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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간화선 수행체계 개관
3. 간화선의 진화와 일본선
1) 한중일 삼국의 간화선
중국은 원元, 청대淸代에 이르러 이민족인 몽골, 여진족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 시기 선승들은 흩어지고 선종은 그 힘을 잃게 된다. 청대 한때 거사불교가 발흥하기도 하였지만, 선과 정토사상의 결합, 삼교일치 등 제종융합의 경향이 두드러져 그 특색이 희미해진다. 결국 송대 이후의 중국선은 더 이상의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다만 “선의 황금시대”를 ‘회상’하는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 “응답하라! 당·송이여!”
선종은 청대에 이르러 이미 그 통합의 사명을 완성하였고, 또한 이미 일화오엽一花五葉의 각종 특색을 잃어버렸으며, 오종五宗의 분화도 없게 되었다. 원元·명明 시기에 여전히 존재하던 임제와 조동의 법맥 또한 이름만 남게 되었을 뿐이다. (마 티엔샹 Tianxiang Ma 麻天祥, 중국 무한대학武漢大學,「청초淸初의 두 선승 올림통수와 위림도패」(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272.)
우리나라의 경우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 선사가 처음으로 대혜의 간화선을 소개하여 선풍을 일으켰고, 고려 말에는 ‘여말삼사麗末三師’로 일컬어지는 유학승 백운경한(白雲景閑, 1299~1374),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 그리고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 등 기라성 같은 선승들의 활약으로 간화선이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며 전성기를 이룬다.1
이들은 당시 정치적인 이유와 맞물려 공민왕의 비호를 받으며 흥성하였지만, 조선시대에 오면 다시 정치적인 이유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7세기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활약으로 잠시 부활하기도 하였지만,2 이후 불교는 이렇다 할 발전 없이 그저 명맥만을 유지하는데 급급하였다. 숨죽이고 있던 조선의 불교계는 일본에 의해 조선이 망하고 20세기에 들어서서야 경허성우(鏡虛惺牛, 1849~1912)라는 걸출한 선승이 나와 다시 부활한다. 이후 임제종 간화선 전통의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일본에 선禪이 전해진 것은 가마쿠라(겸창鎌倉) 막부시대로 유학파인 명암영서(明菴榮西, 1141~1215)3와 그의 제자인 원이변원(圓爾辨圓, 1202~1280)에 의해서이다. 순수한 선종의 시작을 영서의 제자이면서 조동종曹洞宗의 개조인 희현도원(希玄道元, 1200~1253)으로 보기도 하는데, 명암영서가 구불교의 비판을 두려워하여 밀교를 함께 익혔기 때문이다.
이어 심지각심(心地覺心, 1207~1298)이 일본의 여러 선승들에게 선을 배운 뒤 입송하여 임제종 양기파 치절도충癡絶道冲에게 입문 하였다. 이후 선지식을 두루 참알參謁하던 중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 선사를 만나 문답하다가 대오大悟하였다고 한다.4 이때 선문답은 무문혜개 본인의 저서이자 간화선 수행 텍스트인『무문관』화두들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각심은 귀국하면서 『무문관』을 가져와 처음 일본에 전한다.
이후 큰 정치적 격변 없이 선종의 맥은 계속 활발하게 이어져, 남포소명(南浦紹明, 1235~1308)은 송에 가서 임제종 양기파인 허당지우(虛堂智愚, 1185~1269)의 시자로 있다 법을 받아 귀국하였다. 그의 법은 대덕사大德寺를 개창한 대등국사大燈國師 종봉묘초(宗峰妙超, 1282~1337)에게, 그리고 또 묘심사妙心寺를 개창한 묘초의 제자 관산혜현(關山慧玄, 1277~1360) 등으로 이어진다. 이들 남포소명, 종봉묘초, 관산혜현 삼대를 응등관應燈關이라고 하여 임제종 대응파大應派라 불리는데, 이 법맥은 백은혜학(白隱慧鶴, 1685~1768)을 거쳐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백은은 에도(강호江戸)중기 약해진 임제종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간화선 공안 수행체계를 새롭게 정비하여 ‘근세 임제종 중흥조’로 불린다.
가마쿠라시대부터 도쿠가와 초기에 걸쳐, 일본의 유학승과 중국 승려에 의해, 송 ․ 원 ․ 명에서 일본에 전해져 온 선종은, 46명의 선종 승려들에 의해 전해져, 이 중 사법嗣法의 제자가 생겨, 법손法孫이 유파를 형성한 것이 23유파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24류, 46전’이라고 한다(도쿠가와 초기의 석반인자선술釋半人子選述『24류종원도기流宗源圖記』에 기초). 이 46전의 선종 가운데, 希玄道元(1200-1253), 東明慧日(1272-1340), 東陵永璵(?-1365)이라는 조동선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선승은 모두 임제선의 법맥을 잇는 사람들뿐이다. (니시무라 에신[서촌혜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看話禪의 전통과 변용」(普照思想 제25집(2006.02), 보조사상연구원).
대혜의 간화선이 500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하다는 백은에 의해 크게 부흥되었고, 기존의 간화선 수행체계가 다시 정립되었다는 것은 대부분 학자들이 동의한다. 그러나 송대 사원의 정예 수도승들이 어떻게 공안을 다루었는지, 그리고 그 전통이 어떻게 일본으로 전해지고 전승되어 내려왔는지, 그리고 또 현대 일본에서 행해지는 간화선 공안 수행법이 송대와 어떻게 다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大慧의 기법은 일본 승려 白隱 慧鶴(1686~1769)에 의해 도쿠가와 시대에 부흥되었는데, 白隱은 현대 일본 임제종 수도 교과과정의 창시자로서, 大慧와 유사하게 중국 문헌을 다룰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안 수행법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다. 현대의 공안 수행법은 지나치게 당시의 일본 임제종 수도 훈련법을 통하여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도 송대 사원의 정예 수도승들이 어떻게 공안을 다루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말해주고 있지 않다. (로버트 샤프 Robert Sharf,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선 공안,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How to Think with Chan Gongans」(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 98.)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선종의 교육체계가 총림叢林에서 조실이나 방장方丈 스님들에 의해 비밀리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독참獨叅” 등을 통해 1대1로 사자전승師資傳承하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당사자들 외에는 그 내막을 잘 알 수 없다. 비밀이 지켜져야 하는 교육 특성상 후학들을 위해 기록을 남길 수도 없기 때문에, 정황적으로만 추측해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당시 기록들을 살펴 어렴풋이나마 추측해 보거나, 입실을 통해 실재로 수행을 해 보면 그 진위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짐작해 볼 수는 있어도 교육과정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또는 스승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경전의 공부 이외에도, 상급 제자들은 上堂 의례와 入室 의례에서 주지의 의례 집행을 정기적으로 접함으로써 확연히 “선 다운” 수사적 양식을 자기 것으로 익혔다. 入室 의례의 행사 동안, 학생들은 스승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수사적 기술을 연마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공안 문학이 그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스승의 방에서 나누는 개인적인 공식적 대화는 공안 문학에 등장하였던 오래전의 유명한 스승과 제자간 대화의 재연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공안은 주지의 숙소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던 이심전심의 의례 집행을 위한 “대본”으로 작용하였다. 유명한 공안에 대한 공부를 통해 상급의 선 수행승은 스승과 “깨달음의 현답”을 하기 위해 필요한 수사적 도구들을 얻을 수 있었고, 그 자신이 상좌에 앉아 깨달은 조사의 역을 맡을 준비가 되었을 때, 공식적 설법이나 의례적 논쟁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로버트 샤프 Robert Sharf,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선 공안,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How to Think with Chan Gongans」(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p. 101~102.)
2) 일본 간화선의 진화
백은은 임제종 승려들이 더 이상 화두를 참구하지 않는 것을 애석해 하면서 교육과정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 조동종 승려들의 수행에 대해서도 따끔하게 일침을 가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백은이 당시 묵조선 수행자들을 비난하는 말들이 간화선의 창시자인 송대 대혜 선사가 묵조선 수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했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요즘 이들이 말하는 禪 수행처는 황폐하고, 본래 모습은 시들어 버리고, 각지 총림, 재방 禪匠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종종 化城에 비슷할 뿐의 열반 경지를 잡아서, 자기 本有의 불성이라고 이해해 버리고, …이것을 黙照邪禪, 죽은 무리라고 하는 것이다.…(저들은) 깨달음을 구해서 어떻게 된다고 하는가라고 하며,…오로지 잠만 자면서 망념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떻게 된 것인가?
(중략)
슬픈 일이다, 50여명 雲水(선객)들도 거의 모두가 요즘 유행하고 있는 不生禪의 黙照枯坐이며, 노인도 젊은이도 모두 두 때 공양 시간 외에는 다만 묵묵히 열을 지어 앉아서 모두 졸고 있고, 배의 노를 젓고 있는 것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서로 소리를 다하여 외쳐 말하기를 “아! 편안하다 아! 편안하다”라고. (나까지마 시로 Shiron Nakajima 中島志郞, 하나조노대花園大學,「일본 공안선 백은선의 원리와 구조」(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p. 76~77. (원래는 柳田聖山,『臨濟의 家風』 pp. 211~213에서 인용)
당시 백은이 본 일본의 수행자들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대혜는『서장』에서 화두 참구하는 방법과 수행법을 거론하면서 주로 묵조선의 이러한 모습을 비판하였다. 화두를 들지 않고 묵묵히 앉아만 있는 묵조에게 무명無明만 조장할 뿐인 안일무사의 무사선無事禪이라고 한다거나, 혹은 불 꺼진 죽은 재처럼 아무런 지혜 작용이 없는 고목사회선枯木死灰禪이라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백은 역시 대혜처럼 원색적으로 조롱하고 있어, 송대의 간화(선)과 묵조(선)의 대결을 다시 보는 느낌이다. 송대와 달라진 점은 명, 청대에 유행한 염불선念佛禪에 대한 비판이 추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명나라 말기, 운서주굉(1535~1615)이라는 선승이 있었지만 참선의 힘이 부족해서, 見道의 눈은 어둡고, 도를 나아가는 데에 寂滅의 樂을 얻지 못하고, 한발 물러서도 생사의 두려움을 껴안은 것 같은 것이었다. …禪門의 속된 것에 굽히지 않는 준엄한 참 수행을 버리고, 스스로는 蓮池대사라고 자칭하여『阿彌陀經』의 주석을 만들고 크게 염불선을 주창하여 제자들을 지도했다. 고산鼓山의 永覺元賢대사(1578~1657)는『淨慈要語』를 만들어 보좌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널리 중국 일본에서 念佛禪이 보급되니, 마침내 구제할 방법이 없게 되어 버렸다. (나까지마 시로 Shiron Nakajima 中島志郞, 하나조노대花園大學,「일본 공안선 백은선의 원리와 구조」(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78.) (柳田聖山,『臨濟의 家風』 p. 258에서 인용하였다고 함.)
대혜가 묵조사선의 폐해를 비판하였듯 백은 또한 묵조사선과 염불선을 격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대혜 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우리나라나 중국과는 달리 당시 일본은 선수행에 대해 활발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선수행조차도 얼마나 하고 있었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주춤하던 간화선이 일본에서는 활발히 진화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은은 간화선법의 전승 및 정비와 함께, <척수지성隻手之聲>이라는 화두를 새로 개발하는 등 간화선 수행체계의 완성에 주력하였다.
공안을 통한 임제종 수행체계는 유학승들에 의해 우리나라나 일본에 유입되었지만, 지리적으로 안전하고 정치적으로 큰 변화를 겪지 않았던 일본에서 더 잘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었다. 일본도 에도시대 한때 종교운동이 정치적 반란으로 이어질까 두려워 승려의 종교 활동을 극단적으로 제한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민족이 다스린 중국이나 억불숭유정책으로 몰락한 한국과는 차원이 다른 어쩌면 낭만적이기 조차 한 소란에 불과한 정도였다. 오늘날 일본 임제종 간화선이 건재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3) 일본선의 확립, 5문五門 공안수행체계
일본은 송대 간화선이 전파된 이후 나름의 길을 걸으며 이를 발전시켜 나간다. 엔니변엔[원이변원圓爾辯圓]은 선의 종지를 ‘이치理致’, ‘기관機關’, ‘향상向上’, ‘향하向下’로 구분하여 공안수행의 단계를 상정想定하였는데, 이는 다음 세대로 이어져 난뽀 조우묘우(남포소명南浦紹明, 1235~1308)는『대응국사어록大應國師語錄』에서, 다음 무소오 소세끼(몽창소석夢窓疎石, 1275~1351)는『몽중문답夢中問答』에서 ‘이치理致[體]’, ‘기관機關[用]’, ‘향상向上’ 등의 경계를 거론하고 있다. 공안수행에 있어 세 가지 단계를 설정設定하고 거기에 해당하는 공안들을 상정한 것으로 이를 “3문三門”이라고 하였다. 일본에서는 이 ‘3문’ 체계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공안집이 편찬되는 등 공안 참구가 널리 행해진다.
宋代禪에서 이러한 말의 근거를 찾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세 단계의 명확한 체계로서 이해된다는 것은 일본선의 독자적인 발전이었다. 앞의 大應국사 ‘三門의 체계’를 받고, 다음 大燈국사에게는『大燈百二十則』이라는 일본 독자의 公案集이 편집되었다. 그 후 京都 근세 임제종 각파 속에서 각종 공안집이 형성되었지만 에도시대가 되어서 그것들은『宗門葛藤集』에 집대성되어, 17세기 후반 元綠2년(1689)에 처음 간행되어 安政연간에 이르기까지 禪院의 공안 참구에 널리 이용되었다. (나까지마 시로 Shiron Nakajima 中島志郞, 하나조노대花園大學,「일본 공안선 백은선의 원리와 구조」(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81.)
3문 체계에 있어 ‘이치’는 도리道理, 법리法理의 의미로 절대의 화두인 조주의 <무>자 화두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기관’이란 기용機用, 즉 움직임의 의미로 응용의 화두를 말하고, ‘향상’은 이치와 기관을 넘어선 단계로 기관과 더불어 오후수행悟後修行으로 간주되었다. 이 세 단계는 백은에 이르러 언전言詮, 난투難透의 두 가지가 더해져 일본 임제종 “5문五門” 공안수행체계로 완성된다.
白隱의 공안체계는 大應의 三門(理致, 機關, 向上)에 대하여, 二門(言詮, 難透)를 가중하여 法身, 機關, 言詮, 難透, 向上의 ‘五門’체계를 열었다고 한다. 이 위에 더욱이 최후 결전으로서 ‘末後의 뇌관牢關’을 배치한 수행도 있다. 공안체계는 중국선종의 5가7종을 이었던 임제종 看話禪을 일본적으로 수행했던 결과, 에도시대에 이르러서 白隱에 있어서 집대성되었다. (나까지마 시로 Shiron Nakajima 中島志郞, 하나조노대花園大學,「일본 공안선 백은선의 원리와 구조」(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81.)
화원대학花園大學 나까지마 시로[중도지랑中島志郞] 교수는 ‘법신法身’, ‘기관機關’, ‘언전言詮’, ‘난투難透’, ‘향상向上’의 5문 수행체계는 입실참선入室參禪의 극치라고 천명하고 있다. 공개할 수 없는 요소도 많고, 체계도 비밀스러운 부분이 많다고 하면서도, 각 항목에 대한 특징들을 정리하였다. (중국식 용어에 익숙한 우리에게 한자로 된 일본식 용어는 다소 생소한 감이 있지만 그 용어의 함의含意는 이해가 가능하여 그대로 사용하였다. 선도회 수련과정과 비교 알기 쉽게 정리하였다.)
첫째, ‘법신法身(3문에서의 이치)’이란 진여眞如, 불성佛性을 의미한다. 보리달마의 확연무성廓然無聖이니 육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임제의 무위진인無位眞人 등도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단계는 견성見性의 단계로 수행자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지견知見들에서 벗어나는데 그 목적을 둔다. 대표적인 화두로는,『무문관無門關』「제01칙 조주구자趙州狗子」와「제23칙 불사선악不思善惡」「제37칙 정전백수庭前柏樹」등이 이에 속한다. 선도회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화두들(이하 ‘시작하는 화두들’)”의 <무>, <서행답단유수성徐行踏斷流水聲>, <인종교상과人從橋上過 교류수불류橋流水不流>, <남산절정척수南山絶頂隻手> 등도 여기에 속한다고 하겠다.
둘째로 ‘기관機關’이란 기용機用, 작용作用의 뜻으로 ‘법신’에서 한 발 나아간 단계이다. 이론에 의지하지 않는 “방할棒喝” 등 조사들의 자재한 활동들이 거론될 수 있는데, 수행자를 가르치기 위한 지도자의 교묘한 수단이나 책략을 가리킨다. ‘법신’의 경계가 ‘평등관平等關’에 머물러 있어 소극적일 수 있기 때문에, 거기서 나와 일상의 “차별상差別相”으로 다시 돌아가는 단계이다.
‘기관’은 만법萬法과 원만하게 어울리는 오후수행의 단계로 “정념결정正念決定”인 ‘법신’에 이은 “정념상속正念相續”의 첫 단계로, 공안의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무문관』「제07칙 趙州洗鉢」「第47則 兜率三關」「권말의 황룡삼관黃龍三關」등이 여기에 속한다. 백은의 <척수지성隻手之聲>도 여기에 속하며, 나아가서는 선도회 ‘시작하는 화두들’ 중에는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 <날아가는 비행기를 멈춤[停飛! 飛行機]> <공수파서두空手把鋤頭> 등이 이에 속한다고 하겠다.
셋째, ‘언전言詮’이란 언구言句로서 종요宗要, 즉 종지宗旨의 긴요한 뜻, 또는 가르침의 요지를 표현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과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의 공안들이 대표적으로,『무문관』「제07칙 조주세발趙州洗鉢」「제21칙 운문시궐雲門屎橛」「제17칙 국사삼환國師三喚」「제41칙 달마안심達磨安心」등이 여기에 속한다고 하고 있다. 선도회 ‘시작하는 화두들’ 중에는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인데[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家得 未來心不可得] 어느 心에 떡을 먹겠는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은 모두 이 경에서 나옴[阿縟多羅三貘三提法 皆從此經出]>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 등을 들 수 있겠다.
넷째 ‘난투難透’란 문자 그대로 투과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난해難解의 화두들을 투과하여 경계를 심화시키기 위한 과정이다. 난투의 화두들은 평등과 차별을 넘어 깨달음과 일상이 하나로 되는 ‘일여一如’의 경계를 체득하기 위한 관문으로 보면 되겠다. 백은 선사는 ‘팔난투八難透’라고 해서 ‘8가지 뚫기 힘든 화두들’을 꼽았다.
문의 열쇠가 없다면 禪宗은 끊어진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모두 透過하자. 문의 열쇠가 없다면 禪이 아니다... 문의 열쇠를 열고 나오는데 잠깐이면 된다. 疎山壽塔, 牛過窓櫺, 乾峰三種, 犀牛의 扇子, 白雲未在, 南泉遷化, 倩女離魂, 婆子燒庵이다. 이것을 ‘法窟의 關鎖’라고 이름 붙이고, 또한 ‘奪命의 神符’라고도 한다. 이 하나하나 透過 후에 넓게 內典外典을 찾고, 무량한 法材를 모으고 三根機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禪文化本12) (나까지마 시로 Shiron Nakajima 中島志郞, 하나조노대花園大學,「일본 공안선 백은선의 원리와 구조」(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85.)
‘8난투’에 속하는 대표적인 공안으로는『무문관』「제35칙 천녀이혼倩女離魂」과「제38칙 우과창령牛過窓櫺」등이 있고, 선도회 ‘시작하는 화두들’ 중에는 <종관사출비금적縱觀寫出飛禽跡> <회주우끽화懷州牛喫禾 익주마복창益州馬腹脹> <김공끽주이공취金公喫酒李公醉> <천길 속의 돌 자갈을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 끄집어내는 솜씨!> <만산萬山에 눈이 가득 쌓였는데 한 봉우리孤峰만 왜 검은고[雪覆千山 為甚麼孤峯不白]!> <지렁이를 두 토막으로 잘랐는데 어느 것이 진짜인고[蚯蚓兩斷 那箇是眞底]!>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다섯째 ‘향상向上’은 수준이 이전보다 더 나아지거나 높아진 것을 의미한다. '철저히 깨달아서 언어절言語絶, 의로불급意路不及의 무일물無一物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해 가는 단계'이다. 공안으로는『갈등집』「182. 백장재참百丈再參」에 나오는 <불자수기拂子堅起>’나『무문관』「제13칙 덕산탁발德山托鉢」에 나오는 ‘덕산의 말후구末後句’등을 들 수 있다.
‘향상’ 이후의 수행으로는 ‘말후末後의 뇌관牢關’, ‘최후最後의 일결一訣’이라고 불리는 공부 단계를 배치하고 있는데, 이들에 대한 공안은 정해진 것은 없지만, 수행에 있어 만전을 기하기 위해 묻는 “활구공안活句公安” 등이 이에 해당된다고 하고 있다. 금수산 영하산방에서 새로이 체계화한 ‘시작하는 화두들’의 재독과정과 숭산 노사의『온 세상은 한 송이 꽃』의 질문들을 기반으로 한『무문관』재독 과정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한편 백은은 견성을 목적으로 한 수행과 견성후의 수행을 구분하였다. 견성에 다다르는 지름길로 ‘법신法身’의 공안들을 배치하고[정념결정正念決定], 다음 ‘기관機關’, ‘언전言詮’, ‘난투難透’, ‘향상向上’ 등의 공안들을 배치하여 오후수행으로 삼았다[정념상속正念相續]. 이는 초심初心의 수행자들이 쉽게 수행에 돌입할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수행에 전념하도록 하기 위한 설계다. 수행과정을 따라가면 선적禪的인 인격 완성을 이루도록 체계화한 것이다. 물론 이는 애초 간화선이 만들어질 때부터 의도되었던 바이지만, 투과하는 화두 전체를 체계화하여 확실하게 드러내 보이므로 써 초심자로 하여금 접근하기 쉽도록 한 것이라고 하겠다.
곧, 스승인 정수노인正受老人의 교시敎示(정념결정正念決定과 정념상속正念相續)를 이어서, 견성見性을 목적으로 했던 수도修道와 견성후見性後의 수도修道라는 명확한 방침이 자각되었다. ‘五門’ 體系로 말한다면 생사를 뛰어넘은 悟境에 다다르는 가장 지름길로서 ‘法身’의 공안들이 있고, ‘機關’ 이하를 ‘오후수행悟後修行’으로써 크게 둘로 나누었지만, 공안체계를 따라서 수행하는 것이며 선적禪的 인격이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나까지마 시로 Shiron Nakajima 中島志郞, 하나조노대花園大學,「일본 공안선 백은선의 원리와 구조」(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81.)
크게 보면 견성을 위한 ‘법신’의 화두와 비교하여 오후수행인 ‘기관’ 이후 화두는 ‘체體’와 ‘용用’의 관계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체와 용의 관계인 “지관止觀”이나 “정혜定慧”와도 비유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지止’수행을 닦아야만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쉴 수 있고[止是禪定之勝因], ‘관觀’ 수행을 하면 지혜가 이를 바탕으로 해서 일어난다[觀是智慧之由籍]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함께 닦는다는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이분법의 논리에 맞추어, 실재 수행에 있어서도 투과하는 화두들을 둘로 구분하였던 것이다. 본래면목을 깨달음과 동시에 지혜를 갖춘다고 하는 매뉴얼에 따른 것이다. 물론 모든 화두가 두 종류로 명확하게 구분되지는 않을 것이다.
백은의 5문 체계를 선도회 수행체계와 비교하거나『무문관』공안 배치 순서에 비추어 보면, 이들 ‘법신’과 ‘기관’ 이후의 화두들을 교대로 배치하여 체와 용을 번갈아 가며 수행하도록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수행체계에서는 법신을 앞에 두고 나머지를 뒤에 나열하여 선후先後를 구별하였지만, 실재 수행에 있어서는 원래 있던『무문관』순서에 따라 교대로 배치하므로 써 자연스레 반복적인 수행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반복을 통하여 경계를 심화시키는 구조인 것이다.
금수산 영하산방에서는 초심자가 쉽게 의정疑情을 일으키게 하기위해 “시작하는 화두들”의 첫 번째 화두인 <무>자 대신 <척수지성>을 참구하게 하는데, 과정이 반복되므로 결과적으로는 어느 것을 처음 하던 별반 차이가 없게 되는 것이다. 대혜종고 선사는 “열여덟 번의 큰 깨달음과 무수히 많은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大悟十八回, 小梧不知其數]”고 하였다. 그만큼 깨달음이란 단번에 몰록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반복 공부하고 되풀이하는 학습선의 성격이 짙다는 것이다.
'무자‘로 뼈를 우선 세워 놓고, 다음에 서서히 살을 붙여보는 수밖에 없다. 두고두고 살을 붙여 놓기만 하면 결국은 완숙하게 되어 드디어 부처나 조사 스님들과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無門 慧開 原著, 宗達 李喜益 提唱,『무문관無門關』 pp. 39~40.)
백은은 면밀한 수행체계를 확립하여 일본 임제종의 중흥조로 불리고 있다.5 백은 문하는 이후 선종 교단의 확고한 조직과 체제를 구축하였고, 일본 근세 임제종의 주류를 형성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간화선 수행체계를 보존 정립해가면서 나름의 진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사자전승師資傳承의 심법은 종주국 중국이나 우리나라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일본에는 계속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일본 불교계는 활력을 잃지 않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면서 그 종지를 지켜 지금까지 맥을 잇고 있었던 것이다.6
남송 시대의 간화선은 일본의 토양에서 발전을 멈추지 않고 체계화 되는 과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졌고, 그 심법은 일제 강점기 일본 유학을 다녀오신 후 일본 임제종 화산 노사 문하로 출가하신 종달 노사님을 통해 선도회에도 오롯이 전수 된 것이다.
참고로 서울 능인선원원장 지광(서울대 이정섭) 스님은 백은의 수행체계와 라이트 Dale S. Wright의 화두 분류를 참고하여『무문관』화두들을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비교적 후대에 이루어진 공안집『무문관』을 분석, 화두들의 유형을 단도직입형, 제법실상형, 격외도리형, 그리고 진퇴양난형으로 구분하였다.
화두는 직접적으로 진리를 묻는 단도직입형이 있고, 마음의 분별심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군더더기 없이 불성을 직접 가리키는 제법실상형이 있으며, 화두가 드러내는 불성은 세속제의 차원이 아니라 진제의 영역임을 보여주기 위해 언어와 논리를 파괴하는 격외도리형이 있다. 마지막으로 사량 분별심을 끊어 무심을 돈발하게 하는 진퇴양난형이 있다. 수행자는 근기와 재량에 따라 적절한 화두가 어떤 것인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정섭, 서울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간화선수행론 연구-화두참구의 원리와 방법론을 중심으로」 p. 183.)
이 분류법은 간화선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화두를 투과하는 경계를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고,『무문관』본칙의 내용을 참고하여 분류한 것으로 보인다. 화두를 참구하고 투과하는 깨달음의 도구로 보지 않고, 기존의 학술적인 이론에 기초하여 분석과 이해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또, 이 논문에서는 깨달음의 과정을 동정일여-몽중일여-숙면일여의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거나, 화두를 단순히 산란심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였다거나, 또는 수행자는 자기에게 맞는 화두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한 것 등을 보면 백은의 구분법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한 마디로 현재 조계종 스님들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겠다.
1. 백운경한은 1351년 54세의 나이에 원나라로 가서 지공指空과 석옥청공(石屋淸珙, 1272~1352)의 가르침을 받았고, 나옹혜근은 승과에는 합격하지 못하고 1347년 원나라에 가서 지공과 여러 간화선사로부터 인가를 받고 돌아온다. 태고보우는 1352년 원나라에 유학하여 石屋淸珙의 인가를 받고 원 황실의 귀의를 받는 등 간화선사로 명성이 높았다. (최연식, 목포대,「고려말 간화선 전통의 확립과정에 대한 검토」(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146~147.)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 선사는 1,700 공안을 스스로 공부하고, 호주 하무산霞霧山 石屋淸珙 화상에게 가서 보름 간 머물렀다고 하는데 그 기간 동안 보우선사가 공부한 내용을 점검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색이 지은 비문에 의하면 스님은 일찍이 1천 7백 공안을 참구하다가 ‘암두밀계처巖頭密啓處’에서 막혀 나아가지 못하였다. 한참 묵묵히 있다가 갑자기 깨닫고는 냉소를 머금고 한마디 하였다. “암두스님이 활을 잘 쏘기는 하나 이슬에 옷 젖는 줄은 몰랐다.” (선림고경총서 『태고록』))
2. 중종이 승하하자 보우대사는 문정왕후에게 불교중흥책의 하나로 승과僧科를 부활해야 한다고 주청을 올린다. 문정왕후는 명종 3년(1548년) 보우대사를 지금의 서울 강남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수진대사를 봉선사 주지로 취임케 하고, 명종 7년, 선교禪敎양종의 승려를 선발하는 승과를 실시하였다. 훗날 임진왜란의 구국성사들인 서산대사는 1回 합격(명종 7年, 1552)하였고, 사명대사는 4回 합격(명종 16년, 1561)하였다. 조선시대 유명한 선사로 서산대사와 사명당을 드는데, 이들이 나온 시기와 승과의 부활이 맞물린다. 문정왕후의 죽음과 더불어 승과가 폐지되므로 서 더 이상의 선사는 나오지 않았다.
3. 명암영서(明菴榮西, 1141~1215)는 일본 불교 임제종 건인사파의 개조이다. 14세 때 삭발하고 비예산에 들어가 유벤[유변有弁]으로부터 천태학을 배웠다. 1168년 일본 불교의 현상에 의심을 품고 중국 송나라로 건너가 천태산, 아육왕산阿育王山을 순례한 뒤 돌아왔다. 1188년에는 인도의 석가모니 유적을 순례하기 위해 다시 송나라에 갔으나 국교 문제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천태산 만년사萬年寺의 허암회창虛庵懷敞에게 임제종 황룡파의 선禪을 전해 받고 인가를 얻었다. 4년 동안 송나라에서 공부한 뒤 1191년 귀국하여 잠깐 규슈[구주九州] 지방에 머물다가 교토에 진출하여 도겐[도원道元]과 함께 선종禪宗을 열고 신도들의 귀화를 받았다. 그러나 선종을 달가워하지 않는 비예산 승려 등 기존 교단의 저항에 부딪혀 간토[관동關東] 지방으로 옮겨 1209년 호조사[법승사法乘寺] 9층탑을 재건하고, 1215년 수복사壽福寺를 창건하는 등 활발한 선교 활동을 하다가 75세로 수복사에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흥선호국론興禪護國論』『출가대강出家大綱』『일본불법중흥원문』『일대경론총석一代經論總釋』『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등이 있다. (불교경전총론)
4. 한보광韓普光,『일본선日本禪의 역사歷史』 pp. 91~92.
5. 백은의 제자인 용택사龍澤寺 동령원자(東嶺圓慈, 1721~1792)는『종문무진등론宗門無盡燈論』에서 백은의 오문체계를 종유宗由, 신조信條, 현경現境, 실증實證, 투관透關, 향상向上, 력용力用, 사승師承, 장양長養, 유통流通의 ‘십문十門’ 체계로 한 층 더 세밀화 하였다.
6. 일본의 보존력은 여러 면에서 탁월하다.『대덕사의 선』,『잇큐 선사 연구』등 일본 예술의 미학연구로 유명한, 존 카터 코벨 여사는『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이라는 책을 썼다. 그녀는 일본미술사를 전공하고 일본 문화를 연구하다 그 본류를 따라 한국 미술사를 연구하게 된 학자이다. 그 책에서 그녀는 일본이 자랑하는 미술품이 알고 보니 한국 것이었고, 일본은 한국 예술품을 보관하는 ‘박물관’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아니었으면 대부분의 한국 불교 문화재는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사라졌을 것이며, 잦은 전쟁 등으로 소실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 통도사에서 전시가 이루어진 세계에서 가장 큰 고려 불화 ‘경신사수월관음’도 일본이 아니었으면 지금 다시 볼 수 있었을까? 많은 불교 탱화들이 그렇게 저렇게 사라져 우리나라에는 많이 남아있지 않는데, 그것은 낡은 후불탱화를 새 것으로 교체하면 낡은 것은 태우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가 우리 문화재를 빌려서나마 볼 수 있게 된 데는, 일본이 때로는 구걸하고 훔치고 하여 애지중지 간직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불교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은 일본으로 건너가고, 우리 불교는 명맥을 잇는데 급급했을 뿐 화석화 되고 만다. 우리나라는 교와 선 모두에서 불교 후진국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고려 시대 불교는 종교일 뿐만 아니라 문화였다. 그 문화까지도 사라진 것이다. 코벨은 또 다도와 렌가 하이쿠를 통해, 일본 불교의 선 예술을 꽃피운 선승 일휴종순(一休宗純, 잇큐, 1394~1481)선사가 고려에서 일본으로 보내진 한국인 궁녀의 아들이라는 것과 일본 100대 일왕 고코마쓰의 맏아들로 태어난 그가 정치적인 이유로 절에 보내져 선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9년 연구 끝에 밝혀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