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대사(A. D 1∼590) :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까지 1) 사도시대(1∼100) : 그리스도로부터 사도들의 활동이 끝날 때까지 2) 사도후시대(100∼313) :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허락할 때까지 3) 니케아 회의 시대(313∼590) : 초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까지
2. 중세사(590∼1517) : 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부터 종교개혁 시작까지 1) 과도시대(590∼800) : 선교 발달기 2) 로마교회 성장시대(800∼1073) : 그레고리 7세 즉위까지(동서교회 분리) 3) 로마교회 전성시대(1073∼1303) : 교회 보니파키우스 8세 사망까지 4) 로마교회 쇠퇴시대(1303∼1517) : 종교 개혁까지
3. 근세사(1517∼현재) : 종교 개혁부터 현재까지 1) 종교 개혁시대(1517∼1648) : 종교 개혁 시작부터 베스트팔렌 강화조약까지 2) 근세시대(1648∼1800) : 프랑스 혁명까지 3) 최근세 시대(1800∼현재)
■ 사도들의 종말
1) 야고보 : 예루살렘에서 아그립바 1세에게 피살(44년) 2) 베드로 : 로마에서 순교(64년) 3) 바울 : 로마에서 순교(67년) 4) 야고보(주의 동생) : 예루살렘에서 순교(62년) 5) 유다 : 수리아에서 전도 6) 안드레 : 러시아 남방 시티아에서 전도하다가 사망 7) 마태 : 파사와 이디오피아에서 전도 8) 시몬 : 인도에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못박힘 9) 도마 : 수리아와 인도에서 전도하다가 피살 10) 바돌로매 : 아라비아에서 가죽 벗기어 죽음 11) 요한 : 밧모섬에서 유배, 100년경 죽음
■네로와 도미티아누스의 박해
1. 네로의 박해(54∼68년) 1) 원인 : 로마 대화재 사건(64년 6월 18일, 14구 중 3구 전소 7구 반소) 2) 죄명 : 방화책임을 기독 신자에게 지움 3) 처형방법 : 맹견과 사자 밥, 십자가에 못박음, 화형 4) 순교자 : 베드로, 바울이 순교함 5) 네로의 최후 : 국민의 신망을 잃음, 원로원 결의로 퇴위(69년 자살)
2. 도미티아누스의 박해(81∼96년): 그리스도인 박멸비까지 세움 1) 원인 : 황제예배 불복 2) 죄명 : 기독교도 때문에 모든 신이 노했다는 것 3) 처형방법 : 재산 몰수, 맹수와 결투, 저명인사를 추방 4) 순교자 : 황제의 사촌 동생 등 많은 신자 5) 카타콤 : 박해를 피해 지하 무덤에서 예배드림(순교자들의 신앙 파수 무대가 됨)
1. 교부 어거스틴(Augustine) 히포의 주교, 아프리카 타가스테에서 출생, 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암브로시우스에게 감화를 받아 33세에 회심했다. 그후 히포의 주교가 되어 지도적 신학자로서 활약했으며, 성경주석과 변증론적 저술 및 참회록 등의 저서를 다수 남겼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아들을 위한 평생 기도가 유명하다.
2.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 생애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 아이스레벤에서 광부의 아들로 출생. 어머니는 독실한 신자였다. 19세에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스콜라 철학과 라틴 문학 전공 법학을 전공하려다가 아우구스티투스 교단 수도원에 들어감.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논리학, 물리학 교수를 거쳐 신학 교수가 됨. 그는 1511년 수도사 회의 사명을 띠고 로마 여행 중 교회의 여러가지 부조리를 알게 됨. 1512년에 신학박사가 됨. 1525년 카타리나 폰 보라 수녀와 결혼, 1546년 2월 18일에 향년을 마치다. 2) 개혁 사업 개혁하게 된 것은 교황 레오 10세의 속죄표 판매에 반대하여 1517년 10월 31일에 95개조 논제로 공격하니 에크의 재빠른 고발에 따라 루터의 저서를 불태우라 하며 60일내 회개하지 않으면 그 일당까지 체포한다고 함. 그리하여 루터는 1520년 12월 10일에 대학에서 교수와 학생들을 모아놓고 추방장을 불태워 버렸다. 3) 루터의 95개조 항의문(자료실 참조) 속죄표는 하나님의 징벌을 없이 할 수 없고, 교회의 정죄만 없이 할 뿐이다. 속죄표는 죄를 사할 수 없다. 속죄표는 죄인이 하나님께 의당히 받아 야 할 형벌을 없이 할 수 없다. 연옥에 있는 영혼에게는 속죄표가 쓸 때 없다. 죄를 참회한 신자는 하나님께 사죄함을 이미 받은 고로 속죄 표는 쓸데없다. 선행, 공로, 보화가 무엇인지 평민이 깨달을 수 없고 그 보화 창고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가르친 복음뿐이다.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나 성도들의 공로를 팔 권한이 없다. 4) 사상과 저서 (1) 사상 : 경험적, 실제적 종교 탐구, 성찬은 공재설 주장, 삼대 주장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믿는 자는 모두 제사장이다. 성경의 권위) (2) 저서 : 1520년 5월 선행론, 1520년 8월 독일 크리스챤 귀족에게 고함. 1520년 10월 교회 바벨 론 포로, 1520년 11월 크리스챤의 자유 5) 루터와 보름스 국회 (1) 1521년 1월 25일 카알 5세가 보름스에서 국회를 소집, 의제는 루터 처리 문제, 교황 특사로 알 렉산더를 보내어 루터를 국회에 출두케함. (2) 카알 5세가 신변 안전 보증서를 주어서 소환, 죽음을 각오하고 3월 26일 출발, 도중에서 군중들 의 환송을 받음, 작사, 작곡의 찬송가, (내주는 강한 성이요)를 부름 (4월 17일 국회의 신문 25 권의 저서가 루터의 것인가? 그렇다 이를 취소 할 수 없는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성경으로 증 명하기 전에는 취소할 수 없다) (3) 황제의 명령 : 루터는 저술을 금한다, 루터는 죄인이니 그와 만나는 자도 처벌한다. (4) 4월 26일 귀가 도중 친구의 성으로 납치되어 신약 번역에 착수했다. (5) 1521년 11월 착수하여 1522년 3월에 원고를 마침. 1543년에 14회 정정 출판함.
3. 칼빈(John, Calvin) 1) 생애 1509년 7월 10일 파리 동북방에 소재한 노용에서 5형제 중 둘째로 출생함. 부친 제라드는 법률가 로 감독, 서기로 근무했고 모친은 경건한 신앙인 이었다. 1523년 8월에 파리 대학에 입학, 라틴어, 철 학, 인문과학을 공부함, 졸업때에 법과로 전과함. 1533년 11월 1일에 친구 니콜라스 코프가 파리 대학 학장으로 취임할 때 취임 연설의 기초자로 복음주의를 강조하였다. 1540년 8월 네덜란드에서 피신해 온 과부와 결혼하였다. 1564년 5월 24일 55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2) 제네바의 개혁 운동 (1) 개혁전의 정치 조직 : 제네바시는 자치권이 있었다. 시정은 세 종류의 의회(평의회, 200인 의회, 시민 총회)에 의해 지배되었다. (2) 제네바의 개혁 운동 : 1521년경에 루터의 저서가 제네바에 전달되어 개혁 운동의 기운이 가득하 였고 1532년에는 일반인이 동요가 있었다. 파렐의 베른 개혁 운동이 성공하여 제네바 개혁당에게 힘과 자극을 주었다 ① 200인 의회는 미사를 금했다. ② 풍속 개량과 규율을 엄히 지켰다. 파렐과 칼빈의 개혁운동(칼빈은 3인의 목사중 1인, 시민들 의 반항으로 의회는 파렐과 칼빈의 추방을 결의, 스트라스부르에서 3년간 성경 주석 집필, 1541년 신파의 집권으로 다시 초청되어 23년간 머무르며 개혁운동에 전력하였다. 처음 13년 을 고전하였으나 후 10년은 성공적인 개혁 사업을 전개하였다.) 3) 칼빈의 개혁사업 칼빈의 이상은 정교 일치로 신정 건설에 있었다. 교회법 제정 교회정치 감독 없이 국가의 간섭을 받 지 않는다. 교회직원 목사, 장로, 집사 (1) 교인 : 전 신민이 교인으로 신앙고백을 하여야 했다. (2) 평의회 조직 : 목사 5인, 장로12인으로 조직된 풍속, 도덕, 취제기관으로 매주 1회 집회하였다. 칼빈은 목사 회원이었으나 성경 해석자로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교회 추방권이 있었고 1542-1546년 사이에 58명사형, 76명 추방의 결정이 있었다. 사업 부흥을 위하여 견직 공업을 장려하였다. 시민교육을 위해 대학 설립함. 4) 저술활동 기독교 강요, 신구약 주석, 문답서, 설교 - 서신, 세네카의 주해 등이다. 5) 칼빈의 신학사상 (1) 사상 : 신학의 기초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하나님의 섭리 주장, 인간과의 밀접한 관계에 두었 다. 그리고 성찬론의 기념설을 주장함 (2) 신앙 5개 신조 ① 인간의 전적 타락 ② 무조건적 선택 ③ 제한 속죄 ④ 불가항력적 은총 ⑤ 성도의 견인 6) 칼빈이 유럽에 끼친 사상적 영향 (1) 영국 : 청교도들에 의하여 카톨릭식의 의식과 미신적 예식 일소, 청교도 신앙을 배양, 배출자는 (후워, 험프리, 밀톤, 번연) 등이다. (2) 스코틀랜드 : 존녹스에 의하여 1560년 개혁 교회가 법적 인정받음. (3) 프랑스 : 위그노가 활동 그 중심 인물인 페르베였다. 1572년 성 바돌로매 전야제에 위그노 대량 학살이 있었다. 1598년 앙리 4세의 난트 칙령에 의하여 신교의 자유를 획득하였다.
4. 종교 개혁 기념일 루터가 독일의 비텐베르크교회의 정문에 그의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붙인 것(1517. 10. 31)을 기념하 는 날, 이 사건은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에 독일의 루터파와 연합지역 교회들은 10 월 31일 또는 그 다음(또는 그 전의) 일요일을 종교 개혁기념일로 정하였다.
5. 리빙스턴(Livingstone) 선교사
■영국의 아프리카 탐험가, 선교사, 1838년 런던선교협회에 가입하여 동 협회 후원으로 신학공부를 마치고, 남아프리카로 파송되었다(1840).
■베강 유역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하였으며(1853), 잠베지 강을 탐험하던(1854)중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했다. 이후 여러 차례의 탐험을 통하여 아프리카 대륙 문명화에도 선구자가 되었다.
6. 무디(Dwight. L. Moody)
미국의 복음 전도자, 매사추세츠주 노드필드에서 출생, 그는 에드윈 무디의 아홉 자녀들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났다. 무디는 자기 동네의 유니테리언교회에서 종교적인 감동을 받았으며, 자신이 나가는 교회의 주일학교에 학생들을 많이 끌어모으기 시작한 것이 그의 최초의선교사업이었다. 그가 받은 교육은 지역 초등학교 교육이 고작이었다. 1854년 그는 보스턴으로 가서 그의 외삼촌에게 고용되어 구두방 점원으로 일하였다. 그 후 구두판매업계에서 뛰어난 외판원으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시카고로 옮겨와 기독청년연합회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861년 그는 자신의 구두판매 사업을 그만두고 도가적인 도시 선교사가 되었으며, 남북 전쟁 당시에는 기독교 위원회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872년 그는 영국을 방문하여 여러 전도집회들을 주관해 나갔는데 그 결과 복음 전도자로서의 탁월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7. 청교도 영국의 일부 교회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영국 국교회의 정책에 반대하여 제네바의 칼빈주의 종교개혁을 모방한 보다 적극적인 종교개혁을 요구했다. 그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유능한 논쟁가들이 참여했다. 상인 계층이 이 운동을 지지했으며, 엘리자베스 왕궁 위원들 가운데도 상당한 지지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성경이 인정하고 있는 예배의식 이외의 인위적 의식을 철저히 배척하였고, 교회장식, 사제복, 오르간, 십자가 모형 등의 사용까지도 비판했다. 대신 전도와 주일성수 그리고 탁자식 강대 설치를 강조했다. 1660년 이후 청교도는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망명하기 시작하여 미국을 건설하는 주체 세력이 되었다.
8. 번연의 천로역정 1894년 발행된 기독교 소설, 저자 번연(John, Bunyan). 한국 초기 선교 때 성경과 함께 기독교 신앙의 지침서로 많이 읽혀졌고, 한글 계몽에도 큰 공헌을 했던 책이다.
9. 토마스(Thomas, Robert, Jermain) 선교사 영국 런던선교회에서 중국에 파송한 선교사, 중국명 탁마사 혹은 최난헌 한국 개신교 선교 개척자, 영국 웨일즈에서 회중교회 목사의아들로 출생. 런던 뉴칼리지를 졸업하고 해외선교를 지망, 런던선교회에서 중국 선교사로 임명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1863년 7월 21일 중국으로 출발했다. 상해에서 선교활동에 착수했으나 선교부 관리자와의갈등, 부인의 죽음등으로 좌절하여 1864년 12월 사표를 제출했다. 그후 청국 세관에 취업하여 일하던 중 한국 선교를 결심했다. 1865년 9월 제 1차로 한국 서해안을 방문한 바 있고, 마침내 1866년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에 통역관으로 동승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교역이 목적이었던 셔먼호는 한국관군의 제지를 무시하고 총포를 쏘며 한국인들을 살상했다. 이에 평양 수비대는 셔먼호를 공격하였고 승선자 전원은 처형되었다. 죽는 순간까지 한문성경을 뿌리고 전도한 토마스의행적이 유명하며, 이로써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를 불리기도 한다. 훗날 대동강변에 토마스 목사기념관이 세워졌다.
10. 알렌 (Allen, Horace Newton) 구한말 주한 미외교관, 선교사, 의료인, 학국명 안련. 오하이오 주 딜러웨어에서 출생, 웨슬리언대학을 졸업하고 (1881) 마이애미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1884년 선교사 신분을 감추고 공사관 부속의사로 임명되어 한국의 첫 의료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았다. 갑신정변 당시 수구파의 거두인 민영익을 빈사상태에서 구출함으로써 고종의신임을 얻어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을 설립(1885) 하였다.
11. 언더우드(Underwood, Horace, Horton) 미북장로회 선교사, 한국명 원두우 영국 런던에서 존 언더우드의 4남으로 출생, 1872년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한 후 뉴욕대학을 거쳐 1884년에 뉴브론스윅 개혁파 신학교를 졸업했다. 신학교 재학중에 선교사가 될 것을 결심했고 졸업 후 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선교사 준비를 위해 한동안 의학수업을 비롯, 여러 언어와 기술 훈련도 받았다. 인도 선교사를 지망했다가 곧 북장로회 한국 선교사로 결정되었고 일본을 거쳐 1885년 4월 5일 최초의 복음 선교사로 입국했다. 처음에는 알렌이 개설한 제중원 희학교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가르쳤고 내한 이듬해인 1886년 고아원을 겸한 학교를 설립했다. 1887년 제1차 전도여행을 하여 송도, 소래, 평양, 의주 등을 돌았고 그 해 한국 최초의 장로교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창설했다. 그밖에도 한글 성경의 개역과 완역을 위해 성경 번역위원회를 운영하는 일, 문서선교의 본격적인 전개를 위한 '한국성교서회'(현 기독교서회)의 창설과 초기 전도문서의집필과 번역에 있어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다했다. 또한 찬송가의 보급을 위해서도 초기 장로교 찬송가인 '찬양가'를 번역 출판하였다. 함께 내한했던 미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연합적인 활동에 있어서도 크게 협력하였다. 1915년 경신학교 대학부에서 출발시킨 연회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그의 아들 언더우드를 비롯 그의 후손들도 대를 이어 한국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연희대학 설립에 박차를 가하던 1916년 10월 과로로 별세하였다. 생전에 고종 황제로부터 태극 훈장을 받았다.
1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칼빈주의의 유력한 신조들 가운데 하나이자 모든 장로교회의 표준 신조이다. 웨스트민스터회의(1643-1646)에서 작성되었다. 직접적인 배경은 찰스1세가 영국 국교회 체제를 강요함으로써 갈수록 골이 깊어진 왕과 백성들간의 관계에 있다. 국가는 국민의 복지에 관계가 있으므로 종교 문제에도 관계가 있는게 당연하다고 보던 시대에 찰스의 태도는 정치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청교도 들은 영국국교회의 신조들을 당연히 개정해야 하며, 그래야만 순수한 신앙을 가르치고 전파할 수 있다고 느꼈다. 확고한 칼빈주의자들이던 스코틀랜드인들은 그들의 신조들을 개정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배척하였다. 1638년에 역사적인 국민계약은 이 점을 확언하였고, 스코틀랜드인들이 영국 북부를 침입한 것에 놀란 찰스는 그 동안 해산했던 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의회는 찰스에게 훨씬 더 많이 양보하도록 요구하였고, 찰스가 이를 거절하자, 1642년에 청교도혁명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의회는 개혁 노력의 일환으로 영국 국교회와 스코틀랜드 국교회에 적합한 신조를 작성하기 위하여 웨스트민스터에 회의를 소집하였다(1643)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시민 투쟁은 계속되었다. 이 회의는 청교도 칼빈주의자들도 참석하였다(영국에서는 121명의 성직자와 30명의 평신도, 스코틀랜드에서는 4명의 성직자와 2명의 평신도가 참석하였고, 대표들 가운데 약 35명은 청교도 혁명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3년동안 게속된 회의에서(1643-1646) 대표들은 교리 문제에는 별로 어려움을 겪지 않았지만(교리가 신앙고백의 2/3를 차지함), 교회와 국가에 관한 장을 작성하는데는 좀더 긴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해서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정통 칼빈주의를 스콜라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체계적으로 해석한 신조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된 자들의 구원을 강조한다.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던 쟁점들은 회피하였다. 이 신앙고백은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채택되었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표준신조로 남았다.
■ 한국 장로교 약사
1. 준비시대 (1865 - 1844) 1865년- 산동 선교중인 토마스 목사(스코틀랜드 선교사)가 황해도 서해안에 와서 3개월간 전도함 1866년- 토마스 목사는 미상선 (셔면호)를 타고 대동강에 왔다가 피살됨 1867년- 재중 미선교사 콜멧과 마티어 목사가 각각 토마스 목사의 행방을 알고자 서해안을 다녀감 1873년-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이 만주 한인들에게 전도함 1876년- 백홍준 등 4명의 조선 청년이 만주에서 세례를 받음 1881년- 로스 선교사가 다시 만주에 온 신자 85명에게 세례 베품
2. 개척시대 (1884 - 1889) 1884년- 서상륜이 황해도 장연군에 솔내교회를 설립 1884년- 북미 장로회 선교사 알렌 의사 부부가 내한 1885년- 미국북장로교회 의료선교사 안련박사 부부가 입국하여 광혜원을 운영 1886년- 언더우드 학당(경신학교 전신)을 설립 1886년- 언더우드 목사가 처음으로 국내에서 노춘경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찬식을 거행함 1887년- 언더우드가 새문안교회 설립함. 서상륜, 백홍준 장로 장립 1887년- 로스목사(봉천 주재)가 최초 한국 성경 출간
3. 선교사 공의회 시대 (1889 - 1900) 1889년- 선교사 공의회 조직(회장 - 혜론, 서기 데이비스, 호주 장로회 데이비스 목사가 내한하였다) 1892년- 10. 18 미국남장로교회 선교사 이눌서목사 부부, 전위렴목사 부부, 최의덕 목사, 그의 여동 생 최마태가 입국하여 전라도 지역에서 선교활동 1898년- 캐나다 선교회 조직(원산서) 1898년- 9월 카나다장로교회 공식 선교사 구례선 의사 부부, 마구례 목사, 부두일 목사 부부가 입국 하여 함경도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함
4. 합동 공의회 시대 (1900 - 1907) 1901년- 합동공의회 조직(장로3, 조사 6, 선교사 25) 1901년- 평양에 장로회 신학교(현 장로회신학대학교)설립 1902년- 찬송가 편집 시작 각 교파 명치 예수교로 통일 결정 1904년- 각 교파 감사일을 11월로 통일 결정 1904년- 공의회법과 규칙 채용 동년 장로 25, 신학생 19명 1905년- 장로회와 감리회 합동공의회 조직. 4선교회 본부에서 자유장로회 조직 허락했음으로 교파 직 준비
5. 독노회 시대 (1907 - 1912) 1907년- 9월 17일 : 예수교장로회 대한로회(독노회)조직, 장로회 신경과 정치를 임시로 채택하고 최 초 목사 7인을 안수하여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함. 목사 47명, 장로 53명, 예 배처 984개처, 세례교인 17,899명, 원입교인 21,482명 ▶회원- 선교사 38, 장로 40, 내빈 3 ▶목사장립- 서경조, 한석진, 송인서, 양전백,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제주도 선교사 파송- 이기풍 목사 파송 ▶평양신학교 직영 결정 ▶미국 장로회공의회 가맹 결정 1909년 목사 8명 장립, 제주도에 여선교사 파송(이선관 여사). 전도목사 파송 - 한석진(동경) 최관훈 (해삼위) 1910년 9월 21일 1백만명 전도운동 시작, 김진건 목사 만주 전도 목사로 1911년 임종순 장로 동경 전도사로 파송
6. 총회시대 (1912 - 1953) 1912년- 9월 1일 평양서 총회조직(회장 원두우, 부회장 길선주) ▶회원 - 목사 52, 선교사 44, 장로 125 계 221명 ▶결의 - 중국 선교사 파송 결정(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1914년- 감사절 결정(11월 3차 주일후 수요일) 1915년- 장로교 감리교 연합회보 발간 1917년- 총회 회칙 제정 정기총회 10월 첫주일로 1919년- 만국 장로회 총회에 임종순 목사 파견 1920년- 총회 부서 고등교육 장려부 설치(외국유학 장려) 1922년- 교회와 관계없는 강연회는 교회네에서 엄금 1923년- 교회내서 연극 금하기로 1927년- 금강산 수양관 건축 시작, 세계 주교대회에 김관식 목사 파송(로스엔젤레스), 국제 신교 연합 회에 마포삼열 파송 192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 총회 조직. 1932년- 토마스 기념 예배당 헌당식 거행 1934년- 9월 9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선교 50주년 희년기념예배 드림 1935년- 신편 찬송가 발행(장로교 단독으로) 동년 한경희 목사 순교 1936년- 장로회, 감리회, 교구 경계선 철폐 1937년- 표준 주석 편찬위원 선정 1938년- 신사참배 결의, 평양신학교, 숭실학교 등 15개교 무기 방학 1938년- 9월 10일 제 27회 총회서 신사참배 하기로 결의 1939년- 조선신학교 설립 1942년-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 박해 1944년- 일본 정책으로 한국교회 전멸운동 추진
7. 해방후 분열 및 일치운동 시대 1945년- 8.15 해방으로 교회 재건운동 활발 1946년- 고려 신학교 설립 1947년- 4월 18일 제 2회 남부 총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재건 1948년- 한국장로교 W.C.C. 가입 1949년- 장로회 신학교 설립 및 총회 직영 결정 1949년- 4월 22일 교단 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변경 1949년- 신사참배 문제로 경남노회 분열 1950년- 6.25사변으로 교회 인적, 물적 피해 막대 1951년- 총회로부터 경남 법통노회(고신촉) 단절 1951년- 총회 신학교 설립(대구)장신, 조신총회 직영취소 1952년- 장로회 고신측 총노회 조직함 1953년- 제38회 총회서 김재준 목사의 성경유오설 주장으로 목사직을 파면함. 1953년- 6월 10일 조선신학교 중심으로 대한기독교장로회를 조직 분립 1954년- 대한 기독교 장로회 총회 조직 1959년- 제 44회 총회에서 신학교 문제와 에큐메니칼운동 문제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와 분립 1960년- 합동측과 고신측의 합동 1962년- 종전의 고려파가 분립함. 1979년- 9월 장로교 합동측 비주류 이탈(개혁)
■ 우리 나라 믿음의 인물들
■서상륜
(1849 - 1926) 한국 기독교 최초의 장로이다. 1849년 7월 26일 신의주에서 동지사인 서석순의 장남으로 출생하였고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3세때 부모를 잃고 약장사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872년 만주에서 장티프스로 고생하던 중 영국인 선교사 매킨타이어를 만나게 되고 그의 도움으로 병원에서 1개월간 치료한 후 완쾌되었다. 이 때 매킨타이어 선교사로부터 로스 목사를 소개받게 되었고 두 사람에게 감명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1881년 로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후 로스 목사는 한국어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로스 목사는 한국인 청년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와 함께 한문 성경을 국역하고 있었는데 한학에 뛰어난 서상륜도 성경 번역 작업에 동참하여 1882년에 누가복음을 1886에 마태복음 및 마가복음을 1887년에는 누가 복음을 비롯한 신약 성경을 완역하였다. 서상륜은 성경을 국내에 보급하기 위해 고향에 잠입하여 성경 보급에 열중하였고 동생과 함께 10여 명의 신도를 전도하였다. 이 사실이 정부에 알려져 그의 친척집인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소언리(소래)에 피신하게 되었다. 피신 후 에도 그들은 계속 전도에 열중하였다. 1884년 로스 목사가 보낸 성경책이 문제를 일으켰으나 묄렌도르프의 도움으로 성경책 6000권을 인수하여 성경을 배포하였고 전도활동을 하였다. 1884년 장연 송천(소래) 교회를 설립하였는데 이 교회는 한국 최초 교회일 뿐 아니라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887년 10월 한국 최초 장로로 장립하였다(새문안 교회). 서울을 중심하에 각처에 교회 설립 활동을 벌였다. 1926년에 향년을 마쳤다.
■서경조 목사
(1852 - 1938) 장로교 목사, 한국 장로교회 최초 7인 목사 가운데 한사람 본명은 상수, 초기 책장사 서상륜의동생 1852년 12월 14일 평북 의주 출생 10세때 부모를 잃고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으며 형 서상륜과 함께 만주에서 한국 최초의 개신교인이 되었다. 1885년 언더우드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책장사로 활동하다가 1895년 초까지는 베어드 매켄지의 전도 사업을 돕기도 하였다. 1896년 봄에는 황해도 솔내에 예배당을 지어 한국 최초의 교회 설립에 역사를 열었고 1907년 9월 17일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로 안수받았다. 1910년 9월 21일부터는 언더우드와 함께 서울 근교에서 순회 전도하였고 1911년에 언더우드의 동사 목사로 새문안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13년 은퇴한 후 송천(솔내)에서 휴양생활을 하다가 1916년 8월에 서울 안동교회에서 잠시 임시 목사로 시무하였으며 이후 독립운동을 하는 아들 병호를 따라 상해로 이주하여 살다가 1938년 7월 27일에 별세하였다.
■길선주 목사
(1869 - 1935)장로회 최초 목사중 1인 한국 선교사의 선구자, 부흥사, 민족대표 33인중 1인인 독립운동가. 길제 선생의 후손으로 1869년 3월 15일 평남 안주읍 후장동에서 길봉순과 노복순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자는 윤열 도호는 영계. 어려서 한학을 하였으며 11살때 신선행과 결혼하였고 12살때 한시를 지어 장원 급제하고 부사의 통리가 되었다. 190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6월 10일 장대현교회에서 졸업한 후 그 해 9월 17일 한국 독노회를 설립하고 그 자리에서 장로교 최초의 목사 7인중 1인으로 안수받았다. 1897년 김종성 목사가 하나님을 믿도록 권유하였고 그는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 라는 음성을 듣고 성령을 체험한 뒤 널다리골 예배당(장대현교회)에 참석하였다. 이길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1900년 총 공사비 7천원을 들여 장대현 교회를 건축하고 장로로 피택되었다(1898). 숭현 여학회(1900년)를 설립하였다. 그는 매주일 남년별로 장대현 청소년반 소년반으로 나누어 성경공부를 하였으며 저녁 예배 30분 전에 찬송가를 가르쳤고 수요일은 삼일 예배라 하여 기도 중심예배를 드렸다. 그는 박치록 장로와 함께 한국 최초로 새벽기도회를 실시하였다. 1912년 조선총회가 조직되었고 전도국장이었던 그는 선교사 파송계획을 수립하고 1913년 9월에 박태수, 김영훈, 사병순을 한국 최초의 해외선교사로 중국 산동반도에 파송하였다.
■이기풍 목사
1907년 한국 최초 7인의 목사 중 한 분이다. 청일전쟁으로 원산에 갔다가 이곳에서 신도들을 박해하다가 전도를 받고 1894년 스왈론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903년 마펫 선교사의 권고로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된 후에 우리나라 최초의 외지선교사로 제주도에 파송되었으며 얼마 후에는 육지로 돌아왔다. 1921년 제 10대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고문으로 건강이 약화되기도 하였다. 말년에 여천군 우학리 교회를 시무하다가 1942년 6월 20일 별세하였다.
■김익두 목사
(1894 - 1950) 장로교 목사, 부흥사 김응선과 전익선의 독자로 출생하여 한학을 공부하였다. 16세때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한 후 17세 때부터 상업에 종사하였으나 실패하며 20세때부터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 악명높은 불량배였다. 1900년 안악교회에서 스완른의 영상에 관한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회개하고 박태환의 인도로 입교하였다. 1900년 7월에 세례를 받고 1902년 2월까지 순 한문 신약 성경을 100독하였다. 그는 세례를 받고 매서인으로 일하다가 1901년 28세 때부터 재령읍교회의 조사가 되었으며 그해 10월 부터는 신천에 가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신천교회 조사로서 1906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 제 3회로 졸업하고 5000여원의 헌금으로 교회당을 신축하고 1913년 신천교회의 위임목사가 되었다. 1915년 황해노회장 1919년 부총회자에 피선되었고 가을부터 서울의 남문밖회에서 시무하였다. 1920년 총회장에 당선함. 1927년 12월 13일 경기노회에서 전격적으로 남대문교회 임위목사의 사면 3년동안 수모 속에서 살다가 1930년 11월 2일 황해노회로 이명되어감. 1935년 7월 승동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함 1938년 7월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교회를 사임한 뒤 함구령을 받고 고향에서 은거하였다. 1940년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강요로 신사참배를 한 일도 있었다. 해방이후 강약욱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1946년 11월에 조직된 기독교연맹이라는 이용기관에 가입하였고 1949년에는 총회장에 피선
■주기철 목사
(1897 - 1944) 일제의 식민통치시대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감옥에서 순교한 목사, 그는 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에서 아버지 주현성 장로와 어머니 조재선 사이에서 4남 3녀중 넷째아들로 출생하였다. 웅천읍 사립 개통 소학교를 거쳐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웅변에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처음엔 정치에 관심을 가졌으나 안질 때문에 종교 방면으로 기울게 되었다. 1917년 21세에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였다가 병으로 중퇴하였다. 그 후 웅천읍교회에서 소년 집사로 임명되었는데 김익두 목사외의 부흥집회 새벽기도회 때 성신받으라는 설교를 듣고 중생하여 소명감에 불타는 마음으로 1921년 평양 신학교에 입하였으며 19회로 졸업하였다. 1926년 봄에 30세의 나이로 부산 소량교회의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경남 성경학원에서 후진 교육에 힘써서 손양원 등에게 감화를 주었다. 그 후 1931년 9월 22일에 마산 문창교회로 부임하였다. 그는 40세 전후에 부인 안씨를 잃어 마산 의신여학교 교사로 있던 오정모와 재혼하였다. 1930년대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더욱 격화되고 있었는데 평양의 산정현교회에 송창근목사 후임으로 1936년에 부임하게 되었다. 1938년 9월에 있을 조선 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찬송결의를 강제하기 위해 강경한 반대자였던 그를 7월에 다시 예비 검속하였다. 신사참배를 가결시킨 후 석방시켰다. 농우회사건을 구실로 체포하였다가 또 석방시켰다. 일제 당국은 1940년 여름에 그를 구속시켰다. 구속된 그는 모진 고문과 질병으로 쇠약해져서 1944년 4월 13일 병감으로 옮겼다. 마침내 4월 20일 그는 마지막 면회온 부인에게 자기를 대신해서 어머니를 잘 모셔줄 것과 자신이 죽으면 평양 돌박산에 묻어줄 것 등을 유언한 후 21일 오후 9시에 순교하였다. 나이 49세였다.
■손양원 목사
(1902 - 1950) 장로교 목사, 순교자이다. 호는 산돌 1902년 6월 3일 경상남도 함양군 천원면 구성리 683번지에서 손종일 장로와 김은수 집사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1908년 가족이 함께 기독교에 입교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고 칠원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 12세때 신사참배 반대로 퇴학 맥래 선교사의 도움으로 복학하여 졸업 (1917)서울 중동학교에 입학(1919) 하였으나 부친이 3.1운동에 연루되어 검거되자 퇴학당하였다. 일본 소압중학교(1921 - 1925)에 유학하던중 성결교회 노방전도대회에서 성경을 체험하고 귀국하여 경남 성경학원에 입학하였다. 부산 나병원교회 전도사로 부임하는 한편 울산 방어진교회 남창교회 양산원동교회를 개척하였다. 1935년 (33세)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1938년에 졸업했다. 재학중에 평양 능라도교회를 담임하였다. 졸업후 전남 여수 애향원노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닥 1940년 9월 25일 검거되었고 해방과 더불어 출옥하였다. 1948년 10월 21일 여수 반란사건 당시 동인, 동신 두 아들이 안재선이라는 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안재선은 검거되어 총살형이 선고되었으나 손목사의 간절한 부탁으로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 손양원은 안재선을 양자로 삼고 이름을 손재선으로 바꾸었다.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손 목사는 북한 공산군에 의해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당하였는데 그 유명한 사랑의 원자탄 주인공이다.
■최흥종 목사
(1880 - 1966) 장로교 목사, 사회사업가, 전남 광주시 불로동에서 출생하였고 미남 장로회의 오웬 선교사를 통하여 믿음을 갖게 된 이후 줄곧 광주지방과 시베리아 선교 제주도 선교에서 나환자들을 위한 선교와 복지에 힘썼다. 광주중앙교회의 창립교인으로 장로가 되었다. 1921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제14회로 졸업하고 전남노회에서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었다. 광주중앙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였고 1927년부터 시베리아 선교와 제주도 선교에 앞장섰으며 전국으로 나환자들을 위한 권익보호와 복지시설을 확보를 위해 힘썼다. 전국 나환자 근절협회 회장을 맡아 삼애원, 호례원, 송정윤 등의 나환자 시설을 계속 세웠다. 교육에도 관심을 갖고 광주 중앙교회내 숭명학교 광주 YMCA야간학교 광주 농업 실습학교를 창설하고 가르쳤다.
■유진벨(Eugene, Bell)
미남 장로교 선교사, 한국명 배유지(裵裕祉), 켄터키주에서 출생, 센트럴 신학교(1891), 켄터키 신학대학(1894)을 졸업한 후 1893년 내한하여 전남 나주군에 최초의 나주장로교회를 설립하였다. 1900년에 목포교회를 설립하였고 광주 선교부의 첫 책임자로 피택되었다. 1908년 그의 사랑방에서 남녀 학생들을 교육시켰으며, 후에 수피아여학교와 숭일학교로 발전하였다. 전라도에 많은 개척교회를 세웠고 광주기독병원 설립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14년 장로회총회 총회장으로 피선되었으나 과로로 인해 건강을 잃어 광주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조만식 장로
(1882 - 1950. 10.15) 장로교회 장로, 민족운동가, 교육자, 한학을 수학한 후 동료의 권면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도산 안창호의 영향을 받아 일본 유학 중 간디의 무저항 주의사상을 배움. 1919년 3월 독립을 위해 상해로 망명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름.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여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1946년 김일성 일파에 감금되었다가 후퇴하는 공산군에 의해 피살됨.
■박관준 장로
장로, 독립운동가, 의료인, 순교자, 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내던 그가 1905년 기독교에 입신하여 의학을 공부하여 개천군에 십자의원이라는 병원과 군우리교회를 설립해 의료선교를 폈다. 일제의 신사참배 탄압이 가중되자 그 정책적 부당성을 국내외 관계자들에게 지적하고 굳건한 소신과 적극적인 방법으로 항일운동을 벌였다. 1939년 안이숙과 함께 일본 제국국회의 의사당에 들어가 진정서를 뿌린 사건으로 1941년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 우리 나라 신앙운동 및 기타 참고
■새벽기도회의 시작
새벽기도회는 한국을 제외한 여타의 지역에서는 실행되지 않는 한국 교회의 특수한 집회 형태로 발생하여 토착화된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교회에서 새벽기도회는 부흥회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한국교회가 단시일에 성장한데 있어서 새벽기도회의 역할을 대충 넘길 수 없다. 대체로 새벽기도회는 평양의 장대현교회 길선주와 박치록이 1906년경에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새벽기도회는 개인적인 신앙훈련의 한 방법으로 시작되어 교회 차원의 집회로 발전한 독자적인 운동으로 세계 기독교회 사상 유례없는 독특한 집회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새벽기도회가 외지에 영향을 미치게 된 계기는 1907년 대부흥운동을 통해서이다. 오늘날의 새벽기도회는 그 본의와는 달리 신비주의화 되어 간다는 비평을 받고 있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
1903년 감리교 선교사들이 원산에 모여 사경회가 연일 있었다. 이 집회에 참석한 하디 목사는 선교사업에 큰 성과를 얻지 못한 원인을 자기의 부족으로 깨닫고 고민하는 가슴을 부둥켜안고 기도하던 중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이 소문을 들은 평양의 선교사들은 하디 목사를 청하며 집회를 열었다. 때를 같이하여 뉴욕으로부터 존슨목사가 달려와 이 모임에 참가하면서 당시 인도와 영국에서 일어난 세계적 대부흥운동에 관하여 힘있게 전달하였다. 은혜를 갈망하는교인들의 간구는 하늘에 닿아 1907년 1월 평양 중앙교회에서 모인 사경회 때에 그 절정을 이루었으며 낮에는 성경공부 밤에는 부흥전도회로대성황을 이루었다. 죄를 고백하는 기도는 천지를 진동하는 폭포소리와 같았고 한 날 밤에 일어난 성령의 대부흥의 역사는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이 집회에 일어난 부흥의 불길은 전국으로 퍼졌다. 이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신자가 되었으며 얼마나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는지 모른다. 이 부흥운동으로 장로교회에서만도 1906년 6월에서 1907년 6월까지에 입교인이 12,506명에서 15,097명으로 29%의 증가를 보였고 신자 총수가 34%증가하였으며 학생 신자가 72% 증가하였다. 이 후로 교인들은 성수주일, 기독교 윤리의 엄수, 성경연구, 전도 등 그리고 주께 바치는 생활에 힘쓰게 되었고 한국교회는 이 부흥에서 얻은 힘으로 그 후 거듭 일어나는 일제하에서의 수난과 박해를 능히 견디며 참아 나갔다. 특히 부흥 사경회는 이 운동을 계기로 하여 한국교회 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영속적인 연례 행사가 되었다. 그런데 이 부흥운동의 동기는 장병일씨가 지적한대로 길선주 목사가 평양에서 한국 최초로 시작했던 새벽기도회의 뜨거운 열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백만명 구령운동
1909년에 일어났던 대부흥운동과 동일한 맥락의대규모 신자화 운동 1909년에 개성지역의 남감리교회 소속 선교사 3명은 1907년에 일어났던 대부흥 열기가 식어짐을 느끼고 몇명의 한인 성도들과 함께 일주일간 산상기도회를 가졌다. 하산 후 그들 중 스톡스 목사는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자신의 교인들에게 일년 안에 5만명의 새 신자를 얻도록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들 3인은 1909년 7월 서울에서 개최된 남감리회 13차 선교연회에서 20만 명의 심령을 그리스도인에게로 를 대회 표어로 채택케 하였다. 이 연회의 폐회 직후 복음주의선교부 통합 공의회가 개최되었고 3인중의 한 명인 라이드(W.T.REID)가 범 개신교회 전도 표어의 채택을 헌의하여 백만명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로 라는 표어가 채택되었다. 당시 개신교 신도수가 학습교인을 포함하여 8천명에 불과하였고 선교사들은 당시 교인을 약 2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었는데 설혹 20만명이었다 하여도 1년 안에 일백만 명의 신자 확보는 매우 대담한 것이었다. 이 선언 직후 미국인 부흥사들이 초빙되어 백만명 구령을 위한 부흥집회가 열렸으며 교파와 계층을 초월한 전도단이 조직되어 전국을 순회하여 전도하였다. 당시 전도의 특징은 날연보와 문서전도의 독특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기도와 전도에도 북구하고 실적은 저조하였다. 이 운동은 당시의 민족적 비운의 시기를 전도의 기회로 활용하였다는 점에서 선교사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민족사적으로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독교인으로서 자긍심과 공동체 의식을 북돋아 주었고 일제에게는 백만기독교 십자군병으로 비추어져 다른 의미의 충격을 주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창설 예수교장로회 대한독노회는 1911년 전국 교회를 7개노회로 조직하여 총회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그 노회는 평안북노회, 평안남노회, 함경노회, 황해노회, 경충노회, 경상노회, 전라노회였다. 각 지방별로 노회를 조직한 후에 1912년 9월 1일 평양여성경학원에 전국 7개 노회의 목사 96명, 장로 125명이 회집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를 조직하였다. 제1회 총회장으로 원두우(언더우드 선교사) 목사가 피선되었다.
■교회의 수난과 교단 분열
1910년 국권을 잃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 장로교회도 탄압을 받았다. 장로교회는 1919년 3.1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3.1운동에 참여하면서 장로교회는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이 운동이 있은 뒤에 기독교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 기독교는 더 이상 외래 종교가 아니었다. 가장 애국적이요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종교로 이해되었다. 1920년대와 30년대는 사경회와 부흥의 물결이 다시 일었다. 요한계시록 강해로 유명한 길선주 목사와 신유의기사를 행사하며 전국을 순회한 김익두 목사가 이 시기에 활약하였다. 1924년에는 남선교회 전국연합회와 청년회 전국 연합회의 전신인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가 창립되었고, 1928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1934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선교 50주년 희년 축하 예배를 거행하였다. 한편에서는 교회 안에서 여러 분파운동이 나타났다. 이단 사이비도 대두하였다. 신학노선의 갈등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1938년에는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여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그 해에 장로 회신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문을 닫았다. 1943년에는 성경에서 구약과 요한계시록이 삭제되고 찬송가가 개편되었다. 해방이후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납북으로 분단되었다. 38선 이북의 장로교회들은 공산당의지배하에서 박해를 받았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다. 6.25 전쟁으로 월남하는 기독교인들이 늘어났다. 이 때 이북에 있던 적지 않은 교회와 노회도 월남해 왔다. 이를 계기로 오늘날가지 이북 노회라 불리우는 피난한 노회가 존속되고 있다.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투옥되었던 한상동 목사를 선두로 하는 경남지역 인사들이 출옥한 후 신사참배를 한 인사들을 정죄 하였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부산의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인사들이 교단을 분리하여 1952년 9월에 대한에수교장로회 총노회를 조직, 분립하여 오늘의 예장 고신측이 되었다. 김재준 목사의 신신학이 문제되어 1953년 6월 대한기독교 장로회를 조직, 분립하여 현재의 한국기독교 장로회가 되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1959년에는 제 44회 총회에서 신학교문제와 에큐메니칼운동 문제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이 분립해 나갔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분열
1907년에 조직된 예수교 장로회 대한 독 노회와 1912년 9월 1일에 조직된 역사적인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그 동안 여러 차례의 교단 분열을 겪었다. 1953년 제 38회 총회시 김재준 목사의 '성경 유오설' 주장으로 목사직을 파면 사건과 관련하여 1953년 6월 10일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대한기독교 장로회를 조직 분립했고 1959년 제 44회 총회시 WCC가입 문제 등으로 통합측과 분립했다. 1960년 고려파 교회와 합동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하였으나 1962년 호헌파와 1963년 종전의 고려파가 분립했고, 제 64회총회시 소위 개혁측이 이탈 하였다.
1963,9,19-24 문교부에 본 총회가 정식으로 등록되다(사회단체 등록증) 1966 토마스 순교100주년 기념예배 1976 선교10주년 기념 사업회 조직 , 찬송가 합동위원회 조직 1979.9 대구은일교회당에서 합동측(주류)와 결별 총회를 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