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와 바다
―시간의 저편 너머에 묻힌 h에게
김동원
내 마음속엔 언제나 해당화 꽃처럼 붉게 멈춰 버린
처녀의 무덤이 산답니다
저 바닷가 물밑에 가라앉아
진주가 돼버린 처녀랍니다
처녀는 곱고 수줍고 아름다운 머릿결이 물풀 같았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운명처럼 만나
아침마다 해가 뜨기 전 금빛 물결이 일렁이는
바닷물 위 걸어서
해를 만지러 가곤 했습니다
해는 출렁이는 우리의 운명 같아
잡힐 듯 잡힐 듯 손길에서 멀어졌습니다
나는 언제나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그렇게 처녀는 그 겨울 바다 속 生이 잠기고
영원히 바닥에 잠겨서 물풀에 가려졌습니다
그 후 난, 문득문득 깊은 밤 혼자 잠에서 깨어나 웁니다
그토록 그리운 처녀는, 내 바다 위 어디에도 없고
백사장 흰 모래알 속에나 등대 불빛 밑으로
찾고 또 찾아 헤맸지만,
잃어버린 바닷길은 그대로 천 길 물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따금 처녀는 그 처녀는, 저 먼 시간의 저편 너머 수평선에서
붉은 해를 타고 올라와,
그 새벽 깨어나 우는 내 서러운 등을 두 손길로 따뜻이 어루만져 줍니다
국화꽃밭 문 옆엔 가을비가 울고 있었어요
김동원
국화꽃밭 문 옆엔 가을비가 울고 있었어요
빗물이 하늘을 물고 내려와
꽃밭에 흘러내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 저녁 앞발을 괸 채 죽어있던 어미 고양이
새끼는 빗속에 젖어 날 쳐다보고 있었는데,
국화 꽃밭 속엔 어미가 어둠 속 웅크리고 죽어 있었어요
보름달
―시선 이백의「월하독작月下獨酌」에 답하여
김동원
여자 엉덩이만한 둥근 보름달이 떴다
내 오늘, 법이산 위에서 그 엉덩이 밟고 올라
쑤-욱 구름장 위로 고개를 내밀면,
껄껄껄 시선 이백이
하늘 위에서 손을 뻗는다
이렇게 우리는 초저녁 북극성에 걸터앉아
술상이 나오기 전
한 수 시를 짓고,
지구로 떨어지는 별똥을 바라보며
눈앞에 귀찮게 아른거리는 우주선 파리채로 후리고,
참 고운 몸매의 샛별이
웃는 듯 床(상)을 받쳐들고 나오면, 안주론
별자리 황소를 굽고
술은 북두칠성 국자로 알콜 성단에서 뜨고,
어린것들은 조랑말자리 별에 태워
성도를 한바퀴 천천히
돌게 한다
그렇게 한밤중 거나하게 취하면,
우리 둘은 어깨를 끼고
은하수 강가에 배를 띄우는데,
이백은, 뱃머리서 월하독작을 읊고
난, 취흥에 겨워, 저 이쁜 달 엉덩이를 힘껏
'철썩' 때린다
그러면, "으응" 하고 잠 덜 깬
웬 여자 볼멘소리가
방 한구석에 자늑자늑하다
시검詩劍
김동원
천하를 갖고 싶으냐!
쉬지 말고 광활한 초원에 말을 달려라
칼을 쳐들고 불의 행간을 뚫어라
아무도 흔적을 남길 수 없구나
바람만 칼끝을 보고 있다
눈을 파내어라, 귀를 묻으라
직유는 결코 혼자 죽지 않는다
귀신도 모르게 은유를 쳐내는구나
불이 내렸도다!
시시각각 말은 휘황찬란하구나
말이 말을 닫으니 일어나는 말이 없구나
달려도 달려도 이미 와 있는 말
검劍을 찾을 자者 영원히 없을 지니,
무無를 베라, 천지사방 색色을 베라
무덤은 산 자들의 퇴고가 아니냐
정녕, 천하를 갖고 싶으냐,
번개처럼 단칼에 놈의 목을 베라!
황진이
김동원
진이,
그대는 가야금 침향무를 뜯게
나는 그대의
치마폭 위에 분홍 진달래꽃을 치겠네
노을로 번진 눈물을 치겠네
흔들리는 그 바람의 무늬를 치겠네
중모리 중중모리 휘모리로
피어 노는
저 비슬산 꽃의 한 生 다 떨어지기 전,
진이,
그대는 침향무를 뜯게
나는 엉망진창 술에 취해
대견봉 그 둥근 달빛에 붓을 적셔
그대 치마폭 위에
분홍, 분홍, 분홍, 분홍, 그렇게 번지겠네
첫댓글 새벽에 새벽같은 깨달음을 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