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황;
2005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종교인구 조사에 따르면, 광주시는 전국적으로 개신교 강세 지역에 포함 되고, 그 중 전남에 이어, 6위에 올라 있다. 그러나 2011년의 전국의 각 지역별 종교인 비율 조사에서는 종교인 비율이 48.1%로, 전남에 이은, 전국 최하위로 나타났다. 전국적으로는 충청 지역을 제외한 서부 지역이 개신교 강세 지역이고 충청 지역과 제주 지역을 포함하는 동부 지역이 불교 강세 지역으로 나타난다. 카토릭은 제주 지역에서만 2위였고 모든 지역에서 3위에 머물러 있다.
2005년 현재 광주 지역 각 종교인 숫자와 시 인구 대비 비율
| 개신교 | 불교 | 카토릭 | 원불교 | 유교 | 천도교 | 증산교 | 대종교 | 기타 |
신자수 | 278,884 | 203,429 | 183,787 | 4,954 | 2,859 | 1,316 | 990 | 87 | 3,568 |
% 수 | 19.7 | 14.4 | 13.0 | 3.5 | 1.7 | 0.8 | 0.6 | | |
|
이러한 조사는 광주시 지역의 무종교인 비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지역이 농촌 사회에 가깝고 상대적으로 산업화가 덜된 지역임에도 개신교가 강세인 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의 서부 지역으로 카토릭이 먼저 들어왔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충청 지역은 특별한 곳으로 간주될 수 있다. 호남과 충청 지역이 비슷하게 산업화에서 낙후된 지역임에도, 각 종교의 강세 지역 현상은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각 교파들의 역사와 교리;
개신교;
개신교는 내부적으로 교파들이 가장 다양하고 서로 간에 이단 논쟁도 첨예하여 이곳에서 간명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또한 그들이 이 지역으로 유입되어 들어왔던 역사도 좀 더 조사해야 할 부분이다. 아마도, 일제 시기 무렵부터 빠른 속도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입 시기를 고려한다면 급성장의 배경에 대한 분석도 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일제 시기부터 해방 이후 동안에 YMCA나 YWCA가 한국의 근대화와 민주화에 상당한 몫을 담당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일제 시기와 해방 이후까지 활동하다 1966년 광주 시민장(市民葬)으로 장례를 치렀던 오방(五放) 최흥종 목사가 교파를 초월하여 활동하면서 교육과 의료 사업을 통해 빈민구제 활동을 전개했다.
불교;
불교도 내부에 다양한 종파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이 지역으로의 유입 역사는 영광의 불갑사와 해남의 미황사 등이 중국의 남방 지역으로부터 유입되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 부분도 좀 더 조사되어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호남 지역의 불교는 일제 시기 만공(滿空) 선사의 역할이 지대했지만 현대에 와서는 서옹(西翁) 전 종정의 비중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서옹의 비중 때문에 교종의 몫이 이 지역에서 커졌다고 볼 수 있다. 일제 시기 동안에 일본 불교의 유입도 광주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한국인 중의 신자 비율은 현재 확인이 되고 있지 않다. 부산 지역의 동산(東山) 전 종정과 같은 수도와 생활을 동일시했던 유파가 이 지역에서도 없지 않았겠지만 주류가 되지는 못했다. 아마도, 전북 부안의 월명암과 실상사 그리고 정읍의 내장사에서 주로 활동했던 학명(鶴鳴) 선사가 동산과 유사한 유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광주 지역의 사찰이나 사찰지에는 각종 문화재들이 일부 남아 있다. 남구 구동의 서 오층 석탑(보물 제 109호), 동구 지산동의 동 오층 석탑(보물 제 110호), 증심사의 철조 비로사나불 좌상(보물 제 131호), 약사암의 석조 여래 좌상(보물 제 600호), 동구 지산동 자운사의 목조 아미탐불 좌상(보물 제 1507호), 임곡 지구 신룡동의 오층 석탑(광주시 유형 문화재 제 12호) 등이다. 이들 중 신룡동의 것은 개인들의 축산단지 바로 옆에 위치하여 있고, 동 오층 석탑은 신라 하대의 탑으로 과거 백천사의 터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최근까지는 지산동 성당이 위치해 있다가 현재는 바로 옆에 연화사가 개창되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현재의 유동 지역에 일제 시기까지는 “십신사지(什信寺址)”에 석불과 석비가 남아 있었다. 이 지역의 ‘유림(柳林)숲’이 1990년대에 주택단지 등으로 개발되면서 석불과 석탑은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앞으로 이전 전시되어 있다. 현 불로동 1번지에 189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사찰 “동 본원사(東本願寺)”가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이 사찰의 활동 내용은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현재 예술의 거리 원불교 광주 교당이 자리한 곳 부근에 영원사(永源寺)가 있었다고 기록이 있지만 이것 역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카토릭;
조선 후기 무렵에 카토릭이 충남과 황해 지역의 해안 지역으로 유입되기 시작했지만, 일제 시기를 거치면서, 카토릭의 교구 조직에서 광주 지역은 1937년 대구대목구 관할 지역 하의 광주지목구와 전주지목구로 신설되어 편성 되었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인 1957년 광주대목구로 승격되었다가, 1962년 한국의 모든 대목구가 교구로 승격될 때 광주 지역도 함께 교구로 승격 되었다. 그것들 중 서울, 대구, 광주는 ‘관구선도 교구’로 지정되어 광주시도 ‘관구장좌 대교구’로 승격 지정 되었다. 1971년 광주대교구에 제주지목구가 신설 되었다가 1977년 제주도가 제주교구로 일차 분리 되었다. 즉, 현재 한국의 카토릭은 서울, 대구, 광주 대교구를 중심으로 하는 3개의 관구로 편성되어 있다. 광주관구 하에는 광주교구, 전주교구, 제주교구가 포함 되어 있으며, 현재 김희중(하지노) 대주교가 관구장을 맏고 있다.
호남 지역에 카토릭이 유입되는 과정은, 조선 후기에 선교사들이 이 지역에 직접 들어왔던 경우는 없었지만, 학교와 병원 등의 선교 활동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일제 시기 동안에 수피아여고를 시작으로 살레시오중고등학교와 여자 중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축물인 옛 사택 건물이 현 수피아여고 뒤쪽에 부속 건물로 남아 있다. 이 지역의 카토릭은 근대화 과정에서 뿐 아니라 민주화 과정에서도 지대한 몫을 수행해 왔다. 금남로의 기독교회관과 남동성당 등이 카토릭의 활동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8-90년대 나주 지역에서 ‘피 흘리는 성모상’ 사건의 경우와 그 현상의 증언자로 부각된 노부인의 주장에 일부 신부들이 동조했을 때, 광주대교구에서 최종적으로 이단 판정을 내렸다. 동시에 그 현상에 동조했던 신부들도 참회하지 않으면 이단으로 단죄될 것이라고 선고했었다.
원불교;
일제의 초기 무렵에 전남 영광에서 시작했지만 얼마 뒤 전북 부안 지역으로 일차 이전했고 일제 말 무렵 총부를 현재 익산시 지역으로 옮겼다. 광주시 지역에는 이미 일제 초.중기 무렵부터 활동이 있었다. 1950년대에 광주교구의 교구교당을 현재의 궁동 예술의 거리에 세웠다. 전국 신자 비율 1%를 약간 상회하는 수준에서 광주시의 신자 비율이 3.5%에 가깝다는 것이 원불교 교단 내에서 광주시가 갖는 비중과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카토릭처럼 단일 조직이다.
부안 지역에서 학명선사와 만나기 이전에, 교조인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득도 후 금강경 등을 본 후, “불교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처음 시작했다. 이 교파는 불교 혁신 운동과 관계있지만 학명 선사와의 만남이 득도 이후라는 사실 그리고 학명선사에 의해 추천된 승려로의 입적이 내장사의 승려 집단에 의해 거부 되었다는 사실 등이 불교와 분리된 다른 교단으로 출발하게 될 수밖에 없게 했을 것이다. 현재는 불교 쪽에서 불교 내의 한 분파로 수용하려 끌어들이고자 하지만 오히려 원불교 쪽에서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실사구시와 합리주의를 추구하고 증산교류의 기사이적을 억제하고자했던 교조 대종사와 경북 출신의 2대 종법사 그리고 전북 진안 출신의 3대 종법사의 만남은, ‘인연’을 찾는, 약간은 신화적 색채가 있지만, 교단의 운영 전반에서는 불교의 생활화와 합리화를 추구하고 있다. 아마도, 느슨한 공동체 운동과 종교 교단의 운영 과정에, 신자의 기부금이나 헌금 등을 포함하는, 현대적 회계 장부를 가장 먼저 도입한 종교 교단일 것이다.
유교;
현재는 남구 구동에 소재한 ‘광주시 향교재단’(허가 일자; 1987. 7.10.)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학술적이거나 의례적인 행사들을 유치하고 관장하고 있다. 등록된 사람들 거의 모두가 노인들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천도교;
우리에게 ‘동학’으로 많이 알려진 최초의 토착 신흥종교이다. 2대 교령 최시형의 처형과 동학농민운동의 실패 등으로 침체 되었지만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증산교;
전북 김제의 강증산에 의해 시작된 도교 색채의 토착 신흥 종교이다. 주로 호남 지역의 농민들에게 많이 포교 되었지만, 일제 때부터 몇몇 교파로 분리되기 시작하여 약화 되었다.
대종교;
일제시기에 전남 나주 출신의 나철이 개창한 ‘단군교’로 알려져 있다.
기타;
이슬람;
1986년 11월 전북 전주시에 이슬람 성원이 개원되었지만, 광주 지역에는 아직 성원이 없다.
성덕교;
광주시 궁동에 본당이 있다. 아직 이 지역에만 제한된 종교로 보인다.
각 사원들;
개신교; 동명교회, 양림교회(제일교회), 중앙교회 등
불교; 증심사, 원효사, 약사암 등
카토릭; 남동성당과 북동성당, 지산동성당 등,
원불교; 궁동 교구교당 등
각 교파들의 사회적 활동;
각 교단들의 사회 활동은 일차적으로 선교 사업과 연계된다. 교육사업 활동은 카토릭이 최초이면서도 가장 활발하다. 살레시오와 수피아 등의 학교 재단들 외에 카토릭신학대학 간호대학 등이 있다. 개신교 계통의 학교가 일부 있지만, 교육 과정에 체플 등을 지나치게 강요하면서 선교 목적을 강조하여 사회적 잡음을 낳고 있다. 정부의 인가를 받은 학교재단 형태의 활동은, 광주시 지역에서는, 그 외의 종교 재단의 것은 현재 없는 것으로 보인다. 2004년부터 법제화되었던 ‘지역아동센터’는 광주시 내에, 2012년 1월의 조사에 따르면, 현재 273개소 중 245개인 90.1%가 이 무렵에 설립되었다. 광주시의 경우는 단체보다 개인 명의로 된 경우가 압도적이고 따라서 그 운영이 영세하지만 운영과 실태 등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들 중 약 2/3가 개신교의 성직자들에 의해 개인 명의로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카토릭의 경우는 단체 명의인 것으로 인정된다. 외에, 결혼 이주 여성을 위해 한글과 문화 등을 가르치는 기관들이 있지만, 현황은 지역 아동 센터와 유사할 것이다. 1949년에 의제 허백련 화백과 함께 최흥종 목사가 농업 전문가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삼애학원을 설립했었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의료선교 사업도 비교적 활발해 보인다. 개신교의 경우, 고종의 말기에 미국인 선교사 알렌에 의해 1885년 2월 혜민원(惠民院)의 광주 지원이 광혜원(廣惠院)으로 재탄생 되었고 이듬 해 3월에 제중원(濟衆院)으로 개칭된 뒤 일제시기 동안에도 광주에서 운영되었던 병원 터가 현 양림동 지역에 남아 있다. 일제 시기 동안에 최흥종 목사가 자신의 땅 천 평을 기증하여 현 봉선동에 나환자진료소를 개설했고 해방 후 한센인촌을 창설했었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의료 선교 및 사업 부분은 특히 카토릭이 활발하여 현재 카토릭병원, 성모병원 등등이 있으며, 원불교는 풍암동에 원광한방병원이 있다.
종교 방송국은 개신교의 광주평화방송국이 동구 금남로 3가에, 불교의 불교광주방송국이 북구 임동에, 카토릭의 기독교광주방송국이 서구 금호동에, 원불교가 서구 쌍촌동에 광주원음방송국으로 개국 활동 중이다. 외에, 광주 시민들에게 사회적이거나 문화적인 참여의 공간을 주로 제공하고 있는 카토릭센터, YMCA, YWCA, 원각사, 무각사 등이 있다.
다른 지역도 대체로 그러하지만, 광주시의 경우 특히 민주화 과정과 종교가 관계가 깊다. 5.18 민주화운동과 관계된 곳으로는 남동성당, YMCA, 카토릭회관 등이 유명하다. 현재 광주시의 자살률이 전국 8대 도시 중 4위이기에, 시가 5대 종단과 함께 “생명존중 생명사랑 공동 실천”을 위한 예방 대책을 마련하고 공동체 의식을 확대하려는 운동을 진행 중이다. 별도로, 전남 영광 지역의 반핵 운동 단체와 함께 원불교가 반핵.반원전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이단 혹은 사이비 교파들;
이단에 관계된 문제는 현재 거의 개신교에 집중 되어 있다. 통일교, 신천지, 침례교 내의 구원파 등의 교파들이 광주시 지역에서도 상당한 신자를 확보하고 활동 중이다. 과거 카토릭의 ‘피 흘리는 성모상 사건’은 현재 완전히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카토릭과 원불교는 단일 교단 조직이어서 이러한 문제에 상대적으로 간명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이비 종교 집단의 문제는 현재 부각되어 있는 집단이 없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이곳에서 간단히 언급할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닐 것이다. 흔히 거론되는 ‘사회나 가정을 파괴하는 교파들’이라는 기준을 따른다면, 개신교 내의 일부 교파나 증산교 내의 일부 집단이 거론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