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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만남 왕궁에서 부르는 노래 (1:2-2:7)
※ 술람미 여자의 사랑의 갈망 (1;2-4)
“1: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1:3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 구나
1: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1. 사랑하는 자와 “입 맞추기”를 원함. (1;2)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1;2)
1)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Let him kiss me with the kisses of his mouth) (1;2상)“입 맟춤” 외래어로 키스(Kiss) 신랑은 신부(술람미)와의 친밀함의 은혜를 원합니다. 다시 말해서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신부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의 거룩한 입맞춤으로 주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때 잠자던 신부는 깨어나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입맟춤”이란 입술을 타인의 신체 또는 다른 사물에 접촉시키는 행위를 뜻하며, 일반적으로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입맞춤”이라는 단어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모의(謀議)하는 것을 은유적으로 “입맞춤”이나 “입을 맞춘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백과서전)
3)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날마다 주님의 말씀과 입맞춤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주님! 입술의 거룩하고 오묘한 말씀을 내 심령 속에 불어 넣어 주십시오. 거룩한 말씀의 친밀함은 우리가 사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4) 시16편은 다윗의 믹담 시입니다. “믹담”이 무슨 뜻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황금보석" 또는 “덮다, ”속죄하다“ ”죄를 덮어 버리는 속죄의 송가“ 로도 해석합니다. 다윗의 삶은 목동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왕의 보좌에 올랐지만 파란 만장의 험한 생애 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호의 은총을 구했습니다.
5) 거룩한 말씀으로 입 맞춰 주시기를 소원했습니다. ”믹담“ 곧 황금보석 시는 광부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지하 깊은 곳에 내려가서 어렵게 황금을 만나 가지고 나오는 것을 연상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시16;1-3)
2. 사랑하는 자에게 무엇을 갈망하는가?
1) 술람미 여자가 갈망하는 것은 신랑과 입맞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랑이 사랑해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신부가 신랑의 사랑을 받는 것은 최고의 행복입니다. 이론적으로 또는 교리적인 지식으로 사랑이 아니라 입맞춤의 사랑입니다. 직접 경험해보는 사랑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날 때 이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2) 신앙생활에 갈망함이 없이는 은총(恩寵)을 입을 수 없습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107;9) 신랑이 신부를 사모(思慕)하고 신부가 신랑을 사모할 때 온전한 사랑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당신은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갈망하며 사모하십니까? 주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채워졌습니까? 갈망함으로 은총을 입은 다니엘은 말일(末日)에 자기 백성이 당할 일을 깨달았습니다.
“내게 이르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매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 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단10;11-12)
3)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이 거룩한 주님을 만나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고 주님과 거룩한 입맞춤으로 교제하여 그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은 세상에서의 최대의 복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세상의 군왕들을 초대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시2;11-12)
4) “원하니”(with the kisses) 이는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과 연애(戀愛)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물이 없어 메마른 황패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님 만나기를 갈망합니다. 내 육체가 주님을 앙망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사모합니다. 어느 때나 주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습니까?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도 주님을 만난 생수를 공급받고 물동이를 버렸습니다. 나인성의 과부도 주님을 만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간음(姦淫)한 여인도 주님을 만나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3. 사랑을 갈망하는 이유 (1;2)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your love is more delightful than wine) (1;2하)
1) 이 말씀에서는 사랑과 포도주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포도주는 세상에서 기쁨과 위로(慰勞)를 주는 대표물입니다. 시편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 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시104;15)라고 했습니다.
2) 포도주는 인간에게 유익을 주고 즐거움이 있는 곳에는 항상 포도주가 있었습니다.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응용되느니라” (전10;19)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약제(藥劑)로 포도주를 조금씩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딤전5;23)
3) 위와 같이 포도주는 인간 생활에 유용한 것이었지만 솔로몬의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기 “네 사랑이” (your love)는 네 사랑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연인간의 사랑“ ”아가패적인 사랑“ ”형제의 사랑“등으로 복합적인 관계를 같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네 자녀들은 속히 돌아오고 너를 헐며 너를 황폐케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사49;15-17)
4) 하나님의 사랑은 복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랑으로 인간에게 일시적인 유익과 즐거움을 주는 포도주와는 비교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불변하는 무궁(無窮)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렘31;3)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5-8)
4. 사랑은 기름과 같다. (1;3)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1;3)
1) “네 이름이”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의 마음을 흡족하게 합니다. 주님의 이름에는 성품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이름을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9‘6-7)
2) “쏟은 향 기름” “기름”은 성령의 사역을 상징하며 이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표상합니다. 주님은 우리와 같은 천한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깨어 지셨습니다. 향유는 깨어져야 흐릅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준비했다는 말씀입니다. 옥합(玉盒)이 깨어져서 향 기름이 쏟아져 나와 온 집안에 가득하듯이 주님의 십자가(十字架)의 희생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흠모(欽慕)하며 사랑하기에 충분했습니다.
3)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한 여자가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 머리에 부은 것을 기록했습니다. 제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허비했다고 그 여자를 비난했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장사를 위하여 한 것이라고 높이 칭찬하시고 온 천하 어디에서든지 복음(福音)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기념하리라 하셨습니다. 복음 전파는 깨어지는 아픔과 희생(犧牲)이 있어야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인류를 사랑하신 향취(香臭)가 들어 나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마26;12-13)
5. 처녀들이 왜 사랑하는 가? (1;3)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 구나” (1;3)
1)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 구나” (No wonder the maidens love you!) (1;3하) 이들은 술람미 여자를 포함하여 예루살렘 여자들 즉 궁중 시녀 들을 말합니다. 궁중에는 신분(身分)의 차이대로 많은 여자들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聖靈)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부어진 자들입니다. 이들은 헌신적(獻身的)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 거룩한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고 어디서든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고후2;14-16)
6. 갈망하는 자의 결심 (1;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1;4)
1)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Let the king bring me into his chambers)이 거룩한 침실(寢室)은 거룩함을 입은 자만이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외인(外人)은 절대로 금지 되어 있는 곳입니다. 죄를 가지고 거룩한 하나님 존전(尊前)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2) 이름 없던 술람미 여자가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왕의 은총(恩寵)과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 침궁은 영적으로는 지성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성소는 제왕(帝王)도 들어가지 못하고 오직 피를 가진 대 제사장(祭司長)만이 들어 갈 수 있는 곳입니다.
3)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가지고 들어 가셔서 새롭고 산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롬3;ㅣ23-26)
4) “너는 나를 인도하라” (Take me away with you--let us hurry)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음을 의미합니다. 그곳은 왕의 침궁 곧 침실 입니다. 왕의 침실은 주님의 임재(臨齋)를 상징하며 그분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습니다. 그 곳에서는 친밀(親密)한 교제가 이뤄지며 신랑의 사랑의 음성(音聲)을 직접 들을 수 있습니다. 그 곳에서는 영의 양식을 얻을 수 있고 또한 권능과 계시(啓示)와 사랑으로 충만(充滿)한 우리를 위해 예비 된 은밀한 장소입니다.
5)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바른 신앙생활은 달음박질하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생활은 자신의 힘만으로 불가능합니다. 사랑의 줄로 이끌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자신이 주님의 손을 붙잡는 것보다 주님의 사랑의 손에 붙잡혀 이끌림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6) 당신은 주님 저를 당신의 은밀한 곳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그 곳에서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 싶습니다. 간절한 갈망과 사모함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생활은 거룩하고 기쁨이 넘치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요16;13-14)
7) “사랑의 줄로”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사랑의 줄로 이끌어 내셨으며 자유를 주어 평안케 하였고 먹을 것을 주었다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줄을 끊고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서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호11;4)
8) “처녀들이 너를 사랑 한다” 왕 된 신랑을 사모하고 갈망했던 처녀들 곧 신부된 자들은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고 포도주보다 더 나은 사랑을 깨닫고 사랑함이 마땅하다고 경험한 사랑에 대하여 고백합니다. 은혜를 받은 적도 없고 사랑을 받은 적도 없는데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짝 사랑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1-23)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일5;10-13)
※술람미 신부의 자기 성찰 (1;5)
“1: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1. 술람미 신부의 자아 발견 (1;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1;5)
1)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Dark am I, yet lovely) (1;5상) 아가서는 하나의 여정과 같은 것입니다. 술람미 여자는 자신의 전환점(轉換點)을 겪으면서 자신의 인생 여정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얼굴이 검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못남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모든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정직함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싫어하십니다.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시101;7)
2) 이름 없는시골 처녀가 왕의 사랑을 입어 왕비가 되어 침실에까지 들어가서 왕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게 되니 자신의 못남이 발견되었고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솔직하게 고백(告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못남은 왕의 사랑으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3) 성도들도 역시 지난날의 죄와 허물은 주님의 사랑 앞에서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정직하게 자기의 죄를 아뢰고 겸손(謙遜)하게 주님을 바라보는 성도(聖徒)에게는 흑암(黑暗) 중에 빛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정직하게 자신이 죄인의 괴수(魁首)였다고 고백했고 만왕의 왕 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거룩한 성도의 반열에 참여했습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1;14-16)
4) “예루살렘 여자들아” 여기에 언급된 예루살렘 여자들은 주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성도들(Sunday Christian) 들이며 자아를 발견하지 못하고 십자가를 경험하지 못한 미숙한 신자들입니다. 십자가를 깨달았을 때 신앙생활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자기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변화를 이루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5) “게달의 장막 같을 지라도” (dark like the tents of Kedar) (1;5중) 술람미 여자는 자신이 “검다”고 고백한 후로 또 한 번 자아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게달의 장막”같다는 고백입니다.
6) “게달”(Kedar) 은 “어둡다”를 의미하는 어근에서 유래되었고 이스마엘의 12명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아라비아 사막에 거하는 유목민족(遊牧民族)입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장막은 흑갈색의 염소가죽으로 만든 천막(天幕)입니다. 칙칙하고 거무죽죽한 게달의 장막은 아무런 볼품도 없고 곱지도 않은 그런 천막이었습니다.
7) 술람미 여자가 자신을 “게달의 장막”에 비유한 것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햇볕에 타서 거무죽죽해진 피부, 고운 것도, 아름다운 것도 없는 게달의 장막이라고 자신을 낮춰서 말한 것입니다.
8) “솔로몬의 휘장 같구나” (like the tent curtains of Solomon“ (1;5하) 술람미 여자가 자신을 “게달의 장막”같다고 고백하지만 솔로몬 왕은 그녀를 자신의 휘장으로 여겨줍니다. 솔로몬 왕궁의 휘장은 더없이 밝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휘장입니다. 그래서 술람미 여자는 힘을 얻습니다.
9) 성도들도 본래(本來)의 심령 상태는 “게달의 장막”같이 어둡고 도덕적(道德的)으로나 양심적(良心的)으로나 종교적으로 내 세울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과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3-8)
※술람미 신부의 시련과 탄원 (1;6-7)
“1:6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1:7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 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
1. 포도원 지기 (1;6)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1;6)
1)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I am darkened by the sun) (1;6상) 술람미 여자는 오라비들의 미움을 받아 들로 내어 쫓겨 일광 즉 햇빛에 그을려 검게 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시련(試鍊)을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와 가까이 교제하면 자신의 연약함과 허물은 더욱 들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2) 세상을 멀리하고 주님을 더욱 가까이 따르고 섬기려고 하면 성도의 시련은 더욱 심해집니다. 성도들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자들입니다. 술람미 여자에게 닥쳐왔던 시련과 같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들에게는 환난(患難)과 많은 시련이 닥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5;1-4)
3) 신부는 계속해서 자기 처지를 솔직히 고백하고 주님의 사랑을 사모합니다.
“나를 흘겨보지 말 것은” (Do not stare at me) (1;6중) 흘겨보다는 멸시하는 눈 초리를 의미입니다. 비록 자신이 검게 보이고 포도원지기를 한다고 해서 멸시 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4)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my own vineyard I have neglected) (1;6하) 포도원은 교회입니다. 성도는 누구나 포도원지기입니다.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는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맡은 자득ㄹ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 했습니다.
5) 포도 원지기는 예배와 헌신, 전도와 양육, 사랑과 봉사로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성도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포도원을 지키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무엇을 하는 것보다 자신이 무엇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며 육신적인 것이 되어 책망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6) 포도나무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의 사명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3-5)
2. 양 떼 먹이는 곳 (1;7)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 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 (1;7)
1) “양 떼 먹이는 곳” “정오에 쉬는 곳”을 내게 고하라” 술람미 여자는 심령(心靈)이 곤고한 상태에서 신랑을 찾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양떼를 먹이는 곳은 주님의 말씀으로 양육(養育)받고 참된 안식(安息)을 다시 찾기를 갈망하는 신부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2) 정오(正午)는 낮 열두 시. 곧 태양이 표준 자오선을 지나는 순간을 이르는 말로 오정, 한낮, 대낮을 말합니다. 술람미 여자는 주님이 계신 정오에 쉬는 곳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탄원합니다. 이는 “나를 어둠의 방해를 받지 않는 정오의 계시의 빛 가운데로 데려가 달라는 요청입니다.
3) 술람미 여자는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많은 일, 포도원지기를 하는 일로 지쳤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그늘에서 쉬고 싶습니다. 주님 당신의 양들이 쉬는 곳은 어디 입니까? 그곳으로 나를 데려가 주십시오,
4)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되랴” 고대 근동에서 여인이 수건으로 가리는 것은 몸을 파는 창녀(娼女)의 행동이었다고 합니다.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입니다.
5) 전에 우리는 모두 주님의 원수였고, 사단에 속한 음녀였습니다. 이제는 어린양의 보혈의 피로 출애굽 되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지만 이전의 사단에 속한 음녀의 행동(行動)들에 대한 부끄러움들이 성도들의 기억 속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랑 앞에 당당히 나아가기가 어렵습니다.
6) 얼굴을 가리우는 것은 수치심의 상징입니다. 술람미 여자는 자신이 왜 얼굴을 가리운 여자처럼 되어야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술람미 여자가 자신의 수치심을 벗겨 달라는 주님을 향한 요청이기도 합니다. 이 상태를 히브리어 성경은 “방황하는 여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술람미 여자는 자신 혼자 견딜 수 없어 시련 받는 심령(心靈)이 쉴 곳을 찾아 탄원(歎願)하고 있으며 괴로움을 더 견딜 수 없어 왕의 은총을 탄원하는 것입니다.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오직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칭하게 하여 우리로 수치를 면케 하라하리라” (사4;1)
7) 수치심(羞恥心)을 면하려면 수건을 벗어야 합니다. 내가 어찌 수건(veil)으로 얼굴을 가리운 여자같이 되랴? (Why should I be as one who veils herself?) 거듭난 성도일지라도 성령(聖靈)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면 수건(手巾)에 쌓인 얼굴로 다녀야 합니다.
8) 성령 안에 있는 자는 더 이상 수건으로 덮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든지 주님께로 가면 그 수건이 모두 볏겨 집니다. 우리의 저주(咀呪)와 수치는 주님께서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셔서 다 처리하셨습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3;15-18)
※예루살렘 여자들의 조언(助言) (1;8)
“1;8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1. “예루살렘 여자들” (18상)
1) “여인 중에 어여뿐 자야” (1;8상) 사랑하는 이를 찾는 술람미에게 예루살렘 여자(친구)들은 사랑하는 이를 찾는데 도움이 되는 말을 합니다. 술람미 여자가 어여쁘다는 말을 들은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은 검다고 겸손하게 낮추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필요합니다.
2) 사도 야고보는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약4;10)고 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겸손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도 그러한 술람미 여자를 여인 중에서 어여쁘다고 했습니다.
3) 자기의 못남을 인정하고 부족함을 인정할 떼 다른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사울왕은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겸손이 낮추었을 때 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송을 받아 왕까지 되었지만 자기가 제일이라고 높였을 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삼상15;17-19)
2. “양떼의 발자치를 따라” (1;8하)
1) 술람미 여자도 그렇지만 성도 역시 양떼의 발자치를 따를 때 사랑하는 이를 찾는 비결(秘訣)이 될 수 있고 은혜를 회복할 수 있는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 것은 주님은 성도들을 과거(過去)의 죄나 짓고 살았던 못난이로 계속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생활에서 사모(思慕)하고 갈망하는 마음도 보십니다.
2) 주님은 우리의 행위나 들어난 겉모습을 보시면서 잘 가꾸지 못한 포도원의 들 포도로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라갈 새싹과 같이 보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보시기에 어여쁘다고 하시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좋은 포도를 맺는 것이 주님의 바람입니다. 만약 들 포도 열매를 생산한다면 찍힌 가지가 되어 화목(火木)이 될 것입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시80;14-15)
3) “양떼의 지나간 발자취” 양들은 길로 지나가며 대로(大路)를 이루어 흔적을 남겼을 것입니다. 양떼의 발자취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고 군대 군대 목자(牧者)의 발자취도 보일 것입니다. 성도들의 참된 신앙의 여정도 믿음의 선진들의 발자치를 따르면 될 것입니다. 그 발자취를 찾아보려면 히브리서 11장을 보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11;1-3)
4) 신약에서 주님께서 어떠한 삶을 사셨는가를 비롯해서 열두 사도와 사도 바울의 신앙생활의 여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이 오신 후로 많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걸어갔던 삶의 여정을 통해서 양떼들의 발자취를 따르며 우리들 또한 참된 신앙(信仰)의 발자취를 후손들에게 남겨야 할 것입니다.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후11;26-30)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숫군을 세웠으니 나팔 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렘6;16-17)
“아가서”가 보여주는 승리의 비결 3가지
첫째 상처를 받았을 때도 믿음의 공동체 (교회)를 떠나지 말고 머물러 있으면서 상처를 해결하시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10;34)
둘째 교회 인도자 (지도자) 들의 권위를 인정하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살전5;12-13)
셋째 주님이 맡기신 사역을 감당하시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4;1-2)
5)주님의 품은 우리의 안식처입니다. 양떼들 간의 시기와 다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이 양떼를 떠나면 짐승에게 찢길 수 있습니다. 상처(傷處)를 입었을 지라도 그 공동체를 떠나지 말고 인도자의 권위(權威)를 인정하고 받은 은사를 따라 선한 충성을 다해야 참된 양입니다.
6)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아가서는 왕이 한 말인지, 술람미 여자가 한 말인지, 예루살렘 여자(친구)가 한 말인지 잘 분간이 안 되는 곳이 많습니다. 여기는 예루살렘 여자가 술람미 여자에게 한 말입니다. 친구로서 충고는 대단히 유익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그렇습니다.
7)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신앙은 순수함과 진실함이 요구됩니다.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은 아름답습니다. 참된 삶의 목적을 찾아 나서는 신자는 아름답습니다. 종교 안에 있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는 자는 아름답습니다. 참된 신앙의 길을 잘 모를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목자들의 장막 곁에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 즉 교회를 함부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선진들의 책이나 설교를 통해서 진정한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8) 한번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더 깊이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사모하는 마음과 영적(靈的)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에 굶주린 거지처럼 여기 저기 기웃거려서는 안 됩니다. 구원(救援)은 피로 이뤄진 것이라면 자아(自我)를 처리하는 데는 십자가(十字架)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 안에 거하게 되고 참되 평안과 거룩한 성도의 성화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9)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 지니라” 사실 양과 염소는 대단히 가까운 동물입니다. 양들은 염소와 매우 흡사한 외모를 지녔습니다. 양은 순하고 목자를 잘 따르지만 염소는 고집이 아주 세서 자기가 가고 싶지 않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키우는 사람의 입장에서 짜증이 나고 힘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聖經)에서도 잘 따르는 양과 따르지 않는 염소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중세(中世)시대에는 사탄을 염소로 분류했습니다.
10)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이라”고 하신 것은 “고집 센 염소 새끼를 번성케 하듯 성도는 복음에 대한 고집을 키워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적 자아는 고집 센 염소 새끼입니다. 나의 고집 센 염소 새끼는 십자가를 발견했을 때 깨졌습니다. 내 육적 자아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그 후로 성화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11) 복음에 대한 고집이 주님의 은혜와 신앙 훈련을 더욱 열심 있게 했습니다. 복음을 깨달았다하면서도 경건(敬虔)에 대한 연습이 부족하다면 복음에 대한 고집이 없는 것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딤전4;7-10)
12)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외모가 비록 검고 초라해 보일지라도 술람미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사랑하는 이를 만나 사랑을 받으면 예뻐집니다. 솔로몬은 그가 사랑하는 대상을 여인 중에 어여쁜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받은 여자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떻게 할 줄을 몰랐던 술람미는 상사병(相思病)에 걸렸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왕이어서 사랑하는 여인이 무력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사랑의 대상을 유익(有益)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13) “아가패적 사랑”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솔로몬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책임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충고 합니다. 그것은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그 양들을 돌보는 “목자들의 곁에 가서” “내 염소 새끼를 먹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목양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를 베풀고 사랑을 받았으면 사랑하고 복음을 받았으면 복음을 전해서 다른 사람 영혼 구원받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 솔로몬 왕과 술람미 신부의 사랑의 대화 (1;9-11)
1:9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1:10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1:11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1. 왕의 찬사 (1;9)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1;9)
1) “내 사랑아” (I liken you, my darling) (1;9상) 이는 솔로몬 왕이 술람미를 “내 사랑아”라고 다정하게 아름다움을 칭찬하며 부르시는 음성(音聲)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 된 우리를 아무런 감정 없이 부르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친구 같은 연인(戀人)으로 다정하게 부르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습3;17)
2)“바로의 병거와 준마” (one of the chariots of Pharaoh) (1;9하) 솔로몬 시대에 애급의 말(馬) 특별히 바로의 병거를 끌도록 잘 훈련된 말은 가장 뛰어난 전투용 말이었습니다. 이 준마(駿馬)는 왕궁에서 왕만이 탈 수 있었습니다. 바로의 병거와 준마는 잘 훈련되어진 말로써 주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달려야 하는지, 멈춰야 하는지 싸워야하는지, 후진(後進)해야 하는지를 잘 알아채는 그야 말로 주인과 하나 되는 준마였습니다.
3) 준마(駿馬)는 주인에 의해 결정되며 누가 타느냐에 따라서 그 말의 운명은 결정되고 가치(價値)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애급은 병마(兵馬) 산지(産地)로 유명한 나라였습니다. 솔로몬 왕은 애급의 병마를 좋아하여 마병이 12,000명이며 병거(兵車)가 1,400대 이었으며 이 모두는 애급에서 사 왔습니다.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일천 사백이요 마병이 일만 이천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하였더라 솔로몬의 말들은 애굽에서 내어왔으니 왕의 상고(商賈)들이 떼로 정가(定價)하여 산 것이며 애굽에서 내어 올린 병거는 하나에 은 육백 세겔이요 말은 일백 오십 세겔이라 이와 같이 헷 사람의 모든 왕과 아람 왕들을 위하여도 그 손으로 내어왔더라“ (왕상10;26-29)
4) 솔로몬 왕은 아직 미성숙한 술람미 여인을 향해 "내 사랑아 너는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다고 칭찬했습니다. 신랑은 신부가 어리든 성숙하였든 상관없이 사랑스럽고 아름답습니다. 주님께 속한 자는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성도들 역시 하나님 앞에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거듭나서 하나님께 속한 당신의 자녀들을 아름답게 존귀하게 보십니다.
5)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자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유한 것은 말의 특징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말은 윤택(潤澤)하고 용감하며 장엄하고 주인에게 순종을 잘하고 싸움에 익숙하고 정복(征服)하는 힘이 강합니다. 이는 모두 성도들을 상징하며 참된 신자의 표본입니다.
6) 죄 많은 세상에서 거듭나기 이전의 성도들은 바로와 같은 악한 자를 태우고 그에게 종노릇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만왕(萬王)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태우는 준마가 되었습니다. 특히 용감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으로 대적을 물리치며 순종의 삶으로 주님을 영화(榮華)롭게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롬6;17-19)
2. “두 뺨과 머리털” (1;10)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꿰미로 아름답구나” (1;10)
1)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Your cheeks are beautiful with earrings) (1;10상) 얼굴의 표정은 감정(感情)을 나타내며 좋은 감정은 삶의 질을 바꿔주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자의 두 뺨은 장식한 땋은 머리카락으로 인해 아름답습니다. 땋은 머리카락은 긴 머리털을 의미합니다. 이는 곳 나실 인(separation to the LORD as a Nazirite)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나실 인은 하나님께 구별(區別)된 사람입니다. 긴 머리털은 하나님의 능력(能力)을 가리킵니다. 술람미 여자의 아름다움이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온 것임을 보여 주며 그의 심령이 선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민6;5)
2) “네 목은 구슬꿰미로 아름답구나” (your neck with strings of jewels) (1;10하) 목은 바라보는데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목을 구슬꿰미로 장식했습니다. 목은 순종(順從)을 나타낸다면 구슬꿰미는 인내(忍耐)를 상징합니다. 그 구술은 진주입니다. 진주는 조개의 고통의 산물입니다. 조개가 자기 몸속으로 들어온 이물질을 내어 보내기 위해서 인내하며 품어 낸 실이 진주의 크기입니다.
3) 술람미 여자의 목의 구술 장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온유(溫柔)함을 가리킵니다. 목은 원래 곧은 것인데, 그녀에게는 장식품(보석 목걸이)이 있으므로 그녀가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성품(性品)을 닮아 온유함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목걸이가 없는 목은 모두 곧은 목입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잠29‘1)
3. “은을 박은 금 사슬 귀고리” (1;11)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 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1;11)
1)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 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We will make you earrings of gold, studded with silver) 우리가라고 하신 것은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금 사슬에 은을 박아”라고 하신 것은 그녀에게 구슬꿰미가 있음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2) “순종과 인내”하는 마음이 없다면 변화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금 사슬”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으로 불변성(不變性)을 의미하고 정교하게 만드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하나님은 만들어 주십니다. “은”은 구속(救贖)을 말합니다. 성도들은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며 거룩한 성품으로 주님의 형상을 이루어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은 일생(一生)동안의 일입니다.
3) 솔로몬 왕이 술라미 여자를 위해 금 사슬에 은을 박아 만들어 주었던 것처럼 성도들의 변화된 삶은 스스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역사하셔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4) 진정한 성도라면 새로운 피조물(被造物)로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양떼의 발자취 안에 있어야 합니다.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가서 목자들의 장막 곁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금(金) 사슬을 은(銀)을 박아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5) 성도들의 목의 장식품은 금은보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부친(父親)의 교육을 청종”하는 것입니다. ”모친(母親)의 법도“를 준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성도들의 목의 구슬입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잠1;8-9)
※ 술람미 신부의 화답 (1;12-14)
“1:12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1:13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1. 향기를 토하는 나도(nard) 기름 (1;12)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1;12)
1)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While the king was at his table) (1;12상)“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이는 왕이 연회석에 참여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솔로몬 왕이 연회석에 앉아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그 여자에게는 더할 수 없는 영광이요 가장 친밀한 교제를 가진 것입니다.
2) 왕의 상은 사랑을 입은 자들이 함께 둘러 앉아 먹고 마심으로 원기를 회복하고 사랑하는 분과 즐겁게 대화를 나눔으로 주님의 사랑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술람미 여자는 솔로몬을 왕(王)으로 인정하고 모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3) 성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 심령에 왕으로 모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고 친구처럼 친밀하게 교제(交際)하시는 주님이시지만 반드시 심령(心靈)에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통치(統治)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딤전6;14-16)
4) “나드 기름의 향기” (a pint of pure nard, an expensive perfume)나도 기름은 인도에서 생산하는 최고급 향유로써 왕이나 존귀한 자들이 왕림했을 때 부어 존귀(尊貴)하게 접대 할 때 사용했습니다.
5) “나드 기름”은 “귀한 것” “소중한 것” 아끼는 것“으로 헌신(獻身)을 뜻합니다. 술람미 여자는 자기의 가장 귀하고 아끼며 소중하게 여겼던 ”나드 기름“을 솔로몬 왕에게 드렸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은 다 주는 것이며 헌신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도 자기의 결혼 때 사용하려고 아꼈던 귀중한 나도 기름을 주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요12;3)
2.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 (1;13)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1;13)
1)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My lover is to me a sachet of myrrh“ (1;13상) 유대인 여자들은 몰약(沒藥) 향낭을 차고 다녔습니다. 몰약의 특성과 용도는 “시체에 바르는 방부제”로 즉 부패(腐敗)한 악취를 제거하고 또한 벌레들이 달려드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는 술람미 여자의 왕께 대한 고백입니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沈香)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요19;39-40)
2) “성별 의식에 사용” 왕과 선지자 제사장을 장립할 때 붓는 기름으로 사용하였고 성전 안에서 각종 거룩한 기구들을 깨끗케 하는데도 사용했습니다.
“너는 상등 향품을 취하되 액체 몰약 오백 세겔과 그 반수의 향기로운 육계 이백 오십 세겔과 향기로운 창포 이백 오십 세겔과 계피 오백 세겔을 성소의 세겔대로 하고 감람기름 한 힌을 취하여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 기름을 만들지니 그것이 거룩한 관유가 될지라 너는 그것으로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상과 그 모든 기구며 등대와 그 기구며 분향단과 및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그것들을 지성물로 구별하라 무릇 이것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 (출30;23-29)
3) “왕궁 부녀들의 화장품으로 사용” 여인들이 몰약(沒藥)을 지니게 되면 악취를 제거해 주고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줍니다. 술람미 여자가 솔로몬 왕을 “몰약의 향낭”으로 비유한 것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함을 표상한 것입니다.
4)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復活)하셔서 썩음의 악취를 제거해 주셨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잠재한 죄악의 악취(惡臭)를 소멸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새 생명으로 성도들의 심령 속에 내제(內制)하심으로 기쁨이 넘치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전15;52-54)
3.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1;14)
1)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My lover is to me a cluster of henna blossoms from the vineyards of En Gedi) “고벨화”는 (봉선화) 생명을 살리는 약제로 효험이 있는 강심제(强心劑)입니다.
2) “고벨화“는 속죄(贖罪), 중재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것이 엔게디(새끼 염소의 우물) 포도원에 있다했는데 이는 사해(死海)의 서해안에 있는 오아시스를 말합니다. ”엔게디“는 다윗이 피해 다니던 곳입니다. 이는 성도(聖徒)들이 예수님을 부활(復活)의 주님으로 고백(告白)하고 모심을 의미합니다.
3) 술람미 여자의 솔로몬 왕에 대한 신앙 고백은 영적(靈的)인 의미로는 첫째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강림(降臨)하셨다. 둘째 구속(救贖) 주로써 십자가에 죽으셨다. 셋째 삼일 만에 생명의 주로 부활(復活)하셨다“는 성도들의 신앙 고백이며 간증(干證)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4. 솔로몬 왕의 응답 (1;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1;15)
1) 솔로몬 왕은 술람미 여자의 왕에 대한 칭송으로 인해 그 여자의 마음을 알게 되고 왕은 기뻐서 술람미 여자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2) “내 사랑아” (How beautiful you are, my darling!) (1;5상) 내 사랑을 다른 성경(聖經)에서는 내 짝이여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아내는 행복합니다. 여자의 일생의 영욕(榮辱)과 고락은 남편을 만나기에 달려 있습니다.
3) 왕의 짝이면 왕비(王妃)가 되고 종의 짝이면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적인 측면에서도 믿음의 대상을 잘 선택해야 됩니다. 세상을 택하면 마귀의 종이 될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迎接)하면 주님의 짝이 되어 구원을 얻고 주님과 함께 하나님이 후사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8;16-17)
4)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Oh, how beautiful!) (1;15중) 어여쁘다고 반복하여 말하는 것은 그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반복은 감탄(感歎)이며 참으로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5)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Your eyes are doves) (1;15하) 비둘기는 구약에서 가장 정결한 새이며 재물로 사용하였고 신약에서는 성령에 비유되는 최상의 새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새의 번제이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예물을 삼을 것이요” (레1;14)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3;16)
6) 비둘기의 눈은 세밀하여 땅에 떨어진 작은 좁쌀도 보는 시력을 가졌다고 합니다. 사랑하면 비둘기의 눈처럼 볼 수 있습니다. 남이 보지 못한 것도 보게 되어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비둘기 같은 눈은 온유(溫柔)하고 순결한 눈을 말합니다. 이는 제물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이루는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7) 성령을 비둘기에 비교했으니 성령의 은사들은 살펴보면 은사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능력행하는 은사” “예언의 은사” “영 분별하는 은사” “방언의 은사” “통역의 은사” 이외에도 로마서12장에 다른 은사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어떤 은사는 이미 끝난 은사도 있고 다른 은사는 지금도 사용되어 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주고 있습니다. 은사는 자기가 원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고전14;12)
※ 합창 (a chorus.) (1;16-17, 2;1-7)
“1:16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1:17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2:1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2: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2:3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2:4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旗)로구나
2:5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2:6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게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2:7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합창은 많은 사람이 두 파트너 이상으로 나누어 각 파트너대로 각기 다른 가락을 부르는 노래로 코러스(Chorus) 라고도 합니다. 여기서는 신부를 비둘기 같다는 신랑의 찬사를 들은 신부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어여쁘고 화창하다고 합창으로 화답합니다. 이는 즐겁게 하는 신랑이라는 의미입니다.
1. “푸른 신랑 신부의 침상”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1;16)
1)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our bed is verdant) (1;16하) “프르고” (verdant)는
“신록의” “초록의” “젊은”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2) 침상(寢牀)은 부부가 서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쉬는 장소입니다. 이곳에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기도의 제단으로 주님으로 더불어 교제하고 편히 쉬는 처소(處所)입니다. 침상이 “푸르다”는 것은 즉 청색(靑色)은 생명(生命)을 상징하는 빛깔입니다.
2. “백향목 들보와 잣나무 석가래” (1;17)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 로구나” (1;17)
1) “백향목 들보” (The beams of our house are cedars) (1;17상) 백향목은 “우수” “장엄” “견고”(인내)한 재목을 말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고 구원받은 사람들, 곧 생명을 상징합니다.
2) “잣나무 석가래” (our rafters are firs0 (1;17하) 잣나무는 소나뭇과에 딸린 상록 교목으로, 키는 30m쯤 되고, 지름은 1m에 달하는 커다란 나무입니다. 나무껍질은 얇고 회갈색이며 비늘 조각처럼 떨어집니다.
3) 여기서 잣나무는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잣나무 석가래)과 부활(백향목 들보)은 성전(聖殿)을 짓는 재료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잣나무로 지었습니다. 또한 이 두 가지 나무는 솔로몬 성전(聖殿)을 짓는데 중요한 재료이었습니다.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창6;14)
“백향목 널판으로 전의 안 벽 곧 전 마루에서 천장까지의 벽에 입히고 또 잣나무 널판으로 전 마루를 놓고 또 전 뒤편에서부터 이십 규빗 되는 곳에 마루에서 천장까지 백향목 널판으로 가로막아 전의 내소 곧 지성소를 만들었으며“ (왕상6;15-16)
3. 술람미 신부의 신앙 고백 (2;1)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2;1)
1) 신부된 술람미 여자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고백하며 주님과 동행하기 시작합니다. 2장은 1장의 계속이지만 2장에서는 새로운 장면이 전개됩니다. 술람미 여자는 자기 자신이 고향의 초원과 산골자기에 자신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2) “사론의 수선화” (I am a rose of Sharon) (2;1상) 술람미는 자신을 사론의 수선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론은 갈멜산 정남에 위치한 평원입니다. 이곳은 수목이 울창한 곳으로 동쪽은 산악이고 서쪽은 바다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3) 술람미는 자신을 “수선화”라 부르면서 주님의 공동 상속자로 주님의 마음에 즐거움과 기쁨을 가져다드리는 자임을 스스로 밝혔습니다. 수선화는 작열하는 태양빛 아래서 더욱 강렬한 색채를 들어내고자 온 힘을 기울입니다.
4) “수선화”는 여러해살이풀이며 줄기는 높이가 20~40cm이며, 잎은 뭉쳐나고 비스듬히 선 모양을 하고 있고 1~2월에 달걀 모양을 하는 꽃으로 “신비” “자존심” “고결”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단련(鍛鍊) 속에서 피어나 향기를 발하는 성도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수선화는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정체성을 알 때 고난과 수고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1;12-15)
5)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a lily of the valleys) (2;1하) 골짜기는 어두운 시련의 시간들입니다. 눈물과 근심 걱정의 이 세상을 말하며 “백합화” 역시 왕궁이나 공원(公園)에 있는 호사스러운 꽃에 비교하여 보는 이 없는 곳에서 홀로 피고 지는 외로운 꽃입니다.
6) “수선화와 백합화”는 인생의 무상함을 뜻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고난을 받지만 주님을 의지하여 강열하게 자라며 홀로 외로이 향기를 나타내어 자신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7) 많은 비유 중에서 예수님을 꽃에 비유한 것은 주님의 생애(生涯)가 꽃과 같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생애는 꽃과 같이 아름답고 향기롭고 신선하며 인생(人生)에게 위로(慰勞)와 만족과 기쁨과 사랑과 생명을 주는 생애였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벧전1;23-25)
4. 솔로몬 왕의 화답 (2;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2;2)
1) 술람미 여자가 자기의 정체성을 수선화요 백합화로 밝히자 솔로몬 왕도 이 간증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화답했습니다.
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my darling among the maidens) (2;2상) 여기서 말하는 여자란? “온 인류” “인류 중에서도 궁녀들” “세속적인 육에 속한 신자들”을 말합니다. 그들 중에 내 사랑이라고 하신 것은 동정녀(童貞女)적인 주님께 속한 참 신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고후11;2)
3)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Like a lily among thorns) (2;2하) 가시나무는 잎도 꽃도 향기도 열매도 없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나무로 오직 불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화목을 말합니다. 이 나무는 증오(憎惡), 분노, 시기, 질투(嫉妬), 잔인, 살기(殺氣)를 포함한 악한 것을 의미합니다.
4) 솔로몬 왕은 가시나무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의 신부를 사랑스러움 백합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왕은 신부가 너무도 소중(所重)했기에 가시나무 사이로 손을 뻗어서 신부를 꼭 붙잡았습니다. 우리 주님도 가시나무로 가득한 세상에서 성도(聖徒)들을 백합화라 부르시며 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내미신 손과 발이 가시나무에 찢기시었습니다.
5) 가시나무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백합화는 그 가시에 찔리면서도 더욱 향기를 발합니다. 백합화는 성도,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아름다움과 순결(純潔)을 의미하며 비록 성도들이 죄악 세상에 있을지라도 가시에 찔리는 고통 가운데서 향기를 날려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5. 술람미 신부의 화답 (2;3-7)
“2:3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2:4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旗)로구나
2:5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2:6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게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2:7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1) 솔로몬 왕이 화답(和答)하자 술람미 신부 또한 화답합니다. 이번의 화답은 술람미 신부의 사랑의 체험을 깊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또한 성도들의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의 체험의 고백입니다.
2)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Like an apple tree among the trees of the forest) (2;3상) 수풀은 기둥감이 될 수 없는 잡목(雜木) 나무들입니다. 사과나무는 그들 중에 뛰어납니다. 사과나무는 “꽃이 아름답습니다.” “잎이 무성하여 여름에 시원한 그늘을 제공합니다.” “그 과일은 달고 영양이 풍부합니다.”
3) “십자가 사랑을 발견함과 체험”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솔로몬 왕이며 주님입니다.
4) 인간 중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도 모두 죄인이며 아무리 훌륭한 성인군자(聖人君子)라 할지라도 잡목에 불과합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은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처럼 우리를 죄에서 구원(救援)하셨으며 생명(生命)을 주셨고 참된 위로와 안식과 평안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5)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난 사랑은 너무 높고 깊고 넓고 길어서 지식(知識)이상의 것으로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사랑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3;17-19)
6) “십자가 사랑의 잔치”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2;4) 그가 나를 인도한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말하며 잔치 집에 들어갔다는 것은 혼인 잔치에 들어갔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끼리 연애만 하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혼(成婚)이 되어 잔치를 배설해 놓고 그 곳 즉 잔치 집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19;7-8)
7) “십자가 사랑의 승리” 혼인 잔치 집의 주인은 신랑과 신부입니다. 손님들은 마당 한 구석이나 사랑체로 인도됩니다. 신부는 주인공으로 특석으로 인도되어 신랑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됩니다. 그 사랑의 깃발을 휘날릴 때 환히는 어떠하겠습니까? 이 깃발은 승리의 표상입니다. 이 승리는 십자가의 권능으로 죄악을 이기고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사망의 권세를 이긴 승리를 뜻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15;55-58)
8) “십자가 사랑의 극치” 왕의 사랑에 도취한 신부는 황홀 상태에 빠져 그 강열한 사랑으로 인하여 병이 났음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신부는 신랑의 사랑을 체험하고 사모하며 갈구하다가 병이 나서 그 병을 치료(治療)하고 소생시키는 약으로 “건포도”와 “사과”가 약이 되었습니다.
9) “건포도”(Strengthen me with raisins)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2;5) 건포도는 오래 보관 할 수 있어 불변성을 나타내고 먼 거리까지 수출하는데 용이하며 영양분이 농축되어 있어서 사람의 기운을 소생 시킬 수 있습니다. 참된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만이 인간을 죄에서 건져주시고 치료하실 수 있으며 죽을병에서 소생케 하시는 치료제(治療劑)가 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건포도”이십니다.
“무화과 뭉치에서 뗀 덩이 하나와 건포도 두 송이를 주었으니 그가 낮 사흘, 밤 사흘을 떡도 먹지 못하였고 물도 마시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먹고 정신을 차리매” (삼상30;12)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요5;21)
10)“십자가 사랑의 안식“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게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2;6) 왼손은 안식의 손이요 오른 손은 보호하는 손입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서 안식(安息)을 누린다면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품안에서만이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고 편히 쉴 수 있습니다.
11) “십자가 사랑에 대한 염려와 부탁”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2;7)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부탁한다는 것은 명령입니다. (I charge you) “노루와 들 사슴”은 조그만 일에도 쉽게 놀래는 연약(軟弱)한 동물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참된 쉼을 누리려 할 때 작은 나무 잎이 떨어지는 소리만으로도 놀라 깨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12) 예루살렘 여자들은 영적(靈的)으로 미성숙한 자들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과의 영적 교제에 미숙한 자들입니다. 거듭난 성도가 성숙했다 해도 환난이나 고난을 당하면 흔들릴 수가 있고 자기가 받은 구원까지 의심하면서 심령의 참된 안식(安息)을 누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히4;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히5;12-14)
13)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셔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주님의 인도하심 즉 성령(聖靈)의 인도하심에 어린 아이와 같이 분별(分別)을 못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데는 강열하지만 육신(肉身) 적이고 혼(魂)적일 수 있습니다. 다행인 것은 그들 안에는 이미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사랑을 추구(追求)하게 되고 주님이 원하시는 단계(段階)까지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일2;27-29)
14) 우리가 마음껏 사랑하기까지는,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아다오. 주님을 향한 성도의 사랑은 언제나 많은 방해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나 미성숙한 자들에게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는 부탁입니다. 잠자는 이들의 모습은 고요하고 평안해 보입니다. 신앙도 사랑에 취한 사람은 고요하고 평안해 보입니다.
15) 술람미 신부는 솔로몬 왕의 팔에 안겨 영혼의 황홀(恍惚)한 잠에 취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나를 재발 깨우지 말아 달라고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부탁합니다. 이 여자들은 솔로몬을 알기는 하지만, 긴밀하고 깊은 교제가 없는 자들로 형식적인 신자들을 예표 합니다.
16) 술람미 신부는 비록 이 사랑이 꿈일지언정 영원히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너무 좋고 황홀하고 평안하고 행복해서 왕의 품속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심정(心情)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과 이러한 황홀한 사랑에 취해 본적이 있습니까? 그 무엇도 이러한 사랑을 방해 할 수는 없습니다. 성도의 최고의 기쁨은 십자에서 주님을 경험(經驗)하고 부활(復活)하신 주님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3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