 그러니까 싫어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려니까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해야 되는 거죠. 정치적 견해를 달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잖아요. 이데올로기가 다를 수 있잖아요. 그런 것에서 이데올로기가 보편가치에 부합 하는가 부합하지 않는가 식별을 하는 행위자체를 불편해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듣기 싫은 거죠.
이정배: 현실 교회가 그렇습니다. 교인들 눈치에 이해득실이 있고 그 배경에는 개신교의 독특한 정서로서 영혼구원의 문제라든지 교회가 구원의 방주라든지 개교회의 길 등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일들이 주가 되지, 세상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철저한 구별입니다. 일종의 성속의 구별이기도 한데 완전히 개교회 중심주의 구별이고 이런 일들이 신앙의 고정된 틀로 너무 오랫동안 내세지향적인 신앙과 현실정치에 대한 감각은 너무 무디고 이런 것들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분위기가 지금 개신교에서는 전혀 안되어 있다는 거죠. 그러다 보니 이런 현실교회에 실망해서 교회로부터 유배를 당한 교인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 현실이기도 한데 현실적인 이유는 신부님과 공감을 합니다. 이해득실 아주 분명합니다. 편합니다. 자기 몸에 고통 같은 것 없잖아요. 안주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대다수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논외로 생각하며 사는 것을 교회의 양식이자 문화처럼 생각합니다.
사회: 예수님이 가신 길을 알고 힘들지만 따라가는 소수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분들이 예수님의 그 길을 정확하게 따르지 않고 어떤 조직의 논리에 따르는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고 선택하는 다수의 동료들에게 대화를 하지 않는지요?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어쨌든 대화를 안 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굉장히 진보적인 시각으로 대외적으로는 열심히 활동을 하고 정말 목숨 내놓고 활동 하시는 분들이 왜 내부적인 갈등을 극복하고 거짓 평화가 아니라 진정한 일치를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지 궁금합니다.
이정배: 저희들이 수없이 글로 써내지만 글을 아무도 읽지 않잖아요. 글을 읽었으면 언제 어디서 쫓겨났을 줄 모르는 것이니 안 읽은 것이 다행(?)이죠. 교회 안에서 필요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기회를 주고 저희들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원천봉쇄 당한 것이 현실입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우리끼리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지적하신 것이 정확한데 우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하고 우리가 만나서 이야기 할 기회가 사실 너무나 적어서 좀 더 공격적으로 그런 기회를 만들어가라는 주문으로 알아들어야 할 텐데 현실의 벽은 높습니다. 저희들도 이제는 전략을 다르게 짤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작은교회 박람회’를 열었습니다. 탈성장, 탈성직, 탈성별의 개념을 가지고 ‘큰교회는 이제는 더 이상 안 된다’로 말입니다. 개신교 같은 경우는 80~90%의 목회자들이 일평생 비정규직입니다. 10%의 소위 ‘제대로 된 교회’를 가려면 피터지게 경쟁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살려면 여기에 왜 왔느냐하는 문제의식이 생깁니다. 이제는 작은교회에 가서 카리스마를 가지고 저마다 20~30명 신자들과 더불어 살아내는 이런 공동체운동 해야 한다, 이제 비판만 하는 운동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을 엮어내는 그런 운동을 하니까 우리의 이야기가 조금씩 그들하고 소통이 됩니다.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소위 대형교회 목사들이 아닌 정말 밑바닥에서 기초공동체를 만들고 살아가고 있는 성직자들이 의견을 모아 100여 교회가 모여서 박람회를 하면서 기초 공동체를 튼실히 가꾸면서 대안적인 것들이 더 많이 준비하고 논의하면서 건강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관점과 행동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바꾸어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회: 불교는 굉장히 너그럽잖아요. 자유롭고요. 살불살조殺佛殺祖 할 수 있는 종교가 불교 아닙니까?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죽었다 깨어나도 살신살예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하고 예수님을 못 건드립니다. 거기다가 성경도 못 건드리는 입장이라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라고 하면 꼼짝못하죠.
지관: 불교에서는 추우면 아궁이에 경전을 태우라고 합니다.
사회: 기독교는 그러면 안 되나요? 추우면 낡은 성경책 태우면 안 되나요?
박동호: 글쎄요, 태웠겠지요. 버리는 사람도 많은데요. 헌책방 가면 많이 있습니다.
지관: 큰 스님들의 말씀들이 있었죠. 추우니까 목불木佛을 태우라고요. “목불이 뭔 의미가 있냐, 따뜻한 것이 중요하지”라는 선사의 말씀들이 있었죠.
사회: 책으로 써진 경전이라든지 나무로 만든 불상, 이런 것은 다 수단이니 거기에 메이지 말고 본질인 부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정진하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는 그것이 잘 안 되는 것인지요? 제가 이 말을 꺼내는 이유는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로마서 13장을 읽으면서 “국민 여러분, 정부를 믿어주십시오.” 라고 말을 합니다. 그 내용을 보고 점검을 해봤던 사람들이 성경구절을 꼭 들고 나옵니다. 1970년 전후해서 박정희씨가 3선개헌 할 때인지, 유신할 때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당시 총리인 김종필씨가 나와서 이런 말을 한 것을 기억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성서가 가르친다고 말하는 구절이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마태복음 22장 21절에 보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라”는 구절이 있거든요. 이걸 교회는 정치문제는 간섭하지 말라는 아주 결정적인 말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고 그 다음에는 말씀드린 로마서 13장 1절, 2절에 보면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권위를 거역하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을 거스르는 자가 되고 거스르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게 바로 김종필씨가 인용한 것인데 “국가의 권위를 존중해라, 대들지 말고.”라고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읽어야 되는 것인가요? 어떻게 읽어야 되는지요?
이정배: 성경에는 “예 할 때 예 하고, 아니오 할 때 아니오 하라.”는 분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말은 “~ 같아요”를 많이 씁니다. 열에 아홉은 쓰는 것 같습니다. 분명히 “예, 아니오” 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카이사르 이야기도 보면 그 논쟁은 분리의 의미가 아니라 누가 하느님인가를 묻는 거죠. 너희들은 진짜 누구를 따르며 살 것인가 하는 물음이지 카이사르와 하느님이 분리됐다며 정교분리의 원칙을 이야기 하는 것은 성서의 문맥을 전혀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진짜 누가 하느님이냐가 제일 중요한 것인데 로마사람들이 쓰는 주화에는 로마황제의 얼굴이 들어있었고 유태인들이 쓰는 것은 아무런 상이 없었어요. 유태인들은 상을 만드는 것을 기본적으로 거절했습니다. 그때에 상이 뭐냐 하면 로마 황제의 두상이었죠. 그것을 보면서 “이거 봐라. 이것은 하느님이 아니다.”라며 이게 하느님이 아닌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그 텍스트의 핵심이지 그것으로 둘을 분리시켜서 이해해라 하는 이야기는 그 논제하고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에 대한 예와 아니오를 읽는 것이 정당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내놓고 대화하는 것이 로마인들이 쓰던 화폐였는데 그거는 “그거 봐라, 너희들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하느님께 아니다”라는 이런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사회: 일반적인 해석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성서학자들 중에 그렇게 보는 분들이 있군요. 제가 보기에는 그런 해석이 주류는 아닌 것 같은데요?
이정배: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인습因習화된 해석이지 그게 바른 해석이라고는 생각 안하는 거죠. 누군가가 이야기 하니까 그게 성서적인지 아닌지도 모른 체 그렇게 인용이 되어 왔다고 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로마서인데 그 구절을 저도 생각하고 왔는데 로마서라고 하는 것은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바울서신들 중에서 퍼스트 바울, 세컨드 바울, 써드 바울이 있는데 써드 바울 정도 가면 바울이 전혀 안 쓴 거죠. 세컨드 바울 쯤 되면 바울이 썼을 수도 있고 안 썼을 수도 있는데 이 로마서의 이야기는 분명히 바울이 썼다라고 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그 이야기를 맥락에서 했겠느냐 하는 문제인데 이 이야기는 소수의 성서학자들이 하는 것으로 보통 바울을 보수적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은데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이 로마서를 가지고 종교개혁을 했는데 오직 믿음으로만 하는데 사실은 바울에게서는 오직 믿음이라는 말이 바울 신학의 핵심이 아니라는 거예요. 바울에게 있어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것이 기본적으로 로마시대의 사람들이 다 종을 가지고 살았다면 굳이 크리스챤이 된다는 것은 종을 갖지 말고 살아야 하는 것이고 로마에 있는 사람들이 여성의 문제를 마음대로 하고 살았을 때에는 기독교인들은 그 여인들이 그 다음날 예배하러 가려고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면 “남자 너희들도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해라.” 이런 식으로 뭔가 체제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 것을 요구하는 것이 바울의 기본적인 삶의 골격이었다는 거죠. 그런 바울에게서 오직 믿음으로만이라는 말은 말이 안 된다는 비판을 하면서 로마의 방식이 있고 기독교의 방식이 있는데, 로마서 13장의 방식은 당시에 로마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기독교적인 새로운 삶의 방식을 살려면 굉장히 어렵지만 그런 삶을 살려고 할 때 “로마식의 그런 삶을 살려고 하지 말아라” 라고 봅니다.
사회: 한시적인 그 지역과 그 시대에 한한 말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인가요?
이정배: 아니요. 로마식으로 이르는 평화가 있고 기독교식으로 이르는 평화가 있는데 기독교적인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로마가 쓰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그 삶을 이뤄낼 수는 없다. 그런 맥락에서 국가의 권위에 대해서 너희들은 로마의 폭력적인 방식으로 국가에 대해서 그렇게 관계해서는 안 된다” 라고 하는 것이 바울의 로마서 13장을 읽는 성서적인 올바른 태도라는 것입니다.
사회: 로마와의 관계를 의식해서 의기소침해지는 바울을 우리가 논리적으로 공격하면 안 되는 것인가요? 불교의 경우는 살불살조하는데 우리는 살예살서를 못 한다는 말이에요. 오히려 바울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하더라도 바울도 완전할 수 없는데 바울의 기록 자체가 바울의 한계일 경우에 이것을 자꾸 어떻게 다른 식으로 해석하려고 할 게 아니라 바울의 이런 생각 자체는 틀린 거다 그때 당시에 바울의 생각의 한계였고 이것은 오늘날에는 안 맞는다고 선언을 하면 안 되나요?
이정배: 그럴수 있는데 문제는 우리나라에 왔던 지젝Slavoj zizek이나 바디우Alain Badiou가 바울을 새롭게 해석해서 바울신학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우리 시대의 사람으로 동시대인으로 불러낸 게 바디우고 지젝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물론 그런 점에 대해서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는 다 된다.” 그게 아니라 그 당시의 한계도 있었고 그런 정서는 공감을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바울도 굉장히 인습화된 바울이지, 제대로 성서적으로 우리가 그 지식을 뒷받침하고 읽었던 바울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가 바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잘못 배웠던 인습적으로 알고 있던 바울에 대한 비판이니까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거고 그렇게 본다면 바울에 대해서 더 정확한 성서적인 해석이 뭐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우리들에게 선결된 과제입니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신학을 비판하고 넘어서는데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최고의 지성이 바울을 가지고서 동시대인으로 새로운 보편주의를 말하는 사상가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 놀랍기 때문에 그런 틀로 보더라도 어쨌든 바울에게 있어서 로마서 13장으로 돌아가 보면 분명히 “로마식으로는 살아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이 되었다면” 이게 바울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로마서에서는 로마시민권이라는 말이 하나도 안 나옵니다. 그러면 어디에 나오느냐 사도행전에만 나옵니다. 바울이 쓰지 않은 것에 나옵니다. 바울은 오히려 로마시민권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로마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내는 것 그 삶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바울에게는 정치적인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맥락 속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의미들을 더 읽어내면 그 문제도 물론 이제 어려운 이야기이겠지만 성서적으로는 해결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동호: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라는 말을 같은 유다인이 했다고 하면 그것은 무의미하죠. 첫째로 하느님의 것이 아닌 게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거기에 유다인이 아닌 사람이 들었을 때는 상당한 위험한 발상이죠. 왜냐하면 카이사르 자체가 황제이기도 했지만 신이었으니까요. 신과 신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예수님의 그것을 분리한다는 게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유대인들은 선택을 요구하는 거죠. 이미 아우구투스 황제 때부터 신격화된 로마 황제가 있는데 하느님도 신적 존재인데 구약의 파라오하고 야훼의 싸움과 같은 구도죠. 성경을 읽는 그리스도인들은 굉장히 강한 압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모든 권위를, 권력이 하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을 것인가 로마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을 것인가를 성경을 읽는 당대에 당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마태복음이든지 바오로의 서신이든지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불과 몇 년 전에 몇 십 년 전에 떠난 예수, 우리의 신앙의 모범이었던 바오로가 남긴 글을 보는 남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상당한 긴장을 했을 것이죠. 카이사르를 선택할 것이냐, 하느님을 선택할 것이냐 또는 하느님이 주신 평화를 살 거냐, 로마가 주는 평화를 살 거냐” 라며 선택을 요구하는 구절입니다. 이런 식의 해석은 최근의 우리 가톨릭 내에서 20세기 들어와서 성경을 문헌학으로 역사적 배경으로 연구하면서부터 나온 해석들인 거죠.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현장에서 적용된 것은 해방신학에서 많이 적용되었던 것이죠. 성경이 편집되었던 시대를 한번 성찰해보았으면 합니다. 그것을 한국에서는 역사적인 성찰, 문헌적인 성찰을 안 하는 대신에 구절만 싹 가지고 와 가지고 박정희도 하늘이 준 권위이고 이렇게 했는데 결국은 신적 권위가 되는 거죠. 그때는 권위를 준 사람이 누구냐 하면 황제가 줬었으니까요. 근데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권위를 따르면 전부 다 박해를 받고 죽음을 얻게 되는 것이니 굉장한 압박이고 긴장이죠.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게 성경해석에서는 100년이 안 되는 거죠.
사회: 그렇게 보면 되겠군요. 로마서에서 말하는 어떤 세속권 그냥 그거만 딱 놓고 거기에 복종해라가 아니라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거니까 복종해라 거기에는 “하느님이 주신 거니까” 라고 하는 전제 그 세속권은 그 모든 것에 총 권위자이신 신적 권위에 세속권이 복종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만약에 이 세속권이 신적 권위를 거스를 때는 따르지 말면 되겠네요.
박동호: 구약의 예언서가 다 그런 거죠. 구약의 예언서가 하늘의 온 힘을 백성들에게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서 고아나 과부나 사회적 약자들이 신음하거나 이런 경우에 예언자들이 얘기하는 게 다 그 대목이죠.
사회: 예언자와 예언자의 가르침을 구약이라고 소홀히 하지 말고 그것을 자꾸 많이 가르쳤으면 좋겠네요. 그때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요. 지금 각 종단 내에서 “스님, 왜 저러시나, 신부님, 목사님 왜 저러시나” 하는 다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국민들 중에서도 이해 못하는 분들에게 성직자로서 따뜻하게 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관: 불교의 실천 그리고 인식에 가장 기준을 두는 게 중도사상 아닙니까? 중이 걸어가는 길은 중도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하지만요. 당연히 불교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니까 중도인데 물론 한자로는 가운데 중中자 길 도道를 씁니다. 불교에서 실천과 인식의 또 하나의 축이 뭐냐면 “양단에서 벗어나라” 입니다. 한쪽 끝단에서 벗어나라는 말인데 사실 똑같은 말이죠. 결국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현상을 보고서 우리는 ‘옳다, 그르다’ 이야기를 하죠. 박 신부님 말씀하신 강론에 대해서 정부가 대응하는 것도 사실 드러나 있는 박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현상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불교의 가르침은 “현상을 보지 말고 본질을 보라.” 입니다. 저는 종북이니 좌파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생각이 다른 분들에게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평가하지 말고 극단적인 편견이나 편향에서 바라보지 말고 저렇게 일어나고 있는 우리 눈앞에 보여지고 있는 저 현상의 본질이 뭘까” 이것을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양쪽 말이 다 맞을 수 있고 양쪽 말이 다 틀릴 수도 있는데 맞다 틀리다의 논점이 아니라 왜 저런 현상이 일어날까, 그 본질은 뭘까 우리가 한번 생각을 하고 또 대화를 한다면 지금의 이 문제는 쉽게 해소가 될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모두 다 행복할 권리가 있고 모두 다 평화로울 권리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한 생각에서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본질의 문제를 바라본다면 저는 충분히 그런 것들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박동호: 사람이 갖고 있는 욕망 가운데 권력욕이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악하게 행사하여 지배한다든가 통치한다든가 휘어잡는다든가 억압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끊임없이 탐하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어느 시점이 되면 결탁을 해서 말하자면 아성을 구축하는 것이겠죠. 좋게 표현하면 기득권일 수도 있지만 나쁘게 표현하면 소수의 폐쇄적 권력집단이 되는 것인데 이게 악으로 구체화되는 것도 조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게 얼마나 커다란 비극을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가져오는가를 인류역사는 반복하여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지금 스님 말씀하신대로 그것을 치유하는 여러 길 중에 하나가 정말 핵심을 보고 본질을 보고 배경을 보는 것에 하나의 요소로써 그 배경 안에 핵심 안에 그런 게 있는 지 살피는 게 필요합니다.
지관: 그 배경 속에는 일부 소수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탐욕과 욕망들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본질을 덮어버린 채 현상만 가지고 계속 이야기를 하겠지요. 신부님 말씀에 동의를 합니다.
이정배: 요즈음 불통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얼마 전에 표창원이라는 분이 NCC 제2회 인권상을 받으면서 했던 말 중에 “민주주의가 아무리 옳아도 시대정신과 만나지 못하면 그것은 결코 옳은 게 될 수 없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지금 밀양의 문제도 그렇고, 밀양의 문제는 박정희 때 세워놓은 법에 의해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시대가 벌써 달라졌는데 시대정신과 소통을 하지 못하는 그런 잔재들이 지금 너무나 많이 정권 속에 계속 틀어박혀 있어 가지고 갈등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시대의 징조들을 더 살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함석헌 선생의 말씀도 있듯이 우리가 어느덧 이명박 정권을 선택했을 때부터 또 지금의 선택까지 이제 우리들이 시대의 흐름들을 제대로 잘 짚어내지 못한 그런 감이 있지 않나 하는 반성도 합니다. 요즈음 1970년대로 되돌아가는 느낌이라고들 이야기들을 합니다. 이 정권이 솔직하게 부정한 선거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정리했어야 합니다. “박근혜 퇴진, 이명박 구속”이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에서 정부도 우리 국민도 더 이상 피로써 지켰던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지키고자 이 문제들을 묵과할 수 없다는 그런 자각이 더 많이 일어나야 할 것 같고 이 정부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놓치지 말고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시간적인 카이로스적인 의미를 가지고 현실을 다시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민의의 힘, 종교의 힘이 합쳐질 때 어떤 상황이 올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성찰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사회: 정치하는 사람들이 시민들을 두려워 할 줄 알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히 듭니다. 많은 분들하고 같이 바람직한 생각을 나누도록 하는 장이 되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