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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 카이사르
지금까지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파 사람들을 석방했지만, 코르피니오에서
석방한 요인들 중에는 에노발부스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특히
강한 인상을 주었어요. 에노발부스는 카이사르 후임으로 갈리아 총독에 임명된
인물이고, 따라서 카이사르에게는 당면한 최대의 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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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실을 안 키케로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적을
용서하는 카이사르와 자기편을 버리는 폼페이우스는 얼마나 다른가!”
“내가 석방한 사람들이 다시 나한테 칼을 들이댄다 해도 그런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소. 내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오. 따라서 남들도 자기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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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첸차에 도착하여 병사들 앞에 나타난 카이사르는 여느 때처럼 단도직입
적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전우 여러분(콤밀리테스), 나는 여러분에게 사랑받는
사령관이기를 원한다. 나만큼 여러분의 안전을 걱정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며,
또 여러분이 경제적으로 풍족해지고 전사로서의 명예가 높아지기를 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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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병사들이 무엇이든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둔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지시를 받는 사람이다. 지시를 내리는 자에게는
책임이 있고, 지시를 받는 자에게는 의무가 있다. 스승과 제자, 의사와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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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과 선원이 그런 관계다. 모두 각자의 임무를 완수해야만 좋은 성과도 기대
할 수 있다. 폼페이우스와의 대결에서 공정한 쪽은 나라고 확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도 나를 따라주었다. 하지만 입장이 아무리 공정해도, 그것을
실천해가는 단계에서 공정함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폼페이우스 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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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을 비난할 자격도 잃게 되지 않겠는가. 여러분은 로마 시민이다. 로마
시민인 이상, 올바른 처신을 망각하는 것은 결코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사방이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어요. 이어서 카이사르는 침묵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여러분의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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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는 요구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 군단의 군율에서는 최고의
중벌로 되어 있는 ‘10분의 1형’까지 언도했어요. 드디어 총사령관이 입을
열었어요. 하지만 ‘10분의 1형’을 취소하겠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형집
행은 당분간 연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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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는 이 패배로 9천 명이나 되는 병사와 40척의 배를 잃었을 뿐
아니라,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을 빼앗는 데에도 실패했어요. 아드리아 해의
맞은 편 연안을 확보하고 기다리는 폼페이우스를 공격하기에는 참으로
불리한 정세가 된 셈입니다. 이런 지경에 놓였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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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실패로 끝난 사태를 개선하려고
애씀으로써 불리함을 만회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것은 일단 그대로 놓아
두고 다른 일에 성공함으로써 정세를 단번에 만회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지요.
카이사르는 후자의 대표자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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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카이사르는 남을 증오하는 감정을 거부한 인간이었어요. 증오는
자기와 대등하거나, 자기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에게 품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절대적인 우위에 있다고 자부하는 카이사르가 열등한 사람의 감정인
증오감을 거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어요. 그래도 자기가 남보다 절대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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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월하다는 카이사르 특유의 자부심도 라비에누스에 대해서만은 조금 약해진
느낌을 줍니다. 문장에 나타날 정도는 아니고 행간에 감도는 정도이긴 하지만,
15년 동안 동지였고 게다가 단 하나뿐인 동년배였던 라비에누스의 배신을
카이사르도 완전히 삭이지는 못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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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 년 뒤 영국의 한 연구자는 이렇게 말했어요. “폼페이우스는 전쟁터에서는
카이사르가 상대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장군이었다. 그러나 디라키움에서 패배
한 카이사르는 맨 나중에 전쟁터를 떠난 전사였던 반면, 파르살로스에서 패배
한 폼페이우스는 맨 먼저 전쟁터를 떠난 전사였다. 그리고 단순히 재능 있는
사람과 천재를 구별해주는 것은 지성과 정열의 합일인데, 폼페이우스에게는
그것이 모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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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은 나라를 양분한 세력이 서로 힘을 겨루기 때문에 일어나는 투쟁입니다.
카이사르는 이런 의미의 내전은 루비콘 도하로 시작되어 폼페이우스의 죽음
으로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루비콘 강을 건넌 장면부터 시작되는 ‘내전
기’는 파르살로스 회전에서 끝나지 않고 폼페이우스의 죽음으로 끝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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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에도 ‘폼페이우스파’와의 전투는 계속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내전이
아니라는 카이사르의 ‘선언’이 아닐까. 마키아벨리는 민주적인 토론으로
매사를 결정하는 습관이 없는 민족에게 그런 습관을 이식하려고 애써봤자
헛수고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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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세계는 형식적으로는 독립국이지만 대외관계와 안전보장을 로마에 의존
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속국인 동맹국들과 로마가 직접 다스리는
속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로마가 속주 화를 되도록 피한 것은 안전보장비
때문이었습니다. 속주는 로마가 직접 통치하기 때문에 내외의 안전을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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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의무도 로마가 짊어집니다. 속주민은 속주 세를 내고 있으니까 안전보장의
의무는 없어요. 반면에 동맹국은 형식적이라도 독립국이기 때문에 로마인이
그 나라 국내의 안전까지 보장할 의무는 없어요. 따라서 속주세도 들어오지
않지만, 안전 보장비는 어느 시대에나 막대한 법입니다. 그리고 동맹관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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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니까 로마가 외국과 전쟁을 하는 경우에는 상호안전보장의 원칙에 따라
병력 파견까지 요청할 수 있어요. 동맹국이 파견하는 지원군의 비용은 그 나라
가 지불해요. 로마가 이런 나라들을 ‘로마인의 친구이자동맹자(소키우스 에
아미쿠스 포풀리 로마니)’로 대우한 것은 동맹관계를 맺는 편이 로마에는 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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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로마가 속주로 삼은 지방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첫째, 에스파냐나 갈리아처럼 수많은 부족이 난립해
있어서 교섭 상대가 될 만한 지배계통을 일원화할 수 없는 지방. 둘째, 지배
계통은 일원화되어 있지만, 마케도니아나 시리아처럼, 그리고 과거의 카르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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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몇 차례나 로마에 적대행위를 되풀이한 나라들로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로마세계’는 민족과 종교가 다양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언어도 많았어요.
이런 나라를 고대인은 제국이라고 불렀어요. 따라서 로마도 황제가 통치하는
시대에 들어가기 200년 전부터, 카르타고를 굴복시킨 시대부터 이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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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페리움)’이라고 불리고 있었습니다. 또는 ‘공화국(레스 푸블리카)’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제국은 패권국이라는 뜻이니까 정치체제가 제정이든
공화정이든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로마제국’에서의 공통 규범은
로마법이었고, 공통어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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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는 제국주의자였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이기도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폰토스 왕 파르나케스가 일으킨 군사행동에 대해서
도 적과 대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문제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대처했어요.
팍스(평화)는 우열이 없는 나라끼리의 대화를 통해 성립되기보다는 절대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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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세한 나라의 조정이나 판정을 통해, 또는 부득이한 경우에는 물리적인 힘을
통해 성립될 확률이 더 높은 것이 인간세계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팍스 로마
나, 팍스 브리타니카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말부터가 이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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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와 폰토스 왕 파라나케스의 양군은 카파도키아 지방에서도 흑해와
가까운 젤라(오늘날 터키의 질레)에서 마주쳤어요. 수는 줄어들었지만 카이
사르의 정예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제6군단의 맹공 앞에서 오리엔트 병사
들은 적수가 되지 못했어요. 이 전투가 끝난 뒤, 카이사르는 로마 원로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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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낸 전과보고를 다음 세 마디로 시작했다고 해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VENI VIDI VICI.” 219 마지못해 폼페이우스 편에 선 도시들과는
달리 기꺼이 폼페이우스 편에 선 아테네 시민들에게 카이사르는 딱 한마디
빈정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아요. “여러분은 죽어 마땅한 죄를 되풀이해서 짓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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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도 유명하지만, 그때마다 눈부신 업적을 남긴 조상 덕택에 용서받는
것으로도 유명하군.” 221 카이사르에게도 제10군단 병사들에게도 1년 만의
재회였어요. 연단에 모습을 나타낸 카이사르는 거두절미하고 다짜고짜 말
했어요. “무엇을 바라는가?” 병사들은 저마다 제대시켜 달라고 외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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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북아프리카 전선이라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가 북아프리카에서 싸우기 위해서는 그들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따라서 제대를 요구하면 카이사르도 일시불이나 급료
인상을 약속하여 타협으로 나올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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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그들에게는 카이사르가 전쟁을 계속하는 한 제대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카이사르한테서 돌아온 대답은 천만 뜻밖이었어요.
“제대를 허락한다.” 예기치 못한 대답에 병사들이 치켜들었던 칼은 저절로
내려가고, 요란한 외침소리도 뚝 그쳤어요. 무거운 침묵이 내리 덮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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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병사들 위에 카이사르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시민 여러분
(퀴리테스), 여러분의 급료도 그 밖의 보수도 모두 약속대로 지불하겠다….”
카이사르의 심복 중의 심복이라고 자부하는 제10군단 병사들은 카이사르가
그들을 ‘시민 여러분’이라고 부른 것에 이미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까지
카이사르는 항상 ‘전우 여러분(콤밀리테스)’이라고 불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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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수스 회전이 끝난 지 엿새가 지난 4월 12일, 카토는 우티카의 유지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했습니다. 로마인이 손님을 초대하는 저녁식사는 플라톤의
‘향연’에도 나오듯이 침대 형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술과 음식을 즐기면서
주제를 정하여 토론하는 자리입니다. 로마인은 식사와 술을 곁들인 이 대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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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포시움’이라고 불렀어요. 그리스어의 ‘심포시온’을 라틴어식으로 발음한
것이지요. 이 자리에서 대화 주제를 정하고 사회를 맡는 것은 초대자, 즉 주인
의 역할이었어요. 카토가 주최한 향연에서는 탑수스 회전은 화제에 오르지
않았고 오로지 철학적인 명제만 논의되었어요. 그날 밤의 주제는 ‘자유란
무엇인가’이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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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안팎의 기간을 사이에 두고 네 차례로 나누어 개선식을 거행한 것은
물론 이틀에 걸친 폼페이우스의 개선식을 의식한 것이지만, 승리한 상대가
네 나라에 이르렀기 때문에 나누어서 거행할 필요도 있었어요. 즉 첫째 날은
갈리아 인에 대한 승리를, 둘째 날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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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시노에 공주에 대한 승리를, 셋째 날은 폰토스왕 파르나케스에 대한
승리를, 넷째날은 누미디아 왕 유바에 대한 승리를 축하했다. 파르살로스에서
폼페이우스에게 거둔 승리는 개선식이라는 형태로 축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어요. 같은 로마인을 상대로 거둔 승리였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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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이따금 하나의 인물 속에 자신을 응축시키고, 그 후 세계는 이 인물이
지시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좋아하는 법이지요. 이런 위대한 개인에게는 보편
과 특수, 멈춤과 움직임이 한 사람의 인격에 집약되어 있죠. 그들은 국가나
종교나 문화나 사회의 위기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존재에요. 위기에는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여 하나가 되고, 위대한 개인에게서 정점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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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위인들의 존재는 세계사의 수수께끼입니다. 부르크하르트의 ‘세계사에
관한 고찰’ 로마 특유의 공화정은 해마다 선출되는 집정관 두 사람을 정점으로
하는 행정기구를 선거를 거치지 않은 엘리트로 구성된 원로원이 보좌하고,
시민권 소유자 전원이 투표권을 갖는 민회에서 최종결정을 내리는 체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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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을 담당하는 대다수가 원로원 의원이기 때문에 과두정(올리가르키아)
이라고 불려요. 포에니 전쟁 시대의 그리스 역사가인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정치체제를 집정관으로 대표되는 군주정(모나르키아)의 이점과 원로원으로
구현되는 귀족정치의 이점과 민회로 상징되는 민주정(데포크라티아)의
이점을 짜 맞춘 이상적인 정치체제라고 찬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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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의 천재 한니발과 강대국 카르타고를 상대로 끝까지 싸워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원로원이 한 덩어리가 되어 지휘계통을 담당했기 때문이에요.
카르타고에 대한 승리는 로마의 조직력의 승리라고 말하기까지 해요. 전사자
비율도 줄곧 최전선에서 싸운 원로원 계급의 비율이 가장 높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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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태양주위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이 365일 6시간이 아니라
365일5시간48분46초라는 사실을 토대로 한 그레고리우스력이 유리우스 역을
대신하여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지요. 11분 14초의 오차를 판정하는 데 무려
1천627년이나 걸렸으니까, 율리우스력은 그것이 만들어졌을 당시로서는 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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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일 만큼 정확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레고리우스력도 11분
14초만 정확해졌을 뿐 달력의 개념은 율리우스력과 똑같습니다.
기원전 202년에 한니발을 무찌른 뒤 갈리아 정복이 끝난 기원전 50년까지
로마는 고도성장기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만 한니발의 말을 빌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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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육체가 먼저 성장해버린 탓에 내장의 발달이 그것을 미처 따라가지
못한 시대이기도 했어요. 로마의 내장, 즉 정치체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제도
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의 로마를 통치하기에 적합한 체제였기
때문이에요. 그 당시 로마가 점유하고 있던 영토는 루비콘 강에서 메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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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협까지 뻗어있는 이탈리아 반도에 불과했어요. 그런데 카르타고와의 전쟁
에서 이겼기 때문에 그 영토가 급속히 팽창했다. 지중해는 외국과의 경계가
아니라 ‘우리 바다(마레 노스트룸)’이자 ‘내해(마레 인테룸)’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내장은 여전히 이탈리아 반도만 영유하고 있던 시대의 통치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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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어요. 모순이 생기는 것도 당연해요. 이 모순을 맨 먼저 지적한 것은
그라쿠스 형제였지만, 그후 로마는 승자의 혼미에 시달리게 됩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강대해진 육체에 걸맞는 내장을 로마에 주고자 했어요. 바꿔 말
하면, 국가 로마를 고동성정기에서 안정성장기로 이끌어가려고 했던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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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주민이 속주민의 지위에서 벗어나 로마 시민이 된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갈리아인 집단촌에 불과했던 메디올라눔(오늘날의 밀라노)이나
타우리노품(오늘날의 토리노)에도 로마인 도시와 같은 계획이 시작되었어요.
루비콘 강이나 피렌체를 흐르는 아르노 강도 이제 더 이상 본국과 속주를
가르는 경계선은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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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사법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소권과 배심원이었어요. 어떤 죄를
지은 사람도 재판을 하지 않고 항소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형에 처하는 것을
금지한 ‘셈프로니우스 법’은 그라쿠스 형제 가 운데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
의 제안으로 성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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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은 반체제파인 호민관의 제안으로 성립되었기 때문에 원로원파의 반격을
받게 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어요.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권고’라는 비상사태
선포로 대항했어요. 그 대상이 된 사람은 반역자로 규정 되어 재판절차도 없이
또 항소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즉각 사형에 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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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원은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은 셈이죠. 이 무기에 처음으로 희생된 사람이
‘셈프로니우스 법’의 입안자인 가이우스 그라쿠스였습니다. 그후로는 ‘원로원
최종권고’가 남발된 반면, 그 와 반비례하여 ‘셈프로니우스 법’은 차츰 유명
무실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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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행동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을, 종교에 맡긴 유대인. 철학에 맡긴 그
리스인 법률에 맡긴 로마인. 이것만 보아도 이 세 민족의 특징이 떠오를 정
도입니다. 카이사르는 수도 로마에서 ‘아르테스 리베랄레스(교양과목)’을
가르치는 교사와 의료에 종사하는 의사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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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합니다. 인종도 피부색도 따지지 않아요. 민족과 종교의 차이도 문제
삼지 않았어요. 조건은 단 하나. 로마에서 교사나 의사로 일 하는 것뿐
이었어요. 로마 시민이 되면, 우선 속주세로 대표되는 직접세를 면제받는
이점이 어요. 둘째, 로마 법에 따라 안전을 보장받는 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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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카이사르는 이런 말도 했어요. “아무리 나쁜 결과로 끝난 일이라 해도,
애초에 그 일을 시작한 동기는 선의였다.” 3브루투스가 연설을 시작했어요.
"우리가 카이사르를 죽인 것은, 그를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를 그대로 두면, 카이사르를 제외한 로마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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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로마인의 자유를 빼앗으려 한 카이사르를
쓰러뜨렸다." 군중은 말없이 듣고 있었습니다. 야유하는 소리도 없었지만 환호
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브루투스에 이어 킨나가 연단으로 올라갑니다. 킨나는
암살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변고를 알자마자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달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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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을 지지한다는 뜻을 밝힌 인물입니다. 그 킨나가 카이 사르를 비난하는
연설을 시작하는 순간, 이제까지 침묵하고 있던 군중이 폭발했어요. 카이사르
의 유해는 장례식도 허용하지 말고 테베 레 강에 던져버리는 것이 폭군에게
어울리는 처사라는 킨나의 말은 당장 일어난 고함소리에 묻혀버렸고, 성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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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은 킨나와 브루투 스가 서 있는 연단을 향해 몰려갔습니다. 암살자들은
자기 노예들의 보호를 받으며 포로 로마노 뒤쪽에서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통하는 비탈을 달려 올라가, 전날과 마찬가지로 신전 안으로 도망쳐 들어갈
수밖에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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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가 암살당했을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18세6개월의 젊은이었어요.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아피아 가도 연변에 있는 소 도시 벨레트리의
기사계급 출신으로 원로원 의원을 지낸 인물이고, 어머니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누이동생의 딸이었어요. 옥타비아누스 라는 이름은 옥타비우스의 아들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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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에요. 카이사르에게 옥타비아누스는 누이의 외손자가 되고, 옥타비아누스
에게 카이사르는 외할머니의 오빠니까 종조부가 됩니다. 387 카이사르의 유해
를 목격한 군중은 이제 서야 지금껏 억누르고 있던 눈물과 함께 분노를 폭발
시켰어요. 그 후의 광경은 ‘줄리어스 시저’에 묘사된 것과 마찬가지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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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유해를 태우는 불길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의 가슴에도 옮겨
붙어, 카이사르의 장례식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의 죽음을
초래한 자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자리로 일변했어요. 유해를 태우는 불길이
꺼져갈 무렵, 이번에는 세찬 비가 쏟아졌어요. 카이사르의 유해를 태운 재는
누군가가 미처 긁어모으기도 전에 빗줄기에 씻겨 가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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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신교 민족인 로마인은 일신교를 믿는 유대인과 달리 신과 계약을 맺는다는
개념이 없었어요. 신들은 인간을 수호하고 도와주는 존재 일 뿐, 인간의 생활
방식이 옳으냐 그르냐를 판가름하는 재판관은 아니었지요. 인간의 생활방식을
판가름하는 것은 인간자신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로마인은 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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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만든 창조자가 되는 것이지요. 재판관이 인간 자신이라는 것은 인간의
말을 믿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아요. 로마인은 누구하고나 서약을 나누었지만,
그 서약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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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패배자와의 서약-볼모를 잡고 동맹관계를 맺는 서약
2. 채무자와의 계약-담보를 잡고 대출관계를 계약
3. 볼모나 담보 같은 형태의 보증을 개재시키지 않고 오로지 말만 신뢰하는
서약. 말하자면 공적인 효력까지 가진 신사협정. 카이사르는 원로원 의원들
에게 ‘신사협정’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암살자들을 포함한 원로원 의원
모두가 종신 독재관 카이사르와 ‘ 신사협정’을 맺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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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아버지는 곧 백성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원로원 의원에게나 일반
시민에게나 카이사르는 아버지가 되었어요. 로마 역사상 전례 가 없는 일이지
만, 카이사르가 모든 시민에게 300세스테르티우스씩 주라고 유언한 것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유산을 남겨주는 것과 같다고 카이사르 자신도 생각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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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을 받은 시민들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부친살해는 로마에서는
최고의 중죄였어요. 그들은 카이사르를 죽인 자들을 암살자라고도 부르지
않았어요. 증오와 슬픔과 분노에 찬 민중이 브루투스 일당에게 내뱉은
말은 ‘파리키다(아비를 죽인 놈)’이라는 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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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렇게 말했소. ‘우리가 암살을 결행하지 않았다면 당신들도 조만간
카이사르의 희생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이게 무슨 오만 이오! 살인을 저지른
것에 대해 고뇌하기는커녕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카이사르의 죽음을 슬퍼
하는 것조차 금지하려 하고 있으니 말이오. 노예조차도 두려움이나 기쁨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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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를 느끼는 것은 자유인데, 폭군한테서 우리를 해방시켰다고 자칭하는 자
들은 개인의 감정까지 지배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소? 나한테는 어떤
협박도 효과가 없을 거요. 아무리 내 지위를 위협해도, 나한테서 인간성과
친구로서의 의리까지 빼앗을 수는 없소. 죽음으로 협박해도 소용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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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죽음을 보고, 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를 가지고 죽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지 않을 수 없었소. 이제는 내 죽음과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을
것 같소….카이사르는 내가 누구를 찾아 가든, 누가 나를 찾아오든 상관하지
않았소. 설령 그 사람이 그의 적이라 해도, 나한테 그 사람을 사귀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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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한 적도 없을 뿐더러 불쾌감조차 내비친 적이 없었소. 그런데 나한테서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빼앗아간 자들은 내가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것조차도
금지하려 하는 거요? 이런 정신 분야까지 참견하는 독재는 오래 계속될 리가
없소” -부자이며 옥타비아누스에게 거액을 빌려준 마티우스가 키케로에게
보낸 편지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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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성격과 재능을 이미 파악한 게 분명해요. 그리고
그를 카이사르와 비교해보았을 테니까. 여자라면 누구 나 평생에 한번은 부닥
치는 문제에 그녀도 직면했을지 모르죠. 뛰어난 남자는 여자 뜻대로 되지
않고, 여자 뜻대로 되는 남자는 그 아래에 있는 남자뿐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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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그 후의 생활방식이 결정됩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도 좋으니 뛰어난 남자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역량과
재능은 일급이 아니더라도 자기 뜻대로 되는 남자를 택할 것인가. 클레오파트
라는 후자를 택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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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6년 북아프리카의 탑수스에서 폼페이우스파를 무찌르고 귀국한
카이사르가 시정의 기본방침으로 삼은 것은 ‘클레멘티아(관용)’이었어요.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를 무찌르고 귀국하여 16년 전의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로마 세계의 최고 권력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시정의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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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침으로 ‘팍스(평화)’를 내걸었어요. 로마에 의한 평화, 즉 ‘팍스 로마나’의
시작이었습니다. 515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의 육신은 죽었어요.
그러나 카이사르가 정말로 죽은 것은 기원전 30년입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33세 옥타비아누스의 시대가 열립니다. 아니, 이제는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러도 좋을 것에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카이사르가 타도한
공화정 로마를 대신하는 제정 로마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교양을 겸비한 리더가 미래를 이끌어 간다.
단순히 재능 있는 사람과 천재를 구별해 주는 것은 지성과 정열이다.
2. 3.15일 카르사르
돈 못 벌고 안 풀릴 때는 역사물을 몰-빵 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로마인
이야기‘(15권)를 끝내놓고 보니 복잡한 인물 관계만 빼놓고 세계사가 얼추
교통정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신형 이어폰을 끼고 자전거 드라이브를
했더니 마중 나온 조카 부루투스가 하이파이브를 해줄 것 같은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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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4년 3월 15일은 로마역사의 흐름을 바꾼 날입니다. 로마역사에서
최고의 위인으로 손꼽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날이에요. 영어권
에서는 그의 이름을 ‘줄리어스 시저’라고 발음합니다. 고대 로마의 역사는
3개의 시대로 나누어 볼 수 있어요. 늑대 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물루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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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해 건국된 기원전 753년부터 기원전 509년까지는 왕정시대, 아직 왕정
으로 글을 쓰지는 않았지만 로물루스를 접할 때마다 에스더의 자화상
‘늑대’가 금방이라도 화폭에서 뛰쳐나올 것만 같습니다. 18세 때 작업한
100호짜리 자화상이 반드시 빛을 볼 때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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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09년에서 기원전 27년까지 공화정시대, 기원전 27년부터 기원후
476년까지의 제정시대, 즉 로마제국시대로 구분됩니다. 공화정의 시작은
옥타비아누스의 악티움해전 정도를 기억해야 할 것이고 제국시대는 석고상
'카라 굴라'가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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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시대 후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공화정의 전통을 무시하고 권력을 독점하는 제1차 삼두정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크라수스가 파르티아(당시 지금의 이란과 이라크 영토에 해당하는
강대국)와의 전쟁터에서 죽은 후 원로원의 사주를 받은 폼페이우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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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카이사르를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이리하여 두 세력 간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졌고 그리스 파르살루스 평원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집트로 도망간 폼페이우스를 추격합니다.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우스는 폼페이우스를 보호했는데 당시 그는 누나인 클레오파트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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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공동으로 통치하고 있었어요. 로마에서 최고 실력자로 자리를 굳힌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2월 14일에는 스스로 종신 독재관이 됩니다.
그는 로마의 숙적 파르티아를 정벌하기로 결정하고 출정하기 3일 앞서 3월 15
일에 원로원 회의를 소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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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새로운 원로원 건물이 신축 중이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세웠던 극장 회랑을 원로원 회의장으로 사용했어요. 그가 회랑에 들어서자
한 원로의원이 무엇인가 탄원하려는 듯 다가왔어요. 그리고는 여러 명의
원로의원들이 그를 에워싸더니 갑자기 옷자락에 숨겨둔 단도를 꺼내 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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듭니다. 평생을 전투와 전투 속에서 용맹을 떨쳤던 56세의 사나이의 몸에는
순식간에 예리한 칼날들이 꽂혔습니다. 무려23방이 칼을 맞고 안 죽을 장사가
없을 것입니다. 카이사르가 정적 폼페이우스를 제거한 후에도 그에 대한 예우
로 그의 석상은 그대로 두었는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 아래에서 피범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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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 쓰러지고 맙니다. 그것도 자신이 거두먹인 핏덩이 조카 부르투스에 의해
말입니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신전 유적에서 재현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은 1808년 로마의 화가 카뭇치니(V. Camuccini 1771-1844)는 상상을
통해 이 격동의 순간을 매우 현장감 있게 화폭에 담았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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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주야! 미술사를 한번 정리해보는 건 어떻겠니? 이 역사의 현장은 로마 중심
지역 ‘라르고 디 토레 아르젠티나’에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로마공화정
시대 후반기의 신전 유적 터가 보존되어 있는데 유적 터 일부분은 폼페이우스
가 세웠던 로마 최초의 반원형 극장에 속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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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5일이 되면 이 유적 터에서 로마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는 행사가 열린다고 합니다. 공화정시대의 거물은 카이사르가
분명합니다. 그는 정치인이자 군인, 성직자, 저술가. 무엇보다 서구권에서
황제의 시초가 된 인물로, 본인은 황제가 된 적이 없으나, 그의 이름은 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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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 정치적 상속자 아우구스투스에게 그대로 전해진 데다, 아우구스투스가
취한 제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네로 이후 오토 때부터
로마 황제 제호 기본 틀로 정착되면서 황제라는 의미로 남게 되었습니다.
독일어권에서 황제를 이르는 ‘카이저’와 슬라브어권의 ‘차르’가 그의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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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 것입니다. 오늘날 제정 시대라고 하는 기원전 29년 이후 로마인들에게
사실상 황제로 인식됐고, 티베리우스~클라우디우스까지의 아우구스투스
일가 직계 황제들에게는 직접 언급이 자제됨에도 그들의 정통성 기반이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중시조로 인식됩니다.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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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가 직접 황제가 되지 않았음에도, 3대 황제 가이우스시대 일화의
예처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에게 카이사르는 그들 일가의
실질적 시조이자 정통성의 근거로 인정받았고 그의 이름은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이용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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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삼두정치를 통해 로마를 통치했으며, 갈리아를 정벌하고, 정적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자신에게 정치권력을
집중시켰으나 원로원에서 암살당해요. 하지만 이미 카이사르로 인해 로마
공화제는 사실상 종식되었고,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로
마는 제정으로 변모해 로마 제국이 됩니다.
3. 클레오파트라
기원 전 50 년경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는 역사상 그 어떤 여인보다 극
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한 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그녀의 흥미진진한
생애와 러브스토리는 지금껏 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창작의 원천이
되었어요. Cleopatra Testing Poisons on Condemned Prison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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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 율법에 따라 남동생들과 두 번씩이나 결혼해 왕좌에 올랐고, 왕권을
쟁취하기 위해 남편이며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마케도니아의 마지막 여왕이라는 사실
만으로도 그녀의 생애는 소설보다 더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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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생애 중에서 일반인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부분은 그녀가
로마의 지배자인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유혹한 과정입니다.
당대 최정상에 오른 두 남자를 어떻게 그처럼 완벽하게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기원 전 48년 클레오파트라는 남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의 권력 투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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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한 후 강제로 폐위되어 유배된 상태였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처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침공한 카이사르의 막강한 힘을 빌려 왕권을 되찾을
계획을 세웁니다. 그녀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로마의 최고 실력자인 카이사르
와 운명적인 첫 만남 을 가집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를 정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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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가 이집트 왕궁에 묵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삼엄한 경계를 뚫고
몰래 그에게 접근 하려던 그녀는 기막힌 계략을 떠올렸습니다. 스스로 양탄자
위에 드러누운 뒤 충복에게 자신의 몸을 양탄자로 둘둘 말 것을 명령합니다.
충복은 어깨에 맨 양탄자를 호위 병사들에게 보인 후 집정관에게 줄 값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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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을 가져왔다고 둘러댑니다. 큼직한 양탄자는 카이사르의 눈길을 끌었고
호기심이 발동한 카이사르는 서둘러 양탄자를 풀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양탄자를 펼치기가 무섭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반라의 여왕이 비너스
처럼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완전히 반한 카이사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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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이 되었음은 말한 나위가 없고, 여왕의 정적을 모두 제거하고 그녀를
이집트 왕좌에 앉힙니다. 결국 여왕은 카이사르의 권력을 이용해 왕권을
되찾고 피맺힌 복수를 감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연인이 되어 아들 카이
사리온까지 낳고 야망을 키우던 클레오파트라에게 찬 물을 끼얹는 사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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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합니다. 기원 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의 무한한 권력에 위협을
느낀 정적들이 카이사르를 암살했어요. 클레오파트라는 다음 상대로 카이사르
의 암살 이후 로마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한 안토니우스를 점찍었어요. 삼 두
정치인 중 한 사람인 안토니우스가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 사령관에 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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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동방 원정길에 나섰다는 정보를 입수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안토니우스를 유혹하기 위해 묘안을 짜냅니다. 화가 앨마 테디마
는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르크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만남을 묘사
한 글을 토대로 그린 그림이 현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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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첫 만남 을 가진 장소는 타르수스입니다.
오늘날에는 터키의 한 지방 도시에 불과하지만 고대의 타르수스는 소아시아
에서 가장 손꼽히는 대도시였습니다. 시가지는 강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온갖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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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와 안토니우스를 만났다 고합니다. 선체는 황금빛이요, 바람을 받아
크게 부풀어 오른 돛은 가장 값비싼 색깔인 자주색이었으며, 갑판 중앙에는
금실로 수놓은 장막이 좌우로 열려 있고, 그 아래옥좌에 사랑의 여신 비너스
로 분장한 클레오파트라가 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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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들은 은으로 만든 노를 저으며 피리와 하프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고
배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바람을 타고 진동합니다. 이 화려한 첫 만남
에 안토니우스는 그만 혼을 뺏기고 말았어요. 정신이 나간 안토니우스가
벌떡 일어서서 두려움과 경이로움 찬 눈길로 클레오파트라를 바라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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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는 금으로 장식된 이동 닫집 아래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앉아
요염한 눈초리로 안토니우스를 탐색합니다. 안토니우스와 극적인 첫 만 남을
가진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행여 안토니우스가 권태를 느낄 새라 늘 새로운 쾌락을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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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고 날마다 산해진미에 악사와 무희를 동원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이런 생활이 10년이 넘도록 이어지자 클레오파트라는 연인을 아예 자신 곁에
못 박아두고 싶은 욕심이 생겨요.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려 안토니우스의
사랑이 순간적인 열정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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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신분과 국적, 동양과 서양이라는 인종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이국의 여
왕과 혼인식을 올릴 만큼 안토니우스는 철저하게 여왕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결혼 선물로 여왕에게 엄청난 이권이 걸린 오리엔트
지방의 통치권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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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권력자를 애인으로 둔 덕분에 그녀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재물과 권력을 소유한 여왕이 되었습니다. 사랑에 눈이 먼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아내 옥타비아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편지를 쓰고 또 다른 권력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의 지배권을 동서로 양분할 것을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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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자 로마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사를 돌보기는커녕 힘들게 정복한 식민지에서 나온 귀한 수입을 이집트
여인에게 몽땅 안겨주는 사령관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특히 카이사르
의 상속자요, 조카인 옥타비아누스는 여왕의 노예로 전락한 안토니우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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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수치로 생각합니다. 그는 두 남녀를 국가의 명예를 더럽힌 탕아와
국제적인 창녀의 야합으로 매도한 후 안토니우스를 제거하기 위한 전쟁을
벌입니다.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에 벌어진 ‘악티움’ 해전의 승자가
되었고 패배로 벼랑 끝에 몰린 안토니우스는 자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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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갑작스럽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안토니우스의 묘를 참배하고 돌아온 그녀는 곧바로
최후를 맞았고, 역사가들은 그녀가 독사에 물려 죽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클레오파트라를 그릴 때는 독사가 벌거벗은 여왕의 젖가슴을 무는 자극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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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을 선택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었어요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에로티시즘이
강하게 풍겨 나오는 것은 죽음과 성을 한 쌍으로 묶어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클레오파트라가 팜므 파탈의 원형이 된 것은 정치적인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권력의 최정상의 남자들을 유혹해 희생물로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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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을 이용해 왕권을 차지했고 애인들의
막강한 힘을 빌려 정적을 제거하고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플루타르크는
클레오파트라의 신비로운 죽음에 대해 "여왕의 갑작스런 죽음은 탐스런 무화과
바구니를 든 농부가 여왕을 방문한 직후에 일어났다. 무화과 바구니에 맹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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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한 독사가 들어 있었던 것일까?" 라고 강한 의문을 던져요.
우리가 클레오파트라라고 부르는 여왕은 클레오파트라 3세 에요.
이집트 왕조에서는 여왕이 꽤나 있었는데 그 중 1빠는 단연 클레오파트라
3세가 아닐 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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