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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불화 스크랩 고려불화 아미타팔대보살도
대나무 숲 추천 0 조회 683 11.11.25 21: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025 아미타팔대보살도  고려후기 비단에색 1554x872mm 일본 고후쿠고코쿠겐지(廣福護國禪寺)소장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아미타불 아래로 여덟 보살이 좌우 네명씩 서 있는 구도로, 보살이 약간씩 몸을 튼 모습과 변화있는 시선 처리, 자연스러운 묘법 등에서 아미타팔대보살도 중 시대가 이른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아미타불의 향좌측 제일 앞에 서 있는 보살은 보관에 화불이 있고 내려 뜨린 왼손에 정병을 들고 있ㄷ. 이 보살과 대칭되는 위치의 보살은 보관에 정병이 있고 왼손에 경합을 들고 있다. 이러한 지물과 보관 위의 상징물은 淳熙10년(1183)명 지은인(知恩院)소장 <아미타정토도>등 남송대 불화에서 관음보살, 세지보살을 표현한 전형적인 방법이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아미타팔대보살도에는 不空의 [팔대보살만다라경]에 언급되지 않은 세지보살이 등장하기도 한다.

팔대보살의 조성 근거로 [팔대보살만다라경]이 가장 많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고려불화의 팔대보살은 지물의 종류와 표현 형식에 있어 이 경전 외에도 중국 불화의 도상 전통과 태장만다라 등에 언급되는 내용이 혼재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 아미타팔대보살도에 보이는 배열 방법의 다양성으로 보아 고려에서는 이 경전에서 언급된 배치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으며, 팔대보살만다라의 독자걱 성격보다는 아미타독존도ㅡ, 아미타삼존도에 이어 서방극락정토에 중생을 왕생시키고자 하는 아미타불의 본원을 성취하는 실천자 무리로서 팔대보살이 아미타불과 함께 신앙되었다고 생각된다.(양)

 

026 아마티팔대보살도  고려후기 비단에 색 1753x915mm 일본 도쿄에술대학 소장 

 

 

 

아미타불 아래 여덟 보살의 몸이 향하는 방향이 엄격한 좌우 대칭을 이루어 고후쿠고코쿠겐지 소장본에 비해 한층 정적이고 경직된 느낌을 준다. 고려 말로 갈수록 구도가 좌우대칭을 강조하게 되고, 조선시대 예배화에 보이는 정면성으로의 지향이 뚜렷해진다. 15세기 말에 그려진 일본 겐묘지(善妙寺) 소장 <아미타팔대보살도>에서는 부처와 보살 모두가 엄격한 정면을 향하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통상 앞줄 중앙에 배치되는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뒷줄에 배열되었는데, 이러한 예는 고려의 아미타팔대보살도 중 유일하다. 이는 달리 보면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본존 가까이로 이동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조선 전기에 들어서면 관음보살, 세지보살을 제외한 다른 보살들의 지물이 점차 사라지거나 연꽃으로 획일화되면서 화면에서 아미타삼존만 개별성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이 이미 이때부터 감지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은 일본에 전해져 린노지(輪王寺) 소장 <아미타팔대보살도>, 미타니케문고 舊藏 <아미타팔대보살도>등 일본에서 그려진 여러 모사본의 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양)

 

 

027 아미타팔대보살다 /담무갈보살, 지장보살도  고려 1370년 칠 위에 금 225x130 국립중앙박물관

 

 

 

세로 225mm, 가로 130mm 두께 10mm의 목판에 옻칠을 하고 금선묘로 앞면에 아미타팔대보살도, 뒷 면에 금강산담무갈보살 및 지장보살을 그린 독특한 형식의 불화이다. 어딘가에 꽂아두고 봉안했던 것으로 보이며 하단 가장자리에 2개의 촉이 남아 있다. 촉과 촉 사이 공간에 '대덕십일년정미팔월일 근화노영동원 득 대덕11년정미팔월일근화노영동원 득 '라는 발원 명문이 있어 이 불화가 충렬왕 33년인 8월에 노영 이라는 화사가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연대가 확실한 아미타팔대보살도 중 가장 이른 해이다.

앞면에 그려진 아미타팔대보살도의 불부살은 모두 측면으로 살짝 몸을 돌리고 있어 얼굴이 갸름하게 묘사되었다. 다른 아미타팔대보살도에 비해 큰 지물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앞줄 중앙 좌측의 보살은 왼손에 발을 받쳐 들고 오른손으로는 버드나무 가지를 잡고 있다.

고려시대 아미타팔대보살도 중에서 관음보살의 도상으로 정병대신 이러한 지물이 채택된 것은 이 작품과 도쿄예술대학 소장본뿐으로,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의 도상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뒷면은 크게 상,하로 화면이 구분되는데, [동국여지승람] 희양, 정양사조, [유점사사적기] [말사표훈사지]연혁편의 기사로 보아 상부의 그림은 고려 태조가 금강산 정양사에 오르던 도중 배점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며 고려에 의한 완전한 통일을 기원하자 담무갈보살이 그의 권속과 함께 모습을 나타냈다는 내용을 그린 것으로 해석된다. 화면 왼쪽 중간 부분에는 엎드려 ?ㅇ의 자세를 취한 인물 앞에 태조라는 부기가 보인다. 하부의 중심인물은 원형보주를 들고 민머리의 형상을 한 것으로 보아 지장보살을 그린 것으로 생각되며, 지장보살의 왼쪽과 오른쪽 하단에서 참례하고 있는 자세의 인물들 옆에는 각각 화사인 노영의 이름과   라는 이름이 적혀있다.

노영은 무신정권기 최우의 원찰이었던 강화도 선원사의 벽화를 그린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화면의 테두리를 금강저 문양으로 장식하는 것, 빈 공간을 구름 문양으로 가득 채우는 것, 사경변상도에 등장하는 금강역사의 무기를 연상시키는 유난히 큰 금강저 지물 등 사경변상도와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주는 이 작품으로 노영이 벽화뿐만 아니라 사경변상도나 예배용 불화까지도 넘나드는 뛰어난 기술을 구사한 화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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