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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륜의 판
2022. 8. 18
하나님이 자기 일을 하시는 데는 대역인 사람이 필요하다. 창조는 스스로 하셨지만 경륜을 진행하는 데는 반드시 사람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항상 같은 분이지만 어떤 경륜을 시행하느냐에 따라 그 역을 맡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연극에는 그 장면에 따라 필요한 인물이 있는 것과 같이 사람도 그 역에 적합한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있을 때 그런 일을 하게 된다. 그런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은 일을 하실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요 생명이시지만 형상이 없기 때문에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꼭 필요한 것이다.
창세기 1장은 첫 번째 창조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순전히 혼자 하셨다. 그 마지막은 사람을 지으시고 심히 좋다 하신 것인데 그것은 자기를 표현할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표현하기에 딱 알맞는 형상으로 지어진 것이다.
창세기 2장은 지으신 사람에게 무엇을 위임하셨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을 하나님의 동산에 두셨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게 하셨다. 이것이 2장의 내용이다. 지으신 사람에게 무엇을 위임하신 것이다. 일이 있어서 지으셨으니까 위임하신 것이다. 이 위임은 반드시 둘이 연합해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창세기 2장은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렇게 완성되었다.
씨는 흙이 있어야 하고 남자는 여자가 있어야 하듯이 하나님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 혼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흙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씨가 들어가면 신기한 것을 낸다. 세상에 어떤 것도 씨를 열매 되게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흙이 씨를 열매로 만들어낸다. 신기한 일이다.
여자는 아주 연약한 존재다. 그런데 남자만 만나면 아기를 낳는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잘났든 못났든 상관없이, 아무 조건없이 단순히 여자라는 이유로 아기를 낳을 수 있다. 이것이 연합의 원칙이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연합이 안되는가? 연합을 오해하여 비슷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도 그분과 비슷해야 되고 연합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연합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도 우리에게 필요한 분이 되지 않고 말았다. 본질은 신인데 위격은 사람이면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이다. 우리와 만날 수 없는 사람이다.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와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연합에 대해서 오해가 심하다.
연합은 전혀 다른 두 개가 합해서 하나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잘나고 못나고, 훌륭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다. 여자가 훌륭해서 아기를 잘 낳는가? 흙이 훌륭해서 열매를 잘 만들어내는가? 그런 것과 전혀 관계가 없다.
창세기 2장에는 사람에게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영역을 경작하고 지키라고 위임하셨다고 하였다.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영역을 경작하는 것은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을 사람의 인격을 통해서 실체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창조는 허무해지고 만다.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어떻게 완성될 것인지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는다.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미래가 어떻게 될지 말할 사람이 없다.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연합을 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합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연합할 수 있는 판이 필요하다.
아담을 지어놓고 모든 것을 위임하셨지만 아담은 그 자리를 이탈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동산은 모든 것이 정지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처음 하신 일은 잃어버린 사람을 찾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그것은 잃어버린 사람을 찾는 것이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았다는 말이다. 간단하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어떻게 되었는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실 때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무엇인가로 자기를 가리고 하나님을 대면하려고 한다. 지식으로, 소유로, 자기가 아닌 것으로 자기를 대신하려고 한다. 그렇게 아는 것이 달라지니까 조금만 다르면 다 갈라져 버린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면 “나는 장로교에 있습니다.” 하거나 “나는 보수에 있습니다.”, “나는 진보에 있습니다.”라고 한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사람을 찾고 있는데 우리가 너무 멀리 떠나서 헤매는 것이다. 왜 헤매는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을 모르니까 갈 데를 모르기 때문이다. 회개하라고 하지만 갈 데가 있어야 되지 어디로 가겠는가. 고향을 찾아가려면 길을 알아야 하는데 고향이 어딘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고향을 찾아가겠는가.
우리는 아무도 원래 우리가 어떻게 지어졌는지 모른다. 본래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모른다. 불교에서도 그것을 찾으려고 한다. ‘나의 본 모습을 찾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찾아 놓은 것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내가 인식하는 나만 진짜 나라는 것이다. 내가 인식한 것만 사실이지 인식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완전히 초월한 상태인 것 같지만 모순이 있다. 물이 흘러가는데 내가 인식한다고 흐르고 인식하지 않는다고 흐르지 않겠는가. 내 인식이 어떠하든 물은 흐른다.
여기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본래의 나가 누군지 알아야 되는 것이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빠뜨리고 다른 것을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하고 있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에 하신 말씀이 그것이다.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고 많은 것을 잘했지만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셨다. 가장 중요한 것을 버렸다는 뜻이다. 다 잘해도 가장 중요한 것이 빠지면 아무것도 안된다. 엄청 비싼 차를 만들어 놓았는데 운전할 사람이 없는 것과 같다. 다 헛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람은 하는 일도 너무 많고 아는 것도 너무 많다. 그런 것 때문에 서로 헷갈려서 “너와 나는 다르다.”고 한다. 하나님은 한 사람밖에 창조하지 않았는데 다 다르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서로 남의 탓만 하면서 다 자기가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공부를 많이 했으니 정상이다.’라고 생각하고 ‘나는 이런 신학을 공부했으니 정상이다.’, ‘나는 저런 신학을 공부했으니 정상이다.’라고 생각한다. 다 자기가 정상이라고 한다. 내가 정상이라고 하면 반대로 다른 사람이 비정상이라는 말이 된다. 끝이 없고 아무리 해도 결론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심판 날까지 가보자고 한다. 심판 날까지 가 보면 알겠지만 그전에 죽을 텐데 우리에게 심판 날이 오겠는가.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꼭 알아야 한다.
아담은 자기를 나무 뒤에 숨겼다. 그래서 너는 땀이 흘러야 먹고 살 것이며 평생 수고해야 할 것이라고 하셨다. 무슨 수고를 그렇게 하는가? 간판을 만드느라고, 자기를 가릴 것을 만드느라고 수고하는 것이다. 자기를 변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과에 들어온 사람의 공통점은 아무도 자기를 모른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남을 능히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엉뚱한 말을 계속한다. 정신과 환자가 이상한 말을 하는 이유는 ‘저것들은 모를 것이니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정신과 환자와 지내 보았는데 밥에 독을 탔다면서 밥을 먹지 않았다. 입을 벌려 보라고 했더니 입 안에 태가 가득 끼어 있었다. 도저히 밥을 먹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태가 끼어서 밥을 못먹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독을 넣었기 때문에 못먹겠다고 했다. 입안이 그렇게 되면 밥을 먹을 수 없다. 그런 경우는 정신과 의사도 찾아내기 어렵다. 그래서 요즘은 약을 먹게 하지 상담도 별로 안한다.
사람은 몇 바퀴를 돌아서 다른 것으로 자기를 감싸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것이다. 자기를 잘 포장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봐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원래의 사람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이 사람이 누군가? 한마디로 하면 하나님처럼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박으니까 사람으로 드러난 사람이다. 아무리 무엇을 많이 가졌어도 죽으면 그 본질이 드러난다.
십자가에 못박힌 자리에서 이 사람의 본질이 드러났다. 여기서 ‘예수는 사람이다.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사람이다.’ 이런 결론이 나왔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사실을 묻어버리고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죽었다고 하고, 인류를 위한 희생이라는 식으로 미화시켜 버리고 말았다. 이천 년 동안 그런 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 무엇이 왔는가.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답만 더 어려워지게 되었다.
어느 불교 철학자는 과거에는 기독교가 세계를 지배했지만 이제는 불교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했다. 내가 그 말을 들은지 이삼십 년이 지났는데 지금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합리주의 시대에 사람들은 불교에 더 매력을 느끼게 되어 있다. 불교는 입문부터 무조건 의심하라고 한다. 의심할 것은 다 해 보고, 그리고 찾아보라는 것이다.
그에 비해 기독교에 입문하면 무조건 믿으라고 한다. 나는 무조건 믿어지지 않아서 변증을 해 보았는데 변증을 하니까 더 헝클어져서 더 어려웠다. 더 잘 알아보려고 했는데 더 못알게 되었다. 차라리 모르니까 믿으라고 하면 무대뽀로 믿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을 매끄럽게 만들어 보려고 하다 보면 이것도 모르고 저것도 모르고 다 모르게 된다.
예수, 명백하지 않은가! 인간 중에서 그보다 더 완전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 있는가?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분은 하나님으로 보였고 자기도 “나는 하나님 아들이다.”라고 당당히 말했다. 그것이 사실이다. 속인 것이 아니라 사실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이것이 거짓말이 아니라 참 말이다.
마지막 말 한 마디만 안했어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대제사장이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물을 때 명확하게 그렇다고 대답하셨다. 그러니까 그렇다고 대답한 것이지 예수께서 거짓말을 했겠는가. 참 말이다. 그는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다.
그런데 그가 죽을 때 보니 다른 사람이다. 그래서 헷갈린 것이다. 지금도 이것이 헷갈리고 있는 것이다.
왜 하나님 아들이라고 했고, 십자가에 달려서는 왜 죽은 사람이 되고 말았는가? 나는 이것이 연합이라고 생각한다. 본질이 신이면 죽을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이 완전하게 연합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완전하게 연합하면 신이 된다. 모세를 바로에게 보낼 때 모세는 “내가 누구기에 바로에게 가겠습니까. 어떻게 바로를 설득하겠습니까. 나는 바로에게 죽지 않으려고 도망쳐 나온 놈입니다.”라며 오만 말로 못가겠다고 버텼다. 그때 하나님이 “가라.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다. 과연 모세는 바로 앞에 신이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바로가 그 많은 백성을 내보내주었겠는가.
하나님이 쓰시려고 하면 신으로도 쓰실 수 있다. 인간은 어떤 것으로도 쓰실 수 있는 존재다. 내가 스스로 신이 될 수는 없어도 하나님이 쓰시면 그렇게 될 수 있다.
예수는 신이었다. 제자들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가장 잘 알고 매일 같이 살던 사람들이 한 말이다. 이 말은 엉터리가 아니다. 신화적으로 꾸민 이야기도 아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대로 신화였으면 왜 죽었겠는가.
마지막 고소장이 참람하다는 것이었다. 그를 정치범을 몰기 위해서 거짓말로 뒤집어 씌운 것인데 이에 대해 빌라도는 조사해 보고 분명히 정치적인 죄가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군중들이 소리를 지르니까 다시 물어보고 와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책임지라.”고 하자 유대인들은 “예, 우리와 우리 자손이 책임지겠습니다.”라고 했던 것이다.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물을 때 그렇다고 대답하셨다. 유대인이 그 말을 들었는데 그 사람을 그냥 두겠는가. 그런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죄인이 된다.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을 그냥 두면 안되는 것이다. 그들이 악해서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 안죽이면 안되니까 죽인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같은 사람이다. 모세가 바로 앞에 신이었듯이 예수는 우리 앞에 신이다. 그러나 본질은 사람이다. 여기 비밀이 있다.
이 사람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완전하게 하나님이 되셨고 사람은 완전하게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우주 질서가 잡히게 된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섞이면 우주도 다 섞여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게 된다.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지 않고 여자 속에 남자가 있거나 남자 속에 여자가 있으면 무엇이 되겠는가. 그것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다.
그런데 신은 신으로, 인간은 인간으로 갈라지니까 우주가 조용해졌다. 이제는 하나님이 사람을 쓰실 수도 있고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할 수도 있게 되었다. 여자는 남자와 결혼할 수 있고 남자는 여자와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
남자가 여자를 볼 때, 여자가 남자를 볼 때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으면 어찌 되겠는가.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된다. 그런데 이제는 확실히 ‘아, 저 사람은 여자구나.’라고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결혼을 하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의심이 되면 결혼을 하겠는가. 아담이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이 되라고 하셨다.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이 되려면 완전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사람은 사람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완전하게 구별되어야 연합이 가능하다.
섞여서 흐리멍텅하면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된다. 우리는 이천 년 동안 그런 역사를 경험해 왔다.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지금 아무 대답을 못하게 되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면 대답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면 대답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나온다. 그 보좌로부터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다. 다시는 밤이 없고 저주가 없고 슬픔이나 애통하는 것이 없고……, 인간 세계에 있던 모든 것이 다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 그런 일이 있겠는가. 나도 아직 안되었으니 모르겠지만 어린양이 왕이 되는 세계가 있겠는가, 언제 그런 때가 오겠는가? 누가 대답할 수 있겠는가? 다른 것은 다 돼도 이것은 안된다고 할 것이다.
나도 이것 때문에 상당히 고민을 많이 했다. ‘과연 어린양이 통치하는 나라가 올까? 우리가 잘하면 그렇게 될까, 교회가 좋아지면 그렇게 될까?’ 이런 문제가 앞에 있으니 담담해지고 암담해졌다.
그래서 부득이 번역을 달리 해서 ‘어린양이 통치하는 나라’를 ‘어린양이라도 통치하는 세계’로 바꿔 보았다. 이러니까 문이 열리는 것 같다. 어린양이라도 통치하는 세계는 지금도 가능하다.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 안에 구속된 사람들이 있는 나라는 왕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니 어린양이라도 통치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사역자들이다. 우리가 앞에서 끌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나라에 가면 우리도 다 없어져 버린다. 다 같아진다. 바울은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하였다. 중매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함께 시집간다는 것이다. 함께 시집가니까 다 똑같은 것이다.
이 나라는 어린양이라도 통치할 수 있는 나라다. 다스릴 필요가 없으니까 어쩌면 어린양까지도 필요없지 않겠는가. 이것이 새 언약의 실재가 아니겠는가.
그 날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알라 하지 않을 것은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다 아는데 누가 전도하겠는가. 다 하나님을 아는데 무슨 전도를 하겠으며 무슨 사역자가 있겠는가. 다 시집갈 자리를 알고 있는데 뚜쟁이가 왜 필요하겠는가.
이 판에서는 그런 것들이 다 소용없게 된다. 서로 모르니까 중매장이가 필요하지 다 알고 자기들끼리 좋아서 결혼하는데 중매장이가 왜 필요하겠는가. 하나님과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다. 다 알아 버렸으면 누가 중간에서 이러니 저러니 하며 소개할 필요가 없다. 그만큼 평범해진다는 것이다. 잘난 사람도 없고 못난 사람도 없고, 앞서 가는 사람도 없고 뒤에 오는 사람도 없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고 하셨다.
나는 달음질하는 예를 들어서 “뒤로 돌아 가.” 해 버리면 꼴찌가 일등이 된다고 했는데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꼴찌는 꼴찌다. 꼴찌가 일등 되는 일은 별로 없다. 나는 달음질을 못해서 항상 꼴찌였는데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는 한번도 일등을 해본 적이 없다. 항상 꼴찌였다. 아무리 힘써서 달려도 몸이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나는 땅을 밀기도 어려운데 달음질 잘하는 사람을 보니 공중에서 날듯이 뛴다. 나는 늦게야 내가 달음질을 못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옛날에는 왜 죽도록 힘을 쓰는데 왜 앞으로 나가지 않는지 몰랐다. 윷놀이에 빽 도라는 룰이 있다. 말 넷이 업혀서 첫 자리에 있을 때 빽 도가 나오면 이긴다. 9회 말 홈런이라는 것도 있다. 나는 그런 것이 필요했던 사람이다. 앞으로 나가지 못하니까 “뒤로 돌아 가”가 필요했다. 나는 그런 판이 필요한 사람이다. 나는 그런 판에 온 것이다.
스물일곱에 살던 데를 떠날 때 큰 용기나 믿음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기도를 해서 떠난 것도 아니다. 사방이 꽉 막혀서 갈 데가 없었다. 그런 나를 나오라고 부르셨다. 그래서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쳐 나왔다. 그렇게 부르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못나왔을 것이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도 없고 그럴 용기도 없었다.
그런데 판이 완전히 달라지니까, 절망적인 판에 있다가 새로운 판에 들어오니까 전혀 절망이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이 다 잘되었다. 그때 판세가 달라지니까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 뒤로도 여러 번 판을 바꾸지 않으면 안될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하나님이 판을 바꿔주셨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있던 교회를 떠날 때도 아무 대책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나는 절대로 교회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대책이 없었다. 그런데 누가 내 손을 잡고 나를 CCC에 데려다 주었다. 시험을 봐서 들어가라고 했으면 나는 거기 못들어갈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 모습을 가리려고 했다. 어떻게 왔느냐고 물으면 곤란하기 때문에 늘 숨어지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꿔주셔서 옮긴 것이기 때문이다. 판을 바꿀 때는 내 힘으로 못바꿨다.
엑스폴로 74 때 사람 동원을 잘 했는데 그것도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다. 특이한 방법으로 동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 두 교회를 순회를 해 보고 도저히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골 교회 하나를 찾아가는데 하루 종일 걸렸다. 단양 영춘에 갔는데 강을 사이에 두고 못건너고 돌아왔다. 뱃사공의 말로는 하루에 보살 이백 명이 강을 건너 구인사에 간다는데 나는 해가 저물어서 단양 구인사도 구경하지 못하고, 한 교회도 방문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래서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순회를 그치고 다른 것을 했는데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미리 사람들을 준비해 주셨다. 나는 그 판에서 그 지역의 제일 큰 교회에서 6개월간 설교만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고비까지 받았다. 나는 그런 판에서 놀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서울에 가니까 청주 지구 간사가 “목사님 지구에서 삼천 명이나 왔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 판을 만들어 주셨지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 교회의 목사가 토론토에 가게 되었다며 자기 교회를 6개월을 나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아무나 못할 일이다. 충주, 제천, 단양 지역에서 제일 큰 교회의 강단을 나에게 맡기고 갔던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힘으로 되겠는가. 그런데 나는 무난히 내 책임을 완수했고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때 실패했으면 사표내고 나와야 했을 것이다.
그 후에 청주로 갈 줄 알았는데 갑자기 대구로 가라고 해서 대구로 오게 되었다. 뜻밖의 일이었다. 대구라는 데는 생각도 안해보았는데 오늘 내가 대구에 평생 남게 되었다.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겠는가.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이렇게 남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때 그때 당신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해서 판을 바꿔주신다. 그런데 그것이 꼭 사람과 관계된다. 하나님 스스로 바꾸시는 것이 아니다. 판이 바뀌는 것은 사람과 관계되어 있다.
아담 다음에 나온 것이 가인과 아벨이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 얼굴을 내밀러 왔는데 문제는 둘이 싸워서 큰 놈이 작은 놈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런 얼굴밖에 우리는 본 일이 없다. 하나는 선하고 하나는 악한 사람 얼굴을 거기서 처음 본 것이다. 하나님이 지은 사람이 아니라 이미 이탈된 사람을 본 것이다.
주자의 성리학은 아주 유명한 학문이다. 중용 1장에는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脩道之謂敎라 하였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의 성(性)은 마음 심(心)자 옆에 날 생(生)자가 있다. 天命之謂性은 하늘이 명한 것이 성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성을 다스리고 도야하는 것이 도라 하였다(率性之謂道). 아무래도 이상해서 해석을 찾아보니 어렵게 해석해 놓았다.
그래서 내 방식으로 해석해 보았다. 하늘이 명한 것은 진짜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하늘이 명한 것이 가짜라고, 안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볼 때 하늘이 명한 것은 아주 완전한 것이다. 그래서 率性을 성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성을 따르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솔(率)이라는 말은 다스린다는 뜻도 있고 따른다는 뜻도 있다. 따른다는 말로 해석하면 ‘하나님이 주신 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도’라는 뜻이 된다. 그러니 아주 쉽지 않은가. 오늘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진리다.
다른 종교는 대부분 다스려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담 안에 있는 가인과 아벨을 보았기 때문이다. 가인과 아벨을 그냥 놔두면 개판이 되니까 다스려야 한다. 가르치고 교육하고 율법을 줘야 하고 종교를 줘야 하고……. 그러나 한 번도 된 일이 없다. 본성이 악한 놈을 고친다고 다른 것이 되겠는가. 역시 그놈이다. 어쩌다 한 사람이 된다 해도 모든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 변한 사람도 있다. 우리 교회에도 놀랍게 변한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다 그렇게 된다고 볼 수 없다.
나는 하늘이 명한대로 하나님이 주신 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도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러하다. 유교는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그러하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잘못되었으니까 고쳐야 되겠는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고치려고 하는 것이 역적이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맨날 사람을 고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래 주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필요가 있다.
유교는 하늘이 명한 것이 악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다스려서 선한 것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도 본 것이 가인과 아벨밖에 없으니까 ‘어떻게 가르치면 되겠는가, 어떻게 교육하면 되겠는가. 믿음을 주면 되겠는가,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했어도 안됐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원래 악하면 되겠는가. 개를 소로 만들겠는가, 소를 개로 만들겠는가. 개는 개로 키우는 것이 제일 쉽고 소는 소로 키우는 것이 제일 쉽다. 그렇게 해야 당연하다.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것이 제일 쉬운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는가? 그것은 가인과 아벨을 두고 하기 때문이다. 참 사람을 두고 하면 어려울 일이 없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참 나를 발견하게 된다. 참 나, 나도 모르는 나, 나도 모르는 너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까 전에 모든 것이 필요없게 된다. 판이 다르기 때문이다.
바울 서신에는 마지막에 항상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는 주의, 경고, 당부가 있지만 그대로 된 역사가 있었는가? 그렇게 되었으면 진즉 세상이 달라졌을 텐데 이천년이 지났어도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판에서는 안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판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담 판에서는 안된다. 가인과 아벨이 잘 살면 좋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안된다. 강대국들이 넉넉한 것을 약소국을 도와주면 세상이 얼마나 좋아지겠는가. 그러나 강대국들은 잘되니까 더 싸운다. 잘될수록 더 싸운다.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중국과 미국이 계속 대립하고 있다. 작은 나라들이 평안할 길이 없다.
근본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특별히 사역을 하는 분들은 근본을 알아야 사역이 가능하다. 근본을 모르고 아담과 가인, 아벨만 알면 백날 해도 안된다. 자기도 그런데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가 먼저 하나님이 창조해 주신 사람, 그 사람이라야 되지 않겠는가.
사람은 본 대로 하게 되어 있다. 아이들도 부모를 본 대로 한다. 음식 솜씨가 좋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어려서 잘 먹은 사람이 음식도 잘한다. 입이 그 맛이 길들여 있기 때문이다. 못먹고 산 사람은 좋은 것을 먹었던 기억이 없어서 아무리 잘 만들어놓아도 맛이 없다. 부자집에서 잘먹고 산 여자가 음식을 해 놓으면 맛이 있다. 부자집 딸을 데려오면 다른 것은 어려운데 음식은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본질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은 본질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때는 하나님이 이 사람을 마음대로 쓰실 수 있다. 하나님은 원래 사람을 마음대로 쓰실 수 있도록 지어놓았을 것 아닌가.
그러나 지금은 다른 것이 들어와서 마음대로 못쓰신다. 다 제멋대로 살겠다니 쓰시겠는가. 갈수록 그러하다. 갈수록 제멋대로 살겠다는데 하나님이 쓰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먼저 근본을 알아야 한다.
근본을 모르고는 우리가 하는 일은 헛될 뿐만 아니라 어쩌면 오히려 큰 잘못을 행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멀쩡한 사람을 데려다 죄인을 만들 수도 있고 없는 죄를 뒤집어씌울 수도 있다. 우리가 옆에서 보지 않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사람을 만나면 우선 성경을 믿게 하고 두 번째는 그 성경을 근거로 죄인이라는 것을 믿게 하고 그 다음에 죄 사함을 가르친다.
우리 교회에 어려서부터 선한 종교를 믿어서 나쁜 생각을 해본 일이 없는 자매님이 있었다. 어떤 전도자가 그 자매님에게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고 일 주일 동안 왔는데 그분은 마지막까지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하셨다. 그 전도자는 할 수 없이 지쳐서 포기하고 가 버렸는데 그 자매님이 우리 교회에 와서 첫날 “여기가 천국이네요.”라고 간증하셨다.
근본을 모르면 공연한 사람을 데려다 죄인을 만들고 용서해 주는 척하게 된다. 죄인을 만들지 않으면 성경을 가르칠 수 없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내 말이 무리인 것 같지만 선한 사람을 데려다 성경 가르쳐 봐야 헛일이다.
중용에서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脩道之謂敎(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라고 하여 가르침을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가 脩道之謂敎다. 솔성지위도는 가르침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학이시습(學而時習), 즉 가르침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것이 유교다. 왜 그렇게 유교는 윤리 도덕을 강조했을까? 넓은 땅에 원체 많은 인종이 살고 오랫동안 싸우고 해서 도덕심이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판이 그러니까 공자님은 도덕을 가르쳐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석가모니는 왜 초월을 강조했을까? 힌두교는 모든 것이 신이다. 인도에 갔다온 사람 말을 들어보니 도심지만 벗어나면 소가 길바닥에 돌아다니며 똥을 싸고 개들이 돌아다닌다고 한다. 그래도 모든 것이 신이니까 죽이지도 못하고 쫓아내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석가는 당연히 그 허상을 버리라고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왜 그렇게 일을 했을까? 무엇이든지 다 자기라고 하셨다. “길이 어니까?”라고 물으면 “내가 곧 길이다.”라고 하셨고, “진리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내가 곧 진리다.”라고 하셨고 “생명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내가 곧 생명이다.”라고 하셨다. “하늘로부터 오는 떡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내가 곧 떡이다.”라고 하셨다. 이것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특이한 점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떡을 얻어먹을 수는 있어도 떡 주신 이를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즉 이 사람의 본체를 알고 왜 그가 생명의 떡인지 알아야 한다. 그분을 알고 왜 그분이 집이 많다고 하셨는지 알아야 한다.
모든 인류가 다 들어갈 집이 필요하다. 예수 안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 이 사람들에게 준비된 방은 넉넉하다. 누구라도 다 들어갈 수 있다. 누구라도 자격이 없어서 못들어올 사람은 없다.
종교 안에, 기독교 안에는 자격이 필요하고 차별이 많다. 착하고 덜 착하고, 알고 모르고, 믿음이 많고 적고 차별이 굉장히 많다. 그러면서 자유를 말하지만 자유가 되겠는가. 차별이 그렇게 심한데 어떻게 자유가 되겠는가. 등급이 있는데 어떻게 자유가 되겠는가. 강남에 사는 사람들은 굉장히 옹색하다. 옆을 보면 다 높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 자기보다 높으니까 빚을 내서라도 더 높은 아파트를 사야 한다. 자유가 없는 것이다.
모든 인류가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집, 누구라도 제한없이 들어갈 수 있는 집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어린양이라도 통치할 수 있는 세계가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요한계시록 마지막에는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예수가 전부라는 말이다. 그래서 “주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하고 “아멘”으로 끝났다. 이것은 허황한 말이 아니다. 확실한 말이다. 주 예수가 전부니까 확실하지 않은가. 그 은혜가 무슨 은혜인가? 다 한 사람으로 부름받은 것, 이것이 은혜다.
교회에서 어떤 분들은 “열매가 무엇이냐?”, “그리 가면 열매가 열리느냐?”라고 묻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은 인간 세계에서 필요한 것들이다. 사랑도 필요하고 겸손, 온유도 필요하다.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좋아한다. 세상에서 날리려면 그런 것들이 있어야 되고 우리도 떳떳하려면 그런 것들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런 것으로 어떻게 평화가 되겠는가. 그 판에서 우리는 항상 미달이었다. 이래도 미달이고 저래도 미달이다.
세상 앞에 확실하게 보여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확실하게 자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것을 왜 강조하겠는가. 왜 그것을 기대하고 있겠는가. 되지도 않을 일이니 나는 그것을 기대하지 못한다.
진짜 열매가 무엇이겠는가? 바벨로 가서 다 분열되어 있는 인류를 하나로 모으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열매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에게 만족하는 열매를 내면 되지 다른 사람이 그럴듯하다고 하는 열매로 되겠는가. “그 교회는 괜찮더라. 사랑도 풍성하고 사람도 온유하더라.” 하는 것으로 되겠는가. 아무리 그래도 다 계급이 있다. 사랑도 계급이 있고 온유함도 계급이 있고 다 다르다. 같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 한 가지만은 똑같다. 예수 안에 있는 인간의 운명, 진실 이것은 아무도 바꿀 수 없다. 변경시킬 수 없다. 이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이다. 희망이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이것이 남아 있다는 것이 희망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든 사람에게 있으면 좋겠다. 아멘. 우리 모든 사람에게, 여기 있는 모든 분들에게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
빠지는 사람이 있으면 되겠는가. 최고의 불행이 그것이다. 내가 만일 이것을 모르고 죽었다면 나는 객사(客死)할 뻔했다. 길을 가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죽을 뻔했다.
하지만 그때도 나는 자신했다. 누가 물으면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가면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때도 나는 만족했다. 불만스러워서 한 말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거기서 내가 죽어버렸으면 객사가 아닌가. 길을 가다가 죽으면 집에 못들어가고 죽은 것이 객사다.
세 번인가 죽었다 깨어났는데 그 이유가 나로 하여금 객사하지 않게 하시려고 살려 주신 것 같다. 중도에 내가 죽어 버렸으면 나를 따라온 형제들은 다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서 떡도 얻어다 먹었고 포도주도 얻어다 마셨다. 우리끼리는 좋았다. 세상에 없는 교회라고도 했다.
그런데 또 다른 판이 있다. 이 판은 기독교도 불교도 아니고 모든 인류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판이다. 나는 누구를 만나든 이 말을 하고 싶다. 내가 불교를 다 알고 말하겠는가, 유교를 다 알고 말하겠는가.
엊그제 누가 왔다갔는데 열방교회라고 매스컴에 났던 교회에 다니는 부부였다. 그 교회는 공식적인 모임은 못하고 가정 교회로 모인다고 한다. 거기서 훈련도 받고 해외로 사역을 하러 간다고 하기에 다짜고짜로 “사역을 하러 나간다니 참 좋은데, 선교하러 가는 것도 좋은데 무엇을 가지고 가느냐? 가지고 나갈 것이 있느냐?”라고 물었더니 아무 대답도 못했다. 가지고 나갈 것도 없이 가서 무엇을 주겠는가. 부인은 교돌이로 안가본 데가 없이 다 가보았다는데 어떻게 이 말씀이 들렸는지 너무 좋아하는데 형제는 열방교회만 다녀서 아무 것도 몰랐다. 그래서 내가 “제발 선교하러 나가기 전에 무엇을 갖다 줄 것인지 알고 가라.”고 했다. 그러겠다고 했으니 선교 여행을 중지할 것 같다. 내가 심하게 말했지만 당장 못가게 해야 되지 또 가서 사람을 버려 놓으면 되겠는가. 가지고 갈 것이 있을 때 가도 늦지 않다. 어디 가든 마찬가지다. 복음을 들고 나가야 되는데 줄 것이 없으면 되겠는가.
우리가 비록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지만 한 가지라도 줄 것이 있어야 되지, 기껏 준다고 한 것이 길바닥에 놔두고 가 버리면 되겠는가. 내가 길바닥에 놔두고 가면 나머지 사람은 어찌 되겠는가. 돌아갈 집으로 함께 돌아가야 하고 이 길에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이것은 우리가 노력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판의 문제다. 이것이 원래 사람에게 정해져 있는 길이다. 원래 속아서 그렇지 원래 있는 길이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원래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원래 그 사람과 일하려고 우리를 지어놓으셨다.
그 사람은 언제든지 하나님이 “나와” 하면 나올 사람이다. “너는 신이 되라.” 하면 신이 될 사람이고 “너는 거지가 되라.” 하면 거지가 될 사람이다. 우리는 배우와 마찬가지니까 연출자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시키는 것은 다 할 수 있다.
하지 못할 사람에게 시키는 법은 없다. 할 만한 사람에게 시키지, 하지 못할 사람에게 순교를 시키겠는가. 젊어서 충주에 있을 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순교를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미리 하나님께 당부해 놓았다. “나는 도저히 순교할 사람이 못됩니다. 혹시 필요하시면 목이라도 끌어다가 데려가시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그런 무거운 짐을 나에게 주신 일이 없다. 못할 줄 아시기 때문에 안주신다. 나 같은 사람에게 맡겨 놓으면 가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도망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할 만한 사람에게 시키지 나에게는 안시킨다. 나는 순교자들을 대단한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높은 자리에 앉아야 될 분들이다. 하지만 아무나 다 순교자가 되겠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순교자가 되라고 만들어 놓으셨겠는가. 우리 생긴 대로 쓰신다. 내 생긴 대로 쓰니까 걱정할 필요없다. 군대도 갈만한 사람을 부르지 가지 못할 사람을 부르겠는가.
내가 징병검사를 받던 날 그런 선고를 받았다. 군의관이 병종불합격 도장을 찍어 주면서 “장가나 가야 할 텐데”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예 못할 줄 알았기 때문에 친구들이 다 결혼했어도 결혼에 대해 걱정을 한번도 못해 보았다. 옆에서 하라고 시켜서 할 수 없이 서른다섯에 결혼했다. 집 사람이 한달간 기도해 보니까 나에게 시집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왔다는데 내가 어찌하겠는가. 그래서 부담없이 결혼했다. 안그랬으면 내가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첫날밤에 옷벗을 일을 생각하면 바짝 말라서 45Kg였으니 어디 가서 옷벗고 있겠는가. 그러니까 아예 결혼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옆에서 부추겨서 나가서 억지춘향 노릇을 평생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 팔자는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판을 만들어 주셔야 되지 내가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안에 있는 이 판은 만세 전에 예비된 판이고 예수로 말미암아 시행된 판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담도 아니고 가인과 아벨도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된다. 알고 보면 이 사람이 우리 자신이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을 말할 때마다 너무나 좋다. 왜냐하면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니까 날마다 해도 좋다. 예수를 얘기해도 내 일이니 얼마나 좋은가.
내 속에 예수를 모시고 싶어서 해 보았지만 도저히 안되었다. 그런데 예수 안에 있으니 얼마나 쉬운가. “내 안에 있어 주세요.”라고 기도할 필요도 없다. 내가 그 안에 있으니 너무 쉽지 않은가! 나도 고생 안하고 남도 고생 안시키고 얼마나 좋은가. “기도해라. 금식해라.” 할 필요도 없다. 필요하면 자기가 알아서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지 하라 할 일도 아니고 하지 말라 할 일도 아니다.
판에 따라서 해야 될 일이 있고 필요없는 일도 있다.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판에서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대천 해수욕장에 가면 온 시내가 다 해수욕장 판이다. 거기서 넥타이 매고 걸어다니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다. 전부 비키니 차림으로 시내를 왔다갔다 한다. 판이 그 판이니까 그 판에서는 옷벗고 다녀야 되지 오바 입고 다니면 미친놈이다. 그렇다고 아무 데서나 그렇게 하면 안된다. 대구 동성로에서 비키니 차림으로 다니면 미친 놈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판이 다르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예수 판에 오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떡이면 떡판, 포도주면 포도주 판으로 판이 완전히 바뀐다. 그런 판에 있으니까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쉽지 않은가.
이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있기를 바란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성경은 얼마나 완전한지 일점일획도 틀림없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말씀이 축복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