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품 속의 말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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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놀이를 통해 의사를 전달하면 일단 읽는 이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문학의 창조자들은 독자의 주의를 끌어 효과적으로 의견이나 감동을 전달하기 위하여 온갖 낯설고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언어를 좀더 예술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문학이니 그 속에는 이미 그 자체로 말놀이 성격이 들어있습니다. 한시의 운(韻), 시조의 음보(音步), 유럽어의 라임(Rhyme) 등 이른바 전통시의 기본 형태는 일종의 말놀이입니다. 그러나 현대시에 와서 문학의 말놀이는 더욱 다채롭고 창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면 관계상 짧게 인용할 수 있는 시 중심으로 그 유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의도적으로 발음을 비트는 경우
장정일의 시 '쉬인'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당쉰이 육일만에
우주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건 틀리는 말입니다요.
그렇습니다요.
당쉰은 일곱째 날
끔찍한 것을 만드셨읍니다요.
그렇습니다요
휴쉭의 칠일째 저녁.
당쉰은 당쉰이 만든
땅덩이를 바라보셨읍니다요.
마치 된장국같이
천천히 끓고 있는 쇄계 !
하늘은 구슈한 기포를 뿜어올리며
붉게 끓어올랐읍지요.
그랬읍니다요.
끔찍한 것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온갖 것들이 쉼히 보기 좋왔고
한없이 화해로왔읍지요.
그 솨실을 나이테에게 물어 보쉬지요.
천년을 솰아남은 히말라야 솸나무들과
쉬베리아의 마가목들이
평화로왔던 그때를
기억할 슈 있읍지요.
그러나 당쉰은 그때
쇄솽을 처음 만들어 보았던 쉰출나기
교본도 없는 난처한 요리솨였읍지요.
끓고 있는 된장국을 바라보며
혹쉬 빠뜨린 게 없을까
두 숀 비벼대다가
냅다 마요네즈를 부어 버린
당쉰은 셔튠 요리솨였읍지요.
그래서 저는 만들어졌읍니다요.
빠뜨린 게 없을까 쇙각한 끝에
저는 만들어졌읍니다요.
갑자기 당신의 돌대가리에서
멋진 쇙각이 떠오른 것이었읍지요
기발하게도 <나>를 만들자는 쇙각이
해처럼 떠오른 것이었읍지요.
계획에는 없었지만 나는
최후로 만들어지고
공들여 만들어졌읍니다요.
그렇습니다요
드디어 나는 만들어졌읍니다요.
그러자 쇄계는 곧바로
슈라장이 되었읍니다요.
제멋되로 펜대를 운전하는
거지 같은 자쉭들이
지랄떨기 쉬작했을 때 !
그런데 내 내가 누 누구냐구요 ?
아아 무 묻지 마쉽시요.
으 은 유 와 푸 풍자를 내뱉으며
처 처 천년을 장슈한 나 나 나는
쉬 쉬 쉬 쉬인입니다요.
2. 반복어구의 사용
좀 극단적인 예로 욕설을 반복어로 사용한 경우를 들어보았습니다. 박이화의 '고전적인 봄밤'입니다. 성공적인 말놀이로 인해 욕이 욕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송도 기생 황진이의 사생활은 만고의 고전인데 신인가수 백모양의 사생활은 왜 통속이고 지랄이야. 내가 보긴 황진이는 불륜이고 백모양은 연애인데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가을밤 황국같은 황진이도 좋고 봄밤의 백합같은 백모양도 좋은데 좋기만 한데 왜! 이 시대엔 벽계수를 대신해 줄 풍류남아가 없고 지랄이야. 명월이 만공산 할 제 달빛 아래 휘영청 안기고픈 사나이가 없고 지랄이야. 아, 일도창해 하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길 어째서! 이 몸과 더불어 유장하게 한 번 뒤척여 볼 박연폭포 같은 사내가 없고 지랄이야.
봄밤은 고전인데......
이화에 월백하는 봄밤은
만고강산의 고전인데
(박이화 詩 '고전적인 봄밤' 전문)
3. 사투리나 유아어가 주는 뉘앙스
정일근 시인의 '쌀'은 영남 지방 사투리인 '살'이 주는 느낌을 시로 다루었고,
서울은 나에게 쌀을 발음해 보세요, 하고 까르르 웃는다
또 살을 발음해 보세요, 하고 까르르 까르르 웃는다
나에게는 쌀이 살이고 살이 쌀인데 서울은 웃는다
쌀이 열리는 쌀 나무가 있는 줄만 알고 자란 그 서울이
농사 짓는 일을 하늘의 일로 알고 살아온 우리의 농사가
쌀 한 톨 제 살점 같이 귀중히 여겨 온 줄 알지 못하고
제 몸의 살이 그 쌀로 만들어지는 줄도 모르고
그래서 쌀과 살이 동음동의어이라는 비밀을 까마득히 모른 채
서울은 웃는다
(정일근 詩 '쌀' 전문)
역시 같은 시인의 '어머니의 그륵'은 어머니가 습관적으로 잘못 발음하는 '그륵(=그릇)'이 주는 느낌을 시로 다루었습니다. 지금도 어린이들 가운데에는 그릇을 그륵이라 잘못 발음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정일근 詩 '어머니의 그륵' 전문)
4. 잘못 들은 말이 주는 낯선 충격
이진수 시인의 '부른다는 말 속엔'은 '불러라'에서 '불 넣어라'를 연상하게 되는 것을 시로 쓴 경우입니다.
오랜만에 만났다 우여곡절 끝에 아들을 얻은 친구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또 보자 악수하면서 아이 돌 때 잊지 말고 연락해 그래야지 그럼 당연히 불러야지 하던 그때 아. 내 속 어딘가에 갑자기 화악 불 들어왔다 불러야지 하는 말이 이상하게도 불넣어야지 하는 말로 들렸던 것이다 와서 술도 마시고 노래도좀 불러라 했을 때 그 불러라 하는 말도 꼭이나 불 넣어라 하는 말로 둘렸다 불러라 노래 불러라 하는 동요가 생각나고 불넣어 주면 금방 타오를 듯한 응원가를 아이 앞길에 훅훅 불어주고 싶었다
부른다는 말이 이렇게나
뜨겁다는 걸 알게 해준 친구야
사람 사이만한 아랫목이 어디 있겠니
불 지피지 않으면
냉골이 되는 거기까지
가마, 꼭 가마
(이진수 詩 '부른다는 말 속엔' 전문)
5. 어눌함이 주는 진솔성
필자의 '혀 짧은 그리움. 아니, 그, 디, 움,'의 경우엔 혀가 짧은 화자를 등장시켰고,
그는 언제나 그리움을 그,디,움, 이라 발음한다
그런 그에게 그, 리, 움, 을 강요하면 그, 디, 움, 한다
사람 좋은 그와의 술자리에서
나는 희미하게 바랜 옛사랑의 그림자를,
그는 언눅으로 남았을 옛사당의 그딤자를,
유부남인 나는 웃으며
친정에 가 있는 아내가 아쉽다고,
노총각인 그는 훌쩍거리며
다든 사내의 아내가 된 그 여자가 그딥다고,
마주앉아 주절거리며 술잔을 비워댔다.
내 말은 꽃같이 피었다가 시들고
그의 말은 불길이 되어 내 가슴을 데이게 했다
그의 천부적인 어눌함을 부러워하며,
매끄러운 나의 혀를 부끄러워하며,
마침내 내 중얼거림 속에서 사랑이 사당이 되었을 때,
그는 시, 나는 말이 되고,
그는 예술, 나는 현실이 되어,
시와 예술은 자취방으로, 말과 현실은 자기 집으로 향했다
그디운 사담 옆에 누워있지 않은 외도운 밤을 향하여
(유용선 詩 '혀 짧은 그리움. 아니, 그, 디, 움,' 전문)
이승하 시인의 '화가 뭉크와 함께'의 경우엔 말더듬이 화자를 등장시킴으로써 뭉크의 작품 '절규'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환기 시키는 데에 성공하고 있습니다. 화가 뭉크는 실제로 말더듬이였다고 합니다.
어디서 우 울음소리가 드 들려
겨 겨 견딜 수가 없어 나 난 말야
토 토하고 싶어 울음소리가
끄 끊어질 듯 끄 끊이지 않고
드 들려와
야 양팔을 벌리고 과 과녁에 서 있는
그런 부 불안의 생김새들
우우 그런 치욕적인
과 광경을 보면 소 소름 끼쳐
다 다 달아나고 싶어
도 同化야 도 童話의 세계야
저놈의 소리 저 우 울음소리
세 세기말의 배후에서 무 무수한 학살극
바 발이 잘 떼어지지 않아 그런데
자 자백하라구? 내가 무얼 어쨌기에
소 소름 끼쳐 터 텅 빈 도시
아니 우 웃는 소리야 끝내는
끝내는 미 미쳐버릴지 모른다
우우 보트 피플이여 텅 빈 세계여
나는 부 부 부인할 것이다.
(이승하 詩 '畵家 뭉크와 함께' 전문)
5.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
박제영의 '가령과 설령'에서는 부사어인 '가령'과 '설령'을 고개 이름으로 환치하여 메시지를 확장시켜나가고 있습니다.
가령
이것이 시다, 라고 쓴 대부분의 것은 시가 아니다
설령
이것이 시가 되지 않더라도, 라고 쓰여진 것은 대부분 시다
가령(佳嶺)은 도처에 있다. 가령 화사하고 화려한 것. 가령 사랑이란 단어. 가령 그리움이란 단어. 봄날 꽃놀이 관광버스가 가 닿는 곳. 그곳이 가령이다.
설령(雪嶺)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 스며 있다. 어둡고 춥고 배고픈, 눈과 귀와 혀의 뿌리. 설령 어시장 좌판이라도. 설령 공중화장실이라도. 설령 무덤이라도. 설령 보이지 않더라도. 그곳에 있다.
등반자여 혹은 동반자여
가령은 도처에 있고 설령은 도무지 없다
도대체 어디를 오를 것인가
(박제영 詩 '가령과 설령')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