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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크라이나 공화국(Republic of Ukraine) 역사
‘변경지역’이라는 의미를 가진 우크라이나는 전통 현악기 반두라(Bandura, 하프)와 여자전통복장 소로쉬카가
있으며, 고려인(까레이스끼)이 2만 명 정도가 살고 있고, 그들은 농사를 잘 짓는다고 한다.
인구: 4,420십 만 명, 우크라이나인(78%), 러시아인(17%) 면적: 60만 ㎢, 종교: 개신교, 우크라이나정교,
우크라이나 가톨릭교회 화폐: 1 흐리브냐(그리브나)→ 135원 1달러→ 11.50 그리브나
역사: 5, 6세기경 소수 슬라브족이 정착하여 모스크바북부까지 크게 발전하였고, 9세기경부터 폴란드인과 발트
해와 흑해의 교역로를 지배한 바이킹과 함께 드네프르 강, 볼호프 강, 볼가 강 상류지역에 상륙하였다.
AD880년경부터 류리크 왕조를 창시한 노브고로트의 류리크 공의 후계자 올레크는 드네프르 강 유역을 정복하여
882년 수도를 노브고로트에서 키예프로 옮겼으며, ‘키예프 공국(루스)’은 12세기 중반까지 이 지역을 지배했다.
이를 ‘키예프 공국’은 후에 류리크 왕조라는 이름으로 러시아의 기틀이 되기도 했는데 러시아 어원은 바이킹이라
불렀던 고대 스칸디나비아인의 배(루스, 로스, Rus) 젓는 솜씨에서 유래했다.
988년 키예프왕 블라디미르 1세가 그리스정교로 개종 후 정식종교가 되었고, 비잔틴제국의 보호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지시 아래 교회의 성직위계를 만들었으며,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국가통합수단 역할을 하였다.
1054년 키예프 왕가의 분열로 블라디미르, 모스크바, 노브고로트 등 여러 도시국가가 독립하면서 키예프 공국은
크게 쇠퇴하였고, 12, 13세기에 킵차크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내분이 일어났다.
내분으로 교역로가 바뀌자 차츰 세력을 잃어갔으며, 1236년 몽골의 침입으로 키예프시대는 끝났고, 1200년경에
부상했던 우크라이나 서부의 갈리치아-볼리니아 공국은 14세기까지 존속했다.
모스크바 공국은 본래 키예프 공국에 속했으나 1147년부터 세력을 확장시켰고, 1310년 그리스정교의 대주교가
블라디미르에서 모스크바로 옮겨옴으로써 모스크바 공국은 크게 성장하였다.
그 후 타타르인과 융화함으로써 몽골로부터 러시아 전역의 통치권을 위임받았으나 크게 성장한 모스크바 공국은
몽골의 지배에 반항하기 시작했으며, 1380년 킵차크한국의 군대를 돈 강변에서 물리쳤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인에 의해 멸망하자 모스크바 공국은 유럽과 다른 독자적인 발전경로를 밟았으며,
1458년 모스크바 공국은 키예프 공국에서 분리하였고, 1480년 타타르의 킵차크한국으로부터 해방되었다.
14세기에 리투아니아가 갈리치아 공국을 제외한 우크라이나 영토의 대부분을 합병했고, 갈리치아 공국은 폴란드
왕국에 넘어갔으며, 우크라이나 남부 지방은 여전히 몽골의 킵차크한국(금장한국) 통치하에 있었다.
키예프 본국은 1458년 모스크바 대공국과 리투아니아로 분리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키예프 루스의 옛 영토는
빠르게 분산되었고, 1569년 루블린 합병 이후 우크라이나는 리투아니아에서 폴란드로 넘어갔다.
1648년 헤트만(군대 지도자)이 이끄는 카자크 인들에 의해 짧은 기간이었지만 준(準) 독립 국가를 이루었으나
우크라이나의 자치권은 소멸되었으며, 1783년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합병했다.
1772년 폴란드 1차분할 때 러시아 제국은 갈리치아를 제외한 드네프르 강 서부의 우크라이나 영토를 얻었으며,
19세기 초 우크라이나는 주요 곡물수출지역으로 부상했다.
19세기에 전개된 우크라이나의 민족운동은 러시아제국의 정치적인 억압과 탄압을 받았고,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의 주도하에 우크라이나 ‘중앙라다’가 키예프에서 결성되었다.
10월의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는 러시아 공산주의 정부가 하리코프에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웠으며, 1924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의 일원이 되었다.
1930년대 초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의 공업화와 농업의 집산화 정책을 급속도로 추진하여 농민들의 저항으로 곡물
압류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기아로 약 5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1939년 독일-소련 불가침조약으로 폴란드령이었던 갈리치아 동부와 볼리니아 서부가 우크라이나에 편입되었고,
1941년 6월 독일군이 소련을 공격하고 우크라이나를 빠른 속도로 점령했다.
1945년 독일의 패배로 소련이 1, 2차 세계대전 사이에 폴란드·루마니아·체코슬로바키아의 땅이었던 우크라이나
모든 영토를 차지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귀속되었다.
1986년 체르노빌은 소련이 건설한 핵발전소 원자로 노심(爐心)이 녹아 대참사 있었으며, 1980년대 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시행한 민족주의는 1990년 공화국을 선포할 수 있도록 이끈 촉진제가 되었다.
1991년 8월 우크라이나 의회는 독립을 선포했고, 1991년 12월 국민투표를 통해 법률을 제정했고, 12월 소련이
붕괴되어 전 세계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으나 빈곤한 서쪽은 친 유럽이었다.
2010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평창과 소치의 대결에서 1차 때는 평창이 1위를 했으나 과반을 넘지 못해 2차
투표에서 우크라이나 소치에게 표를 줌으로 소치가 승리했다.
2013년 러시아의 힘으로 부유한 동쪽의 친 러시아계인 동부 출신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차관조건이 까다로운
유럽연합과의 협정체결 중단을 선언하고, 러시아로부터 차관을 얻으려하였다.
이는 서부에 기반을 둔 야당세력이 불만을 가졌고, 11월 21일부터 시위가 촉발되었으며, 시위는 우크라이나
지역갈등과 함께 러시아와 유럽, 미국 등의 이해관계와 맞물리면서 사상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러시아로 망명했는데 이를 ‘유로 마이단(유럽광장 뜻) 시위’이라고 한다.
2014년 2월 서쪽이 정권을 잡자 2월28일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침공하여 세바스토폴의 청사, 군사기지, 공항을
점령하였고, 3월16일 크림 반도 주민투표는 96.7% 찬성으로 러시아로 편입하였다.
※크림반도 역사: 킵차크한국서 분리 독립한 타타르족칸국의 오랫동안 본거지였고, 1783년 러시아에 합병됐다.
2차 대전 때 소련 자치공화국 타타르족은 나치와 싸우는 러시아 게릴라 퇴치에 협력하여 1944년 크림반도에서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로 추방되었고, 얼지 않는 크림반도 세바스토폴에 흑해함대 본부를 두었다.
1954년 우크라이나 출신 니키타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서기장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형제동맹 300주년
기념으로 크림 반도를 소련에서 우크라이나로 편입시켰고, 1992년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 분리 독립했다.
크림 자치공화국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정부와 크림 자치 의회가 협의해 선출해 하는 자치공화국이었으나
2014년 2월 친 유럽이 정권을 잡자 러시아가 무력점령하여 2014년 3월 주민투표로 다시 러시아로 편입됐다.
※드네프르 강은 체르노빌에서 큰 강이 되어 우크라이나 중심부를 통과하여 크림반도 서쪽의 흑해로 흘러간다.
※체르노빌(Chernobyl) 원전사고: 1986년 4월 26일 키예프 북쪽 100km 지점에 있는 체르노빌에서 원자로가
폭발한 사건으로 엄청난 방사능이 유출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원자력 사고이다.
사망자 수치는 제대로 집계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으며, 소련은 사고를 은폐하기 위해 늑장 대응을 하며 사태는
더 커졌고, 사고 후 36시간이 지나서야 대피령을 내렸다.
바람이 북쪽으로 불어 키예프는 대량의 방사능오염을 피할 수 있었으나 인접국인 벨라루스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전 유럽이 방사능을 맞았는데 방사능 유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원자로를 콘크리트도 덮어 씌웠다.
※우크라이나 핵 포기: 구소련이 해체되면서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던 벨로루시, 카자흐스탄, 그리고 우크라이나
3공화국은 핵무기보유국의 지위를 러시아에 이양하는 협정을 합의했다.
1,900여기의 핵무기를 보유한 세계 3번째 핵보유국으로 군부가 강력히 핵무장을 선호했으나 우크라이나정부는
1.러시아의 막강한 핵전력에 소규모핵무기는 안보에 도움보다는 러시아 안보우려를 자극할 수 있다고 보았다.
2.우크라이나의 핵능력은 소련 핵전력의 일부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완전한 투명성이 확보되어 있었다.
3.우크라이나가 신생국가로서 국제사회에 신뢰를 얻기가 쉬웠다. 이런 이유로 1994년 1월 핵을 포기하는 대신
구체적인 안전보장을 약속을 받고 대신 러시아, 미국대통령과 함께 서명했다.
[갈라치아와 만주 독립군에게 무기를 팔고 간 체코군단 그리고 그린 우크라이나]
1772년 폴란드 1차분할 때 리비우를 수도로 하는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이 세워져 1918년까지 군주국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구성국이며, 이곳에 속해 있던 크라쿠프 대공국은 폴란드에 있었다.
1차 대전 때 동맹군(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불가리아, 터키)에 소속된 체코인들은 이들과 싸우는 러시아는
같은 슬라브 민족이어서 전쟁할 이유도 없었고, 그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서 조국의 독립을 원했다.
그들은 고의로 러시아 포로가 되었으며, 1914년 8월 러시아 최고사령부는 전쟁포로를 포함해 자국에 사는 체코와
슬로바키아인들로 구성된 체코군단을 승인했는데 이는 ‘범슬라브주의’를 외치던 러시아 지향점과도 들어맞았다.
6만 여명이었던 이들은 러시아 군단의 지원을 받고, 오스트리아제국과 전쟁을 하는 중에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군은 동맹국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정을 맺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해 버렸다.
동맹군과 싸울 수 없었던 체코군단은 연합군에 가담하여 동맹국과 싸우고 싶었으나 서쪽은 오스트리아제국에
막혀 갈 수가 없자 러시아 동쪽 끝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통해 배편으로 프랑스로 가기로 했다.
프랑스에서 집결하여 전열을 재정비해서 서부전선으로 가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고, 이를 실행에 옮겼는데 이것은
거의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긴 여정으로 무기, 식량, 기차를 확보하고 설국열차를 방불케 하는 수백 량의 열차가
시베리아를 횡단했는데 이 기나긴 열차에는 병영은 물론 병원과 우체국, 신문사, 은행까지 있었다.
이들은 의지와 시스템의 승리였으며, 볼셰비키의 군대와 제정러시아를 복구하려는 백군 사이의 내전이 한창이던
때에 우여곡절 끝에 도착하여 1918년 7월6일 체코군단이 극동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점령한 것이다.
연합군에 동조하는 체코군단은 이 지역의 적군을 몰아내고, 이 항구를 연합군 항구로 선포해 모든 연합군 선박에
개방했는데 1918년 11월 11일 1차 대전도 끝났고, 독립도 했으며, 1920년까지 배편을 수배해 유럽으로 떠났다.
체코군단이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할 당시 발간한 신문 ‘덴니크’는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지 17일 만에
소식을 처음 전했고, 1차 대전이 끝나면서 조국도 체코 독립하여 그들에게는 무기가 필요 없게 되었다.
체코군단과 무기거래의 협상이 있자 거부이며 크리스천 독립운동가인 최재형씨를 중심으로 연해주 한인들도 성금과
비녀와 가락지를 등을 내 놨는데 이것이 지금도 체코 골동품 시장에 우리나라 옛 장신구가 거래되는 이유이다.
체코군단에서 소련제 모신나강, 독일제 마우저 소총 1,800정, 맥심 기관총 7문 대포 3문 그리고 수류탄 등을 구입해
독립군에게 전달되어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와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다.
영화 ‘좋은 놈(독립군), 나쁜 놈(일본 놈), 이상한 놈(배신자)’의 모티브가 된 사건인 15만원 탈취의거는 체코군단은
무기를 가지고 갈 수 없었기에 헐값에 팔려고 해서 계약단계까지 갔으나 배신자 엄인섭이 그린 영화이다.
1882년부터 프리모르스키(연해주) 지역에 우크라이나인들한테 이주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고, 정착민들에게 토지를
분배받아 거주한 우크라이나인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우크라이나 오데사 항구에서 뱃길로 이주한 정착민들이다.
1897년 무렵 우크라이나의 인구는 31만 명을 넘었고, 이 지역 대대수였던 우크라이나 민족은 체코군단이 점령하고
어수선한 시절 1920년 ‘그린 우크라이나’로 독립하려고 시도했다.
1922년 그린 우크라이나 해체로 무산된 잘 알려지지 않는 역사가 있다.
[7일] 18년 10월 23일 화요일 ● (5) 우크라이나 키예프[1 세계 2차 대전기념관 2 페체르스크 라브라 동굴
수도원 3 마린스키 왕궁 4 성소피아 대성당 5 성 미카엘 6 후니쿨라 7 안드레아 교회 8 황금문→ MERCURE
[키예프(Kiyev) 역사] 인구 290만 우크라이나는 키이우
키예프는 드네프르 강과 데스나 강이 만나는 지점 아래 있고, 모든 러시아 도시의 어머니로 불리며, 동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로 5세기경 키예프 3형제가 세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첫 번째 도시가 되었다.
스뱌토슬라프 1세(재위 962~972년)은 동쪽과 남쪽으로 정복 활동을 펼쳐 영토를 크게 넓혔고, 주요 교역국이던
동로마 제국과 긴밀하게 연결된 결과로 블라디미르 1세는 비잔틴 황제 바실리오스 2세의 누이 안나와 결혼했다.
그리고 비잔틴(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정교회를 전래받아 국교로 삼았고, 블라디미르 1세의 아들 야로슬라프 1세
(재위 1019년∼1054년)는 현제로 불리며, 그의 딸들은 프랑스, 헝가리, 노르웨이 왕과 혼인을 맺었다.
자신의 여동생들을 폴란드 국왕, 동로마 황자와 혼인을 시켰고, 자신도 스웨덴 공주와 혼인을 맺는 등 적극적인
혼인 외교정책을 펼쳐 전쟁을 피하고 국가를 안정시켜 키예프 공국은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황금 문을 만들었으나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여러 공국으로 분열되었고, 1095년 흑해의 유목민 폴로프치
족이 키예프를 점령하였으며, 야로슬라프의 손자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재위 1113∼1125)가 일시 회복하였다.
1240년 칭기즈칸의 장손자인 바투가 통치하던 킵차크 한국(汗國)의 타타르인들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으며,
그 이후로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카자크 인들의 지배했고, 1793년 러시아에 합병되었다.
1917년에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수립으로 1934년 수도가 되었고, 2차 대전 중 대부분 파괴됐으며,
2년 동안에 인구는 1/5로 줄어 도시역사상 가장 잔인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복구되었다.
1986년 키예프에서 불과 100km 북쪽으로 떨어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터져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91년 소련 연방의 해체로 우크라이나가 독립하여 수도로 오늘에 이르고 있고, 핵전쟁을 대비하여 만들었다는
지하철은 지하 100m 정도를 내려가는 세계 최고의 깊이이며, 속도도 아주 빠르다.
※드네프르 강의 슬픈 운명: 매일경제신문사 지러파(知露派) 기자인 김병호 지음. 1994~97년까지 한국축구
국가대표팀을 맡았던 아나톨리 비쇼베츠가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이 강을 경계로 서부는 친 유럽성향, 동부는 친 러시아성향으로 나뉘어 역사나 현재나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은
서부는 우크라이나어 쓰면서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히 강하다.
동부는 러시아어를 쓰면서 17세기부터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키예프(Kiyev)의 가이드 이야기]
우리일행은 보리스필 국제공항에 내려 가이드를 만나 구시가지로 향하면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키예프는
드네프르 강을 중심으로 2개의 뱅크로 나뉘는데 강의 동쪽은 좌안(左岸, left bank)으로 신시가지라고 한다.
강의 서쪽은 우안(右岸, right bank)으로 구시가지로 bank는 강 연안의 퇴적 땅 의미며, 헝가리 부다페스트와
오스트리아 비엔나는 도나우 강, 체코 프라하는 볼타바 강을 중심으로 서쪽이 다 구시가지이다.
우크라이나 인구는 1991년 독립할 당시만 해도 5천2백만 명이었는데 유대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고 이민을 많이
가면서 지금은 줄어 4천5백만 명 정도라고 하며, 가이드는 이민 갈 생각은 없다고 했다.
다만 여행을 통해 외국문물을 익히면 살 것이며, 아시아는 말레시아와 태국을 다녀왔지만 아시아에 대한 것을
별로 아는 것이 없다고 하였고, 이 나라 공식 언어인 우크라이나어는 서쪽 사람들이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러시아 말을 사용하며, 동쪽에는 러시아인들이 많이 살고 서쪽은 우크라이나인이
많이 산다고 하며, 이런 조건으로 아직도 총소리 없는 분쟁중이어서 경기도 안 좋다고 한다.
2014년 크림반도 사건과 같은 해 7월 반군의 소행으로 승객 298명을 태운 말레이여객기 격추는 사건도 있었고,
우크라이나는 유로 존(EU)에 가입하기를 희망하지만 워낙 국토가 커서 시일이 걸릴 것이라고 한다.
한편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경제가 어려워서 옛 러시아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하며, 2014년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점령한 후로는 버스, 차, 기차, 항공 등 모든 노선이 끊어졌으나 개인으로는 크림여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드네프르 강의 페이턴 대교(Paton Bridge)는 가는 차선의 다리와 오는 차선의 다리가 다른데 우리는 우측차선을
따라 강을 건너는 중에 강 건너 산위에 있는 ‘조국어머니기념비’의 뒷모습이 보였다.
가이드는 200여개의 섬이 있는 드네프르 강은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강으로 특히 여름철에는 보트를
타거나 여러 가지 물놀이를 하면서 보내며, 다리를 건너면 ‘페체르스카야 라브라 수도원’ 건물도 보인다.
나이 많은 운전기사와 가이드가 러시아어로 하는 이유는 기사는 어릴 때부터 사용하던 말이어서 우크라이나 말을
잘 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러시아가 350년 지배를 받고 해방 된지 겨우 27년 밖에 안 되었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세월이 흐르면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며, 2014년 크림반도 일로 많은 충격을 받고나서 이 나라는
러시아를 따르지 않고 우크라이나식의 자주의식으로 살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세계 2차 대전기념관(The Ukrainian State Museum of the Great Patriotic War)]
가이드를 따라 이동하면서 설명을 들었는데 ‘대 조국전쟁박물관’의 기념관 안에는 각종 사진, 무기 등 전쟁관련
각종 자료들이 전시 되어 있으며, 남쪽엔 높이 102m, 530톤의 티타늄으로 만들진 거대한 기념비가 있다.
‘조국어머니기념비(Motherland Monument)’는 이곳이 종교적이어서 무신론을 주장하는 러시아가 반종교적으로
만든 것이며, 여신상은 9톤의 검을 들고 있고, 1981년 냉전시대에 만들어 졌다.
여신상 안쪽은 비어 있으며,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고, 여신상 탑 아래 건물은 전쟁박물관이며, 야외에는
세계 2차 대전 때 사용했던 비행기와 우크라이나 국기색인 청색으로 칠해진 탱크도 전시되어 있다.
2차 대전 때 가장 많이 죽은 사람은 소련이 약 1800만 명인데 그 중 600만 명이 우크라이나 사람이며, 좌측
붉은 색 4각 형에 새겨진 12개의 영웅 도시와 1개의 요새로 그 중 4번째가 키예프(Киев)이다.
영웅도시로 러시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무르만스크, 스몰렌스크, 노보시비르스크, 모스크바, 볼고그라드, 툴라,
케르치, 세바스토폴이고, 우크라이나는 오데사, 키예프이며, 벨로루시는 민스크와 브레스트의 요새이다.
이동하다보면 좌측에는 2차 대전 때 전쟁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새겨진 조각이 있고 좀 더 가면 하늘이 보이는
터널 안에는 2차 대전의 모습과 군수품을 생산하고 운반하는 조각과 소규모 유격대인 파르티잔 모습도 있다.
이곳을 지나면 11세기 형성 된 라브라동굴 수도원건물의 황금지붕이 보이기 시작하며, 앞에서 보면 남자 같았던
어머니상도 여자처럼 보이고, 이제는 각종의 탱크 중에는 열차 위에 장착된 2대의 탱크가 이색적이다.
이 탱크 열차는 체코군단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할 때 보았던 것 같은 열차였으며, 비행기, 로켓 발사대 등을
보고 돌아왔는데 주차장엔 관광버스가 대우 것이어서 반가웠고, 이젠 페체르스크 라브라 쪽으로 향했다.
[페체르스크(페체르스카야, Pechersk, 동굴) 라브라(Lavra, 도시)]
TC가 갑자기 일정을 보니 동굴 수도원은 가지 않고, 조망할 수 있는 곳에서 조망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친다고
하여 이제까지 가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키예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못 보다니 말이 아니다.
여행사는 여행일정에는 있어 열심히 공부하고 지도를 만들고 했지만 안 가는 곳이 너무 많아 불만이었고, 여행
후에 다시 지도를 만들어야 했는데 이번에도 똑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일행 한 분이 사장을 공항으로 나오라고 해서 따져야 하겠다는 소리가 나왔고, TC는 가이드에게 다시 얘기해서
가도록 해 보겠다고 하여 작은 희망을 가졌으며, 가이드는 회사에 열심히 전화를 했다.
더디어 들어가기로 결정했으며, 설명은 먼저 본 것만 지도에 번호를 부여하고 기록하였고, 참고 될 것만 번호를
부여해서 기록했는데 전부 구글 지도를 참고로 했으며, 이젠 사진 찍기 위해 10달러를 지불 하고 입장했다.
페체르스크 라브라는 1051년 그리스의 아토스 산 수도원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성 안토니우스가 고향으로
돌아와 드네프르 강변에 동굴을 파고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동굴 수도원’이 생겼는데 로마의 ‘카타콤’ 같다.
수도원은 수도사 네스토르가 현존하는 최초의 러시아 연대기를 썼던 곳이며, 지하묘지에는 네스토르와 수도사
및 성인들의 미라가 보존되어 있고, 전체를 키보 페체르시카 월계관이라고도 한다.
수도원은 중세 러시아의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학교의 역할로 지식의 중심지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고,
12세기 초 건축된 수도원은 키예프의 상징이며, 199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 삼위일체(트로이프카야) 문 교회(Gate Church of the Trinity): 1108년 세워졌고, 이 교회 밑으로 만들어진
터널을 통해 안으로 입장하여 가이드가 입장표를 구입하는 동안 주위를 구경했다.
2. 세르크바 스비아토호 미콜리(Tserkva Svyatoho Mykoly): 금별로 장식된 파란 돔으로 아름다운 하얀
교회이다.
3. 라브르스카 마이스터냐(Lavrsʹka Maysternya): 특별한 사제를 위해 18~19세기 건축했고, 이곳에서
가이드를 기다렸으며, 역사박물관과 마주하고 있다..
4. 역사 박물관(Museum of History)는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신앙의 자료를 전시해 놓았다.
5. 그레이트 라브라 벨 타워(Great Lavra Bell Tower): 수도원의 랜드 마크이자 전망대이며, 1731~45년
완공된 높이 96.5m인 벨 탑은 약간 기울어졌는데 수도원(월계관) 구조를 잘 볼 수 있고, 날씨가 좋으면
키예프까지 구경할 수 있으며, 종도 볼 수 있다.
6. 파괴된 벽돌 덩이: 벨 탑 뒤에는 파괴된 벽돌 덩이를 볼 수 있도록 정자 아래 두었는데 가이드는 1941년
독일군이 파괴했다고 했으나 반러시아 소행이라는 주장도 있다.
7. 우스펜스키 소보르(Uspensʹkyy Sobor): 소보르는 그리스 정교회 또는 성당을 말하는 동유럽어로
수도원에서 가장 아름다우며, 스비아토슬라프 야로슬라비치 왕자가 1073~89년 사이 공사를 마쳤다.
2002년 다시 복원되었고, 성모안식 교회(The Great Church Of The Holy Dormition)라고도 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성도들이 기도하는 곳이라 설명 없이 화려한 성화(이콘, icon)들을 감탄하면서 바쁘게 따라
다녔고, 일반 성화는 나무로 만들고 금칠을 했으나 이곳은 대리석으로 만들고 금칠한 성화라고 한다.
8. 성 안토니와 테오도시우스 페커스키의 종교 교회(Refectory Church of St. Anthony & Theodosius
echersky): 교회와 예전에는 수도사식당으로 사용했던 곳과 나뉘어 있으며, 교회는 화려한 아이콘이 있다.
식당은 수도원을 재건하기 전 사진들을 전시했고, 독일군이 파괴한 사진도 전시되어 있다.
종교 교회를 나와 수도사들이 거주하면서 수행을 하였던 동굴로 향했으며, 페체르스크(Pechersk) 슬라브어로
동굴이라는 뜻을 가졌고, 라브라(Lavra)는 수도사들이 형성한 거대한 타운(Town)을 뜻한다고 했다.
19세기에는 2천 여 명의 수도사들이 거주했으나 현재는 200여 명의 수도사들이 아직도 있으며, 동굴 수도원에
도착하면 십자가 찬양교회가 있다.
9. 십자가 찬양교회(Church of the Exaltation of the Cross): 러시아 정교회로 많은 기적을 일어나는 아이콘은
예배 때만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이 교회 앞에는 묘지들이 있다.
동굴로 입장하면 매우 성스러운 곳이어서 남자들은 모자를 벗어야 하며, 이곳에 들어온 수도사는 평생 밖으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그들은 파이프를 통해 빵조각과 물만 공급 받아 삶을 영위했다.
이렇게 일정한 삶을 산 사람은 죽어도 부패하지 않았고, 엄숙한 곳이고 분위기도 맞게 촛불을 켜고 다녀 사진도
찍을 수 없으며, 어두워서 모르게도 찍을 수가 없었고, 지하 무덤과 미라라는 마니도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마니를 발견하면 그 앞에서 기도를 하였고, 수도사들이 예배를 드렸던 ‘지하 성당’도 있으며, 이런
동굴은 아주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고 했고, 관광객을 위해 아주 작은 부분만 공개하고 있다.
이곳을 나와 정원을 따라 내려오면 십자가 찬양교회 앞 전원에 핀 흰 장미가 핀 것을 보고 가이드는 10월 말에
장미가 피는 것이 신비롭다고 했는데 신비한 장소의 힘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정원을 지나 철문을 나아가면 도로이고 이곳에서 차를 타고 구시가지로 향하다가 마린스키 궁전을 들렸다.
10. 생명근원 교회(Church of the Life-giving Source): 1632~1657년 사이 봄의 축복을 받은 처녀의 이름으로
세워진 동방정교회이며. 성도들이 출입하는 문은 외부로 되어 있어 입장권 없이 들어 갈 수 있다.
이 교회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 250m 쯤 떨어진 곳에 있는 러시아 동방정교회인 안노자카티예비스키 흐람
업츠 Mp 교회가 있으나 뜻을 알 수 없으며, 또 성모탄생교회가 있고, 옆에는 벨타워가 있다.
11. 안노자카티예비스키 흐람 업츠 Mp(Annozachatiyivsʹkyy Khram Upts Mp): 코사크 스타일의 아름다운 .
건물로 키예프의 알렉산더 노비츠키의 기부로 1679년 동굴입구 위에 세워진 러시아 정교회이다.
12. 성모 탄생 교회(Nativity of Our Lady Church):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교회이며, 그 옆에는 19 세기의
많은 정치가와 군인이 묻혀있는 묘지가 있다.
13. 벨타워(Belltower): 1761년 많은 동굴을 위해 건축된 종탑으로 당시에는 라브라를 방어 시스템의
일부였고, 현재는 성모 탄생 교회의 종탑이다.
[우크라이나 국회(Verkhovna Rada)]
왕궁으로 가는 중에 우측에 핵전쟁을 대비하여 만들었다는 지하철(PEOTPAH)은 지하 105m 내려가 세계 최고의
깊이라고 가이드가 자랑했는데 우리 일행 사모님이 북한은 그 보다 더 깊다고 해서 그를 멋졌게 했다.
그래서 인터넷에 검색을 했는데 유사시 핵공격의 방공호로 1973년부터 운행된 북한의 평양지하철은 100∼150m
깊이에 만들어졌다고 했으니 사모님 말이 맞았다.
원형의 특이한 건물은 DHL 고속 서비스 포인트(Express Service Point)이라고 하고, 그 뒤에 있는 큰 건물은
다이아몬드 언덕(Diamond Hill)이라는 빌딩이고, 10분도 안 되어 마린스키 궁전에 도착했다.
궁전 입구에 있는 건물은 우크라이나 국회(Verkhovna Rada, 베르호브나 라다)이며, 마린스키 궁전은 대통령이
국빈을 맞이하는 영빈관과 관저로 사용하고 있고, 국빈이 오면 신호들을 끄고 수신호로 한다고 한다.
대통령전용 헬기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오늘 같은 추위에 미니스커트와 반팔을 입은 청년들이 높이뛰기를
하려는 것 같아 사진을 찍고 싶어 ‘빨리 뛰라’라고 외치자 뛰기는 했지만 높이는 뛰지 못했다.
[마린스키 왕궁(Mariyinsky Palace)]
마이단 광장 동남쪽 1.3km 거리에 있으며, 1744~52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여황제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재위
1741~62년)가 건설했는데 1754년 그녀는 에르미타주 박물관(겨울궁전)도 건축했다.
겨울궁전과, 룬달레 궁전을 설계한 프란체스코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Francesco Bartolomeo Rastrelli)가
설계했으며, 1870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 딸인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를 기념하기 위해 지금과 같은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1709년 출생한 그녀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지적이고, 활달하며 뛰어난 재능까지
갖추어 아버지 표트로와 어머니 예카테리나의 모든 것을 닮아 왕실 근위대와 모든 사람에게 인기가 대단했다.
이반 6세의 섭정자들이 그녀를 '수녀원으로 추방하겠다.'고 위협하자 뜻을 같이하는 궁정관리와 프랑스대사의
협력을 얻어, 1741년 반란을 일으켜 이반과 어머니 그리고 협력자를 체포하였다.
관리와 주요성직자들을 소집하여 황제로 선포하였고, 아버지정치를 모방했으나 정치보다는 화려한 궁정생활과
쾌락과 멋진 서구 옷을 사들이는데 열중했으며, 엄청난 비용을 들여 상트페테부르크에 겨울궁전을 지었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작센, 스웨덴, 러시아가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 하노버, 영국이 동맹을 맺어 서로 맞서 7년
전쟁(1756-63)을 시작하였으며, 프로이센은 패배직전에 그녀가 죽어 황제는 조카 표트로 3세에게 넘어갔다.
러시아 표트르 3세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대왕) 2세를 거꾸로 돕는 바람에 기적적으로 살아나 슐레지엔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냈다.
[구시가지로 향하면서 보이는 것들]
제일 처음 만나 것은 20세기 초 반에 만들었다는 우크라이나 국립미술관(National Art Museum of Ukraine)으로
정면 양쪽에는 사장상이 있으며, 온통 시멘트 색이라 우중충했고, 같은 방향으로 코발트색의 건물이 보였다.
이 색을 우크라이나 상징 색으로 벽에는 하얀 조각도 있는데 이 건물 1층엔 산파올(SANPAOLO, 성 바울)로
식당이 있으며, 반대편으로 발레리 로바노프스키 기념비(Monument to Valery Lobanovsky)가 있다.
이 기념비 구소련과 우크라이나 축구의 명감독으로 전 세계 축구에 과학기법을 도입한 사람이고, 그 옆에는
흰색과 우크라이나 색으로 아름답게 장식한 주랑(콜로네이드) 건물도 있다.
정면의 의회 센터 우크라이나 하우스(Congress Center Ukrainian House)를 보고 좌회전하면 우측으로 보이는
알파 뱅크(Alfa-Bank)를 지나면 커피 전문점과 노동 연대 기념물이라는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이 노동조합 건물(Trade Union Building) 이며, 이 건물을 안고 우회전 하면 좌측이 독립 광장이 있고,
대각선으로 2층 복도 전체가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둘러싸인 흰 건물로 보인다.
이 건물이 국립 차이코프스키 음악 아카데미(The National Tchaikovsky Music Academy) 이며, 그 옆에 있는
민속가게(Folkmart)는 독립광장에 왔을 때 들렸고, 안드레아 교회 그림이 있는 접시를 샀던 곳이다.
독립 광장 중앙 너머로 보이는 건물 좌측은 우체국이고, 우측 끝이 핀 은행(Fin Bank)이며, 광장 끝 부분에는
주황색 건물 위에 황금빛 천사상이 있는 리아드스키 문(Lyadsky gate)이 있다.
이은 1151년 키예프의 남쪽 문으로 세워졌으나 1240 년 바투 칸(Batu Khan)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2002년 복원
될 때 키예프의 수호성인 마이클 대천사를 청동위에 금으로 도금해서 세웠다.
[성 소피아(St. Sophia's) 성당]
얼마가지 않아 식당이었고, 점심식사 후 키예프 가장 중심지역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으로 향했고, 저 멀리
황금수도원으로 유명한 ‘성 미카엘 성당’도 보였으며 소피아 성당의 벨 탑 앞에는 무덤이 있었다.
주 경찰과 키예프 법원(Pechersk District Court of Kyiv)이 있는 건물과 멀리 소방 감시탑(Fire watchtower)
보이며, 그 좌측으로는 의류와 시계 등을 파는 멋진 상가가 있다.
TC는 대성당(Cathedral)에는 대주교가 있으며, 그가 죽으면 성당에 무덤을 쓰지만 이 무덤은 표지도 없다고 했다.
76m의 종탑은 바로크 양식으로 1699~1706년에 세워졌고, 정문 역할을 하고 있어 그 아래를 통과 하니 입에서
‘야~ 예쁘다!’라는 탄성이 나왔으며, 전면 중간 중간에 본래 모습인 벽돌을 볼 수 있도록 원형 그대로 두었다.
중앙지붕만 황금 돔이고 나머지 돔 지붕은 푸른색으로 벽은 흰색인데 가이드는 988년 키예프 왕 블라디미르
1세가 그리스정교로 개종하여 정식종교가 되었고, 11세기 백성들이 그리스정교를 믿도록 이 성당을 만들었다.
성당을 만들 때 동방정교회 상징인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 있는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모방했다고 하는데
외형은 닮은 곳이 없지만 ‘지혜’의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 ‘소피아’를 빌려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 키예프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의 지시를 받아 교회의 성직위계를 만들었으니 그 영향도 있었겠지만 외형은
전혀 아니며, 199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은 이 성당의 키예프 건축양식이 후에 러시아 정교회의 건축과
종교 문화에 본받을 만한 룰 모델이 되었기 때문이며, 동유럽의 성당 중에 가장 크고 유명한 성당이다.
세계적으로 탁월한 건축물로 손꼽히는데 러시아성당양식인 양파(성령의 불꽃) 모양을 전파한 건물이며, 안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어 남는 것이 없어 아쉬웠고, 야로슬라프(재위 1019년∼1054년)의 이야기를 했다.
그는 성 소피아를 건축했고, 이곳에 학교를 세워 여성도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으며, 최초의 도서관을 세우기도
했는데 1236년 몽골의 침입하여 성당을 파괴했는데 17~18세기에 복원하면서 내부는 대부분 원형대로 했다.
외부는 바로크 양식으로 바꾸었는데 11세기의 천년 된 모자이크 그림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성당의 하나라고
하며, 이 성당 중심에 있는 보물로 여기는 마리아가 바로 대표적인 그림이라고 한다.
몽골의 파괴 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황에도 파괴되지 않았던 마리아 그림은 그 누구도 부시지 못하는 신성한
그림으로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믿으며, 프레스코 화는 흰 바탕을 칠하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린다.
마르기 전 빨리 그려야 보존이 오래 가며, 그리고 갑자기 야로슬라프 왕의 딸들은 프랑스, 헝가리, 노르웨이
왕과 혼인을 했으며, 자신의 여동생들을 폴란드 국왕, 동로마의 황자와 혼인을 시켰다는 이야기를 했다. .
프랑스국왕 앙리 1세에게 시집 간 안나 야로슬라프나는 1050년 보낸 편지 내용에 '아버지께서 저를 보낸 나라는
정말 야만적인 나라예요. 주택은 어두침침하고, 성당은 끔찍하고, 문화는 미개해요.'라는 내용이 있다.
당시 키예프 문화가 프랑스보다 앞서 있어 안나가 프랑스에게 전해 주었고, 그리고 자신도 스웨덴 공주와 혼인을
맺는 등 적극적인 혼인 외교정책을 펼쳐 전쟁을 피하고 국가를 안정시켜 최전성기를 맞이했다고 한다.
여러 나라에 시집간 딸들과 여동생들은 이 성당을 모델로 삼아 성당을 건축했고, 야로슬라프 동상은 황금문에서
있으며, 키예프 시 상징인 2개의 성당 중에 하나인 ‘성 미카엘 수도원’으로 향했다.
[보흐단 흐멜니츠키(Bohdan Khmelnytsky) 동상]
1617년 우크라이나 귀족으로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맹의 지배할 때 코사크와 군사 활동을 하였고, 1648년
우크라이나의 독립전쟁을 개시하였으나 전쟁 중에 죽었으며, 이 나라 돈 50.000 흐리브냐(uah)에 도안되었다.
보흐단 흐멜니츠키(1595~1657년)는 1617년부터 루블린 연합(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정규 카자크 부대에서
활약하였으나 폴란드 귀족과 분쟁으로 자신의 영지에서 주도권을 빼앗기고 카자크 요새로 도망갔다.
1648년 무장 반란을 일으켜 폴란드 군대를 여러 차례 격파하여 카자크 수장국의 수장이 되었다.
1651년 베레스테츠코 전투에서 패하여 같은 그리스 정교회를 믿는 러시아에게 자치권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지원을 요청하여 수복했으나 이것으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오랜 지배를 받게 되는 빌미를 제공했다.
1651년의 무장 반란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쇠퇴시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지배로 넘어 갔다.
1905년 오피이브스카(Sofiyivska) 광장에 세운 보흐단 흐멜니츠키 동상’은 소피아성당을 보고 있다.
[블라디미르 언덕(Volodymyr Hill)에 있는 것들]
이 언덕 동쪽엔 성 미카엘 성당이 있고, 북동쪽에 있는 후니쿨라를 타고 내려가면 예수탄생 교회기 있고, 북쪽
정면에 주랑(콜로네이드)이 있는 건물이 우크라이나 외무부((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Ukraine)이다.
서쪽엔 국립외교학원(Diplomatic Academy)과 그 앞 광장엔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올가(Olga) 동상이 있는데
그의 역사를 살펴보면 류리크 왕조의 후계자 올레크가 882년경 키예프를 정복해 노브고로트에서 수도를 옮겼다.
올레크는 912년 죽어 후계자 이고리(재위 912~945)가 재위하였으며, 그는 903년 영리함과 미모에 대담함까지
갖춘 올가를 아내로 삼았고, 이고리가 죽자 올가(섭정 945~969)는 최초로 키예프 공국을 다스렸다.
955년 올가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에게 최초로 세례를 받아 기독교 도입의 기회를 열었는데 이 때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부터 청혼을 받을 때가 결혼한 지 32년 되는 해이었으니 그녀의 미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아들 스뱌토슬라프(재위945~972)는 영토를 더욱 넓혔고, 그의 아들이 유명한 블라디미르 1세(재위 980경~
1015)로 성 블라디미르라고 부르는 류리크 왕조의 통치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블라디미르는 최초의 키예프 루시법전을 편찬했고, 올가 동상 우편에 키릴문자를 만든 키릴로스와 메토디우스
형제의 동상도 있는데 이 형제는 9세기 동로마제국의 선교사로 슬라브족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파송됐다.
형제는 파찰음이 많은 슬라브어를 기록하려고 라틴과 그리스문자, 글라골문자를 변형시켜 만든 것이 키릴문자로
그들 형제를 불가리아와 그리스가 서로 자국인이라 주장하고, 키릴 문자도 자국의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한다.
키릴 문자를 받아들인 러시아가 지배했던 동유럽, 발칸 반도, 중앙아시아, 몽골 등지에서 사용한다.
올가 좌측에 있는 동상이 성 앤드루 동상으로 그는 우크라이나 정교를 도입한 성자라고만 알뿐이나 그의 이름과
같은 성 안드리 교회와 북쪽으로 앤드루 거리가 있는데 이동상과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성 미하일 황금 수도원(St. Mikhail Golden Monastery)]
우크라이나 색이라고 하는 연초록 하늘색 벽에 흰 색깔이 들어가고, 지붕은 황금 돔이라서 ‘성 미하일(미카엘)
황금 돔 수도원’이라고 부르며, 12세기 대천사 미하일에게 헌정하기 위해 건축되었다.
11세기에 만들어진 성 소피아 성당과 함께 역사적인 건물이 서로 마주보고 이 지역이 아주 특별한 곳이라고
하며, 수도원 벽에는 유로 마이단 시위 시절에 경찰대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사진이 있다.
이제는 내부로 들어가 가이드의 설명 없이 눈으로만 화려하게 장식된 것을 구경했는데 내부는 좀 어두웠으나
남을 위해기도 하는 즉 중보기도(仲保祈禱)를 위해 켜 놓은 촛불만 밝게 빛났다.
이 수도원은 무신론을 주장하는 소련의 공산당 시절에 파괴된 것을 1998년에 재건했으며, 외벽을 밖에서
지지하는 기둥형태의 고딕건축 구조기술에 하나인 플라잉 버트레스(flying buttress)가 측면에 있다.
※성 미하일 수도원: 1108~13년 키예프 대공국 스뱌토폴크 2세 대공이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원 건축양식으로
건설되었고, 1240년 몽골 제국의 침공하여 파괴하였으나 1496년 동방 정교회 수도원으로 복원되었다.
1108년 스뱌토폴크 2세 부인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성녀 바르바라의 유품을 이곳으로 옮긴 뒤부터 순례지가
되었고, 18세기 수도원 외부만 우크라이나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 개조하였다.
1934~36년 소련이 수도원을 철거하고 정부청사를 세웠으며, 1991년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수도원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1999년 완료된 수도원을 키예프 총대주교좌 우크라이나 정교회에 양도하였다.
※미가엘(Mihael): 대 천사장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영어- 마이클(Michael), 마이크(Mike), 미키(Mickey)가
있으며, 스페인- 미구엘(Miguel), 러시아- 미하일(Mikhail), 미카엘(Michael)로 표기된다.
※유로 마이단(Euro Maidan) 시위: 유로(유럽), 마이단(광장), ‘유럽광장’의 의미로 친 러시아계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2013년 11월 유럽연합과의 차관협정체결 중단을 선언하고, 러시아로부터 차관을 얻으려했다.
유럽파인 야당세력이 불만을 가지고 11월 21일부터 시위가 촉발되었고, ‘베르쿠트’라는 특수 경찰대가 시위대의
강경진압과 이 나라 지역갈등, 러시아, 유럽, 미국 등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사상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
마이단 광장, 독립 광장, 성 미카엘 광장에는 건물지붕에 배치된 스나이퍼(저격수)들이 시위대를 정조준 사격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공식통계로 2013년 11월~2014년 2월까지 시위대 104명이 총격 등으로 숨졌다.
시위진압을 하던 경찰과 보안요원 수십 명도 숨졌고,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러시아로 망명하여 2014년 2월 서쪽이
정권을 잡자 2월28일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침공하여 세바스토폴의 청사, 군사기지, 공항을 점령했다.
3월16일 크림 반도 주민투표는 96.7% 찬성으로 러시아로 편입하였다. 6724.25
성 미하일 수도원 전면 벽에는 유로 마이단 시위 때 희생된 107명의 사진이 있는 곳은 발표된 사망자 104명과
비슷하여 사망자로 보였고, 아래 사진에는 화염 속에 저항하는 시위대 사진이 있다.
288 명의 사진이 있는 곳은 다친 사람으로 보였으며, 그 앞에는 꽃과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는 병들이
놓여있었는데 아마도 촛불을 키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쪽 가옥 벽에 그려진 사람도 시위 때 희생자라고 하는데 아마도 가족이거나 가까운 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니쿨리 후니쿨라(Funiculi Funicula)]
블라디미르 언덕 북동쪽에 1904년에 개통한 후니쿨라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일정에 없어 타 본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타게 되어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라는 단편소설의 제목이 생각났다.
가이드는 준 티켓은 둥글게 생긴 검은 플라스틱을 넣고 후니쿨라를 타고 내려가면서 보이는 드네프르 강과
다리들이 보였고, 다 내려가면 출구 우편에 비즈네스 첸트 볼라디미르(Biznes Tsentr Volodymyrs) 있다.
건물의 용도는 알 수가 없었고, 바로 정면에 예수탄생 정교회(Nativity of Christ Church)가 보이며, 교회 우측
뒤로 보이는 흰 건물은 드네프르 강 항만(Kyiv River Port) 역사 건물 이다.
좌측으로 보이는 붉은 건물은 도서관, 중간 건물은 소비에트 시절에 만든 건물이고, 그 옆 큰 건물은 페어몬트
그랜드 호텔이며, 다시 후니쿨라를 타고 올라가 북서쪽 500m 언덕에 있는 안드레아 교회로 향했다.
[성 안드리 교회(St. Andrey Church)]
가이드는 이 교회에서는 아무 설명 없이 30분간의 자유 시간을 주었으나 시간을 보낼 곳이 없어 10분만하기로
하고, 외장이 너무 예뻐서 입장하려했으나 지금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어 요금을 내야하기에 포기했다.
광장에는 청동으로 만든 숙녀와 무릎 꿇고 있는 남자의 동상이 있는데 2사람의 코를 얼마나 많이 만졌는지 무척
반짝였는데 이것이 앤듀루 이름을 의미하는 ‘남자답고’ ‘씩씩한’ 모습인가?
서쪽에 역사박물관이 있고,, 북쪽엔 앤드류 거리가 있는데 인터넷에서는 이 교회는 러시아황후 방문 기념으로
지어진 푸른 돔의 아름다운 안드레아(상트 안드레예프스카야) 교회로 18세기 바로크 양식이라고 한다.
이 교회는 너무 예뻐서 교회 모습이 있는 접시를 독립 광장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샀다.
※앤드류(Andrew): 그리스도 12사도 중 하나 안드레(Andre)서 유래한 ‘남자다운’ ‘씩씩한’ 뜻으로 요한의 아들,
베드로의 형제로 영어- 앤드루, 프랑스, 포르투갈- 앙드레, 안드레(Andre), 폴란드- 안제이(Andrzej), 헝가리-
앤드라스(Andras), 덴마크- 안데르센(Andersen), 그리스, 독일- 안드레아스, 러시아- 안드레이, 이탈리아-
안드레아(Andrea), 애칭으론 '앤디(Andie·Andy)', '드루(Drew)' 등이 있다.
성씨로는 앤드루스(Andrews)와 앤더슨(Anderson)이 있다.
[독립 광장(Independence Square) 관광]
독립광장으로 향하면서 가이드는 우크라이나는 밀과 돼지고기가 유명하다고 했는데 일행 중 한 분은 이 밀로
수제비를 해 먹어보았는데 아무 조미료 없이 만들었으나 너무 쫄깃하고 구수했다고 한다.
쌀은 생산이 안 되어서 밀이 주식이라고 하며, 또 하나 유명한 것이 소피아 로렌이 주연을 했던 해바라기인데
이 영화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해바라기 보면서 발칸 TC가 버스에서 틀어줬다.
이 나라는 해바라기 오일도 유명하다고 발트 TC가 소개했고, 차는 독립광장 근처에 멈추었으며, 가이드를
따라 가면서 우크라이나 각료회의(Cabinet of Ministers of Ukraine)와 우크라이나 호텔을 봤다.
국제문화예술센터(International Center of Culture and Arts)와 티켓판매대행사를 겸하고 있는 건물 앞에
있는 꽃시계(네베스냐 소트냐, Nebesna Sotnya)가 있었다.
꽃시계 앞에는 2013년 11월과 2014년 2월에 있었던 우크라이나 민주화를 위한 유로 마이단(Euro Maidan)
시위 희생자의 사진이 있고, 청년은 제단에 놓을 물품도 팔았다.
가이드는 시위자에게 발포한 사람은 모르지만 러시아에서 보낸 스나이퍼(저격병, sniper)로 추측할 뿐이라고
했고, 좀 더 가면 외국의 침략에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는 우크르쿠프스필카(Ukrkoopspilka) 건물이 있다.
건물 좌측에 관광하기 좋은 곳에 있는 크레샤틱 키브 호텔이고, 코너가 노동조합건물(Trade Union Building)로
2014년 2월 18일 유로 마이단 시위의 지휘하다가 경찰의 공격으로 불탄 것을 2014~18년 재건축 했다.
1991년 독립을 기념하는 독립 기념탑(Independence Monument)이 있는 독립 광장에 도착했고, 기념탑 꼭대기
여신상이 있으며, 옆엔 국립 차이코프스키 음악아카데미(National Tchaikovsky Music Academy)가 있다.
이제는 아카데미 옆에 있는 민속가게로 향했으며, 이곳에서 안드레아 교회 그림이 있는 접시를 샀고, 이 가게를
나와 지하에 있는 쇼핑몰에서 시간을 보냈고, 이제는 황금 문으로 향했다.
쇼핑을 줄이고 우크라이나를 세운 4명의 ‘영웅들의 동상’ 이나 ‘마이단 광장’을 보았으면 좋았을 터인데...
[황금의 문(Golden Gate)]
소피아 대성당 남쪽 500m 거리엔 예전 키예프공국을 들어갔고, 양쪽엔 긴 성벽이 있었으며, 내부가 금빛난다고
붙여진 ‘황금 문’은 11세기 건설된 키예프 성채의 정문으로 1240년 몽골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1982년 복원했으며, 문 앞에는 소피아 성당을 만든 야로슬로브 동상은 키예프 공국을 들고 있으며, 남쪽엔
우크라이나 국립오페라극장이 있고, 키예프 국립 오페라 극장(Opera house)과 국립 서커스(National Circus
of Ukraine) 공연장를 지나 호텔에 도착하여 키예프 관광을 마쳤다.
[8일] 18년 10월 24일 수요일 ●일정: 09: 50(PS 57) 오데사 향발→ 10: 50 오데사 도착 관광[1 보론초프
궁전 2 예카데리나 2세 동상 3 포템킨 계단 4 푸시킨 동상 5 시청 6 오페라 발레극장 6 시 공원 7 파시지 호텔
8 대성당 광장 → ALEXANDROVSKIY 호텔
[오데사(Odessa) 역사] 인구 100만 명
수도 키예프에서 남쪽으로 443㎞ 떨어진 오데사는 고대에 취락지가 형성되었으며, 지금의 면모는 14세기에
세워진 타타르족의 하지베이 요새에서 비롯되었고, 요새는 그 후 폴란드로 넘어갔다.
1764년 투르크에 점령되었고, 1789년 러시아로부터 대 공격을 받았으며, 1791년 러시아에 합병되면서 1792~
93년 새 요새가 세워졌고, 1794년 해군기지와 무역용부두가 건설되었다.
모든 건축들은 러시아제국 시절 건축했으며, 1795년 오데사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고대그리스의
취락지 오데소스의 이름을 따서 오데사라고 했다.
1881년 유대인선술집에서 러시아인이 쫓겨난 것이 발단이 되어 유대인 학살사건이 있었으며, 오데사는 5월
3~8일까지 5일간 계속되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이것을 기념하는 홀로코스트(Holocaust) 비가 있다.
1866년 철도가 들어온 후 급성장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은 제2의 항구이고, 러시아 제3의 도시가 되었으며,
주요수출품은 곡물이었고, 1905년 러시아혁명의 중심지에 하나였고, 전함 포툠킨호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1925년 무성영화 ‘전함 포툠킨’이 이곳에서 만들어졌고, 2차 세계대전 중 1941년 8월 8일 루마니아 공격을
지원한 독일군에 대항하여 69일간 방어하여 ‘영웅도시’로 칭호를 받았으나 심한 피해를 입었다.
독일군에 900일 동안 점령당했고, 2014년 ‘시청사 거리’는 크림사건 때 친서방파사람들이 친러파사람들을
학살한 추모공원의 역할을 하며, 오데사는 친서방파보다 친 러시아파가 더 많다.
언어도 주로 러시아어를 쓰고 있으며, 훌륭한 부두와 선박 수리 장을 갖추고 있는 우크라이나 최대 항구로
철도망도 몰도바와 루마니아의 모든 지역들과 잘 연결되었다.
예술의 어머니라고 할 만큼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여 카페, 샵, 식당 이름도 예술가 이름이다.
[오데사 필하모닉 홀(Odesʹka Oblasna Filarmoniya) 식당으로 향하면서]
오데사 공항에서 남자가이드를 만나 차를 타고 시내로 향하면서 오데사에 대한이야기를 했는데 역사와 중복되지
않는 것만 간추려 기록하면 소비에트 시절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된 곡물 80%가 이 항구를 통해 수출되었다.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하면서 경기는 급격히 악화되었는데 그것은 모든 물동량이 끊기면서 쇄락하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러시아로 남을 것인지를 두고 대립 중이며, 찬성과 반대는 반반이라고 한다.
좀 이른 시간이지만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간 식당은 궁전 같이 생긴 웅장했는데 돌아와 찾아보니 필하모니
홀로 식당 입구에 걸려 있는 포스트가 왜? 있었는지 알게 되었으며, 손님은 우리뿐이다.
[쵸쉰 다리와 보론초프 궁전(Vorontsov Palace)]
식당을 출발하여 항구를 통과하면서 오데사에서 가장 유명한 ‘포템킨 계단’과 부두의 시설들을 보면서 포템킨
계단 북쪽 400m 지점에 있는 공원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사랑의 자물통이 가득한 걸 치대이다.
바다 쪽으로 있는 쵸신교에 무질서하게 있었던 것을 없애고 이곳에 모아둔 것으로 쵸신교 위에서 투신자살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며, 당시에는 가장 길었던 이 다리 별명은 장모님 다리(Mother in law Bridge)라고 한다.
1950년 대 구소련 때 높은 지위에 있었던 한 공산당원이 장모님이 집에서 주무시지 않고 빨리 가도록 놓았는데
주위의 돌들은 모두 이탈리아에서 가져 온 것이며, 다리 밑에는 사람이 살기 힘든 스레드 지붕의 폐가도 보였다.
이곳은 공산당원의 사랑 때문에 연인들이 많이 찾는 데이트 코스로 작은 ‘사랑의 다리?’도 있고, 좀 더 가면 바다
쪽으로 ‘보론초프 궁전'과 뒤편에는 예쁜 주랑(콜로네이드, colonnade)도 보인다.
크림반도에 20년 동안 짓은 큰 보론초프 궁전이 있고, 이곳은 작은 궁전으로 작년에고 올해도 수리 중이며,
당시 책 가격이 엄청 비싸서 책 한권이 소 3마리 가격인데 이 많은 책들을 도서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책은 하루만 빌려주고 반드시 반납을 해야 하는데 반납을 하지 않거나 다시 빌려가려면 책은 꼭 사야한다고
하며,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빌려주려고 조치인 것 같았다고 했다.
코인이 그려져 있는 기둥(Pam'yatnyk Olʹviyi) 앞에 섰는데 이곳이 그리스 사람을 뜻하는 그릭 파크(Greek
Park)가 있는 곳으로 이 공원은 시티 공원과 연결되며, 시티 공원은 시청사에서 끝난다.
오데사 이름의 어원인 오데소스는 그리스인들이 살았던 취락으로 그들이 사용했던 코인을 그려 놓은 것이며,
이곳은 처음 폴란드- 리투아니아가 점령했고, 다음은 오스만 터키가 다음은 러시아 제국이 점령했다.
이제는 넓은 가로수 길을 영어로 불루버드(Blvd)라고 하는데 이 산책로 중간에 ‘포툠킨 계단’과 ‘리슐리외
동상’이 있고, 길 끝에는 푸시킨 동상이 있으며, 가로수로는 마로니에(marronnier) 이다.
이 나무는 체스낫(chestnut)이라고도 하며, 열매는 반들반들해서 먹음직스럽지만 독성이 있어서 먹을 수 없다.
인가와 공원 사이에는 불루버드 산책로가 있고, 공원과 항구 사이엔 ‘프리모르스키 (Primorsky) 대로’가 있고,
프리모르스키는 러시아어로 ‘바다와 접해 있다’라는 뜻으로 한자로 훈차한 것이 연해주(沿海州) 이다.
러시아의 극동 즉 우리나라 두만 강 위에 있는 ‘프리모르스키 주’의 행정 중심지가 블라디보스토크이며, 이제는
비록 볼 것은 없지만 오데사에서 가장 유명한 ‘포툠킨 계단’에 도착했다.
※보론초프(Prince Vorontsov, 1714~ 67): 외교관인 세미욘 R. 보론초프의 아들로 1782년 출생하여 1856년
오데사에서 사망했으며, 18세기 러시아 정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801년 육군에 입대 후 나폴레옹 전쟁(1806~15)에 참가하여 1815~18년 프랑스 주둔 러시아 점령군을
지휘했고, 1823년 크림반도와 오데사를 포함한 인구가 희박한 변경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공정하고 효율적인 행정체계를 확립하고 러시아 정착민들의 대거 이주시켜 무역과 산업의 발전을 크게
촉진시켰고, 1844년 카프카스 지역의 총독과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통제권을 확고하게 다졌다.
1848년까지 다게스탄의 영토를 러시아의 지배하게 하였으며, 농노해방과 온건 개혁조치를 지지했으며,
1853년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1856년 육군원수가 되었으나 사망했다.
[리슐리외(Richelieu) 동상, 포툠킨 계단(Potemkin stair)과 후니쿨라]
포툠킨 계단입구엔 ‘리슐리외(쥭 제 레쉘야, Duc de Richelieu) 동상’은 ‘듀크 상’이라고도 하는데 그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피해 러시아 군에 입대하여 장군에 올랐고, 후에 오데사 초대총독에 임명되었다.
그는 11년간 총독을 하면서 도시계획을 세워 도시민에게 땅을 무상으로 나누어주고, 1년 이내 집을 짓지 않으면
다시 회수하는 방법으로 4천 채의 건물을 세웠다고 하며, 경제, 문화 예술을 크게 발전시켰다고 한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1세의 명령으로 동상이 세웠으며, 동상은 세계 2차 대전 폭격으로 손가락 하나를 제외하고
기적적으로 남았고, 이젠 오데사의 가장 유명한 포툠킨 계단을 둘러볼 차례이다.
포툠킨 계단은 영화의 한 장면을 모르면 그저 평범한 계단인데 1905년 일어난 전함 포툠킨호의 반란을 혁명
20주년 기념으로 1925년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감독이 연출한 소련의 무성영화이다.
사실을 주제로 만든 영화지만 이 계단사건은 사실이 아니나 더 유명한 것은 영화 속의 한 장면으로 아래 ‘전함
포툠킨과 계단’에서 기록했으니 참고하시고 우리는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가 후니쿨라를 타고 올라왔다.
포템킨 계단은 1841년 동쪽 흑해 쪽으로 역사적인 계단은 만들어졌으며, 높이 40m에 192개의 계단은 1928년
‘불바르 계단’에서 ‘포템킨 계단(Potemkin stair)’로 개칭했고, 영화 속의 명장면으로 유명한 계단이다.
계단 동쪽엔 리슐리외 동상에서 항구로 가는 후니쿨라(funicular)가 있으며, 러시아혁명 때 코사크 친위대가
시민들을 학살한 ‘프리모리스키(Primorsky) 장면’을 촬영한 계단은 표시가 안 나지만 아래가 넓고 위가 좁다.
넓은 부두엔 해양무역조합, 어부의 아내 동상, 성 니콜라이 교회가 있고, 가장 높은 건물이 이 오데사 호텔은
(Captain of the port of Odessa)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포템킨(포툠킨): 예카테리나 2세는 90여명 정부와 즐겼으나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여 업무를 엄격히 분리했고
예외로 투르크와 전쟁에서 승리하고 크림반도와 흑해로 진출하게 한 하급귀족 출신인 '포툠킨'이다.
1791년 죽을 때까지 여제와 같은 지위를 누렸고, 2년간 정부생활을 끝낸 뒤에도 계속유지 된 것은 그의 야심과
뛰어난 예지와 유능함을 겸비했기 때문이며, 1783년 투르크가 차지하고 있던 크림 반도를 빼앗아 병합했다.
예카테리나의 영광은 1787년 포템킨이 주선한 크림 반도의 항해로 그 절정을 이루었으며, 축제와 같은 분위기
속에 여제는 새로이 자신의 영토가 된 땅을 횡단했고, 오스트리아 황제, 폴란드 왕, 수많은 외교사절들이 왔다.
그녀를 축하하고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라고 불린 호화로운 행사를 즐겼는데 이렇게 불린 이유는 예카테리나가
배를 이용했고, 이 때 포템킨은 여제에게 치적을 자랑하고 빈민가를 숨기기 위해 여제가 이동하기 전 ‘위장(
세트장) 마을’을 옮겨 놓았는데 이를 ‘포템킨 빌리지’라고 하며, 겉만 화려한 거품경제의 경제 용어로 사용한다.
거짓을 정치적 용어로 사용할 때는 ‘포템킨 주의’라고 하며, 현재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미관, 관광, 교육장,
광고, 촬영, 훈련장소, 위장전술 등으로 ‘포템킨 빌리지’를 만들고 있다.
가옥은 전면만 있는 경우와 건물전체가 있는 경우, 마을과 도시 또는 무기와 유적 등의 유사품도 있으며, 경제
용어로는 ‘포템킨 빌리지’ 정치적 용어로는 ‘포템킨 주의’라고 하고, 거시기 크기가 큰 것으로도 알려졌다.
※전함 포툠킨과 계단: 1905년 여름 흑해 러시아함대 포툠킨 전함에서 혁명파군인들의 봉기로 포악하게 굴던
장교들이 바다에 던져졌고, 오데사 군항에 도착하여 혁명시민의 반란을 지휘했다.
다음날 진압을 위해 함대가 나타났으나 정부군함은 포툠킨 전함에 발포하지 않는데 그들은 학대받는 병사들의
마음이 서로 통한 때문이었는데 이 영화는 1925년 사실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혁명 선전용으로 만들어졌다.
계단의 학살 사건은 실재가 아니며, 혁명 때 있었던 '피의 일요일'(1905. 1. 22)을 이 계단에서 재현했는데
계단으로 대피하는 시위 시민을 아래에서 황제 친위 코사크 족 기병대가 막아섰다.
위에서 군대들이 열을 맞춰 계단을 내려가면서 학살하는 장면인데 가장 압권인 것은 유모차를 잡고 있던 검은
두건을 쓴 여자가 살해되어 유모차는 계단 아래쪽으로 구르면서 아기가 탄 유모차 이미지와 잔혹한 군인들의
모습이 교차되어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러시아 혁명(1905~17): 1905년 1월 제정 러시아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된 평화시위의 군중을 군대가 무차별
살상하여 절정에 이루었으며, 엄청난 파업으로 황제는 헌법제정과 의회의 창설을 약속했다.
정부가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군대의 통제권을 다시 장악해 혁명이 막을 내렸으나 1917년 3월 혁명은 차르
체제를 붕괴시키고, 11월 혁명에서 볼셰비키는 권력 장악에 성공했다.
[코사크(Cossack) 족과 카자흐(Kazak) 족]
1. 코사크 족의 코사크는 영어이며, 터키어로는 ‘자유인’을 뜻하는 카작(Kasak, kazak)이 어원이며, ‘대장
부리바’에 나오는 코사크 족은 2차 대전 때 러시아를 도운 족과 독일을 도운 족이 있다.
그들의 호전성과 잔인성은 항복한다고 치켜든 손마저 잘랐으며, 대화는 오직 칼로만 했고, 전쟁과 약탈을
직업으로 하는 용병들이며, 어릴 때 목축을 하면서 자연이 전사로 자랐다.
이처럼 독일과 소련에서 모두 '야만인'이라 불리면서도 그 양편으로부터 천부적인 전사들이라는 일치된 평가를
받았던 타고난 투사들이라 불렀던 그들은 유럽 정벌에 나섰던 칭기즈칸의 후손이다.
이들은 말 잘 타고 싸움 잘하며, 패배를 모르고, 자존심이 강해 어느 나라, 어느 정권에도 굴복하기 싫어하는
이 혈통 중에는 하나가 테러로 이름난 ‘체첸’인데 이들에게 잘 어울리는 직업이 군인이다.
250년간 러시아와 동유럽을 지배했던 제정 러시아의 황제들은 이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1918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공산혁명이 때 잔혹한 방법으로 시위를 진압하던 황제의 근위기병대는 모두가 코사크 족이다.
그 후 10여 년간 계속된 내전에서 공산당 정부의 적군(赤軍)에 최후까지 맞서 싸운 백군(白軍, 왕정 지지파)의
핵심도 코사크 족들이었는데 소련의 공산화로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갔다.
1939년 2차 대전 발발로 소련군복을 입고 다시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붉은 군대의 코사크들은
거주 지역에 따라 돈 강 유역의 돈 코사크, 폴란드 국경 스텝(초원)에 살고 있던 쿠반 코사크가 있다.
그리고 시베리안 코사크 등 있는데 이들은 복장은 소련군복보다는 고유의 양털모자와 체르케스카 코트를
입는 경우가 많았고, 전차보다는 말을 좋아한 것은 시대착오적이었지만 그 나름대로 쓸모가 있었다.
모스크바까지 진격했던 나폴레옹은 ‘코사크 기병대 1만 명만 있으면 전 세계를 정복 할 수 있다.’라고 했으며,
나폴레옹은 코사크 족보다 더 놀란 것은 추위에 강하고 눈 속에서 먹이를 찾아내는 강인한 말이었다고 한다.
또 겨울을 맞아 후퇴하는 독일군을 추격하는 눈 속은 자동차보다 훨씬 더 쓸모가 있는 게 말이었으며, 특히
'코사크가 뒤 따라 오고 있다'는 공포심은 소련군 몇 개 사단보다도 더 효과가 컸다고 한다.
1941년 소련 침공한 독일군을 가장 괴롭힌 것은 신출귀몰한 ‘파르티잔’이라는 러시아 게릴라들이었다.
이를 색출하고 토벌하는데 안성맞춤인 코사크 족은 대부분 소련시민이어서 소련군에 복무했지만 소속감도,
충성심도 없고, 높은 급료와 지위가 보장됐던 황제의 근위대 자리를 빼앗긴 소련정부에 반감도 있었다.
이들을 회유하여 높은 급료를 주고 독일군에 입대시켰는데 자발적으로 독일군을 돕겠다는 코사크도 있었으며,
이들은 소련만이 아니라 유고, 루마니아, 체코 등 게릴라 활동이 있는 독일 점령지에 투입되었다.
빨치산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유고슬라비아 게릴라들은 코사크란 말만 들어도 두려움에 몸을 떨었으나 1945년
독일의 패배로 독일군에 협력했던 코사크 족은 소련정부로부터 민족반역자 재판에서 대부분 사형되었다.
소련군에 종군했던 코사크는 무공훈장을 받아 '사회주의국가영웅'들이 되었는데 지금도 그들은 말 젖으로 빚은
술을 즐기면서 그들만의 생활 방식을 고집스럽게 지켜나가고 있다.
2. 카자흐 족의 카자흐 뜻은 코사크와 마찬가지로 ‘자유인’인데 독립인 또는 방랑자라는 뜻도 있으며, 이들도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코사크 조과 같은 몽골족이지만 사는 방식이 달랐다.
코사크 족은 전사의 집단이지만 카자흐 족은 유목민의 삶을 살아간 것이 차이가 있다.
현재 독립한 카자흐스탄에 가장 많이 살며, 인구는 720만 명이고, 러시아 혁명 후 부유한 사람들이 중국으로
도주하여 지금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에 125만 명이 살며, 몽골에 10만 명이 살고 있다.
[예카데리나(Catherine the Great) 2세 동상]
'예카테리나 광장‘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 했으나 광장보다는 주위 건물과 거리가 아름다웠고,
광장에는 ‘예카테리나 2세(재위1762~96)’의 동상이 있으며, 그는 오데사를 설립한 여황제이다.
그는 부동항이 필요해 제 2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항구로 오데사를 설립하여 1792년 오데사를 편입하고 1794년
도시 명을 오데사로 변경했는데 항구를 개설한 오데사의 원년으로 삼기에 창건기념탑이라고도 한다.
예카데리나 2세의 이야기는 룬달레 궁전에 기록되어 있다.
[알렉산드르 푸시킨(Aleksandr Pushkin) 동상]
푸시킨 동상으로 가기 위해 다시 ‘불루버드(블브드, Blvd) 산책로’에 들어섰고, 조금 가다보면 BC6~7세기에
살았던 그리스 사람들의 유적을 유리로 씌워놓았는데 야외박물관(Archaeological Excavations)이라고 한다.
야외박물관 속에는 유적보다 현대인이 행운을 빌며 유리 틈새로 던져 놓은 동전과 지폐가 더 많았고, 산책로
끝에는 1888년 세워진 ‘푸시킨 동상’이 있는데 그는 1년1개월을 오데사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가이드는 보론초브의 아내와 바람피운 이야기가 가이드북에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고 했으나 보론초브와
푸시킨은 몇 번이나 결투를 치른 후 결국 백작은 푸슈킨의 사면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도 거짓말?
푸시킨동상 뒤로 보이는 흰 건물은 ‘오데사 시청’인데 1906년 이전에는 금과 은 등을 교환하는 프레스센터였고,
이후로 시청 건물로 사용했다고 하며, 시청건물 전면에는 이오니아식 기둥이 장식되어 있다.
시청 앞에는 엄청나게 큰 프라다나스 나무와 30개가 넘은 도시를 가르치는 이정표(Distance Pointer)는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많은 도시를 나타내는 이정표인데 서울은 찾을 없었고, 모스코바까지는 1130km라고 되어있다.
사이로 오데사 고고학 박물관(Odessa Archeological Museum)이 보이며, 우축으로 돌면 해양 박물관
(Maritime Museum)과 해군박물관(Navy Museum)이 함께 있다.
앞거리에는 청동으로 만든 오데사 상징인 배의 닻 앵커 (Anchor)의 하트 모양은 ‘내 사랑 오데사(I Love
Odessa)’라는 뜻이라고 한다.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 유서 깊은 대 귀족가문 출신으로 어머니는 아브람 하니발의 손녀였고,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며, 근대 문학의 창시자로 데카브리스트와 관련된 정치시가 화근이 되었다.
1820년 키시나우로 유배되어 1820~23년까지 있으면서 ‘카프카스의 포로(1822)’를 썼고, 조지아 트빌리시의
오르벨리아니(Orbliani) 목욕탕을 극찬하며, ‘이곳보다 더 좋은 목욕탕은 없다.’라는 글을 남겼다.
카즈베키에서 3년간 머물렀고, 1823년 오데사로 이송되어 자신의 상관이자 지방 현지사인 보론초프 백작의
아내와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으며, 그는 몇 번이나 결투를 치른 후 결국 백작은 푸슈킨의 사면을 요구했다.
‘무신론 수업'을 받은 죄로 1824년 어머니 영지인 ‘미하일로프스코예’로 유배되면서 가장 왕성한 창작을 하였다.
1825년 일어난 데카브리스트 반란을 진압한 니콜라이 1세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푸시킨이 데카브리스트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1826년 모스크바 귀환을 허락하고 돌아온 그를 만나 개혁을 약속했다.
1831년 격렬한 구애 끝에 당대미인이며, 13살적은 18세 나탈리야(1812~63)와 결혼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그녀의 사생활은 문란하여 니콜라이 1세와 불륜의 관계를 맺기도 했다.
1837년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꾸민 음모에 말려들었고, 아내를 탐하는 남자들로부터 사랑과 명예를 지키려
부인을 사랑한 프랑스 망명귀족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해 치명상을 입고, 2일 후 죽었다.
그가 죽기 전 쓴 시가 유명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이며, 38세 나이에 죽은 것을 안타깝게 여긴 니콜라이
1세는 결투를 금지시켰고, 그가 죽은 후에 나탈리아는 황제애첩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며, 1844년 재혼했다.
2012년 6월 국내 건립을 추진하던 민관합동 운영기관인 한러대화(Korea-Russia Dialogue)가 건립한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앞에 건립된 푸시킨 동상이 있다.
[오데사(Odessa) 오페라 발레 극장]
오페라 발레극장으로 가는 보도 위에는 로스앤젤레스의 헐리우드 바인 거리(Vine St)에 유명한 스타의 이름과
손자국이나 발자국이 새겨져 있듯이 이 도시 출신으로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과 직업은 그림으로 그렸다.
처음 오페라 극장은 800명의 좌석을 가진 나무로 지어졌으나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87년 오스트리아 건축가가
설계한 네오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했고, 11년 동안 계속 증축되어 현재는 1636개의 좌석이 있다.
외부는 웅장한 바로크양식이며, 내부는 아기자기한 로코코양식이고, 내부 인테리어 하는데 금 9kg가 사용됐다고
하며, 이 극장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에 하나라고 했는데 그렇게 말해도 될 만하다.
입구 우측은 고대그리스 희극의 한 장면인 ‘새’를 조각했고, 좌측은 현대그리스 작가 에브리피디스(Evripidis)의
비극 ‘이폴리트(Ippolit)’ 장면을 조각했고, 정면 꼭대기 사륜마차를 타고 있는 조각이 있다.
이 조각은 음악여신 무즈(Muse)이며, 1주일에 4번 공연이 있고, 내부는 들어갈 수 없었으며, 극장 앞 정원에는
자메이카 로즈 홀에서 봤던 로열폰티아나 나무 같이 생긴 것이 땅을 향해 날개를 펼친 모습이었다.
경기가 나빠 몫 종고, 멋진 상가건물 200㎡의 1층만 가격이 5억2천만 원 한다고 하여 싸니 비싸니 논쟁을 하다가
우리나라 60평짜리 아파트 비하면 그래도 싸다는 결론으로 끝맺었고, 이제는 시공원에 도착했다.
[시 공원(City Garden), 파시지 호텔(Otelʹ Pasazh)]
오페라 발레 극장에서 직선거리로 500m 서쪽으로 가면 시 공원이 나오며, 그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레오니드
유티오소프(1895~1982년)라는 기념비(Monument to Leonid Utiosov)라고 하는 동상이다.
가이드는 재즈 음악가라고 했으나 인터넷에서는 영화배우로 오데사에서 출생하고 오데사에서 죽었으며, 그는
1934년 포템킨 영화 주연을 한 남자로 이 영화에만 출연한 사람이라고 한다.
긴 의자에 앉아 있는 그의 기념비와 함께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아 빈틈에 나도 같이 기념촬영을 했고, 동상이
쳤다보고 있는 곳에는 아르누보 양식으로 지은 아름다운 건물은 호텔이라고 한다.
돈이 부족해서 중단된 상태이지만 외부의 아르누보 양식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건축물로 같은 양식인 탈린의
톰페아 성은 아르누보 양식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으나 이 건물은 한눈에도 알 수가 있다.
공원을 한 바퀴 돌면서 지도에는 빈 의자는 일프와 페트로프 기념비(Monument to Ilf and Petrov)라고 하여
조금은 이상했으나 가이드는 오데사의 소설가가 쓴 것으로 유명한 ‘12번째 의자’를 의미한다고 했다.
시 공원 앞 남쪽엔 영어로 통행인이라는 파시지(Passage) 호텔은 19세기 건축된 아름답고 우아한 바로크
양식으로 유명한 건물로 지붕은 피라미드 형식의 유리로 자연채광을 했고, 현재 2년째 증축중이다.
호텔 내부는 쇼핑센터인데 독립 후 장사가 잘 되지 않는 다고 하며, 벽들의 조각이 너무 아름다웠고, 호텔을
나서면 서쪽 길 하나를 건너면 성당 광장과 대성당이 나오며, 먼저 광장으로 갔다.
※아르누보(Artnouveau): 불어로 ‘새로운 예술’ 뜻으로 19세기 말에서 1910년 사이에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한
장식양식으로 자연의 아름다운 곡선(덩굴, 잎 등)을 모티브로 삼았으나 기능성이 강조되면서 소멸했다.
[성당 광장(Cathedral Square)과 프레오브라젠스키 대성당(Preobrazhensky Cathedral)]
성당광장 중앙엔 미하일 보론초프 기념비(Monument to Mikhail Vorontsov)가 있고, 기념비 아래는 총독시절
중요한 사건을 조각해 놓았으며, 대성당에는 보론초프와 그의 부인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스파소 프레오브라젠스키 대성당(Spaso Preobrazhensky Cathedral)은 1930년 스탈린에 의해 파괴도기
전까지는 오데사의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교회이었으며, 지금은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다행이도 성당 안에서 사진이 가능했는데 아주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깔끔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아직도 수리를
하고 있었고, 서 있을 수 없는 사람만 앉을 의자만 있으며, 신도들이 앉을 의자가 없었다.
[오데사(Odessa) 관광]
시간이 남아 30분간 차를 타고 시내를 돌기로 했고, 차를 타려가다가 베드로와 가브릭 기념상(The Monument
to Peter and Gavrik)을 보았으며, 오데사 기차역은 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다가 1952년 다시 복구했다.
2006년 리모델링했으며, 기차역은 궁전이나 콘서트 홀 같이 너무 멋지게 생겼는데 키예프까지 가는 침대열차를
현대에서 만들었다고 가이드가 얘기했고, 오데사는 버스, 전차, 기차 등의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다고 한다.
가격도 저렴해서 130원 정도인데 65세 이상이면 무료이며, 정치인들과 주민들의 생각이 많이 다르다고 했는데
아마도 가이드와 주민들은 친 러시아 같았다.
우리 호텔에서 약 5km 동남쪽에 있는 4월 10일 광장은 타원형의 로터리 안에 있으며, 2차 대전 때 루마니아와
독일에서 해방된 40주년 1984년 세운 오벨리스크 꼭대기에는 승리하는 전사의 상징적인 황금별이 있다.
이 별을 승리의 날개(Wings of Victory)라고 하며, 이 탑은 고전적인 소비에트 기념비로 대리석 판에는 소련의
오데사 영웅 이름이 새겨져 있고, 동남쪽에는 아크 팰리스 호텔(Ark Palace)이 보인다.
새벽 산책하다가 이름 모르는 작은 교회도 있었고, 공원에서 법과 질서의 수호자를 기리는 기념비(Memorial
to Defenders of Law and Order)도 보았으며, 아침 식사를 마치고 몰도바 국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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