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사상초등학교50회 권금산님의 글로 사상구청 문화지에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
권금산님은 사상구 괘법동 "벼락부자집 앞이 고향"이며 학장초등학교로 치면 18회에 해당됩니다.
아 내고향 부산沙上<1>
<글을 시작하며...>
[연어]라는 물고기는 큰 바다에서 성장한 후 자신이 태어났던 강물을 찾아
올라가서 그곳에 알을 낳고 그곳에서 자신의 생애를 마친다.
[철새]들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일정한 코스를 돌면서 지구를 이동하며 살아간다.
동물들의 이런 본성적인 능력을 회귀 본능(回歸 本能)이라고 한다.
[사람]들에게도 고향을 그리워하거나 과거에 집요한 애착을 갖는 회고 심리가 있다.
인간의 이 망향 정서(望鄕 情緖)와 과거의 사물에 대한 강한 집착을 나타내는 회고 감성(回顧 感性)은 동물들의 회귀 본능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청년은 미래에 살고, 노인은 과거에 산다”라는 말이 있다.
남은 인생이 살아 온 날들 보다 훨씬 짧은 노인들은 살아 온 길고 먼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 무수한 나날들 속에 새겨지고 서려 있는 과거의 추억과 기억을 회상하고 반추하면서 인생을 살게 된다.
철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 마을!
그 곳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들...
무수한 희로애락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고향 산천과 많은 시간을 더불어 보냈던 사람들이 그리워지고 그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깊어진다.
아 그리운 사상(삼각산)아!
1963년 초여름.
사상 국민학교(현 사상초등학교) 정문 앞에는 시멘트 다리가 놓여 있어 서괘리(괘법동)와 덕포리(덕포동)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상 초등학교 옆의 남쪽 담벼락을 따라(당시에는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와 철조망들이 엉성하게 쳐져있었다.) 동쪽과 서쪽으로 도랑물이 흐르고 있었다.(현재의 복개도로. 동쪽의 신라대학교 쪽에서부터 물이 흘러 사상초등학교를 거쳐 삼락천 까지 흘러서 현재 감전 배수로를 통하여 낙동강으로 흘러 나감.)
종수와 인찬. 영선이등 동네 아이들 서너명이 약속이나 한듯이 사상 초등학교 앞 다리 밑으로 모였다. 학교 입학하기전의 또래 아이들이었다.
친구들과 놀기에는 그래도 여기가 제일이었다.
학교 앞에 오면...
그래도, 당시의 사상면 중심지라(사상면사무소는 현재의 사상교회 교육관 부근) 사상에 있는 형님 누나들을 다 만나 볼 수도 있었고, 또 내년이나 내후년쯤이면 그래도 초등학교 학생이 된다는 부푼 꿈으로 사상초등학교 앞에서 놀았다.
그리고, 배가 고플 때면 다리 위를 올라와서 몇 발작 걸음만 가면 남평 약방 사거리를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당시의 사상면 중심지였음. 감전. 학장. 주례. 덕포. 삼미사(모라동 인근)사람들도 여기까지 시장을 보러 걸어왔음.)
지금이야... 먹을거리가 풍부한 세상이라서 그렇지만, 아이들은 아침 일찍이 나가서 감꽃을 주워서 먹기도 하고 목걸이를 한 아이도 있었다.
감꽃도 먹을 꺼리였기에 바지런하지 못하면 감꽃 구경도 못했다.
성질이 급해서(?) 실에 꿰였던 감꽃은 다 먹어버리고 빈실만 목에 건 아이도 있었다.
그렇다!
하루의 일과였다. 소일거리라고는 없었고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이라 놀이터도 없었기에 아이들은 학교 앞에 와서 놀았던 것이다.
학교에 오면, 그래도 철봉도 있고 미끄럼틀과 시이소 등 여러 가지 놀이꺼리가 되었던 것이다.
“보오~~~ 오!~~”
신라고무(현 사상 파출소 지구대 뒤쪽 한신 아파트)에서 정오를 알리는 소리였다.
당시에는 시계가 귀했기 때문에 보일러의 증기를 이용해서 소리를 내는 효과였다.
아이들은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신나게 놀았었는데, 고무 공장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고는 정말(?) 이상하게도 배가 고팠다.
------- 다음 주에 ^*^ -------
첫댓글 신라고무 후에 국제상사가 인수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