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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릉강이 양자강으로 합류하는 틈바구니에 솟은 거대한 암반도시, 거기에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을 밤에 보면 마치 고층건물이 밀집해 있는 듯 착각하게 만들었다고 독립지사들은 회고했다. 그곳에 임시정부가 도착한 것은 1940년 9월이요, 5년 동안 터전으로 삼았다.
중경시대는 임시정부가 활기찬 시절이었다. 고난의 이동기를 접고 안정된 바탕 위에 활동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일본의 패전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그곳에서 한국광복군 창설, 건국강령, 외교적 성과, 좌우합작 달성 등 많은 업적을 일궈냈다.
임시정부가 중경에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좌우 세력이 그곳에 집결하고 있었다. 1938년 말에 김구가 미리 도착해 내륙을 거슬러 올라오던 임시정부 본진(本陣)의 이동을 원격 지휘하고 있었다. 또 1939년 후반에는 조선민족전선연맹 대표 김원봉이 계림에서 조선의용대를 지휘하다가 중경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합작 논의가 다시 시작되었다. 1939년 후반 기강(?江)에서 열린 7당 회의와 5당 회의가 그 서막이었다. 1920년대 유일당운동과 1930년대 합작운동에서 못다 이룬 통일운동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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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가 중경에 도착하기 직전에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우파 세력이 하나로 통합하였다. 1940년 5월에 한국국민당(김구), 재건한국독립당(조소앙), 조선혁명당(이청천)이 새롭게 한국독립당을 창당한 것이다.
이들은 “3·1운동의 생명을 계승한 민족운동의 중심적 대표당”임을 선언하고, 삼균주의(三均主義)를 근간으로 강령을 정했다. 이들이 지향한 ‘신민주국가’는 완전한 광복이라는 터전 위에 정치·경제·교육이 평등한 사회를 추구해 안으로는 균등 생활을 확보하고, 밖으로는 세계일가(世界一家)를 구현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완전한 광복을 통한 대한민국의 건설, 보통선거제 실시를 통한 정치적 균등 실현, 토지와 대(大)생산기관의 국유화를 통한 경제적 균등 실현, 의무교육을 통한 교육적 균등 실현, 그리고 광복군 편성과 의무 병역 실시 등을 당강(黨綱)으로 채택했다. 자유와 평등이 조화를 이룬 신민주국가, 그것이 지향점이었다.
1940년 9월 17일에 한국광복군을 창설함으로써 임시정부는 당(한국독립당)·정(임시정부)·군(한국광복군) 체제를 갖추었다. 그리고서 다음해 11월에 ‘대한민국 건국강령(建國綱領)’을 확립했다. 제2차 대전 발발이 임박한 시점에 광복이 현실로 다가왔다는 확신을 가진 임시정부가 환국하여 건설할 국가상을 마련한 것이다.
건국강령은 총강(總綱)·복국(復國)·건국(建國) 등 3장 24개 항으로 구성됐다. 총강은 민족사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복국과 건국은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여 민족국가를 건설할 단계를 설정해 추진할 임무와 절차를 규정하였다.
여기에 제시된 민족국가는 개인이나 특정 계급의 독재를 철저하게 반대하는 신민주국이요, 정치·경제·교육에서 국민 모두가 균등한 권리를 가지는 균등사회를 목표로 삼았다.
결국 광복 이후에 세울 국가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로 기우는 국가가 아니라, 한민족이 기반이자 한국민을 기본 단위로 삼는 전민적(全民的) 국가였다. 이는 한국독립당의 이념으로 표명된 것이기도 하고, 좌파 세력의 대표인 조선민족혁명당의 강령과 흡사하여 합작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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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좌파 세력도 중경에 발판을 굳혔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구성하던 조선민족혁명당·조선청년전위동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 4개 정당 세력이 모두 중경에 도착하였고, 1941년을 지나면서 임시정부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장개석의 종용과 정세 변화가 주효했다. 좌파 가운데 핵심인 조선민족혁명당은 한빈과 이정호가 탈당하고 당군(黨軍)이던 조선의용대의 주력 부대가 화북(華北) 지역으로 북상함에 따라 크게 약화되었다. 게다가 중국 정부가 임시정부만을 유일한 지원 대상으로 삼자 돌파구 마련이 시급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이틀 뒤인 1941년 12월 10일에 조선민족혁명당은 제6차 전당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임시정부 참여를 결의하고 한국독립당과 통일협상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대회 선언에서 “종래에는 임시정부에 대해 불관주의(不關主義)를 취해 왔으나 내외 정세가 변하여 임시정부에 참가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밝혔다.
1942년에 들어 정치적인 결속에 앞서 군대의 통합이 실현되었다. 5월에 조선의용대 본대 병력이 광복군으로 합류하여 신편 제1지대가 되고 김원봉이 광복군 부사령관 겸 1지대장으로 취임한 것이다. 이어서 정치적인 합류가 뒤따랐다. 1942년 10월 25일에 열린 제34차 의정원회의에서는 의원 23명에 대한 보궐선거가 있었고, 여기에 조선민족혁명당 인사들이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9명이던 국무위원의 수를 11명으로 늘려,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과 장건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어서 1943년 10월에 열린 제35차 의정원회의에서는 의원 48명 가운데 24석을 차지한 한국독립당을 이어, 조선민족혁명당이 12석, 그리고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무정부주의자동맹 등이 나머지를 차지했다. 그리고 1944년에는 좌파의 핵심 김원봉이 군무부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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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가 1942년에 달성해낸 좌우 통합은 보기 드문 성공 사례이고, 우리의 소원이자 숙원 과제인 분단문제 해결에 교시를 주는 것이기도 하다.
민족 독립이라는 최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좌우 세력이 정치적으로는 자유를, 경제적으로는 평등의 요소를 적절하게 조화시키고 이념적인 격차를 줄여 열린 공간에 합류하면서 신의를 쌓아간 과정과 성과는 역사적 교훈이 된다.
김희곤·안동대 교수
조선일보 2005.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