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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만으로
2022. 11. 20
오늘 순자가 나 있는 데서 말하겠다고 해서 어떻게 말할지 모르지만 좋은 것일 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이 말을 한 것이 정말 잘했다. 나는 저렇게 자세히 말을 못했다. 지난번에 말할 때는 교회에 여러가지 말이 있기에 했던 것이다. 순자와 원모는 전에 어느 형제와의 사건 때 크게 상처를 받았다. 일은 그 형제가 저질렀는데 원모가 뒤집어썼던 것이다. 왜냐하면 사건 내용을 모르면서 창세기 형제들이 그 형제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그 형제가 사과를 한다고 했는데 울면서 해서 나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랐다. 두 번이나 했어도 몰랐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욱 그 형제를 동정했고 원모가 너무했다고 했던 것이다.
요번에도 나는 너무나 많은 은혜를 입었는데 항간의 여론 때문에 말했던 것인데 오늘 정말 잘 들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까지 다 말해 줘서 너무 고맙다. 순자 원모와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원수질 일이 있겠는가. 내가 은혜받은 일밖에 없다. 나는 시간이 지나면 문제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한번도 순자의 은혜를 잊어본 적이 없다.
나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섞어서 했는데 그것이 이렇게 파장이 커질 줄 몰랐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경상도에도 그런 말이 있고 전라도에도 그런 말이 있다. “이 문디야”라는 말이 나쁜 말이 아니다. 나는 바로 말하기보다는 그런 식으로 웃으면서 말했던 것인데 이렇게 안좋은 결과를 가져올 줄 전혀 생각 못했다. 이것을 나는 깊이 뉘우치고 있다. 그래서 말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늘 상세하게 설명해 주니까 나도 한번 기억이 새롭다. 실제로 기억 못하는 것이 많다. 그러나 나를 위해서 어떻게 수고하고 애를 썼는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서울을 뭐하러 다녔겠는가. 그 힘든 몸으로 밤에 서울에 올라갔다 와서 다음 날 진료를 해야 하는데 내 몸의 건강을 도우려고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여간 오늘 이렇게 해명해 준 것이 너무나 고맙다. 교회 안에서 혹시라도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기 바란다. 절대로 그럴 일이 아니다. 나는 그때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때 죽었을 사람이다. 병원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는 알았겠지만 그 다음부터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 병원에 적절한 시기에 가게 된 것도 정말 잘했다. 나는 평소에도 식물인간 같이 치료하려면 안하는 것이 좋겠다고 순자에게 부탁했다. “그렇게 하려고 하거든 네가 손을 써서 못하게 하라.”고 부탁했다. 작은 병원도 큰 병원에 가면 응급실에서 죽으니까 작고 알뜰한 곳으로 보내라고 평소에 부탁했던 일이다.
긴 이야기를 하면 안되지만 정말 고맙다. 오늘 해명해 준 것이 나에게도 시원하다. 교회에서도 혹시라도 다른 말을 안했으면 좋겠다. 나에게도 도움이 안되고 순자에게도 도움이 안되니까 모르는 말은 하지 말기 부탁한다. 감사하다. 나는 오늘 마음이 아주 시원하다. 이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고 감사하고 고맙다.
원모나 순자가 나와 어떤 관계인가. 무엇인가가 잘못되어서 이렇게 꼬였는데 시간이 가면 풀려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순자가 오늘 좋은 마음으로 말하니까 나에게도 크게 위로가 된다. 세 번이나 죽었다 살았고 마취를 두 번이나 하니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예 모르는 것도 많다. 여러분은 혹시 내가 기억 못하는 일을 말하더라도 알려주시면 좋겠다.
어디서는 내가 노망해서 그렇다는 사람도 있다고 하고 늙어서 그렇다는 사람이 있다고도 한다. 나도 별 말을 다 듣고 있다. 죽을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다는 말도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하나님께도 이렇게 기도했다. “필요하면 살려두시고 필요없으면 언제든지 데려가세요. 나는 내 일생이 너무 감사하고 만족합니다. 다만 이 마지막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면 좋겠습니다.”라고.
오늘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왔다. 교회가 시끄러우니까 이러니 저러니 따지려면 또 문제가 생기고 또 문제가 생긴다. 그러므로 강단에서 말하는 사람만은 복음만 말하자. 다른 말을 하지 말고 복음만 말하자.
나는 김 목사에게도 말했다. 이번에 목요모임을 하고 나서 바로 다음날 아침에 전화가 와서 11시에 오라고 했더니 왔기에 말했다. 목요일 저녁에도 좀 들었는데 다 못듣고 자서 그 다음 일은 잘 모르지만 ‘참 어렵겠다. 어려워.’ 이렇게 생각했다. 사람이 다 자기 입장에서 말하는데 들어보니 내가 다 잘못한 것이라기에 노골적인 말을 했다. 염려라는 방식으로 “이것은 위험하다. 계속 그렇게 하면 위험하다.”라고 말했다.
염려는 내가 해야 되지 않는가. 내가 저지른 일이니까 유심히 보고 있다. 만일 도가 지나치거나 하면 내가 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초창기에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았을 때 외부에서 사람들이 오면 대부분 “젊은 사람들을 이래 두어서 되겠느냐. 이것이 뭐 교회냐.” 하고 가버린 사람이 많다. 여러분은 그 광경을 못보신 분이 많을 것이다. 의자도 없이 앉았던 때였다.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왔고, 뒷자리에서는 누워있기도 했고, 껌을 씹기도 했다. 별 사람이 다 있었다. 그러니 예배당에 다니던 사람들은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한번도 형제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을 안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다 나를 보고 왔으니 내가 안그러면 되기 때문이다. 나는 형제들이 언젠가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한번도 그러지 말라는 말을 안했다. 그래서 저절로 다 없어졌다. 그때도 어떤 사람은 자유롭고 좋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난장판이라고 했다.
지금도 우리 교회가 시끄럽지만 때가 되면 조용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김 목사에게 “앞에서 말하는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되겠느냐. 가로막는 것이고 방해하는 것 아니냐.”라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 이야기랄지, 독일에서 600만 유대인을 학살한 장본인인 아이히만의 예를 들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 가슴이 섬찟했다. ‘저 말이 누구보고 할 말인가, 우리 교회에서 할 말인가?’ 나는 이 말을 김목사에게 했다.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처음으로 말했다.
전에는 늘 소신껏 하라고 했다. “네가 마음에 없는 말을 하면 되겠느냐. 소신껏 해라.”라고 했다. 그런데 그런 결과가 와서 얘기를 했더니 “앞으로는 말할 때 주의해야 겠습니다.”라고 했다. 앞으로 두고 보면 알 것이다.
앞에 있는 사람은 복음만 말해야 한다. 복음은 누가 들어도 좋은 것이 아닌가. “내가 못한 것을 하나님이 해 주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이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누구라도 말해 주기 바란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는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고 죽었다.
나도 처음에는 예수가 신화적인 인물이라는 말을 듣고 급해졌다. 예수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사도들의 간증이고 신앙고백이고 경험이고 케리그마라는 것이다. 이것을 종합해서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신화적인 방법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불트만이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예수는 신화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 해당되지 않으니까 관심이 없었다.
내가 예수를 모르는 점도 있고 좋은 점도 있었는데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 좋은 기적 같은 것, 거기서 나오는 말을 내가 먹고 편하고 좋으니까 여러분에게 말했다. 내가 먹고 좋았는데 여러분이 안좋았겠는가.
그런데 예수가 신화적인 인물이라는 말을 듣고 ‘이거 예수를 바로 알아야겠네.’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내가 평생 찾아온 길이 ‘하나님이 찾는 사람이 누군가?’ 이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신화라고 하니 ‘그러면 나는 무엇을 했는가?’라는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불트만은 신화라는 껍데기를 다 벗겨보고 예수를 찾았지만 못찾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다 신화라고 할지라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만은 역사다. 사실이다.” 이 말을 했다고 한다. 거기서 나는 힌트를 얻었다. 그래서 ‘역사적인 예수를 찾아야겠구나. 알만한 예수를 찾아야겠구나.’ 하고 내가 아는 성서를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만질만한 예수를 못만났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죽었다.” 이것이 내가 전부터 도저히 수용이 안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어떻게 내 죄를 위해서 다른 사람이 죽는가. 내가 얼마나 엄청난 죄를 지어서 하나님 아들이 와서 죽어 주셔야 할 필요가 있는가?’ 이것이 나의 평소 생각이었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로서의 예수를 찾아보려고 했다.
다 아니까 그렇게 말하지 않았겠는가. 베드로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선포해서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했다고 한다.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 이것이 기독교의 시작이다. 그러나 나는 그 부활한 예수를 실제로 만지려고 하니 만질 수 없었다. 옛날에는 안다고 생각했는데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바울을 찾아가 보았다. 다메섹으로 가다가 “사울아, 내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것도 같이 가던 사람들은 못듣고 바울 혼자서 들었다고 한다. 그것도 나는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생생한 간증이다. 로마서 6장에 가면 함께 죽고 함께 산 것을 말했다. 그것도 현재형이 아니라 과거형으로 말했다. “함께 죽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산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함께 죽었다는 것이 나에게 알아진 바가 이것이었다. “백 점짜리 예수가 죽었는데 60점짜리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우리도 그때 다 죽은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테이프를 들어보시면 알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게 생각이 안되고 ‘나는 함께 죽은 일이 없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바울은 생생한 경험이 있어서 한 말인데 나는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사람, 성령에 이끌렸다는 사람이 있다. 사도행전을 성령의 행전이라고까지 말한다. 성령이 인도해서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성령이 그때 그때 인도해서 행동해 본 적이 없다. 돌아보면 ‘아, 성령이 인도하셨구나.’라고 알게 되지만 그때 그때 내 앞에서 인도해 준 성령은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알만한 예수가 없었다. 내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알만한 예수, 만질만한 예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래도 나는 계속 예수를 말했다. 맨 처음 고린도전서에서 깨닫고 시작했는데 한참 하다 보니 예수를 알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복음서로 넘어갔고 그 후로는 복음서만 왔다갔다 했다. 그 중에 제일 많이 본 것이 요한복음이다. 그래서 나는 많은 것을 얻고 많은 양식을 먹고 살았다.
그런데 신화라는 말이 나오니까 ‘내가 더 알아야겠다. 확실하게 알아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이한 경우라고 한다. 보통 목회자들은 이런 사람이 없다. 신학교에서 배운 것이 있고 이미 고정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나는 좀 특수해서 그것을 알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알고 보니까 예수께서 내 죄를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못할 말을 해서 죽은 것이다. 유대인들의 하나님이 누군가.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상천하지에 우리 하나님 같은 분이 있느냐.”라고 했다.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르기가 너무 황공해서 글자만 써놓고 읽지 않았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해독해 보려고 했지만 자음만 써놓아서 읽을 수 없었다. 히브리어는 모음을 붙이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 자음만 써놓았으니까 무슨 발음인지 몰랐는데 해독한 결과 그것이 여호와, 혹은 야훼라고 해독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여호와, 혹은 야훼라고 하는 것이다. 그만큼 위엄있고 중요하고 높은 분을 예수가 내 아버지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 용납이 되겠는가.
전에는 나도 제자들이 잘못 소문을 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이번에 자세히 검토해 보았다. 마지막에 가야바의 법정에서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그렇다고 대답하시지 않았는가. 옆에 있던 군병이 얼굴을 덮어놓고 때리면서 “네가 그리스도면 내가 누군지 알아맞혀 보라.”며 조롱했다.
그 자리에 베드로가 있었는데 예수께서 대제사장에게 “그렇다.”고 하시는 말을 듣고 베드로의 머리속이 하얘졌다. 그래서 모른다고 한 것이다.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고 결단코 모른다고 했다. 당연한 말이 아닌가. 그는 전혀 예수를 몰랐던 사람이다. 그때 닭이 세번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고 울었다고 하는데 이것을 회개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전혀 회개가 아니다. ‘저 사람은 나를 아는데 나는 왜 저 사람을 모르는가?’ 복장터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대성통곡을 하고 가 버렸다.
분명히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직접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너 같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십자가에 매달아놓고 “네가 하나님 아들이면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 자리에 제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아무 말도 못하셨다. 안했다는 사람도 있는데 못한 것이다.
말을 하려면 세례요한이 증거했던 대로 “아니다. 나는 너희를 위해서 죄를 짊어지고 죽는 것이다.”라고 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무 말도 못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운명하셨다.
나는 거기서 ‘야, 내가 좀 알만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죽을 사람이니까 ‘이 사람도 나와 같은 사람이고 죽음이 있네.’라고 알았다. 그래서 갑자기 ‘내가 만날 예수가 여기 있구나.’라고 생각이 된 것이다. 꼭 이 사람만이 예수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만날 수 있는 예수는 이 사람이구나.’라고 알게 된 것이다. 여러분도 잘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무 기뻐서 교회 앞에 이것을 내놓은 것이다. “나는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을 이제 만났다.”라고. 만났다는 말을 하니까 나는 너무 좋았는데 반응이 전혀 암담했다. 더구나 나에게 제일 많이 자극을 준 것이 최순열 자매였다. 자기도 그렇게 예수를 만났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기 죽음의 중요성을 자꾸 말했다.
그때 나는 분명히 모르면서도 ‘저것은 아닐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네가 예수를 만났으면 만난 예수를 말해야지 왜 자꾸 네 죽음만 말하느냐.”라고 말했다. 세 번쯤 권고했지만 전혀 듣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모르겠다. 네가 알아서 해라.” 하고 끝냈다.
그때 나는 많은 자극을 받았다. 왜 저럴까? 뒤로 알고 보니 나와 순열이는 출발점이 달랐다. 나는 예수를 알려고 출발한 것이고 순열이는 자기 문제로 고생하다가 자기와 같은 사람은 만났던 것이다. 그래서 해방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 죽음을 계속 말하는 것이다. 나는 내 죽음을, 내 문제로 예수를 찾았던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따라온 예수가 누군가?’ 이것을 알려고 예수를 찾았던 것이다.
여기서 나는 중요한 것을 알았다. ‘아닐 텐데…….’ 하고 더 가까이, 더 가까이 예수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안그랬으면 거기서 예수 만난 것으로 끝났을 텐데 그런 반론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자극이 있었기에 더 추구하게 된 것이다. 내가 손해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서 왜 사람들이 버리고 갔던가? 왜 제자들까지도 버리고 갔던가? 그 이유를 나는 옛날에 자기들이 찾던 것이 없으니까 버리고 간 것이라고 했다. 여러분이 들어서 아실 것이다. 민족해방을 기다리다 안되니까, 제자들까지도 그런 맥락에서 예수를 알았는데 전혀 그런 기미가 안보이니까 버리고 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이번 일을 만나고 보니 ‘그것만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보니까 누구라도 그 자리를 보면 버리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그렇게 되려고 예수를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 자리는 모든 사람이 다 버리고 간 자리다. 그것은 인생의 바탕 중의 바탕이다.
나는 거기서 아주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 ‘아, 저것이 인생이구나. 저것이 나고 저 자리가 내 자리구나.’라고 보였다. 그러니까 생각이 바뀌었다. ‘아, 저것이 진실이고 인생의 근원이고 반석이구나.’라고 아니까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저기서 나왔구나. 하나님이 나를 저기서 지었구나. 그 자리가 모든 것의 근원이다. ‘집을 지으려면 저 위에 지어야 되고 새 사람이 되려면 저기서부터 시작해야 되는구나.’라고 알았다.
거듭나야 된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대답하기 어려운 말이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라고 물으면 “예, 나는 거듭났습니다.”라고 대답하기 어렵다. 특별한 교파에서 훈련받은 사람들 외에는 대답하기 어렵다. 그 사람들은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며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거듭난 것이라고 교리적으로 배운다. 그렇게 가르치는 데가 없다. 그래서 누구라도 거듭났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다. 니고데모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다 모른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말씀하시며 장대에 달린 놋뱀을 보라고 하셨다. 니고데마가 가 버린 후인지 있을 때였는지 모르지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하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 사람을 쳐다보면 산다고 하셨다.
그러나 이것을 누가 알겠는가. 쳐다보면 어떻게 사는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 말을 알아듣기 어렵다. 지방교회에서는 이 말을 독없는 뱀이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독이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기독교 일부에서는 심판이라고 해석한다. 구리는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고 구리뱀은 심판하는 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났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연결되면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심판이라고까지 한다.
그 다음 구절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이 말을 정확하게 해석하기 어렵다. 어떻게 사랑하셨다는 말인가.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했는데 무슨 뜻인가. 이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이렇게 예수를 아는 것이 쉽지 않다.
예수 사건은 날 때부터 모르는 일이다. 처녀가 잉태해서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우리가 모르는 일이다. 구체적으로 이 문제로 장로교가 보수측과 자유주의 측으로, 둘로 갈라졌다. 칼빈주의 쪽에서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을 몰라도 무조건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이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이다. 그에 비해 자유주의자들은 그런 것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김재준 박사는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갈라진 것이다. 하나는 한국 신학대학이 되었고 하나는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가 되어 두 파로 갈라졌다.
칼 바르트는 무조건 믿어야 된다는 말도 이해할 수 없고 무조건 아니라는 말도 안된다고 했다. 그는 처음에는 자유주의적인 입장이었는데 무조건 계시를 무시하니까 ‘아닌데, 계시가 분명히 있는데’ 하고 돌아섰다고 한다. 이 사람은 둘을 섞어 놓은 셈이다. 아무리 계시라도 우리 이성으로 납득이 된 것, 할 수 있는 것만 효과가 있지 않느냐며 돌아선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계시를 판단해야 되니까 계시 위에 있는 사람이 된다. 어려운 문제다.
그래도 나는 깊이 신학을 공부한 것도 없지만 그런대로 좋은 길을 찾아왔다. 결정적으로 워치만 니를 만나서 ‘아,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는구나. 이런 사람을 부르고 있구나.’라고 알았고 모세를 보면서 ‘하나님은 사람을 신으로 쓰실 수도 있구나.’라고 알았다. 하여간 길이 쭉 보여서 이 한 노선으로 지금까지 왔다. 그런데 예수를 모른다고 하면 되겠는가.
나는 예수가 처녀로 잉태한 사실을 모른다. 그래도 그것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로 보면 그럴 수 없다.”라고 여러분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역사적 사실에 별로 역점을 두지 않고 예수가 왔다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어떻게 물이 포도주가 되겠는가. 그런데 나는 “썰렁한 인생에 예수가 오시면 즐거운 잔치집이 되는구나.”라고 해석했다. 나에게 그런 경험이 있으니 그렇게 설명했다. 그리고 모르는 점은 그냥 모르는 것이지 신화라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신화라는 문제가 드러나서 내가 이렇게 추구하게 된 것이다. 나는 만난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런데 이런 반론들이 있기 때문에 보고 또 보니까 ‘아, 사람들이 이것을 싫어하는구나. 나도 싫어하고 다 싫어하는구나. 아담도 이래서 선악과를 먹었구나.’라고까지 알게 되었다. 그런 반론들이 다 나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더욱 깊이 예수를 알게 되었을뿐이다. 그래서 나는 반론을 원망하지 않는다. 이런 반론들이 올수록 나는 더욱 확실해졌다.
그래서 처음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많이 알게 되었다. ‘이 사람 안에는 만유가 포함되는구나.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이구나.’라고 알았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 이야기고 여러분의 이야기고 다 사람의 이야기니까 여기 포함 안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라고 해도 그 사람이고 그렇다고 해도 그 사람이다. 모르고 있을 뿐이지 결국은 돌아온다. 돌아오면 다 하나 아닌가, 다 같은 사람 아닌가. 이러니까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그 전에 위트니스 리가 쓴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라는 책이 있어도 읽어보지 않았는데 이번에 이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런 분 속에 모든 인류가 포함되는구나.’ 알고 보면 거기는 너와 내가 따로 없다.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없다. 이것은 존재의 세계다. 우리가 다르다는 것은 전부 지식의 세계, 소유의 세계에서 하는 말이다. 소유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하나되려고 해도 하나가 될 수 없다. 차이가 있는데 어떻게 하나가 되겠는가.
네 명이 달음질을 하면 일등부터 4등까지 정해진다. 4등 짜리는 죽도록 뛰어도 일등을 못따라간다. 나는 어려서부터 한번도 꼴찌를 면한 적이 없었다. 왜 그렇게 발이 안나가는지 아무리 힘써 달려도 안되었다. 우리 아이들도 화평이와 진실이는 뜀질을 못한다. 은혜는 뜀질을 잘하는데 원체 체력이 약해서 처음에는 잘 달려도 뒤로 가면 쳐진다. 그래도 등수에는 든다. 외할머니를 닮아서 그런 것 같다.
이 사회에서는 절대로 차등이 없을 수 없다. 물질적인 문제가 인생 문제라고 생각한 마르크스는 물질적인 평등을 찾아서 공산주의를 만들었다. 물질이 불균형해서 사람이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꼭 물질로만 불행하다면 마르크스의 생각이 맞다. 그러나 사람이 불행한 이유는 꼭 물질만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공산주의에서는 물질은 평등하고 권력은 불평등하게 되었다.
어디 가도 평등한 것은 없다. 자유주의인 미국에 가도 소유로는 절대로 평등될 수 없다. 거기서는 기회균등을 높이려고 한다. 누구라도 자기가 노력한 것만큼 먹고 살 수 있다. 미국에 가보니 교포들이 내내 늙도록 일하는 분들이 있다. 능력만 있고 자리를 못잡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불만이 없다. 때가 차면, 나이가 들면 연봉을 주니까 일을 해서 세금을 내면 당연히 살만큼 노령 연금을 받는다.
진짜로 인간이 존재적으로 평등할 수 있는 길은 예수의 마지막 자리밖에 없다. 경험해 본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예수를 좋아한다. “목사님과 나는 하나다.” 이러니 얼마나 좋은가.
요즘 젊은이들이 나섰는데 자세히 보자. 똑똑하고 잘나가는 아이들이 아니라 다 어려움을 겪던 아이들이다. 세희가 먼저 터뜨렸는데 세희는 깊은 고민끝에 만난 것이다. 그냥 만난 것이 아니다. 이혼까지 하고 친정에 와 있는 상태에서 저 말이 나온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왔는데 쌩하고 안들었다. 그래서 ‘쟤가 상당히 고집이 세구나.’라고 알았는데 이번에 간증하는데 보니 완전히 새판이다. 이것을 누가 시켜서 하겠는가. 누가 교사해서 이렇게 되겠는가. 경험을 해 보지 않으면 잘 모른다.
나도 내가 은혜를 받았다면 내 가난한 때문이다. 나는 내일 일을 모르는 자리에 오게 되었다. 나는 진짜로 내일 일을 모르게 되었다. 내일 밥을 먹을지 못먹을지 모르는 상태에 이르러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기서 내가 부름을 받은 것이다.
다른 때 부름받았으면 나는 선뜻 따라나올 수 없는 형편이었다. 돈벌이를 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어머니를 객지에 놔두고 어떻게 나오겠는가. 그런데 “하나님, 이런 나를 무엇 때문에 만들어 놓았습니까?” 하던 때였기 때문에 ‘아,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구나.’라고 알았다. 이 때 내가 무슨 이유로든지 못한다고 하면 다음에 내가 “무슨 이유로 나를 만들어 놓았습니까?”라는 말을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앞뒤도 안보고 결정해서 편지를 보냈다.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음성으로 들리네. 길을 주선해 보게.” 이렇게 해서 신학교에 가게 된 것이다.
나는 신학교를 간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목사가 부러워서 목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조그마한 교회에 전도사만 있었는데 식비도 제대로 못받았다. 그런 전도사만 보았기 때문에 목회한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부를 때 안가면 하나님 앞에까지도 “왜 나를 지어놓으셨습니까?”라는 말을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왔는데 그 친구에게 응답한 날부터 정확하게 20일 만에 집을 떠났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던 자리에서,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내일 일도 모르는 자리에서 완전히 다른 판으로 옮겨졌다. 그래서 하루도 이전만 못한 날이 없었다.
학교라고 큰 신학교도 아니고 학교를 짓기 위해서 부지를 사놓았는데 가건물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루 하루 배우는 것이 즐거웠다. 나는 공부는 좋아한다. 그래서 잘 듣기만 해도 80점이 나왔다. 그때는 몸을 생각해서 다음날 시험이 있어도 10시를 넘겨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날마다 새로워서 형통하는 길로 오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판을 바꾸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판이 바뀌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십자가에 와서 ‘연약해서 죽으셨다.’ 여기서 끝나는 것과,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신 데서 ‘나도 사람이고 이 사람도 사람이구나.’ 여기서 만난 것이 다르다. 순열이가 한 그대로 머무는 것과 ‘아니다. 그것은 아닐 텐데…….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은 이 자리가 어딘가.’라고 아는 것은 판이 다르다. 길이 다른 것이 아니라 판이 다르다. 이것은 여러분이 체험해 보면 알 수 있다.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 자기 일이다. 자기 자신이다. 여기서 말하면 믿는 사람도 있고 안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믿으나 안믿으나 다 자기 자리다. 운명의 자리다. 이것이 인생의 운명이다.
먼저는 가난한 자가 오고, 다음에는 좀 나은 사람이 오는 법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도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하셨다. 예수님 당시에도 여유 있는 사람은 예수 앞에 온 사람이 없다. 다 병 고치려고 왔고 돌맞아 죽다가 끌려왔고, 이런 사람들이지 여유 있는 사람,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도 내 팔자가 이렇구나. 이렇게 생각한다. 처음 CCC에서 나올 때는 그래도 대학생들이었으니까 CCC에서 하던 대로 대학생들만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뒤로 사람들이 오는데 보니 부모들이 오셨고 주변 사람들이 오셨다. 정말 어려운 사람들만 왔다. 그래서 교회라는 것이 클럽처럼 일정한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잘난 사람 같았으면 잘난 사람들이 모였을 것이다. 내가 신학박사라도 되거나 큰 교단 신학교를 나왔다면 그 수준에 맞춰서 왔을 것이다. 특별한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교역자의 수준과 그 교회 사람들의 수준이 거의 같다. 돈이 많다 해서 다 부유한 것이 아니다. 지식이 많다 해서 다 부유한 것이 아니다. 존재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있다. 다 그런 사람들만 왔던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향상된 그룹을 인도하고 싶었는데 내 꼴이 이런데 그런 사람들이 오겠는가.
그래서 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 말하니까 무시하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정말로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나도 그런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방방 뛰는 것이다. 누가 이렇게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복음은 50대 이상은 알아들을 사람이 있겠지만 젊은이들이 어떻게 알아듣겠는가 했는데 젊은이들이 알아듣고 일어난다. 우리 진실이도 거기 들어있는데 진실이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결혼생활 10년 동안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 나에게 와서는 늘 좋은 것만 말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모르겠는가. 그래서 저렇게 된 것이지 목사 딸이라서 된 것이 아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수혁이가 진실이 간증을 지원하겠다고 양자역학을 들고 나왔다. 나는 그것이 너무 귀하다. 양자역학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내가 듣기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지만 전혀 상대적이지 않은 것도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열렸다. 그 말을 들으면서 진실이를 지원하려고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 상식으로는 도저히 안되는 사람인데 뭔가를 보고 그렇게 간증한 것이다. 그래서 수혁이가 다시 보였다. ‘왜 저런가, 왜 저런가?’ 늘 그랬는데 ‘야, 결국은 저렇게 되는구나.’라고 아니까 수혁이를 보는 것이 달라졌다.
이 복음 안에 들어오면 정말 좋다. 이것은 강요도 아니고 그냥 좋고 나쁘다는 것도 아니다. 내 근본이 밝혀진다.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이 밝혀진다. 나 자신이 숨을 데가 없다. 그런데 어쩐지 나는 이것이 좋다.
나는 몇번이고 그런 경험이 있다. 전혀 안될 때 마음이 편안해 졌다. 무엇이 될 것 같을 때는 괴로운데 전혀 안된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놓였다. 내가 아무것도 못하게 되니까 더 이상 번민하거나 고민할 일이 없어진다. 그런 경험을 여러번 했다. 내가 잘돼서가 아니라 완전히 망하면 고요해진다. 그래서 ‘사람이 막장에 들어가면 행복해지는구나.’라고 알았다. 여러분은 그렇게 막장을 경험하지 않기 바란다. 인생의 막장을 경험하지 않고 말씀을 들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래서 내가 무리해도 계속 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을 하면 내가 너무나 행복해진다. 왜냐하면 내 이야기가 예수 이야기고 예수 이야기가 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남의 얘기를 무슨 재미로 계속 하겠는가. 내 이야기니까 계속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좋다. 내 자신의 정체성이 더욱 확고해진다.
오늘 말하려는 내용이 그것이다. 복음, 복음만 말하자. 특별히 김 목사님께 부탁하고 싶다. 복음 외에는 말하지 말자.
이 복음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느냐,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하기에 “나로서는 유일하다. 그런데 지금이라도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으면 나는 바로 돌아서겠다.”라고 대답했다. 더 좋은 것이 있는데 여기 매여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지금까지 성경을 보아도 내게 복이 안될 것은 제쳐놓았다. 굳이 성경을 연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것만 찾아도 한없이 많은데 무엇 때문에 모르는 것까지 찾겠는가. 그래서 성경 보기가 쉬워졌다. 옛날에는 모르는 것 때문에 골치 아팠는데 지금은 특별히 주석을 볼 일도 없다. 내게 복이 되면 읽고 복이 안되면 놔둔다. 복이 안될 성경을 왜 보겠는가. 나에게 복이 안되는 것, 내가 모르는 것을 볼 이유가 무엇인가. 여러분도 성경을 보려면 복이 되는 것만 보자. 말씀을 들어도 복이 되는 것만 들으면 된다. 복이 안되는 것은 안들으면 된다. 언젠가는 알 날이 생기니까 가만히 있으면 된다.
우리 교회에서 그동안 내가 걸어오는 길에 여러분이 나와 동행하면서 한번도 이런 소란이 일어난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와서 나 때문에 소란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제발 이제부터는 복음 외에는 말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다. 복음 아닌 것은 성경도 말할 필요가 없다. 성경이 무엇 때문에 있는가. 우리에게 복을 주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몰라도 된다. 굳이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성경을 굳이 연구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신학교에서 안배워도 된다. 내게 복 있는 것만 찾아도 얼마든지 많다.
나는 아브라함이 백 세에 아들을 얻었다는 말이 너무나 좋았다. 기왕이면 젊었을 때 얻지 늙고 다 꼬부라졌을 때 얻었는가.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 좋은 사람도 마지막에는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했다는 것이다. 백 살이 되니까 그 믿음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니다. 내년 이맘 때에 사라에게 태기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 말을 듣고 사라는 장막 뒤에서 웃었다고 했다. 성경은 너무나 진실하다.
그런데 그것이 왜 나에게 좋았을까, 내가 막장을 기는 사람이어서였는가? 내 힘으로 안되니까 망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망해도 하나님은 나를 쓰실 수 있다.
이삭은 눈이 멀었다. 그는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는데 리브가가 엿듣고 야곱에게 별미를 주어 이삭에게 보냈다. 야곱이 “아버지, 내가 당신의 아들 에서입니다.”라고 하니까 이삭이 만져보고 “음성은 야곱의 음성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구나.” 하고 축복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실수다.
위트니스 리는 이것을 이삭이 너무 편하게 살고 연단을 받지 못해서 마지막에 영 안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하면 나에게는 복이 안된다. 그런데 이삭이 모르고도 축복했다는 것이 나에게 복이 된다. 나도 그럴 수 있다. 나는 잘한다고 했는데 틀린 것도 있고 잘못한 것인데도 맞는 것이 있다. 내가 계획해서 순조롭게 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여러번 경험했다. 이렇게 하면 되겠다고 계획하고 하면 안되었다. 일부러 막는 것 같았다. 나는 한번도 내가 계획해서 성공한 일이 없다. 그래서 이삭의 예를 나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은 실수도 쓰시는구나.’라고 해석하니까 내게 복이 된다.
야곱은 정말로 캄캄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누구를 만났는가. 자기보다 더 캄캄한 라반을 만났던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마음 먹고 “삼촌, 내가 이렇게 일하면 댓가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요구했고 라반이 “그래야지. 무엇을 주면 좋겠느냐?”라고 묻자 야곱은 “라헬을 나에게 주십시요.”라고 청했다. 라반이 “그래, 그러면 7년을 봉사해라.”라고 한 대로 야곱은 열심히 7년을 봉사했다. 그런데 밤에 결혼식을 하고 신방에 들어온 것은 레아였다. 자고 일어나 보니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다. 야곱이 “아니, 삼촌이 이러실 수 있습니까. 분명히 라헬을 약속해서 7년을 봉사했는데 이럴 수 있습니까?”라며 항의하자 라반은 “아니야, 우리 지방에서는 언니보다 동생을 먼저 시집보내는 법이 없어. 그러니까 라헬을 얻고 싶으면 7년을 더 봉사해라.”라고 했다. 그래서 야곱은 7년을 더 봉사하기로 하고 라헬을 얻었다. 고수 위에 더 고수가 있다. 단수가 높으니까 더 고단수를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야곱은 자기 집을 세우려고 크게 애를 쓴 사람이다. 그런데 도망치려다가 잡혀 죽을뻔했고, 마지막에 애굽으로 내려갈 때는 빈손으로, 쌀 자루만 들고 내려갔다. 그것을 보면 야곱의 인생은 실패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안되었으니 실패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좋았다. 나도 실패한 인생이니까 그럴지라도 쓰시는, 오히려 그것을 쓰시는 하나님이 좋았다. 이렇게 돼야 복이 되지 않는가!
여러분도 성경을 읽을 때 모르면 그냥 놔두고, 복이 되도록 읽고 복이 되도록 해석하기 바란다. 교회에서 말씀을 들을 때 복이 되면 듣고 복이 안되면 안들으면 된다. 안듣는다고 죄 짓는 것이 아니다. 복이 안되고 모르는 것을 어쩌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내가 아무리 이 복음을 말해도 못알아듣겠으면, 모르겠으면 그냥 있으면 된다. 언젠가 알 날이 있을 것이다. 알 날이 없어도 할 수 없지 않은가. 나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에게만 이 말을 하는 것이다.
강단에서 말하는 사람은 최소한 복음만 말해야 한다. 복음 외에 것을 말하면 시끄러워진다. 김 목사도 그러려고 했겠는가. 자기대로 염려가 되니까 한 것인데 염려하는 말만 계속 하면 내가 나가는 길에 방해가 되고 가로막게 된다. 그래서 이번에 할 수 없이 말했다. 극단적인 예까지 동원해서 교회를 가로막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합의가 되었고 “앞으로는 말하는 것을 주의해야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문제는 언제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나쁜 예인데 양문회 학생들에게 들으니 지금 내가 말한 복음은 개인적인 간증, 개인적인 깨달음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영적 깨달음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말할 때와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하면 내가 기다린다고 언제 돌아오겠는가. 나에게 말할 때 보면 금방 다 온 것 같은데 학생들에게 말하는 것을 보면 개인적인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입장이 이렇게 다르다.나는 이런 말을 공적으로 하고 싶지 않았는데 혼란이 생기니까 하는 것이다. 이런 혼란에 말려들면 나라는 사람 자체가 이상하게 된다.
반대보다 혼란이 더 무섭다.그래서 나팔을 분명히 불자고 한 것이다. 헷갈리게 불면 안되니까 확실하게 불라는 것인데 한성 형제가 와서 흥분해서 양날 칼로 휘두르는 바람에 그것 때문에도 갈라졌다. 한쪽에서는 “왜 저 소리를 하느냐?”고 하고 한쪽에서는 “야, 좋다.”고 했다. 다음날 왔기에 이렇게 말했다. “너와 나의 개인적 관계야 말할 필요가 있느냐. 그런데 다른 사람이 너와 나의 개인적 관계를 어떻게 알겠느냐. 전혀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알겠느냐.”
한성 형제 말을 듣고 대번에 누가 일어나서 답답해 죽겠다고 했다. 그 사람은 나와 개인적 관계가 별로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 말을 한 것이다. 그래서 “너와 나의 개인적 관계는 한계가 있고 교회와도 한계가 있다. 그러니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라.” 그랬더니 그 다음에 해명을 했다. 여러분도 다 읽어보셨을 것이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목사님과 같이 있습니다. 어디를 가도 같이 갈 사람입니다.”라면 충분하다. 한성이를 아니까, 다른 데 갈 사람이 아니니까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을 다른 사람도 이것을 알겠는가.
남을 헷갈리게 하면 곤란하다. 그래서 내가 “들을 수 있으면 듣고 들을 수 없으면 그냥 있으면 된다.”고 하는 것이다. 모르는 말을 남에게 하면 안된다. 자기가 아는 말만 하면 된다. 그러면 교회가 시끄러울 일이 없다. 우리 교회 역사상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말이 무서운 것이다. 말로 천하가 움직인다. 하나님 말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분명하게 전해야 한다. 개인의 간증이면 그것을 끝까지 말해야 한다.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하면 헷갈리지 않겠는가.
젊은이들이 나에게 영지주의라고 말했다고 알려주었다. 본인은 영적인 깨달음이라는 의미로 말했다고 해명했는데 사실 영지주의라고 하면 누가 들어도 이단이라고 생각한다. 초대교회에서 가장 큰 이단이었다. 나는 영지주의라는 말을 두번 들었다. CCC에서 나온 다음에도 CCC사람들이 나를 영지주의라 했다. 만약 김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분명히 영적 깨달음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했다면 그것은 내가 이단이라는 뜻이다. 세상이 다 알기를 영지주의에 대해서 한 가지만이 아니라 여러가지로 알고 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초대교회의 영지주의다. 그들은 “예수는 신이다. 하지만 우리 눈에 사람으로 보인 것이다.”라고 했다. 나는 반대다. “예수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신으로 쓰셨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면 본인이 말한대로 영적인 깨달음이라고 이해하시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밖에 나가서 영지주의라고 말하면 안된다. 아무도 그렇게 듣지 않으니까 아주 위험한 말이다.
나는 예수가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신처럼 쓰셨다고 생각한다. 모세에게 “내가 너를 바로 앞에 신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대로 그렇게 쓰실 수 있다. 예수를 우리 앞에서 신으로 쓰실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볼 때 신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예수의 실체는 사람이다.
사람이 어떻게 신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쓰시면 신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람이 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아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쓰시면 하나님 아들이고 안쓰시면 사람이다. 하나님이 필요한 대로 지어진 것이 사람이다.
마지막 부탁은 강단에 서는 사람은 꼭 분명하게 나팔을 불라는 것이다. 그리고 듣는 분들은 잘 가려서 듣기 바란다. 안들리면 안들리는대로 들리면 들리는대로 있으면 된다. 이러니저러니 말을 하면 풍설이 된다. 말이라는 것은 전하면서 여러가지 말이 된다.
김 목사님에 대한 말도 여러가지로 전해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어디가 진실인지 모르게 된다. 그러니까 복음이 아닌 것은 할 수 있는 대로 안하는 것이 좋다. 듣는 사람도 깨닫고 알아진 것만 말해야 한다.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니 저러니 말을 하면 혼란만 가져온다. 그런 일이 없기 바란다. 오늘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것이다.
순자 자매가 한 말은 내가 한 것보다 훨씬 정확하고 확실하다. 나는 오해를 불식시키려고 또 말한 것인데 그것도 문제가 되었지만 본인이 말한 것은 하나도 틀림없다. 내가 기억 못하는 것도 다 맞다. 내가 병원에 갈 때가지 나를 돌봐준 사람이 유일하게 순자 자매다. 나는 그때 혼수가 온지도 몰랐다. 그래서 왜 내가 병원에 가야 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의사들이 알고 나를 병원으로 보내게 된 것이다. 구미까지 간 것도 순자 덕분이다. 거기서 좋은 의사를 만났다. 하루에 중환자실로 두번씩이나 왔다. 오전에 와 보고 퇴근하면서도 와 보았다. 그런 의사가 어디 있겠는가.
그분에게 치료를 받으면서 한번도 어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다. 사전에 미리 알아서 대비해놓았던 것 같다. 한번도 치료받기 어렵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밥을 먹은 것도 아무것도 안먹어도 배가 안고팠다. 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일은 먹을 것을 준다기에 아침에 보니 파란 쥬스를 반컵, 50cc를 주기에 먹었다. 다음 날은 아침에 한 잔, 저녁에 한잔을 주었다. 두 잔을 먹고 나니까 식욕이 생겼다. 식욕도 조절해 주었고 모든 것을 다 조절해 주었다. 그리고 어느 날 똥을 누라고 했다. 내가 똥을 누겠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죽 같은 똥이 나왔다. 먹은 것도 없는데 아무 어려움도 없이 나왔다. 거기서 치료받으면서 고통을 받아본 적이 없다. 정말 좋은 의사를 만났다.
나는 순자 자매가 베푼 은혜를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여러분이 꼭 아시기 바란다. 모 자매처럼 그따위 소리를 하지 말기 바란다. 혼자 아는체하다가 많은 사람을 고생시키고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었다. 제발 그런 말을 하지 말기 바란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고 나는 충주 교회 간증을 들어야겠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잘 들어주셔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