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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인도 불교사
5. 중도中道
1) 아我와 비아非我의 사이
『잡아함』卷10「천타경闡陀經」에는 장로 천타闡陀가 아난에게 내가 있느냐? 없느냐? 에 대해 법을 묻는 일화를 전한다.
‘저도 색이 무상한 것이고, 수·상·행·식도 무상한 것이며, 모든 행도 무상한 것이고, 모든 법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며, 열반은 고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모든 행은 비고 고요하여 얻을 수 없고, 애욕이 다하고 탐욕을 여읜 것이 열반이다)라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거기에 어떻게 나[我]라고 할 만한 것이 있어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것이 법을 보는 것이다)라고 말하겠습니까?’
(중략)
그 때 아난이 천타에게 말하였다.
“저는 부처님께서 마하가전연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치시는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전도되어 혹은 있다, 없다는 두 극단에 의지한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대상 세계를 취해 마음으로 곧 분별해 집착한다. 가전연이여, 만일 받아들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머무르지 않고 나[我]라고 헤아리지 않으면, 이 괴로움은 생길 때에 생겼다가 소멸할 때에 소멸할 것이다. 가전연이여, 여기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미혹하지 않으며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능히 스스로 알면 그것을 바른 소견[正見]이라고 하나니’, 이것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가전연이여, 세간의 발생을 사실 그대로 바르게 관찰하면 ‘세간은 없다’는 소견이 생기지 않을 것이요, 세간의 소멸을 사실 그대로 바르게 관찰하면 ‘세간은 있다’는 소견이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전연이여, 여래는 두 극단을 떠나 중도를 말씀하셨다. 말하자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기나니, 즉 무명(無明)을 인연하여 행(行)이 있고 ……(내지)…… 태어남·늙음·병듦·죽음·근심·슬픔·번민·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또 말하면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소멸하나니, 즉 무명이 소멸하면 행이 소멸하고 ……(내지)…… 나아가 태어남·늙음·병듦·죽음·근심·슬픔·번민·괴로움이 소멸하느니라.” (김월운 저,『잡아함경雜阿含經』 제 10권 262. 천타경(闡陀經), 439~440, 동국역경원.)
무상하여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법을 보는 나[我]라고 할 만한 것이 엄연히 있지 않느냐?’라는 천타의 질문에, 아난은 붓다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대상 세계에 취해, 있다, 없다 하며 분별 집착하는데, 그러나 만일 집착하지 않는다면 괴로움은 생길 때에 생겼다가, 소멸할 때에 소멸할 것이다. 그리고 생기는 것을 사실 그대로 관찰하면 ‘세간은 없다’는 소견이 생기지 않을 것이요, 소멸하는 것을 사실 그대로 관찰하면 ‘세간은 있다’는 소견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세간世間이란 우리들이 사는 세상으로, 영원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런데 세간에 사는 유한한 존재인 우리들은 ‘세간이 없다’는 생각을 도저히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세간의 유한성을 바르게 관찰한 사람, 즉 해탈한 사람에게 는 세간은 무명에서 연기한 것일 뿐, 시시각각 변하다가 결국 소멸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세간이 있다’는 소견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알고, 보고, 말하는’ 망념의 ‘나[我]’와 ‘무상을 여실히 보는’ 해탈한 ‘나[非我, 無我]’가 있다는 것이다. 세간에는 망념의 나인 ‘아我’가 있고, 세간을 떠나서는 해탈한 나인 ‘비아[非我, 無我]’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래는 세간과 출세간의 양 극단을 떠나 중도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기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십이연기설로 중도를 말하고 있다. 중도는 연기에 의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불교 무아설의 최승最勝한 뜻(parama-artha)은 바로 이런 곳에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 나에게는 실재성이 없으므로 무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무아는 망념에 입각한 나까지도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찬타 비구가 제기했던 ‘알고, 보고, 말하는 그 나’는 바로 이러한 나(妄我)라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불교의 무아설은 유와 무의 두 끝을 떠난 중도적인 교설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곧 십이연기설에 입각한 것이다. (고익진 지음,『불교의 체계적 이해』 pp. 49~50.)
정리하면 이렇다. 세상 사람들은 전도되어 혹은 있다, 없다는 두 극단에 의지하고 분별 집착하는데, 붓다는 두 극단을 떠난 중도를 설한다는 것이고, 그 중도는 십이연기설에 따른 것이라는 것이다. 한쪽에는 세간의 아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출세간의 비아 혹은 무아가 있는데, 여래는 양 쪽을 아닌 중도를 말한다는 것으로 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정리하면 이렇다. 세상 사람들은 전도되어 있다, 없다, 라는 두 극단에 의지하고 분별 집착한다. 그러나 붓다는 두 극단을 떠난 중도를 말하였는데, 그 중도는 십이연기설에 의한다는 것이다. 한쪽에는 세간의 아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출세간의 비아 혹은 무아가 있는데, 여래는 양 쪽을 아닌 중도를 말한다는 것으로 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아我 범부, 세간, 윤회 | 중도中道 여래 | 비아非我, 무아無我 부처, 출세간, 해탈 |
중도는 엄밀하게 따져 둘의 중간은 아니므로 이렇게 그릴 수도 있다.
아我 범부, 세간, 윤회 | 비아非我, 무아無我 부처, 출세간, 해탈 |
중도中道, 여래 |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처음에는 아와 비아로 구분하였는데, 어느 때 부턴가 아도 비아도 아닌 중간 개념의 말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아도 비아도 아닌 또는 아와 비아를 아우르는 중도 개념의 용어가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앞 장 ‘무아無我냐? 비아非我냐?’에서 살펴보았듯 또 다른 개념의 ‘무아無我’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새로운 ‘무아’의 탄생이다. 물론 한역이 되는 과정에서 번역자에의해 생겨난 용어이겠지만, 그 바탕에는 그 개념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한역과정에서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표를 보면, 여래는 곧 부처인데, 여래와 부처가 다른 것처럼 두 군데에 존재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다시 표로 보면 이렇다.
아我 범부, 세간, 윤회 | 무아無我 여래, 중도中道 | 비아非我 아라한, 출세간, 해탈 |
이 표에는 부처 대신 아라한阿羅漢을 넣었다. 초기 불교 시대에는 해탈한 사람을 아라한이라고 하였는데(물론 싯다르타도 아라한이다), 대승에 오면 아라한은 소승에만 해당되는 용어로 남는다. 여기서부터 소승과 대승의 차이가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적어도 처음에는 비아였는데, 대승에서 이론화하는 과정에서 무아로 자연스레 굳어진 것으로 유추가 가능하게 되었다. 추론이 많이 들어가긴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보아도 별 무리는 없어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대승의 주장에 의하면 붓다가 비아를 말씀하셨지만 원래 의도는 무아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의하였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불교에서는 선업善業에는 즐거운 선보善報가 따르고 악업惡業에는 괴로운 악보惡報가 따른다고 설한다. 이를 한 마디로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고 한다. 소위 불교의 업설業說이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현실을 보면 이따금 이러한 불교의 업설이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앞에서 살폈듯 무아설과는 서로 모순되어 보이기도 하여, 학자들은 불교의 업설을 숙명론이나 방편설로 보는 경향이 있다. 무아이기 때문에 윤회할 주체가 없어진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세간의 무명·망념에 의한 아가 있다고 한다면 그에 따른 윤회 또한 자연스럽게 있게 된다. 불교에서는 업을 윤회의 주체로 보기 때문이다. 무아설無我說은 무명·망념의 아가 없다는 것이지 아我가 아예 없다는 말은 아니다. 생사윤회는 바로 그런 망념 때문에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업설과 무아설은 이론적으로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2) 중도中道의 원리
보통 ‘무아無我’라고 하면 ‘나는 없다.’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무아, 즉 ‘나는 없다.’는 말은 성립될 수 있는가? ‘나는 없다’라고 한다면, 나는 없다고 말하는, 나도 없어야 한다. 내가 없는데, 어떻게 ‘나는 없다’라는 말을 할 사람이 있겠는가? 엄밀하게 따지면 무아, 즉 ‘나는 없다’라는 말은 성립될 수가 없다. ‘나는 없다’라고 할 ‘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말의 역설逆說”, “말의 패러독스Paradox”라고 한다. 이것은 오랜 역사를 가진 논제로, 가장 유명한 역설은 크레타인의 역설(Cretans’ Paradox)이다.
그리스 철학자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는 모든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에피메니데스는 크레타Creta 섬 사람이었다. 그럼 이 말이 성립하는가? 크레타 섬 사람인 에피메니데스가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라고 하였으니, 그 말 자체가 거짓말이 되어 그 말은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은 다음과 같은 추론에 따라 모순에 봉착한다.
1. 에피메니데스는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라고 주장했다.
2. 그의 주장이 맞다고 전제한다면,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이다.
3. 그런데 에피메니데스는 크레타인이다.
4. 고로 에피메니데스는 거짓말쟁이다.
5. 거짓말쟁이의 말은 거짓말이므로, 에피메니데스의 말은 거짓말이다.
6. 에피메니데스의 말이 거짓말이므로,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추론을 따라가다 보면 2번의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이다.’와 6번의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다.’는 말은 서로 반대되는 결과이다. 두 항목 모두 올바른 추론에 따라 나온 결과이나 서로 모순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역설이라고 하는데, 이보다 앞서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우불리데스Eubulides도 “한 남자가 자기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한 것은 참인가? 아니면 거짓인가?” 라는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이 모순의 해결은 훨씬 후대에 와서야 이루어진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이 집합 이론의 관점에서 이 모순을 정리하였다. 즉, 이 역설은 자신을 모든 집합의 원소에서 제외시키면 풀린다. 모순은 그 집합에 자신을 포함시키느냐 마느냐에 따른 문제였던 것이다. ‘나를 제외한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이다.’ 라고 하면 역설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왜 자기 자신은 제외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이 역설은 여전히 유효하다.
르네상스 시대를 살았던 회의주의자 몽테뉴Montaigne는 이러한 역설을 인지하고 그것을 피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한다. 그것은 아예 처음부터 말꼬투리가 잡히지 않도록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회의론자懷疑論者였던 몽테뉴는 “모든 것은 의심스럽다.” 라고 주장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면 그 ‘의심스럽다’는 그 발언 차체도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그래서 말을 바꾸어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라는 의문형으로 자신의 회의론을 주장하였다.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크세주(Que sais-je [kə sɛʒ], What do I know? 그는 당면한 현실 문제에 대해, 어떤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오로지 의심하고, 또 의심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독단을 피하기 위해 그는, 비판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대 인도에도 말꼬투리가 잡히지 않게 말하는 논법을 활용한, 또 하나의 회의론자가 있었다. 육사외도六師外道중 한 사람인 산자야 벨라티풋타Sanjaya Belatthiputta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사물의 본질本質이나 궁극적窮極的 실재實在(절대자, 무한자, 신)의 참모습은, 사람의 경험으로는 결코 인식認識하고 설명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을 폈다. 그는 사후의 존재나, 선악善惡의 과보果報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한 답변으로 일관하였다. (붓다는 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일예로 “저 세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고 있다.
대왕이여,
1) 만일 대왕이 ‘저 세상이 있소?’ 라고 내게 묻고, 내가 ‘저 세상은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저 세상은 있다.’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그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다르다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다 라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지 않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2) 만일 대왕이 ‘저 세상이 없소?’ 라고 내게 묻고, 내가 ‘저 세상은 없다.’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저 세상은 없다.’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그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다르다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다 라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지 않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3) 만일 대왕이 ‘저 세상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오?’ 라고 내게 묻고, 내가 ‘저 세상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저 세상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그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다르다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다 라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지 않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4) 만일 대왕 ‘저 세상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요?’ 라고 내게 묻고, 내가 ‘저 세상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저 세상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그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다르다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다 라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지 않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경우를 열거해 가며 ‘나는 이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그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다르다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다 라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지 않다고도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미꾸라지처럼 “미끈미끈”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교묘히 본질을 피해가고 있다.
이것은 인도에서는 낯설지 않는 화법으로,『우파니샤드Upanisad』의 진술 방식이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라는 뜻의 ‘네티 네티(neti neti)’다. 단적으로 “이것이다!”라는 긍정적 언어의 형태로는, 근원적 실재를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부정을 통해 긍정을 부각시키는 전형적인 방법으로, 우파니샤드 시대 최고 사상가였던 야즈나발키야Yājnavalkya는 그의 아트만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아뜨만은 순수한 예지(叡智, prajnaghana)이다. 그것은 안도 없고 바깥도 없다. 마치 소금 덩어리가 안도 바깥도 없이 완전히 같은 맛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아뜨만은 적극적인 개념으로서 서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단 무(無)는 아니다. 그것은 인식의 주체이다. 아뜨만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이러한 일체의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뜨만 그 자체는 이미 무엇에 의해서도 인식될 수 없다. 그것은 파악될 수도 없는 불가설인 것이다. 만약 억지로 언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다만 ‘아니다. 아니다(neti neti)’라고 부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中村元著『インド思想史』岩波書店, 1967) (히로사찌야 지음, 권영택 옮김,『인도불교 사상사 下』 p. 155.)
아트만은 인식의 대상일 뿐,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로지 부정을 통해서만 서술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최고의 존재는 경험할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으며,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부정의 부정을 거듭하며, “어떤? 있음!”을 나타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방법을 불교의 공空과 중도中道 사상에 적용한 사람이, 인도 제14대 조사이자 대승8종大乘八宗의 조사祖師인 용수龍樹1다. 바라문 출신으로 ‘네띠 네띠’에 익숙하던 그는, 비슷한 논법으로 대승불교의 교리를 체계화한다. 예컨대『중론中論』「관거래품觀去來品」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已去無有去 이미 가버린 것은 가고 있지 않다.
來去亦無去 아직 가지 않은 것 역시 가고 있지 않다.
離已去未去 이미 가버린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나서
去時亦無去 지금 가는 중인 것 역시 가고 있지 않다.
‘가버린 것은 가고 있지 않다. 가지 않은 것 역시 가고 있지 않다’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가는 중인 것 역시 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어지는 해설을 보자.
무엇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 움직임의 주체가 있어야 한다. ‘내가 걸어간다. 새가 날아간다.’고 할 때 나와 새는 움직임의 [주체]가 되고 걸어감과 날아감은 그 [작용]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나’와 ‘새’가 있고 ‘걸어감’과 ‘날아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내가 걸어갈 때나 새가 날아갈 때 나와 걸어감, 새와 날아감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한 덩어리의 현상이 보일 뿐인데 우리는 이를 주체와 작용, 주어와 술어로 분할하여 말로 표현한다. 이러한 사유의 분할을 불교 용어로 분별(分別)이라고 한다. 이러한 분별을 관거래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가는 자가 없다면 가는 작용은 성립하지 않는다.
가는 작용이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가는 자가 존재하겠는가?
若離於去者 去法不可得 以無去法고 何得有去者 MK. 2-7
세상만사는 함께 발생하는 한 쌍 이상의 개념들로 이루어져 있다. 홀로 만들어진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걸어감’은 분리되어 있지 않은 한 덩어리 현상인데, ‘나’와 ‘걸어감’을 분리하여 표현하였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설명이다. ‘감’이라는 움직임은 눈앞에 존재하는 하나의 현상이다. 그러나 ‘나’와 ‘걸어감’을 따로 보고, ‘나는’과 ‘간다.’로 분별해서 말하는 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썩 명쾌하게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가는 자와 가는 작용이 서로 연기 관계에 있다는 조망 아래서 용수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만일 가는 자가 간다면 두 가지의 감이 있는 꼴이 된다.
첫째는 가는 자의 감이고, 둘째는 가는 작용의 감이다.
若去者有去 卽有二種去 一謂去者去 二謂去法去 MK.2-10
가는 자가 간다는 결국 가는 작용이 두개인 중복 표현이 되고 만다. 이런 오류는 술어의 의미가 주어 속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범하게 되는 의미 중복의 오류이다.
‘나는 간다.’라고 할 때, ‘나’도 가고 ‘간다.’도 가는 것이라는 논리이다. ‘나’와 ‘걸어감’을 따로 보고, ‘나는’ ‘간다.’라고 걸어가는 나와 걸어감을 두 번 거론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는 자가 다시 가게 되어, 중복의 오류를 범했다는 설명이다. 앞서 우리는 무아를 ‘나는 없다.’라고 한다면, 없는 나를 또 없다고 한 것이 되어 성립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나는 간다.’고 할 때도 가는 나를 또 간다고 하였으니 잘못된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 중복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 가는 자를 가는 작용을 갖지 않는 가는 자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만일 가는 자가 간다고 주장한다면 오류에 빠진다.
가는 작용 없는 가는 자가 있으며, 그런 가는 자가 간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若謂去者去 是人卽有咎 離去有去者 設去者有去 MK.2-11
가는 작용을 갖지 않는 가는 자는 존재할 수가 없다. 가는 작용 없는 가는 자가 있다고 간주한 후 가는 자가 간다고 주장한다면 그런 주장은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 우리는 가는 자가 간다는 한 가지 판단을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첫째는 가는 작용을 갖는 가는 자가 간다고 이해하는 것이고 둘째는 가는 작용을 갖지 않는 가는 자가 간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전자는 술어의 의미가 주어에 내포되어 있기에 발생하는 논리적 오류이고, 후자는 술어의 의미를 주어에서 배제시킬 대 발생하는 논리적 오류이다. 전자의 경우는 의미 중복의 오류를 범하게 되고 후자의 경우는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중복을 피하기 위해 가는 사람을 ‘가는 작용을 갖지 않은 자’라고 정의한다면, 이제는 가는 작용을 갖지 않는 자가 가는 것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다른 말로 하면, 만약 ‘감’을, 곧 ‘가는 이’라고 한다면 행위자[가는 이]와 행위[감]가 일체가 되는 오류가 따르고, 또 만약 ‘가는 이’와 ‘감’이 다르다고 한다면 ‘감’ 없이 ‘가는 이’가 있게 된다는 논리이다. 즉, 가는 행위와 가는 사람이 같다는 것도, 그렇다고 다르다는 것도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론』총27장이 모두 이와 같이 다루는 논제는 달라도 주제는 거의 같은 방식인데, 모두가 공의 논리를 이용하여 갖가지 이론들의 허구성을 증명해 보이려고 시도하고 있다. 결국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는 중도를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간다.’라는 간단한 명제도 간단이 받아들이기 버겁다. 나아가서 나는, 우리는, 잘 가고, 잘 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가고 오는 것이 불편해진다. 여러분은 간다고 해도 안 되고, 가지 않는다고 해도 안 되며, 갔다고 해도 안 되고, 가지 않았다고 해도 안 되게 되었다. 왜 이리 복잡하게 되었는가? 그런 복잡한 논리를 말하는 용수의 의도는 또 무엇인가? 그 의도는 논서의 서두에 있는 ‘귀경게歸敬偈’에 잘 나타나 있다. 귀경게란 부처님을 기리는 노래라는 뜻이다.
不生亦不滅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
不常亦不斷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끊어지는 것도 아니다.
不一亦不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不來亦不出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
能設是因緣 연기의 진리를 가르쳐 주시어
善滅諸戱論 온갖 헛소리 망상을 없애버린
我稽首禮佛 부처님께 머리 조아려 예배드립니다.
諸設中第一 최고의 진리를 설파하신 스승이시어!
여기서 생멸生滅, 단상斷常, 일이一異, 거래去來 등 여덟 가지는 중생들이 가진 수많은 잘못된 견해들을 대표하는 단어들이다. 이 게송을 ‘팔불게八不偈’라 하는데, 이로부터 도출된 사상이 ‘팔부중도八不中道’2이다. 용수는 이 여덟 가지 견해를 부정함으로써, 그때까지 나온 외도들의 사견邪見과 불교 내의 유부有部 등의 유견有見을 잠재우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극단에 치우친 모든 견해들을 타파하기 위해서 일뿐 아니라, 용수 역시 진리의 모습은 우리 인간의 불완전한 언어로는 나타낼 수도, 정확하게 표현할 수도 없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불완전한 언어로는 진리를 전할 수 없다는 것을 논제들을 통해 반복해서 말하면서, 모든 사견들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절대적인 진리는 체득하는 것이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용수는 그의 언어로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중론》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말하자면 그 절망이다. 세밀한 곳까지 미쳐서 나가르주나는 인간언어의 - 따라서, 인간인식의- 한계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선종禪宗 3대 조사 승찬(僧璨, ?~606)이 지은 『신심명信心銘』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 유혐간택唯嫌揀擇이니, 단막증애但莫憎愛하면 통연명백洞然明白이라.’ 즉,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다. 오직 가려서 선택함을 꺼릴 뿐이다. 다만 미움과 사랑의 편견만 없다면, 막힘없이 뚫려 뚜렷하고 환할 것이다. 승찬 대사는 양변을 떠난 중도中道를 가르치고 있다.
『무문관』제25칙 삼좌설법三座說法에서 앙산仰山은 ‘대승大乘의 법은 사구四句를 여의고 백비百非를 끊습니다[摩訶衍法, 離四句絶百非].’라고 말한다. 이 말을 두고 조주가 남전에게 가서 묻는다.
조주가 남전에게 물었다.
“사구四句를 떠나고 백비百非를 끊은 경지를 가르쳐 주십시오.”
남전이 곧 방장실로 들어가 버리자 조주가 말했다.
“노화상이 평소에는 말을 잘 하다가도 일단 물어보면 한마디 말도 없단 말이야.”
시자가 말했다.
“화상께서 대답하지 않으셨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조주가 바로 주먹을 날렸다.
천하의 남전이라도 사구四句를 여의고 백비百非를 끊은 경지를 한 마디로 할 수 있었겠는가? 다만 그는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을 뿐이다. ‘나는 이렇게 방장으로 들어가네!’라고. 그러나 그것을 간파看破한 시자에게 조주가 주먹을 날린 이유는 무엇일까? 말 없음도 맞지 않다는 것일까? 물론 맞지 않다고 해도 맞지 않다. 진실은 알지도 못하면서 입버릇처럼 나오는 말들, 그런 타성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 주먹을 날린 것은 아닐까?
어이쿠!
3) 이제설二諦設과 중도中道
용수는 일단 인간의 언어로 어찌 해 볼 수 없는 부분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부분으로 나누어서,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인간의 언어로 나타낼 수 없는 진리를 “진제眞諦(제일의제第一義諦 혹은 승의제勝義諦)”라고 하고, 언어로 나타낼 수 있는 진리를 “속제俗諦(혹은 세속제世俗諦)”라고 하여 분리한 것이다. 이것이 소위 “이제설二諦設”이다.
나가르주나는 진제와 속제의 두 가지 진리를 세웠다. 그리고 진제 본연의 상태를 ‘공’이라 부르고 속제 본연의 상태를 ‘가(假)’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서 부처세계(‘열반의 세계’라 불러도 좋다.) 본연의 상태는 ‘공’이며, 우리들 범부의 세계(현상세계) 본연의 상태는 ‘가’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언어로써 ‘가’는 기술할 수 있으나, ‘공’은 기술할 수 없는 것이다. (히로사찌야 지음, 권영택 옮김,『인도불교 사상사 下』 p. 169.)
이제설은 세상만물의 존재 형태를 설명한 것으로, 속제는 현상 그대로 존재하는 것으로 눈에 보이는 세계를 말한다. 한편 진제는 그 존재하는 사물들이 어디까지나 연기하는 일시적인 존재라고 보고, 무자성無自性, 공空의 세계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 기술할 수 없는 진제는 ‘공空’의 상태인 ‘부처 세계’의 진리를 말하고, 기술할 수 있는 속제는 ‘가假’의 상태인 ‘범부 세계’의 진리를 말한다. 이를테면 출세간의 승의적인 진리를 진제, 세간의 일반적인 진리를 속제로 구분한 것이다. 그럼 진제와 속제의 관계는 어떤가?
나가르주나는 ‘공’의 세계(부처의 세계)와 ‘가’의 세계(범부의 세계)를 완전히 분리시켰다. 어쩌면 그것은 좋은 듯하지만, 그러나 이것을 분리한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불교’는 애초부터 범부가 불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불과 범부가 우선은 분리되었다 해도 그것을 다시 결합케 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그 결합이 없으면 ‘불교’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가르주나는 그 두 가지를 ‘중(中)’에 의해서 결합시켰던 것이다(그림 참조). 중이란 다시 말해서 ‘중도(中道)’이다. (히로사찌야 지음, 권영택 옮김,『인도불교 사상사 下』 p. 175.)
무언가 정리된 느낌이고 명확해진 느낌이기는 하다. 그러나 용수는 이런 명확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용수는 이제설을 논하면서, 이 둘의 도리를 파악하지 못하면 깊은 불법의 뜻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분리 분석을 통해 진리에 접근하여 한 것이다.
속제 범부의 세계 분별지分別智 ‘가假’ | 수행 ‘中’ → 중도中道 | 진제 부처의 세계 반야지般若智 ‘공空’ |
반면에 인연으로 생한 법이 곧 공空이고, 또한 가假이며, 또한 중도中道’라고 하며, 중도의 본 뜻을 간명하게 정의하기도 하였다. 통합을 통해 진리의 속성을 보이려고 한 것이다. 이들 삼제 또한 연기의 법칙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세 가지 진리인 이들 공空, 가假, 중中, 삼제三諦의 관계는 어떠한가?
「중론」에서는 제일의제는 세속제에 의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고, 또 이 이제(二諦)의 도리를 잘 파악하지 못하면 깊은 불법의 뜻을 알지 못한다고 설하여, 공이 결코 단순한 무(無)가 아님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는 이와 같이 공사상에 근거하여 그 당시의 잘못된 사상계를 비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불교의 근본진리인 중도를 천명하였습니다. 곧 ‘여러 인연으로 생한 법[衆因緣生法]이 곧 공(空)이며 또한 가명(假名)이며 또한 중도(中道)’라고 설하여 중도의 뜻을 간명하게 정의하였습니다.
(중략)
모든 인연으로 생기는 법을 나는 곧 무(無)라고 하고 또한 가명(假名)이라고 하며 중도 의 뜻 이라고 하느니라.
衆因緣生法을 我說卽是無요 亦爲是假名이요 亦是中道義니라.
(中論 ; 大正藏 30 p.33중)
‘모든 인연으로 생기는 법[衆因緣生法]’이란 일체제법이 연기하여 생함을 말합니다. 이 연기법은 그 본성이 무(無), 즉 공한데 아주 아무 것도 없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연기하고 있으므로 가(假)인 것입니다. 연기를 하면서 공하고 공하면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은 공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며[非空非假] 동시에 공이고 거짓[亦空亦假]이며 이것이 곧 중도입니다. 이 공(空) 가(假) 중(中)이라는 삼제(三諦)는 전부 원융해 있습니다. 즉 모든 연기의 내용은 공(空)이지만 가(假)와 중(中)이 모두 내포되어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退翁 性撤, 성철스님 법어집 1집1권『百日法門 上』 pp. 163~167.)
열심히 분리하더니, 결국 공空 = 가假 = 중中 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공’ 즉 ‘가’요, ‘가’ 즉 ‘중’이라! 번뇌 즉 보리요 생사 즉 열반이라! 무언가 스멀스멀 망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냥 여기서 멈추기로 하자. 현대 과학에서 말하는 불확정성의 원리3와도 같이 구체화하면 할수록 그르친다는 느낌이 든다. 하나가 명확해지면 다른 하나는 모호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의 모습이다.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구나[柳綠花紅]!
이산(利山) 화상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모든 색은 공(空)으로 돌아가거니와 공은 어디로 돌아갑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혀는 입 밖에 나오지 않느니라.”
스님이 물었다.
“어째서 그러합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안팎이 똑같기 때문이니라.”4
1. 용수(龍樹, 나가르주나Nāgārjuna (150? ~ 250?) : 나가르주나의 생애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문헌으로는 다음 세 가지가 있다. ① 쿠마라지바(344-413)가 지은 <용수보살전(龍樹菩薩傳)> ② 티베트의 부톤(1290-1364)이 저술한 <불교사>에 포함된 나가르주나 관련 기사 ③ 티베트의 타라나타(1575-1615)가 저술한 <불교사> 가운데 나가르주나에 관한 서술등이다. 고대의 인물에 대한 기록이 흔히 그러하듯이 나가르주나의 전기 역시 신화적으로 채색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②와 ③의 경우가 심해서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허구적 전설인지 가려내기가 어렵다. 비교적 그 정도가 덜한 쿠마라지바의 <용수보살전>을 중심으로 나머지 전기와의 공통부분 등을 참고해서 그의 생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나가르주나는 바라문 계급 출신으로 남인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기 때문에 바라문들이 베다를 낭송하는 소리를 듣고 바로 그 문장을 암송하고 뜻을 이해했다. 그는 다방면에 재능이 있었는데 천문, 지리, 예언 등 여러 가지 비술을 체득하고 있었다. 세상의 깊은 진리를 통달했다고 생각한 그는 친구들과 함께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고자 은신술을 익혔다. 그들은 방술을 이용해서 왕궁에 들어가 궁중의 미녀들을 모두 범했다. 몇 달 후 후궁가운데 임신한 사람이 생기자 왕은 범인을 잡을 것을 명령했다. 마침 지혜로운 신하가 있어 침입자들을 처단할 수 있었으나 나가르주나만은 용케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가르주나는 비로소 욕망이 고통의 근원이며 재앙의 뿌리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출가하였다. 그는 경, 율, 논, 삼장을 독송하고 는 또 다른 경전을 찾았으나 얻지 못했다. 히말라야에 들어가 한 늙은 수행자로부터 대승 경전을 전해 받고 즐겨 암송하고 그 뜻을 이해했으나 아직 완전히 통달하지는 못했다. 이후 나가르주나는 인도 전역을 편력하면서 경전을 구해보는 한편 외도의 논사들이 주장하는 교의를 논박하고 복종시켰다. 외도의 제자가 나가르주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승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一切智人]인데 지금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있습니다. 제자를 자처하는 것은 자신에게 부족한 점이 있음을 자인하는 것입니다. 만약 스승께서 부족한 것이 있다면 일체지인이 아닙니다.” 그 말은 들은 나가르주나는 굴욕감을 느끼고 교만한 마음을 냈다: “이 세상의 가르침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뛰어나기는 하지만 아직도 철저하지 못한 점이 있다. 그러한 것들을 바로 잡고 보완하여 바른 법을 널리 편다면 또한 옳은 일이 아니겠는가?” 이리하여 나가르주나는 가르침과 계율을 [다시] 세우고 의복과 의식을 독자적으로 만들어 기존의 불교 교단과 약간의 차이를 두었다. 그는 홀로 수정으로 된 방에 거처하면서 새로운 계율과 의례에 따라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대룡보살은 나가르주나가 아만심에 차 있는 것을 보고 측은히 여겨 그를 바다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 용궁의 칠보로 장식한 창고를 열어 대승의 경전들을 보여주었다. 나가르주나는 이것을 받아 석 달간 읽고 그 뜻을 두루 통하였고, 이윽고 여러 경전이 든 상자를 하나 얻어 본래 생멸이 없다는 무생의 법을 체득했다. 남인도로 돌아온 나가르주나는 외도를 복종시키고 크게 대승의 불법을 폈다. 여러 차례의 논쟁을 통해 많은 왕공과 장자, 브라만들을 불교에 귀의시켰다. 소승불교의 한 법사가 나가르주나에게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다. 나가르주나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내가 이 세상에 오래 머물기를 바랍니까?” 소승법사는 그의 장수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자 나가르주나는 조용한 방으로 들어가 며칠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제자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니 매미가 허물을 벗은 듯이 죽어 있었다. 나가르주나가 세상을 떠난 지 백 년이 지났는데 남인도의 여러 나라에서는 그를 위해 묘를 짓고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며 섬기고 있다. 그의 어머니가 아르주나라는 나무 아래에서 그를 낳았으므로 아르주나라고 하며, 용이 그의 도를 완성시켰으므로 나가[龍]라고 이름지었다. 이리하여 그의 이름이 나가르주나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저술로는 <중론(中論)>이 가장 유명하다. 그외 <대지도론(大智度論)>과 <십이문론(十二門論)>도 지었다고 하고 이 세 문헌을 함께 불러 “삼론(三論)”이라고 부르며, 중국에서 4-5세기에 유행했던 삼론종이라는 종파의 이름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대지도론>과 <십이문론>이 용수의 저술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다.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 팔부중도八不中道는 중관사상中觀思想을 정립시킨 용수의『중론中論』에 나타난 사상으로 생멸生滅, 단상斷常, 일이一異, 거래去來의 여덟 가지 극단에 치우친 미망을 타파하여 깨달음의 중도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이다. ① 不生不滅(불생불멸)=生은 인연이 화합하여 일어난 것이며, 滅은 인연이 다하여 사라지는 것이므로 생멸의 兩 극단을 부정하는 것이다. ② 不常不斷(불상부단)=현상계의 모든 것은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상주하지도 단멸하지도 않는다는 주장이다. ③ 不一不異(불일불이)=일체법을 진리의 본체에서 보면, 하나의 원리이므로 다른 현상에 집착하는 견해를 부정하는 것이다. ④ 不去不來(불거불래)=삼계육도(三界六道)의 윤회 속에 이 세상에 잠깐 왔는데 영원히 온 것처럼 고집하는 견해를 부정한다.
3. 불확정성 원리(不確定性原理, Uncertainty Principle)는 양자 역학에서 맞바꿈 관측량(Commuting Observables)이 아닌 두 개의 관측가능량(Observable)을 동시에 측정할 때, 둘 사이의 정확도에는 물리적 한계가 있다는 원리다. 불확정성 원리는 양자역학에 대한 추가적인 가정이 아니고 양자역학의 통계적 해석으로부터 얻어진 근본적인 결과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위치-운동량에 대한 불확정성 원리이며,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위치가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운동량의 퍼짐(또는 불확정도)은 커지게 되고 반대로 운동량이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위치의 불확정도는 커지게 된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즉, 위치와 운동량의 표준편차의 곱은 디랙 상수의 절반보다 같거나 크다. (위키백과).
4. 혜심 ․ 각운 지음, 김월운 옮김,『선문염송 · 염송설화 3』「300. 중색(衆色)」 pp. 295~296. [說話] “모든 색은 공으로 돌아가거니와[衆色歸空]……”라 함은, 마치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한 것과 같으니, 하나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인가, 하나가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인가? 하나가 돌아 갈 곳이 있다면 어디로 돌아가며, 하나가 돌아갈 곳이 없다면 왜 돌아갈 곳이 없는가 함이다. “혀가 입 밖에 나오지 않는다[舌頭不出口]”함은 말할 수 없다는 뜻이요, “안팎이 똑같다[內外一如]”함은 공과 색이 둘이 아니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