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초계정씨라면 누구나 가장 관심있게 확인하고자 하는 자료가 바로 시조 광유후의 자료이다. 초계정씨 종인이 아니더라도 중세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홍문공도와 시조에 대해서 생소한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고 본다.
어려서부터 많이 들어온 학자, 유학자, 문신과 같은 말은 너무나 익숙한 말이긴 하지만 과연 알고 있는 시조의 모습이 정확한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고 여러 가지 자료를 취합해서 종합하면서 내용을 조금 정리하여 대종회보에 싣기에 이르렀다. 이에 시골의 이공계 대학을 졸업하고 사학에 대해 문외한인 저는 드러난 역사적인 기록을 묶어 시조의 진면목에 대해 다시 살펴보는 계기가 되기 희망하면서 이 글을 싣습니다.
<시대적 환경>
후삼국을 어렵게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 이후 4대 광종은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호족세력을 누르고 왕건강화를 도모하였으며, 제5대 성종은 국자감을 설치하였고 기간중에 거란족의 1차 침입이 있었다. 제7대 현종때는 거란의 2차, 3차 침입이 있었으며 특히 2차 침입시는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까지 피난을 가는 등 국토가 유린되었다. 거란의 3차 침입시에는 강감찬 장군이 거란족 기마병 10만명을 섬멸하여 당시 동아시아 최강의 전력이던 거란족의 기마병을 섬멸하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시조 광유후가 탄생한 시기는 현종 8년(1017년)에 문과에 장원급제 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20년 전후를 거슬러 올라가면 제6대왕 성종(981~997)의 후반부에서 제7대왕 목종(997~1009)의 전반기 쯤으로 추정된다. 이 당시 시대적 환경은 거란족의 1차 침입(993년), 거란족 2차 침입(1010년), 거란족 3차 침입(1018년)에 걸친 국가적인 대격동의 시기였으며 시조의 출생과 어린 시절의 성장시에는 그러한 사회적인 배경이 있었다. 세차례에 걸친 거란족의 침입으로 국토는 피폐하였으며 천리장성의 축조와 국경의 수비문제로 어수선한 분위기였고 이러한 시점에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군사력 강화를 통한 국가의 생존권을 확보하고 내부적으로는 왕권의 강화하는 것이 이 시기에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고 본다.
<관직으로 본 시조 일대기>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에서 시조께서 관료로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는 사서에 드러나는 관직의 이동상황을 확인하면 대략 파악이 가능하다.
과거 급제 후 초기에 임명된 좌습유, 지제고는 제외하더라도 그 이후 사서에 등장하는
몇 가지의 관직을 통해 당시 시대적인 상황에서 시조에게 부여된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
○ 중추원 부사, 지공거 - 1047년(문종 1년)
문종1년에 중추원 부사로서 지공거를 맡으셨다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얼핏 생각하면 중추원 부사와 지공거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시대적인 상황에 맞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많은 연관이 있다고 볼수 있다.
중추원은 군사기밀과 왕명출납 등을 하는 기관으로 국왕의 측근에서 외교문제, 군사적인 기밀사항, 병력의 이동 등을 보좌하므로 최측근에서 국왕을 보필하는 기관이었으며 지공거는 과거시험에서 관리를 선발하는 책임을 맡은 관료를 부르는 말로 역대 왕들은 과거제도를 통한 관료선발을 통해 왕권의 강화를 시도하였다.
중추원부사와 지공거 모두 왕권을 수호하고 강화하기 위한 중요한 자리였음을 알 수 있으며 문종의 입장에서는 재위 초기에 가장 믿고 신뢰할만한 관료에게 이러한 역할을 맡겼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 동지중추원사, 지중추원사, 중추원사 - 1049년~1050년(문종 3년~문종 4년)
중추원내에서 중추원부사에서 승진하여 동지중추원사, 지중추원사를 거쳐 중추원사를 거치게 되는데 중추원은 당나라 시대의 추밀원이나 고려 후기의 밀직사와 같은 기관 으로 국가적인 병력의 이동과 군사적인 결정을 내리는 당시 왕조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시조 광유후께는 이 중추원사에 계시면서 문종을 도와 거란, 송나라 등 외교와 변방의 군사적인 처리방안에 대해 깊이 있게 관여하였다고 본다.
이것 하나만 놓고 볼 때도 시조를 단순히 학자라고 언급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를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국경분쟁의 징후가 있거나 사태발생시 도순문사 또는 도순검사라고 하는 임시로 특별히 파견된 관료가 있었는데 이럴때는 중추원사 를 보좌하는 중추원의 고위 관료중에서 선발하여 파견하는 경우가 많았다.
○ 한림학사승지 - 1050년(문종 4년)
한림학사승지는 고려시대 한림원에 속한 정3품의 관직으로 한림원은 조선시대로 볼 때 홍문관과 비슷한 기관이다. 한림학사승지는 한림원의 정3품 관직으로 홍문관 의 제학이나 대제학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림원은 국왕의 교서,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는 기관이니 국왕의 측근에서 귀와 눈의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도 삼사라고 하는 청요직중에서도 홍문관을 삼사의 첫 번째로 구분하여 최고의 영광스러운 자리로 인식하였다.
거란족과 송나라와의 대외관계가 아주 중요하던 시기인 만큼 문종의 시조에 대한 신뢰를 확인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고려사 열전을 보면 2세 정간공도 고려 숙종때 한림학사로서 지공거를 맡았다는 기록이 있다. 한림학사승지는 국왕의 측근에서 왕의 심중을 헤아려 각종 대내외의 공식 문서등을 작성하던 한림원의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 예부상서 - 1050년(문종 4년)
예부는 고려시대에 예의, 제향, 조회, 학교, 과거 등을 관장했던 기관으로 상서는 정3품으로서 예부의 최고 관직이다. 이전의 역사를 보면 고려 광종이 과거제도 시행이나 조선시대 중종때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현량과를 통한 인재 선발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관료를 선발하는 방법은 왕권을 강화라는 측면과 직결되어 있다. 대개 음서제를 통한 관직의 진출은 귀족들의 권력을 대물림하는 방법이고, 과거제도를 통한 신진 관료의 선발은 기존 기득권 귀족과 연관이 없는 새로운 관료의 선발이라는 점에서 왕권강화의 방법이며 문종 초기에 시조께서 예부상서를 역임한 것은 이러한 맥락으로 문종조 초기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관료를 선발하여 왕권 강화와 기존 호족세력을 누르고 고려시대 최고의 문화적 황금기 가능하게 한 문종의 선택이었다고 본다.
○ 사학의 창시 – 1051년(문종 5년 추정)
공식적인 관직은 아니지만 시조는 고려 사학의 창시자였다.
고려시대의 사학은 모두 12개로 보통 사학 12도라고 부른다. 사학 12도의 설립 목적이 과거 급제를 통한 관직에 등용이라고 볼 때 사학의 창시도 문종의 왕권 강화라는 의도된 목적을 벗어나지 않는다. 고려시대의 사학은 퇴직한 관료들이 제멋대로 세운 서당의 개념이 아니다. 만약 사학이 임의로 세워졌다면 수백, 수천은 족히 넘어야 할터인데 고려시대에는 딱 12개만 존속하고 공양왕때 폐지되기 전까지 12개가 고스란히 유지되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국가에서 사학의
창시와 유지에 통제를 가했음을 알수 있는 자료다. 고려시대에는 사학에 노비와
전답을 지원하였고 국가에서 지원해준 기관이었기 때문에 국가 재정상 사학을 계속 늘릴 수는 없었다. 사학은 고려 문종부터 숙종에 이르는 시기에 대부분이 세워 졌으며 그 사학의 시발점이 바로 우리 초계정씨의 시조이신 광유후인 것이며 시조를 필두 하여 고려시대 사학은 자제들을 교육하여 과거를 통해 신진관료를 배출하는 역할을 하여 고려시대 문화의 황금기를 이어갔다.
고려시대의 사학의 시초에 관한 문제는 추후 별도로 대종회보로 연재할 계획입니다.
○ 홍문광학추성찬화공신(弘文廣學推誠贊化功臣)
시조께서 받으신 공신의 호는 홍문광학추성찬화공신(弘文廣學推誠贊化功臣)이다.
이제까지 알고 있는 시조의 모습은 학자요 문신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시조의 진면목을 파악하기 위해 공신에 대하여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단순히 글을 많이 읽었다던가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던가 문장에 뛰어나서 공신을 내리는 경우는 없다. 그런 재능을 왕실의 수호와 왕권의 강화 또는 국가적인 재난 상황에 크게 기여했을 때 공신을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마도 문종 재위 초기 문종을 도와 고려시대의 문화적 황금기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공신을 내렸다고 추정하며 공신의 내용을 볼 때 홍문(弘文), 광학(廣學) 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군사, 외교적인 분야보다 학문과 교육 등의 분야에 기여하였으리라고 추정해 볼수 있다.
<결론>
시조께서 역임하신 중추원사, 한림학사승지, 예부상서, 지공거 등의 관직을 살펴
볼 때 학자나 문관이라고 국한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편적인 평가라고 아니할 수
없다. 아예 틀린말은 아니지만 종합적으로 볼 때 시조의 모습을 온전히 표현했다고
볼 수는 없다. 고려사절요(문종 34년, 1080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봄 2월에 말씀하시기를 “ 고 문하시중 왕총지와 예부상서 중추사 정배걸은 모두 충성
스럽고 곧기가 짝이 없으며 재주와 식견이 뛰어났으니 시대가 비록 오래되었으나 내 어찌 잊으리오. 남다른 은총을 내려 과인의 어진이를 사모하는 뜻을 밝혀야 하겠으니 총지에게는 수태사 중서령을 배걸에게는 수태위 문하시중 광유후를 추증하라” 하였다“
사서에 기록된 내용이 충성스러우며 곧고 재주와 식견이 뛰어났다고 했는데 지금은 단지 배움이 많은 학자 정도로만 알고들 있지 않은가?
왕의 입장에서는 치세를 위해 많은 기여를 한 사실을 위와 같이 표현하였다.
남들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서 꾸며내는데 우리 초계종인들은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 드러나는 시조의 모습조차 제대로 담아내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문종조 초기부터 왕의 특별한 명령을 받고 지공거를 수행하였으며 돌아가시기 전까지 중추원사와 한림학사승지, 예부상서를 거치면서 국가의 중요 정책에 깊이 관여하셨으며, 퇴임후에는 홍문공도를 설립하여 왕권강화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문종은 돌아가신지 30년이 지나 관직을 추증받으셨다.
이제는 단순히 글을 많이 읽은 학자라는 인식을 우리 스스로부터 떼어 버릴 때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