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봄, 신민회는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 간부회의를 열어 국외 독립군 기지와 독립군 창건을 논의했다. 1910년 12월, 신민회는 독립운동 노선으로 대일 무장투쟁을 채택하고 국외 독립군기지 장소를 서간도로 확정지었다. 그 중심에는 우당 이회영이 있었다. 삼한갑족 이회영의 집안은 8대에 걸쳐 정승판서를 배출한 당대 최고의 명문가였다. 이회영은 가족회의를 열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집단 망명 계획을 논의했고, 형제들은 흔쾌히 동의했다. 6형제는 곧바로 집과 재산을 모두 처분했다. 명동성당 입구에서부터 을지로 외환은행이 있는 곳까지 약 6천여 평 땅이 우당 이회영 집안의 소유였다. 2만석 재산가였던 이석영은 당시 아흔아홉칸 고대광실을 소유하고 있었고, 개인 절까지 짓고 살았던 조선시대 손꼽히는 갑부였다. 이회영 6형제 일가가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자금은 약 40만 원으로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600억 원이 넘는 거액이었다. 1910년 겨울, 이회영 6형제 일가는 삼한갑족의 명예와 부귀영화를 모두 버리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를 향했다. 당시, 중국 당국은 이주 조선인에게는 집과 토지를 매매할 수 없도록 했다. 거듭되는 청원에도 토지 매매가 허락되지 않자, 이회영은 북경으로 가서 당시 최고 실권자인 위안스카이를 만나 토지문제를 담판 지었다. 1911년 6월, 마침내 무장 항일 독립기지가 건설됐다. 이주 한인들은 자치기구 경학사를 조직해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뒷받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