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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7
권세 있는 새 교훈
막1:21-28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내용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 누구든지 성경을 읽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당연히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리는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이것은 순전히 저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뭐 학적으로 연구하여 말씀을 드리는게 아니라
새벽기도 후에 성경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성경은 이런 책이네...그런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무슨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하나님의 일하심...사역을 기록한 책이네...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계시록은 어떤 책인가..의문이 들지요...
성경 66권 중에 65 다섯권이 하나님이 일하신 책이라면
나머지 한권 계시록은 앞으로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록한 책인거지요
실제로 성경 창세기 1장에서부터 하나님이 일하심이 기록되어 있고요
2장도 하나님의 일하심이지요..3장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록하여...
그것이 계시록까지 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선택하여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놀고 있는 사람...요행을 바라는 사람...
일에는 관심이 없고 실컷 놀다가
로또 한 장 구입하면서 대박을 맞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을 쓰실까요?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렇게 요행을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일에 정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쓰셨다는 겁니다.
특히 제자들의 부르심이 그렇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쓰심에 결정타라고 할 수 있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그게 마25장의 내용입니다.
마25장은 유명한 세가지 비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열처녀 비유...달란트 비유...양과 염소 비유
이 세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한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열처녀 비유는 등과 기름을 준비한 자를 지혜로운 여인들로 그렇게 준비하지 않는 여인들은 미련한 여인들로 구분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5.2.1달란트를 주고 주인이 타국으로 떠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최선을 다해서 장사해서 또 5달란트 남김
두 달란트 받은 자도... // 2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일하지 않습니다..주인 탓만합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아...1달란트 받은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구나...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주인도 나중에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책망하는 겁니다.
양과 염소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우리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헐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주었고...옥에 갖혔을 때 찾아 보았습니까?
자기가 한 일들을 알지 못합니다...자기가 일하고 기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최선을 다한 사람은 최선을 다한 것으로 행복한 겁니다.
누가 알아주고 안 알아주고 이런데 신경쓰지 않으니 자기가 하고도 잊어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심도...아무나 부른 것이 아니라..
자기 일에 열심인 사람들....그 사람을 부르셨는데....
자기 일에 열심이지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사용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부르시자...그물도 버려두고...그물 깊는 것도 버려두고 따른 겁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부르신 후에...그 제자들 앞에서 행하신 첫 번째 사역이 본문입니다.
첫 번째 사역이 뭡니까? 말씀사역입니다..
말씀 사역과 동시에 귀신을 쫓아내시므로 능력행함을 보이셨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서 말씀을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2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러라”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고 시작합니다...
그들이란 예수님과 제자들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이 선택한 첫 사역지로 가버나움을 택하셨다는 겁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가버나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이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대부분의 사역이 갈릴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그 가버나움 중에서 예수님이 찾으신 곳이 어디라는 겁니까?
안식일에 들어간 곳이 회당이라는 겁니다.
먼저 회당에 대해서 오늘은 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역 초기는 대부분 회당에서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이 회당은 바벨론 포로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포로로 잡혀가 성전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대체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는데
그 장소가 바로 회당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실제로 당시에 유대인들은 거주하는 동네가 생기게 되면 반드시 회당을 지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 밖에 없었지만
회당은 유대인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세워지게 되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성전과 회당의 차이는 뭘까요?
성전은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회당에는 누구든지 들어감이 가능했습니다.
성전은 당시까지 제사를 드림이 주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회당은 기도하는 장소요...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장소였습니다.
또한 예수님 이후시대에는 예배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던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에나 제자들 시대에 회당보다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데
더 좋은 장소는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항상 하나님의 법,
말씀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을 전하실 때...일어난 역사를 본문이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 같지 아니하더라”
주님의 가르치신 말씀을 듣고 어떤 반응이 일어났다는 겁니까?
*** 교훈에 놀라니....말씀을 듣고 놀랐다는 것이지요...
놀라니라는 헬라어가 [엨세플레쏜토]라고 하는데...
이는 밖으로라는 헬라어 에크와 친다라는 뜻의 플레쏘의 합성어입니다.
이는 문자 그대로 놀라되 정신이 빠져버린 듯한 멍한 상태를 말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흔히 멍하니 있는 사람을 보고 말할 때...
저 사람 지금 ...넋이 나갔네....할 때와 같은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무슨 이야기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의 말씀 우리 마음속에 임하시게 되면... 이런 상태가 된다는 겁니다.
동일한 반응을 보인 말씀이 있습니다. 그게 산상수훈입니다.
산상수훈은 마5,6,7장의 말씀입니다.
이 산상수훈의 말씀을 전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듣고
본문과 동일한 반응을 보인 말씀이.... 마7:28-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고 합니다.
무엇을 듣고 본문에서나 산상수훈에서나
무리들이 정신이 나간 듯이 놀랐다는 겁니까?....
본문에서는 교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이 교훈이 뭐며 말씀이 뭡니까? 진리의 말씀입니다.
당시에 서기관들이 가르치고 전한 것은 스승들로부터 온 교훈이요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사변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너무나 단순했습니다.
진짜 복이 뭔가 진리가 뭔가 생명이 뭐며 죽음이 뭔가 구원이 뭔가를 가르친 겁니다.
그러니까 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차원이 틀린 겁니다.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명확한가 예를 들어보면...
요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
요9:5 나는 세상의 빛이로다
요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아멘입니까?
즉 예수님이 전한 말씀은 항상 이렇게 말씀을 전하신 겁니다.
그러니 말씀이 혼돈스럽지 않습니다...명확합니다..
이러니 사람들이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거지요...아니 놀라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저는 기독교를 믿은 후에 기독교 진리는 명확하다는 것을 알고 너무 좋아했던 적이 있습니다.
불교는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구원을 얻는 문제만 하더라도 그렇쟎아요
기독교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
즉 예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다르게 말씀 드리면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어떻습니까?...선을 행하면 극락에 간다고 합니다.
저는 이건 너무 모호한 불분명한 명제라고 생각합니다.
1) 선의 기준이 뭐냐는 의문이 따르고요
2) 그냥 모든 사람이 알기 쉽게 남을 돕는게 선이라고 합시다...
얼마만큼 도와야 극락에 들어가는 선이되는지 명확하지 않고요
3) 또한 돈으로 돕는게 선이냐...아니면 시간으로 돕는게 선이냐...]
아니면 나는 돈도 없고...시간도 없으니 마음으로 돕는 것은 선이 아니냐...이런 의문도 있어요
그러니까 불교는 알면 알수록 모호한 겁니다.
불교의 최고 경지가 해탈이라는 것 쯤은 다 아시지요?
그럼 해탈이 뭡니까?...모든 집착을 끓고 자유로워 지는 것...이 해탈이라고 합니다.
모든 집착을 끊고 해탈에 이른 사람이 있을까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불교인들이 그렇게 존경하고 신같이 받드는 중이 있지요
그가 성철스님이지요...
그의 열반송을 보면...
자기의 죄가 하늘에 가득차서 수미산을 넘어간다...
그래서 자신이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장좌불와를 하고 참선을 하신 분이....
알고 보니 자신이 말할 수 없는 큰 죄인이더라는 겁니다.
이렇게 불교는 알면 알수록 모호한게 불교라는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너무나 명확하고 정확합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사람들이 놀랄만큼 명확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23절 이하는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던 곳이 어디입니까?
23절에 회당안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귀신 들린 사람이 소리칩니다.
24-2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읽고...
24절에 귀신들린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여기에 나는...이 말은...귀신 자신을 가르키는 말이지요?
귀신이 안다는 겁니다...누구를 안다는 겁니까? 예수를 안다는 겁니다.
예수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한자...임을 안다는 겁니다.
마8장에도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장면이 있습니다.
그때도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마8:28절에서는 귀신이 예수님을 향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여....라고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심각한 도전을 주시는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슨 도전을 주시는 말씀입니까?
귀신들이....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확실히 알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귀신들은 예수그리스도가 오심을 두려워 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그리스도가 마귀와 귀신의 일을 멸하러 왔다는 것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말 우리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겁니까?
믿으면 귀신들이 두려워한 그만한 무게의 두려움이 있습니까?
그리고 정말 이 귀신들의 일을 멸하러 오심을 믿느냐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믿음의 증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면 두가지 증표가 나타납니다.
1) 두려움이요. 2) 마귀의 일을 멸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1) 두려움은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귀신들은 자신들에게 닥칠 불행에 대한 두려움이지만
예수를 믿는 우리의 두려움은 귀신들이 가지는 그런 불행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내가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함으로 인한 거룩한 두려움
마치 내가 도무지 쳐다보지도 못하고 도무지 레벨이 맞지 않는 높고 높은 분이 있다고 합시다
그분이 나를 식사자리에 초대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내가 그분과 같이 식사한다고 합시다...그때 내가 가지는게 있습니다...두려움입니다.
밥먹다가 벌줄까봐? 나를 망하게 할까봐? 두려운게 아닙니다.
나같이 못난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분이 나를 불러주시고 같이 식사해주심에 대한 두려움
이 두려움은 무서워 두려워하는게 아니라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을 우리가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2) 마귀의 일을 멸하심을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마귀들도 알았습니다
하물며 예수를 믿는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마귀의 일은 사람을 타락케하고...죄에 빠지게 하고...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겁니다.
혹 우리가 이런 시험이있다면...깨달아야 한다는 겁니다
아...회당에 들어온 귀신이 있듯이...내게도 귀신이 역사하는구나...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귀신의 이끌림에 따라가도...유혹에 넘어가서도 안됩니다.
오히려 예수를 알았다면 당연히 그 귀신의 일들을 대적하여 싸워 이겨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리는 어렵지 않습니다...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진리되신 예수를 믿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를 아는게 아니라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믿음은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마귀의 유혹을 이겨내고
예수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내가 되고 세상에 되는 일에
앞장서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