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파친코’에 대한 단상
정 효 봉
학창 시절 독서 토론회 활동을 함께 했던 친구가 오랜만에 소식을 전해왔다. 최근에 읽은 책이 너무 감명 깊어서 책 소개도 할겸 안부전화 한다며, 책에 관련된 영상자료 하나를 보내주었다. ‘파친코’의 저자 이민진 작가의 대학 강연과 방송매체 인터뷰 영상이었다. 소설 ‘파친코’를 삼십년 세월동안 자료를 준비하고 집필하면서 느낀 점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일본은 앞으로도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작가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책을 읽어야지 하면서 차일 피일 미룬 지 몇 년이 지났다 그런데 얼마전 문인협회 선생님 한 분이 내게 책 한 권을 보내주셨다. 그 책은 바로 소설 ‘파친코’ 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책의 첫 페이지를 열었다. “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놓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첫 문장이 나를 압도하였다. 이민진 작가의 대담함과 책이 품고 있는 내용의 무게를 보여주는 이 문장은 나를 단숨에 책을 완독하도록 만들었다.
부산 영도에서 신체 장애인으로 태어난 훈이는 착한 심성을 가지고 부모님을 도우며 살아간다. 스물여덟살이 지나서 가난한 집 딸 양진과 결혼을 한 훈이는 어렵게 얻은 딸 선자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시선과 올바른 삶을 사는 지혜를 가르친다. 그러나 선자가 열 세살이 되던 때에 훈이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양진과 선자 모녀는 하숙집을 경영하면서 넉넉하지는 않지만 안정적인 생활을 하며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선자는 일본인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한수와 사랑에 빠지고, 급기야 한수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그런데 총각인 줄 알았던 한수는 사실 일본에 아이까지 있는 유부남이었다. 이 때 하숙집 손님으로 온 백 이삭목사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선자에게 청혼을 한다. 둘은 결혼 후 바로 이삭의 형 요셉과 형수 경희가 터전을 잡고 있는 일본 오사카로 가게된다. 그 곳에서 큰 아들 노아와 둘째 아들 모자수가 태어난다. 이삭은 선교 활동을 하던 중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죄목으로 이년 간의 옥고를 치르며 모진 고문을 받는다. 그리고 출감 후 바로 세상을 하직한다. 한편 선자를 찾고있던 큰아들 노아의 생부 한수는 우연한 기회에 선자를 발견하게 되고 그 후 계속 몰래 주변을 맴돌며 어려울 때마다 그녀를 돕는다. 노아는 명문 와세다 대학에 합격하고, 한수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다가, 결국 자신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된다. 그 충격으로 노아는 학교를 그만두고 잠적한 채, 나가노의 파친코에 취직해 일을 한다. 그곳에서 리사라는 일본 여자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며 살다가, 수소문끝에 자신을 찾아온 선자를 만난 후 권총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동생 모자수는 재봉사로 일하는 유미와 결혼을 하고 아들 솔로몬을 낳는다. 하지만 유미는 교통사고로 그의 곁을 떠나가고, 모자수는 새로운 여자 에스코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솔로몬은 미국 명문대 유학을 마치고, 미국에서 사귄 여자친구와 함께 귀국하여 영국계 은행 일본지사에서 일하게 된다. 하지만 상사에 의해 부당한 이유로 일을 그만 두게 되고 여자친구와도 헤어지게 된다. 결국 솔로몬은 모자수의 파친코 비지니스를 물려받게 된다. 인생의 황혼에 이른 선자는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며 이삭의 묘에서 지난 날들을 회상하던 중, 노아가 키워준 아버지 이삭을 끔직이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노아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사무치게 느끼며 소설은 끝이 난다.
무엇보다 작가가 오랜 기간을 현지에서 치밀하게 준비한 생생한 자료를 토대로 스토리를 구성하여 이야기의 현장감과 생동감이 뛰어나게 느껴졌다. 소설의 단골 스토리라 할 ‘출생의 비밀과 뿌리’ 라는 소재가 어김없이 등장하지만, 기존의 스토리들과는 달리 친부의 유전자와는 정반대의 캐릭터를 인물로 설정함으로서 읽는 이들로 하여금 흥미를 더하게 했다. 이야기의 전개는 물 흐르듯 진행되어, 책을 읽는 내내 다음 장을 넘기기에 바빴다. 특히 한수가 선자 주위를 맴돌면서 계속 선자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보이는 부분에서는 자칫 통속소설처럼 느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구성력으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만 노아의 죽음은 예상했던 구성과는 차이가 있었다. 노아가 권총 자살했을 때 작가가 다음 이야기에 반전을 시도하기 위한 소설적 장치나 복선이 아닐까 생각을 하였다. 언제쯤 다시 등장해서 어떤 반전을 이어갈까 궁금해하며 읽었으나, 결국 노아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작가의 역사인식에 있어서 우직한 면이 보이는 구성이며, 읽기를 마친 후에도 선자보다는 노아의 생각이 더 오래 머무르는 이유이기도 하였다.
소설을 읽는 내내 선자와 함께 그 시대를 살았고, 선자의 남편이 되었다가 선자의 아들이 되기도 했다. 특히 선자의 가슴 한 켠에는 ‘한’ 이라는 한국 특유의 정서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한’은 분명 상처이고 사무치는 아픔이지만, 그것은 오히려 선자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고,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이 ‘한’의 정서는 오늘날 대한민국을 G7가입을 목전에 둔,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만든 보이지 않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메시지는 무엇보다 먼저 일본 제국주의의 반 인륜적 행태이다. 신사참배를 어겼다는 이유로 무고한 목사를 2년 이상 감금하고, 모진 고문과 학대를 자행하여 결국 죽음으로 이르게 만들었다. 2차 대전 전 후 그런 잔혹함을 자행했지만 지금까지 사과는커녕 오히려 치부를 미화하려 드는 일본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작가는 기독교적인 사랑의 실천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이름이 모두 성경 속의 인물들이며, 그들 모두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이삭, 요셉, 노아, 모자수, 솔로몬 등이 소설 속 인물로 등장을 한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성경 속 인물의 현시화라는 차원으로 소설을 읽게 만들고 있다. 인간의 사랑은 본성을 넘어서는 삶의 숭고한 행위이다. 작금의 우리 세계가 갈등과 모든 문제들을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을것이라고 작가는 소설 속에서 강조하고 있다.
또한 재일 한국인들의 차별과 핍박의 삶, 그리고 사회적 유리벽을 묘사하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일본의 주류사회에 끼워 들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인공들의 상황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노아도, 솔로몬도 명문대를 나왔지만, 주류사회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결국 최고의 벽을 넘어선 성공이란 것이 파친코 사업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재일 한국인들은 3년에 한 번씩 거주 연장 절차를 밟아야만 하고 일반 시민으로서의 평등한 대우는 꿈도 꿀 수 없다. 이는 재일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들이 직면하는 문제로 일본의 배타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중세 이후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인간성을 회복한 듯 했으나 바로 지리상의 발견과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선진국들은 대량생산으로 인한 상품의 판로가 필요했다. 그 결과 식민지 개척을 당연시하는 제국주의가 세계를 지배하였고, 이 제국주의는 인류 최악의 선택인 세계전쟁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세계대전 이후 ‘사회주의’와 ‘자유 민주주의’의 이념 갈등이 생겨났으며, 세계는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배타적 국수주의, 즉 신 제국주의가 도래하였다. 이렇듯 세계는 끊임없이 투쟁과 갈등이 반복되고 있다. 현재는 미국과 중국 간 치킨 게임에 온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상황에 처해있다. 다시는 세계가 제국주의의 망령과 배타적 국수주의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될 것이다.
글을 마치며 이 책의 첫 문장이자 주제 문장인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놓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를 확대해석 해보면 역사가 인류에 많은 상처와 피해를 주었지만, 그 피해를 받은 인간은 자발적 극복과 치유를 해왔다. 그러기에 앞으로 인류의 미래에는 아직도 희망과 비전이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이제 모든 지구상의 인류는 물질문명의 지나친 발달로 인한 문화 지체를 극복하고 인간의 삶을 쾌적하게 만들어가는 ‘친화적 세계주의’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아울러 강대국들간의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배타적 국수주의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진정한 세계평화와 연대의 의미를 고민해야만 할 것이다.
첫댓글 드라마나 영화를 보지 않는 제가 최근
엔터테이먼트 기업에 투자를 하면서 이 드라마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이 곳에서 글을 찬찬히 읽으니 더 이해의 폭이 넓이 집니다.
좋은 글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부남깁니다.
제 글을 읽고 공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뵐 때 와인 한 잔 하면서 영화얘기 하고 싶습니다.
항상 건강 행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