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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명예혁명과 청교도 운동
(이 글은 유튜브 박용규TV에 올라온 크롬웰 공화정 시대 청교도 운동의 강의 내용을 녹취한 것임을 밝힙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_ZY-QsEJzBs
안녕하십니까?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명예교수 박용규입니다.
명예혁명과 청교도운동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688년에 명예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해 존 번연은 세상을 떠났고 리차드 백스터는 189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때문에 백스터가 죽기 3년 전에 명예혁명을 자신의 생전에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명예혁명은 영국 역사에서만이 아니라 교회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그 배경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종교적인 대립에서 야기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명예혁명의 역사를 아주 간결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찰스 2세의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가 영국을 로마 카톨릭으로 바꾸기 위해서 로마 카톨릭 지도자들을 정부의 요직에 앉히고 저항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을 극심하게 박해하고 영국 의회의 결정들을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찰스 2세가 왕정을 복구한 후 정치적인 안정을 기하면서 청교도들을 극심하게 박해하고 프로테스탄트들도 박해하고 로마 카톨릭을 우대하는 정책을 구사하면서 제임스 2세는 부왕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더욱더 친 카톨릭적으로 회귀하는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1688년 영국의회가 네덜란드 윌리엄과 힘을 합하여 제임스 2세를 퇴위시키고 윌리엄과 그의 아내 메어리를 윌리엄 3세와 메어리 2세로 왕위에 옹립한 것입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정권교체를 순탄하게 이룩했다고 해서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라고 역사에서 불리어지게 된 것입니다.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도망을 갑니다. 1688년 윌리엄 3세는 왕위에 오른 그 이듬해에 권리장전을 발표하고 영국 역사의 이정표를 놓았습니다. 의회 민주주의가 역사에 뿌리를 내려서 왕이 의회를 함부로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명예혁명의 정치적인 배경
우리는 명예혁명의 정치적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에 정치적인 상황은 명예혁명을 이해하는데 너무나 중요합니다. 왜 명예혁명은 발생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적어도 세 가지를 이해하면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찰스 2세와 그의 뒤를 이은 제임스 2세가 영국을 로마 카톨릭화 시키려고 하면서 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심각한 종교적인 대립과 갈등이 지속되었습니다.
둘째, 자연스럽게 왕과 의회 사이의 갈등입니다. 왕당파와 의회파 간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전투가 벌어져서 의회파가 승리해서 올리버 크롬웰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정이 수립되었고 크롬웰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그의 아들 제임스 크롬웰이 호민관에 올랐지만 무능으로 인해서 찰스 2세가 다시 왕정을 복구했습니다. 때문에 결과적으로 의회파가 왕당파에 밀린 셈이 된 것입니다. 찰스 2세가 왕위를 복구했지만 왕과 의회의 대립은 자연스럽게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임스 2세가 등장하면서 철저한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는 제임스 2세와 의회는 심각하게 대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임스 2세와 의회와의 갈등이 지속되면서 저 교회 국교신도들로 구성된 휘그당과 제임스 2세 사이에는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했고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1679년과 1681년 제임스 2세를 퇴위시키려고 시도를 휘그당이 한 것입니다. 왕은 고 교회(High Church) 국교신자들로 구성된 토리당을 지원해서 1685년 왕정의회를 토리당으로 채웁니다. 하지만 이것은 토리당을 본질적으로 응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휘그당의 영향력을 제거하려고 하는 고도의 정치적인 계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제임스 2세가 의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로마 카톨릭 신자들을 대거 관리로 채용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영국의회에 의한 심사율을 무시한 처사였습니다. 찰스 2세가 왕정을 복구한 이후에 종교적인 관용을 앞세우면서 자신이 신봉하는 로마 카톨릭을 영국 내에서 다시 부활시키려고 시도하자 이를 의회가 간파하고 1673년 모든 국가의 공직을 국교도로 한정한다는 심사율을 제정했습니다. 사실 그 결과 카톨릭교도들은 물론 비국교도들까지 공직에서 물러나게 했습니다. 심사율은 1828년 폐지될 때까지 영국 안에서 실효법으로 존속되었습니다. 이런 정치적인 상황에서 제임스 2세가 국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고위직에 로마 카톨릭 신자들을 기용한 것입니다. 런던 주교 헨리 콤프트를 퇴임시키고 옥스포드 대학교 맥달린 컬리지 프로테스탄트 교직원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로마 카톨릭 신자들로 채웠습니다. 게다가 양심의 자유를 반포하고 로마 카톨릭을 억압하는 제도를 철폐하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왕이 심사율을 어긴 데다가 로마 카톨릭을 노골적으로 옹호하자 왕과 의화 사이의 갈등은 더욱더 첨예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셋째, 왕위 계승문제입니다. 영국의회는 제임스 2세의 뒤를 이어서 개신교도인 메어리가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어린 아들을 왕위에 계승시키려고 후계자로 제임스 2세가 지명한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토리당도 제임스 2세와 대립적인 관계를 유지해온 휘그당과 손을 잡고 제임스 2세의 폭정에 맞섰습니다. 의회는 어떻게든 로마 카톨릭 신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2세를 퇴위시키고 찰스 1세의 손자 손녀였던 당시 네덜란드 공화국 총독 빌헬름(윌리엄)과 그의 아내 메어리를 왕위에 옹립하려고 하는 비밀 모임이 결성이 1688년 6월에 이루어집니다. 윌리엄은 네덜란드 독립운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윌리엄 오렌지 공의 증손자였습니다. 네덜란드가 칼빈주의 프로테스탄트 국가인데다가 윌리엄은 혈통적으로 칼빈주의 프로테스탄트 신앙에 굳게 선 가문이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정치적인 혼란에 방관자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고 제임스 2세와 맞서는 영국의회 토리당과 휘그당 지도자들에게 1687년 4월 비밀편지를 보내 격려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해 9월에 제임스 2세가 종교적 관용이라고 하는 명분을 앞세우면서 로마 카톨릭을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행위를 중단해 줄 것을 공개적으로 요청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제임스 2세 그리고 메어리와 윌리엄의 대립이 생겨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네덜란드 윌리엄과 메어리의 영국에 개입
윌리엄과 메어리는 영국 문제에 깊이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1688년 영국을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외국 침략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도록 제임스 2세가 투옥시킨 캔터베리 대주교 6명의 편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외교적으로 수완이 참으로 뛰어났는데 영국내 로마 카톨릭에 대한 박해를 가하지 않을 것과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서 동맹을 맺는 조건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드 1세와 협약을 맺고 프랑스에 공동 대응하기로 했습니다. 정치적 외교적 수완이 탁월한 윌리엄은 수석 행정과 밴틴크를 통해서 수송선 400척 그리고 독일 용병 13,616명 그리고 200만 길드의 자금 심지어 교황 이노센트 11세로부터 자금을 빌리는데 성공하였습니다. 9월 26일 암스텔담 의회로부터 영국침공 승인을 받은 윌리엄은 11월 16일과 11월 11일 6만의 병력과 5만의 말을 싣고 출항해서 1688년 12월 15일 영국 토레이(Toray)에 상륙합니다. 그가 이끈 군대의 깃발에는 “나는 잉글랜드의 자유와 개신교의 신앙을 지켜낼 것이다.”라고 하는 문구가 새겨져있었습니다.
윌리엄의 군대는 영국인 망명자들과 위그노들이 상당수 포함되었습니다. 윌리엄 2세의 군대와 제임스 2세의 군대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19,000명의 제임스 2세의 군대는 수적으로 열세였습니다. 그런데다가 제임스 군대의 최고 사령관이었던 루이 듀라가 11월 23일 투항을 하고 이어서 존 처칠 그리고 제임스의 딸 앤도 투항을 하면서 제임스 2세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잉글랜드 해군이 윌리엄의 지지를 표방하면서 찰스 1세처럼 자신도 처형당할지도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이 앞서기 시작해서 12월 23일 그는 아내가 있는 프랑스로 망명을 떠납니다. 의회는 윌리엄 단독으로 국왕을 추대할 것인지 메어리와 함께 공동으로 추대할 것인지 아니면 메어리를 단독으로 추대할 것인지 논의하다가 공동으로 둘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결국 공동추대로 결론이 내려져서 윌리엄과 메어리가 왕으로 추대됩니다. 1689년 2월 13일 윌리엄 3세와 메어리 2세는 권리장전에 서명합니다. 1689년 스코틀랜드 의회도 윌리엄 3세와 메어리 2세를 왕ㅇ로 인준합니다. 이렇게 해서 1688년 명예혁명은 성공을 했고 왕권신수설을 주창한 제임스 2세는 퇴위를 당했고 전제군주제는 종식되었고 의회 민주주의가 최종 승리를 하게 된 것입니다. 1689년 12월 16일에 영국의 국가제도를 규정한 권리장전 핵심내용은 영국 국왕의 존재를 절대 전제군주로 규정하고 국왕이 준수해야 할 제반 권리 여섯 가지를 명문화시켰습니다.
첫째, 의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법률의 적용, 면제, 집행정지를 금지한다.
둘째, 의회의 동의 없는 과세, 평시의 상비군을 금지한다.
셋째, 의회선거의 자유, 의회 발언의 자우, 국민 청원권을 보장한다.
넷째,의회를 소집한다.
다섯째, 국민의 청원권 의회 의원의 면책특권, 신체의 자유에 관한 제반 규정
여섯째, 왕위 계승자에서 로마 카톨릭 교도를 배제한다. 왕위에 오른 윌리엄 3세는 종교의 자유를 중시해서 종교적 관용을 베풉니다. 39개 신조문에 서명을 하고 왕에 대한 충성만 약속하면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비록 서명을 거부하는 이들이라고 할지라도 왕실을 해하고자 하는 음모만 없다면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합니다.
이런 혹독한 시련을 통과하면서 청교도들은 시련 속에서도 자신의 신앙과 개혁정신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왕정복고 후에도 청교도들의 이상은 영국인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아주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자신들의 신앙을 계속 유지해 올 수 있었습니다.
그 시대 탁월한 청교도 리차드 백스터
이 시대에 <개혁주이 목회자>를 저술한 인물로 널리 알려진 리차드 백스터가 영국의 대표적인 청교도 지도자로 부상합니다. 참으로 많은 학자들에게 깊은 매력을 제공한 청교도였습니다. 그에 대한 많은 논문이 출판되었습니다. 세계적인 학자 제임스 패커가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것도 리차드 백스터였습니다. 백스터는 당시 이중예정론을 강조하고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주창하고 정통주의 신학을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인간의 회심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청교도 지도자였습니다. 리차드 백스터는 1641년 4월 스물 여섯 살의 나이로 만장일치로 키드민스터의 세인트 메어리 & 올 세인트 처치(St Mary and ALl Saints’ Church) 교회 목사로 선출되었습니다. 그곳에서의 그의 사역은 19년 동안 계속되었고 그 기간 동안 키더민스터와 인근 지역에서 많은 개혁을 이룩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주변 지역의 목사들을 장로교, 성공회, 독립교 그리고 교파에 상관없이 연합운동을 주도합니다. 이 기간에 그의 유명한 <Reformed Pastor,개혁주의 목회자>가 출간됩니다. 이 책은 많은 목회자들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주고 있고 지금까지도 그의 영향력이 깊게 미치고 있습니다. 1642년 왕당파와의회파의 전투가 벌어졌을 때 리차드 백스터는 어느 특정 편에 서는 것을 피하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의회파 군목으로 참전해서 매주 설교했습니다. 이때 수많은 탁월한 지도자들이 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백스터는 존 오웬과 오랫동안 신학 논쟁을 벌입니다.
그 이유는 백스터가 제한속죄 사상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백스터는 기독교 신학방법론(1681년)을 비롯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은혜라고 믿은 것입니다. 칭의 역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것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백스터는 인간의 회심 과정에서 개개인의 고유한 역할이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리처드 백스터의 신학은 당시 정통적인 칼빈주의와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신학적인 다양성이 존재했고 청교도 안에서도 교회관과 신학적인 관점이 통일된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할 때 우리는 그 부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웬이 좀더 조직신학적인 접근을 했다고 한다면 리차드 백스터는 실천적인 측면이 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연합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합운동을 이끈 주역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 대중들에게 더 많은 인기를 얻은 사람은 사실 존 오웬보다는 청교도 지도자 리차드 백스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존 오웬을 신학적으로, 리차드 백스터를 목회적, 실천적으로 사용하셔서 청교도 운동의 지도자로 이 두 사람을 함께 사용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임스 2세의 퇴위와 명예혁명의 의의
제임스 2세의 퇴위와 명예혁명에 대해서 앞서 말씀드렸었는데 다시 한번 본질적인 핵심사상이 무엇인가를 정리해 드리기를 원합니다. 찰스 2세의 뒤를 이어 1685영에 그의 동생 제임스 2세가 왕위를 계승합니다. 그는 영국에 공식적인 종교로 로마 카톨릭을 복고하는데 성공합니다. 제임스의 진정한 목적은 종교적 평등이나 관용정책이 아니라 영국에서 로마 카톨릭을 회복시키는 것이었으며 더 나아가서 1559년과 1662년 이후에 이룩된 프로테스탄트의 영국내 기초를 무너뜨리는데 있었습니다. 그의 로마 카톨릭 선호는 영국의 국교도를 청교도들 그리고 분리주의자들 모두로부터 호응을 받지 못했습니다. 비공식적 예배에 참여하는 이들을 사형에 처하는 칙령을 반포하면서 제임스 2세는 로마 카톨릭 신자들을 고위직에 임명을 하면서 더욱더 국민의 반감을 샀습니다. 이것은 불법적인 행위로서 왕권 남용이엇 특히 심사율을 어기는 처사였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민간인 관직 이상을 가져서는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2세는 1685년에는 사전에 상의없이 일방적으로 의회를 해산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왕위 후계자로 인식되어 왔던 개신교도 메어리 공주를 후계자로 삼지 않고 자신의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했던 것입니다. 결국 제임스 2세가 집권한지 3년만에 영국인들은 반란을 일으켜 그를 폐위시키고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 윌리엄과 그의 아내 메어리를 왕으로 맞은 것입니다. 1688년 윌리엄이 영국에 도착하자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도주합니다.
청교도 운동 총정리
이제 청교도 운동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에일머가 지적한 것처럼 17세기는 언제나 그렇듯이 종교, 정치 및 사회가 밀접히 연계되었습니다. 특별히 제임스 1세의 즉위부터 윌리엄 3세와 메리2세의 즉위까지 86년간 영국의 정치는 청교도 운동과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진행되었습니다. 때문에 청교도 운동을 종교적인 현상에 국한시켜 좁은 의미에서만 해석할 수 없습니다. 청교도 운동은 포괄적인 해석을 내려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할러(William Haller)가 해석한 것처럼 청교도 운동은 교회 정치 문제, 목회자들의 개혁 투쟁, 분리주의 그 이상의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현존하는 사회를 전도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지성의 자세, 행동규범, 심리학, 표현방식, 기성의 신앙생활을 능가하는 역동적인 신앙의 활력을 포함해서 영국문명을 변혁시키는 결과를 청교도 운동이 가져다 준 것입니다.
이 시대에 영국이 배출한 인물들이 종교적인 지도자들만은 아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백스터, 번연, 존 오웬을 비롯한 수많은 청교도 지도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과학자 아이삭 뉴턴(Issac Newton, 1642~1727), 위대한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가 출현해서 종교적인 삶과 과학적인 삶을 새로운 방향에서 수정한 것입니다. 그리해서 자연 과학의 발달과 합리주의 청교도 운동이 한 시대 속에서 어울려져서 진행되었습니다. 18세기 들어서면서 영국에서는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 개의 종교적인 공동체가 공존한 것입니다. 다수인 영국 국교회 제2의 세력을 소유한 비국교회 그리고 소수의 로마 카톨릭 교회 가 그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상호간에 상당히 관용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때문에 국교도이면서 프로테스탄트적인 사상을 소유한 이들이 상당수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2세기에 걸친 갈등 속에서 영국 교회가 자신들의 길을 찾았던 방식이었습니다.
절대왕정에 대한 의회의 승리는 질서정연한 진보와 평화적 개혁의 가능성을 위해서 싸웠던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그 결과 영국에서는 민주주의의 장이 열렸고 영국을 더욱 근대로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16세기부터 시작된 영국인들의 신대륙 이주 특히 청교도들의 신대륙 이주로 17세기에 이르러 신대륙에서는 청교도 정신이 종교-사회-윤리 전반에 뿌리내리면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이주한 이들 청교도 필그림(순례자)들에 의해서 신대륙 뉴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청교도 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했습니다.
청교도들은 조지 말스턴의 말대로 교리(Doctrine), 경건(Piety), 문화(Culture) 이 셋이 하나의 트라이앵글처럼 너무도 훌륭한 조화를 이룬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빼어난 빛나는 너무도 훌륭한 신앙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의 강의는 여기까지입니다. 부족한 강의를 끝까지 시청해 주신 시청자 여러분들과 구독자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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