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두 도시 이야기
이번에는 도시 이야기입니다. 그랜드써클 안에 위치해 있는 라스베가스와 그랜드써클 바깥 쪽에 있는 싼타페가 그 대상입죠.
도시는 낭만이 있습니다. 자연은 수려한 풍광이 있지만 도시는 애잔한 스토리가 있습니다. 생성의 역사로 따진다면 도시는 끽해야 천년고도고 자연은 수백만년의 지구생성 과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느끼는 감상에서 자연은 정적이고 횡단면적이어서 한 순간의 빛과 모양새 밖에 없지만, 도시는 동적이고 종단면적이어서 갖가지 사연과 스토리가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도시는 여행자와 어울리는 곳이 아닙니다. 도시의 활기와 낭만과 사연은 그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것이지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의 것이 아닙니다. 세느 강변의 빠리쟌느는 그가 빠리에서 살면서 겪은 수많은 일들을 흐르는 강물과 섞을 수 있지만 여행자는 그렇게 섞을 수 있는 사연이 없습니다. 뒷골목 재즈바의 블루스를 진정으로 즐길 수 있는 사람은 하루 일을 마치고 퇴근한 그 도시의 생활인이지 자동차 타고 몇 시간을 달려온 여행자가 아닙니다.
꽤 그럴싸하다고 알려진 시애틀의 바다에 비친 도시 야경보다도, 유명한 홍콩의 빅토리아 피크에서 내려다보는 화려한 밤거리보다도, 서울의 고수부지에 앉아 바라본 한강에 비친 한강다리들의 불빛에서 본좌는 훨씬 더 풍부한 무엇인가를 느낍니다.
도시는 흔들리는 가로등 불빛 하나 하나에도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때, 그제서야 제대로 즐길 수 있습니다. 자연은 직접 가봐야 그 느낌을 제대로 즐길 수 있지만, 도시는 반대로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스토리와 함께 간접적으로 접할 때 훨씬 더 진짜에 근접하게 그 곳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행자의 세느강변, 여행자의 맨하탄거리, 여행자의 홍콩 야경, 여행자의 종로 뒷골목은 모두 진짜가 아닌 가짜, 이미테이션일 뿐입니다. 낭만이 있는 도시에서 낭만을 느낄 수 없는 것이 도시 여행의 패러독스입니다.
라스베가스 - 모방으로 빚은 고유성
라스베가스(Las Vegas)는 그런 측면에서 독특합니다.
라스베가스 호텔은 모든 게 싸구려 모방입니다. 이집트를 흉내낸 룩소르(Luxor) 호텔에는 커다란 스핑크스와 이집트 조각들이 있지만 속이 텅 비어 있는 플라스틱 모형물입니다. 두드리면 묵직한 것이 아니라 퉁퉁 소리가 납니다. 뉴욕 거리를 옮겨놨다는 뉴욕뉴욕호텔은 그 색감이나 건물이 붙어 있는 정도가 마치 싸구려 극장 간판 같은 느낌을 줄 뿐 입니다. 파리의 에펠탑을 그대로 옮겨놓은 호텔도 있는데, 도로 한 가운데가 아닌 호텔 옆에 찌그려져 있는 에펠탑에서는 철구조물의 위풍당당함을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이 싸구려 모방 천지가 바로 라스베가스를 거주민의 삶 속에서 묻어 나오는 낭만이 서려 있는 도시가 아닌 여행자의 하룻밤 에피소드로 충분한 도시인 이유입니다. 라스베가스를 즐기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살면서 쌓아온 스토리가 필요 없습니다. 진짜 사람 사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여행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곳이 라스베가스입니다.
미국에서 라스베가스로 여행오라는 티브이 광고를 많이 합니다. 그 광고의 컨셉은 짧은 여행기간 동안 그곳에서 일상과는 떨어진 일탈의 에피소드를 만들고 남들에게 얘기하기 어려운 그 에피소드는 원래 그 여행자가 살았던 다른 도시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라스베가스에 머문다는 것입니다.
하룻밤의 일탈이 있고 그 일탈이 오래 동안 남지 않고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은 프라스틱 싸구려 이미테이션으로 채워진 라스베가스의 도시 특성과 매우 잘 어울립니다. 라스베가스에 대해 우리가 기대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생활의 도시가 아닌 일탈의 도시. 흐르는 강물에 비친 불빛에 이야기를 곱씹는 도시가 아닌 싸구려 모방물에 원나잇 에피소드를 휘갈겨 쓰는 도시. 그래서 라스베가스를 일컬어 '죄의 도시 (city of sin)' 라고 하기도 합니다.
라스베가스는 '라스베가스 스트립(Las Vegas Strip)' 이라는 길빠닥이 유명합니다. 유명 호텔이 모두 이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우리 나라 티브이에서 라스베가스가 나왔다하면 보여주는 분수쇼가 볼만한 벨라지오(Bellagio) 호텔도 이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라스베가스의 관광은 나름대로의 컨셉을 가지고 있는 호텔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특이한 장식물도 보고 쇼도 보고 음식도 먹고 오락시설을 즐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좌 이런 식으로 여러 호텔을 들락날락하는 관광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호텔이 상당히 붙어 있지만 라스베가스가 여름에는 섭씨 40 도를 넘어 가끔은 50 도까지 올라가는 곳이고, 설사 겨울에 가더라도 걷다보면 각 호텔사이의 거리가 그리 만만치 않아서 거리를 걷기보다는 차를 타고 여러 호텔을 돌아보게 됩니다. 대부분의 호텔이 별도의 주차 건물을 가지고 있는데, 주차장에 에어콘 설치하는 호텔은 없습니다. 차를 주차시킬 때마다 후덥지근한 주차장의 매연 냄새 맡아가며 호텔로 들어가, 담배 냄새 가득한 도박시설을 지나 두어시간 둘러봅니다. 그리고 다시 차를 타고 다른 호텔을 돌아보는 과정을 반복하게 됩니다. 두 번째 호텔까지는 볼 만 하지만 세 번째 호텔부터 슬슬 짜증이 나더군요.
라스베가스를 갔으면 당근빠따로 도박을 해야 하는데, 몇 푼 가지지도 않고 잭팟을 터뜨린 잭키님의 경우와 달리 본좌는 몇 십불을 때려박았지만 홀라당 날리고 말았습니다. 도박은 자고로 든든한 자금이 없으면 버티지 못하는 법입니다. 기분 같아서는 기계가지고 씨름하는 빠찡고가 아니라 좀 더 근사한 포카나 룰렛을 하고 싶지만 기본 판돈 자체가 부족하니 25 센트(300 원)짜리 빠찡고 앞에서 도박 한번 했다는 기분만 내고 맙니다.
확률적으로 봤을 때 판돈이 적은 빠찡고일수록 돈을 잃게 됩니다. 기본 5 센트(60 원)짜리 보다는 25 센트짜리가 돈 딸 확률이 높고 기본 3 불(3,600 원) 넣는 슬롯이 25 센트짜리보다는 확률이 높습니다. 빠찡고 기계가 그렇게 셋팅이 되어 있습니다. 그저 판돈 없는 것들은 시간이나 때우고 꽁짓돈이나 쓸어 넣고 가라는 말씀되겠습니다.
라스베가스 스트립에 최근에 지어진 호텔이 많고 각 호텔마다 해적선, 파리, 베니스, 뉴욕, 분수 등등 고유의 컨셉을 가지고 있어 개별적 볼거리가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환락의 도시 분위기는 라스베가스 스트립이 아니라 다운타운에 있는 프레몽 스트리트 (Fremont Street)에 가야 느낄 수 있습니다. 라스베가스 스트립의 고급 호텔들은 도박게임룸만 빼면 가족 단위의 여행자를 대상으로 하는 건전한 곳입니다. 화려한 네온사인에서 끈쩍한 분위기가 묻어 나오는 곳은 프레몽 스트리트죠.
홀딱쇼를 뜻하는 스트립과 똑같은 스펠링인 '스트립(Strip)'은 여러 가게들이 즐비한 거리를 뜻합니다. 동음이의어죠. 허나 거리를 뜻하는 스트립이라는 말을 듣고 다른 연상작용 없이 온전히 거리만 떠올린다면 그건 아이큐(IQ)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감성지수인 이큐(EQ)에도 문제가 있는 겁니다. 상식적인 연상작용을 고려했을 때 스트립이라는 길빠닥 명은 라스베가스보다는 프레몽 스트리트에 붙이는 것이 훨씬 잘 어울립니다.
들어보면 많은 여행자들이 라스베가스 스트립만 돌아보고 프레몽 스트리트는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갑니다. 낮의 라스베가스 관광은 라스베가스 스트립지만 밤의 라스베가스 관광은 프레몽 스트리트입니다. 프레몽 스트리트의 최대 관광거리는 길빠닥 전체를 네온사인 터널로 지붕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길빠닥 네온사인 터널에서 빛의 쇼를 벌입니다. 라스베가스 스트립은 왕복 6 차선 이상의 큰 도로지만 프레몽 스트리트는 차가 다니지 않습니다. 밤에는 마치 차를 통제했던 우리 나라의 대학로 같습니다.
미국은 길빠닥에서 술마시는 것이 불법입니다. 공공 장소에서의 음주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 법이 적용되지 않는 길빠닥이 몇 군데 있는데 프레몽 스트리트도 그 중 하나입니다. 길가에 있는 호텔의 도박게임룸 바에서 1 불밖에 안 하는 마가리따를 한 잔 사 빨면서 휘황찬란한 네온과 거리의 악사들, 큰 뱀을 들고서 사진을 찍고 돈을 받는 노점상, 진짜 홀딱쇼 스트립을 구경하러 들어오라고 유혹하는 이쁜이 언니들 사이를 걷다보면 이곳이 내가 그리던 진짜 라스베가스라는 생각이 듭니다.
호텔을 즐기기에는 라스베가스 스트립이지만, 길빠닥을 즐기기에는 프레몽 스트리트입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애들 손잡고 왔다면 라스베가스 스트립이지만, 도망치듯 밀월 여행을 왔다면 프레몽 스트리트입니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 의 니콜라스 케이지가 머물 곳은 프레몽 스트리트였지 라스베가스 스트립이 아닙니다. <쇼걸>이라는 영화 보셨습니까? 주인공이 라스베가스의 뒷골목 스트리퍼로 일하다가 큰 호텔의 고급 쇼걸이 됩니다. 라스베가스 스트립은 고급 쇼걸의 거리라면, 프레몽 스트리트는 뒷골목 스트리퍼의 거리입니다.
여행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자문을 구할 때 라스베가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봅니다. 라스베가스를 최대 관광지로 꼽는다면 그 사람은 저와 다른 여행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좋은 호텔과 싸고 맛있는 음식, 쇼핑거리, 인공의 재미가 있는 곳이어서 한 번 쯤 들릴 만한 곳이지만 라스베가스 자체를 위해 시간과 돈을 들여 다시 가고 싶은 곳은 아닙니다.
혹시 모르죠, 두둑한 판돈이 생겼다던가 아니면 니콜라스 케이지처럼 그렇게 생을 마감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찾게 될지는...
첫댓글 어설픈 날씬데 기분전환 했네. 잘 봤구만. 계속 수고
프레몽 스트리트 기억해야지...
프레몽 스트리트가 우리나라 LG가 천정쇼하는 그곳인가?? 그 곳은 너무 빨리 지나가서... 그래 라스베가스~ 하루 밤의 볼거리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