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내 삶이 되다 [6]
- 꽃밭 속에 가꾼 꽃들
1975년 12월 까지 글짓기 지도와 나의 글쓰기는 한마디로, ‘불철주야’ 였다.
작품의 완성도는 낮았지만 꽤 많은 글을 쓰면서 불면의 밤을 보냈다. 사실 남들이 10년 걸려야 라는 글쓰기를 1년 동안 해냈던 것이다. 이런 무리한 창작 활동 때문에 그 다음 해엔 몸에 무리가 생겨 ‘수술’이란 큰 대가를 치르고야 말았다. 이 일로 후유증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46년이 지난 지금 그 당시 만든 학급 문집 [꽃밭]을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지금 그 작품 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글 쓴 아이들의 얼굴이 그 속에서 웃으며 뛰어나오는 듯하다.
아래의 글은 문집을 내며 쓴 서문이다.
〜 문집을 내면서
이제 조그만 봉오리가 열매를 맺게된 것 같습니다. 여러 어린이들의 정성어린 마음의 씨알을 모은 『꽃빝』!
꽃밭과 같이 아름답고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라는 뜻에서
『꽃빝』문집을 만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여러 분의 밝고 맑은 마음을 글로 써 보기를 바라며 언제나 착하고 남을 위해 주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되겠어요.
1975. 12. 남진원
문집 『꽃밭』에 수록한 아이들과 작품의 제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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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손문곤), 엄마별(최치환), 산길(조재석), 그림자(이동구), 참새(김일상), 연필(윤영구), 빨래(조규용), 잠자리(김상식), 암소(김동언), 엿장수(이경동), 가을(장진원), 꽃그늘(신동운), 잠자리(박춘일), 팽이(이진학), 겨울(홍철희), 저금통(박상훈), 시계(장주호), 단풍(이기행), 코스모스(김사현), 여름밤(윤석근), 거울(인태영), 꿀꿀이 저금통(김동언), 꽃(황대수), 나비(박성배), 점심시간(장택일), 시냇물(정이영), 새싹과 나무(정복기), 기차역(김상덕), 겨울이 오면(박병식), 나무(김충기), 시냇물(홍승석), 조그만 종이배(김재윤), 진달래(최미숙), 비(허명이), ,
어린이 글짓기 지도를 할 때에도 최도규 형의 힘이 컸다.
1975년 초 봄이었다. 저녁에 교무실에서 아이들 작품을 다듬고 있었다. 마침 최도규 선생님이 오셨기에 좀 봐 달라고 했다.
“봄의 느낌이 좀 더 나야 하는데 미진한 것 같아요.” 히며 이정화 작품을 건네 드렸다. 도규 형은 몇 군데 손질을 하였다. 다듬은 작품은 내가 읽어봐도 상큼하였다. 이 작품을 투고하였는데 『교육자료』6월호에 어린이 작품으로 실렸다. 한 작품을 더 손 보았다. 황미예의 동시 ‘소꿉장난’이었다. 이 작품은 『소년』에 보냈는데 1975년 5월호 『소년』에 실렸다. 그리고 얼마 후, 아이들이 놀라서 내게로 왔다.
“선생님, 황미예가 방송에 나왔어요!” 하고 야단들이었다.
그랬다. 『소년』에 실린 동시를 윤석중 선생이 방송에서 글을 발표하고 칭찬해주셨던 것이다. 이후 삼척군 화전 국민 학교는 전국에 글짓기 학교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경북에 박운택 선생님이 계셔서 ㅇ린이 글짓기를 지도하셨다. 걍북 봉화의 재산 국민 학교였다. 아이들의 작품을 읽으면 너무 재미있었다. 그 뒤에는 박운택 선생님이 계셨던 것이다. 봉화의 재산 국민 학교 어린이들의 작품은 생활 밀착형 동시였다. 김종상 선생님이 늘 어린이 동시는 어린이의 생활이 묻어나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재산 초등학교는 모두 생화을 소재로 쓴 동시인데 완성도가 높아서 감동이 깊었던 것이다.
박운택 선생님은 그후 문단에도 등단하셨지만 란타깝게도 2014년 작고하셨다. 『대구문학』3, 4월호에서는 추모 특집을 엮은 걸 알고 있다. 2014년에는 박운택 선생 뿐만 아니라 시조시인 정재익, 김몽선 선생도 작고하셨다. 문단의 큰 손실이었다.
봄
이정화( 삼척 화전 국교 5)
긴 겨울
쇠사슬에 묶인
냇물
봄바람에
사슬 풀고
방랑길 떠날 때
새싹들
바깥 세상
구경 나오고
봉오리 진달래
바쁘게
몸치장 한다
( 1975년 『교육자료』 6월)
소꿉장난
황미예 ( 삼척 화전 국교 5)
파릇파릇
새싹 같이
산모롱이 모여앉아
옹기종기 소꿉장난
너는
엄마
나는
아빠
( 1975년 『소년』, 5월호 )
1975년 아이들 문집 『꽃밭』을 자세히 읽지 않았다가 46년 만에 글을 옮겨 쓰며 다시 읽게 되었다. 다시 읽으니 새로운 느낌이 들기도 하고 아이들을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이 아이들이 이젠 58살이나 되었으니 같이 늙어가는 것도 알겠다. 몇 년 전에 이곳 방터골에 찾아온 제자를 보니 머리카락이 나보다 더 하얗게 샌 아이도 있었다. 이 글을 읽으며 무엇보다 의미있었던 것은 그 시대의 생활상이 담겨있는 점이었다.
보리밥에다 누런 김치를 반찬으로 했기에 아이들이 볼까 봐 구석에서 먹은 이야기며 아침 일찍 밥을 해 주고 학용품을 사 주는 어머니에 대한 생활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고향에 다녀온다며 집을 나간 엄마를 기다리는 글은 내 마음을 한없이 아프게 하였다. 그때 그 글을 보고는 아무 위로도 해 주지 못한 내가 부끄러웠다. 선생님으로 있으면서 아이들을 자식처럼 살뜰하게 보살피지 못한 나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자책하였다.
지금 돌아보니, 그래도 선생님이라고 찾아준 어른이 된 아이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 2021. 12. 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