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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미마을 |
09 : 15 |
북문(점심) |
12 : 01 |
마애여래좌상 |
09 : 26 |
노적봉(562m) |
12 : 37 |
254봉 |
09 : 50 |
북문 |
13 : 18 |
수리봉(412m) |
10 : 11 |
서문 |
13 : 40 |
성터 |
11 : 19 |
병풍바위 |
13 : 45 |
조망바위 |
11 : 31 |
수인사 |
14 : 19 |
수인산성 남문 |
11 : 52 |
상림마을 |
14 : 40 |
<마음의 평화>
마음의 평화는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건 내 삶을 사랑하고,
나와 함께 그것을 공유했던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다.
- 셰퍼드 코미나스의《치유의 글쓰기》중에서 -
<장흥댐 탐진호 모습>
<장흥 가는 길>
집을 나서며 산으로 향하는 발길은 언제나 가볍다. 이젠 마약처럼 다가오는 매주 산행이 몸에 익숙하다.
새벽 천기를 보면 그날 하루 산행의 노정과 조망을 어림해 보고, 오고 가는 버스 길의 지루함을 달래줄 즐거운 마음 같기가 생활화 된다.
만나면 반가운 식구들이 대전 시내를 순회하며 하나 둘 버스에 오른다. 미소와 악수로 만남을 기뻐하는 것이 귀연 산꾼들과의 오붓한 감정으로 되살아나는 것이 가족 같은 푸근함을 준다.
호남고속도로와 광주, 나주를 거치는 국도는 하루를 시작하는 해뜸의 광경을 보며 달리는 차창과의 만남이다. 들녘에서는 새파란 봄의 근질거림이 느껴지고 분주히 움직이는 농부의 모습에서 질박한 농촌의 살아 숨 쉬는 정경을 본다.
오래전 장흥을 찾았을 때 한참 공사 중이던 장흥 댐은 말끔히 완공되어 물을 채우고 있고, 주변 경관은 숲이 우거져 아름다움을 더한다.
오지처럼 느껴졌던 그날의 장흥을 다시 찾는 마음이 산을 향한 중독 같은 시선으로 주변 산들을 응시한다.
부산면 자미마을에 산꾼들이 하차하니 드넓은 논에서는 푸른 보리밭 향내음이 가득하다. 옥녀봉과 수리봉 그리고 길 건너에 제암산이 우뚝하다.
수미사로 드는 마을 입구는 봄 내음과 매화 그리고 동백꽃이 반기는데 대나무 숲 사이로 난 산길이 숲의 안정감을 주며 산꾼을 반긴다.
<자미마을 입구에서 바라본 수리봉>
<마을 입구에서 단체 사진>
<자미마을 입구의 마을 안내석>
<자미마을에서 보이는 성불 들판과 제암산>
<수리봉 근경>
<수미사와 수리봉>
<장흥 구룡리 마애여래좌상>
<병풍바위 지나 수리봉과 산성을 만나다>
수미사를 지나 병풍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을 만난다. 바위 전면에 새겨진 마애불은 오랜 풍파에 모습이 희미하지만 자비로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높이 20M의 병풍바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불상은 윤곽이 불분명하지만 머리 부분이 혹처럼 튀어 나오고, 콧등이 유난히 튀어 나왔으며, 손의 모양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형상인데 석가모니가 고행 끝에 악마의 방해를 물리치고 도를 이루는 순간을 나타내는 모습으로 석가모니만 취하는 손 모양이라 한다.
이 마애불은 고려시대 송광사 16 국사 중 원각국사 충지의 상으로 전해지며, 고려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마애불을 지나 병풍바위에 오르니 주변 조망이 무척 시원하다. 일렬로 늘어선 바위들이 아름다움을 뽐내는데 그 기기묘묘한 형상이 주변 산들 중 압권이다.
특히 마애불이 있는 봉우리와 장흥 벌판 그리고 억불산의 구도가 안성마춤이다. 바둑판처럼 짜여진 벌판과 산들의 조화는 이른 아침 산정에서만 즐길 수 있는 산꾼들의 청량제이다.
서쪽으로 수리봉이 아름다운 형체를 뽐낸다. 비록 412m의 낮은 산이지만 바닷가 근처에서는 제법 늠름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병풍바위>
<제암산과 사자산>
<병풍바위>
<수리봉과 능선>
<억불산과 장흥 들판>
<장흥 들녁>
<수인산 능선과 수리봉>
<수인산으로 향하는 능선>
<장흥댐 탐진호 모습>
<독수리 모양을 닮은 봉우리>
<내동 방축마을>
<수인산성의 동문 정경>
<유치면 대리쪽 계곡>
<수인산 능선 모습>
<수인산성 축성 모습>
봉우리마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진 수인산 능선들은 동서남북으로 둥그런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북쪽으로 동문과 형체도 확실한 산성의 모습이 다가온다.
산정에도 예전 성터가 확실하고, 산줄기 따라 산에 있는 바위들로 쌓은 성들이 모습을 보여준다. 능선을 따라 쌓은 수인산성은 계속 서쪽으로 이어져 남문과 서문으로 연결되고, 북문에 닿아 노적봉 수인산에 다다른다.
수인산 정상에서 동문을 따라 계속된 성곽은 산을 빙 돌아 서문 병풍바위 요새에 그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
서문을 가기 전 남문 갈림길에서 북문으로 향하다 보면 완벽한 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높이 약 3m의 수인산성은 지형지물을 잘 이용했는데 고려말에서 조선에 이르는 500년 세월 왜구의 침범에 대항하며, 관찰사가 머물 정도로 규모가 큰 성이다.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했다는 수인산성은 언제 처음 쌓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377년(고려 우왕 3년)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병영성을 옮겨오기 7년 전인 1410년(조선 태종 10년)에 고쳐 쌓은 전라도 남해안 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1410년 당시 전라도 5개 산성들은 모두가 다음과 같은 필수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첫째, 둘레가 1,000보가 넘을 만큼 커야 한다는 점.
둘째, 산세가 높고 험해야 한다는 점.
셋째, 수량이 넉넉해야 한다는 점.
넷째, 몇 개의 고을 주민들이 한꺼번에 피난할 수 있을 만큼 입보(立保)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점인데 수인산성은 이러한 입지 조건을 완비한 성이었음이 다음 기록들에서도 확인된다.
수인산 석성은 둘레 1,396보로서 안에 샘이 여섯인데 겨울과 여름에도 마르지 않는다. (세종실록지리지)
병영으로부터 성의 남문에 이르기까지 매우 좁은 길이 빙 돌아서 문 밖의 지세가 핍박하여 두 사람이 함께 설 수 없으며, 북문은 더욱 험절(險絶)하고 동문은 적을 막을 수 있는 곳으로 문 밖에 수덕(修德)한 산세가 절벽으로 되어 있다. 서·남·북 3면은 천험(天險)하다. 동문은 옛 성 밖에 별도로 빙 둘러 개천을 만들어 쌓았다.(대동지지)
고려 말 도강, 탐진, 보성, 장흥, 영암의 백성들이 이곳에서 왜구의 침입을 피하였다.(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성의 규모는 둘레 3,756척, 높이 9척, 많은 부속 건물과 동·서·남·북문 및 초소, 우물 6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성터의 흔적과 성곽의 일부, 수구지(水口址) 2개소, 회랑도(廻廊道), 북문지 안에 2개의 연못만이 남아 있을 뿐 모두 훼손된 상태다. 또한 노적봉에는 봉화대가 설치되어 장흥 억불산 봉화대 등으로부터 왜구의 동태를 병영성에 중계했다고 하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성벽은 능선을 따라 자연 조건을 최대한 활용해 쌓아져 있다. 따라서 높은 능선 위에 쌓은 성벽 높이는 1m 내외로서 비교적 낮은 편이나 동·남·북문 부근의 낮은 지대는 4m 높이로 쌓아 올렸으며, 동문지가 위치한 계곡 입구만 방어하면 자연성벽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그 일대의 성벽은 1m 크기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정교하게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총 연장 길이는 약 6km에 달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수인산성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돌로 쌓았다. 둘레가 3,756척이고 높이가 9척이다. 고려말에 도강, 탐진, 보성, 장흥, 영암의 백성들이 모두 이곳에서 왜구의 침입을 피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수인산성의 ‘인(仁)’은 본래 ‘인(因)’이었다고 하지만 왜 바뀌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노적봉 근경>
<산성1>
<산성2>
<아기 곰 둘리를 닮은 바위>
<산성3>
<남문 근처 이정표>
<남문 근처의 축성 모습>
<수인산 능선 모습>
<수인산 북문 근처의 억새 지대>
<북문 근처의 이정표>
<군동평야 모습>
<수인산 정상의 돌탑>
<수인산 정상 표지석-지도에는 높이가 562m로 되어 있는데 여긴 561m이다>
<노적봉 정상에서 본 주변 조망은 최다>
수인산 노적봉 정상에 오르면 수인산성 모두를 볼 수 있으며 주변 조망을 시원하게 즐길 수 있다.
우선 북쪽으로 국사봉과 가자산이 보이고 서쪽으로 월출산과 가학산이 우뚝하다. 동쪽으로 제암산과 사자산이 지척이고 그 옆으로 억불산과 화방산이 장흥벌판과 함께 아름답다.
멀리 두륜산과 완도 상황봉이 보이며 천관산도 시야에 확실하다. 탐진호 두 개가 산록에 잠겨 푸른 모습으로 다가오고, 월출산과 맞닿은 평야지대 작천면과 성전면 뜨락이 멋지다.
특히 월출산을 정면에서 보는 장관은 이곳 산정이 최고로 친다고 한다. 기암으로 이루어진 월출산 정경을 드넓은 평야지대를 지나 수인산에서 보는 감개무량함은 이루 표현할 수 없다.
지나온 산줄기의 흐름도 장관이다. 옥녀봉에서 수리봉 그리고 산성을 따라 줄을 긋듯 선명한 성곽은 이곳이 너무도 역사적으로 힘들었던 곳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또한 노적봉은 병사들을 지휘하기 좋은 망루처럼 위치하며, 산 위에 또 하나의 산으로 마치 거대한 왕관 모습으로 자리한다. 하지만 노적봉은 벼 낱가리를 쌓아 놓은 것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북쪽으로 둥그렇게 능선을 따라 북문에 이르고 이내 능선을 따라 산을 넘으면 서문에 이른다.
<정상에서 바라본 지나온 능선>
<탐진호>
<월출산>
<수인산 능선>
<북문 넘는 능선>
<장흥 들판과 억불산>
<제암산 근경>
<독수리를 닮은 병품 바위 정상 모습>
<북문>
<홈골제와 군동평야>
<서문 부근의 우물>
<서문 근처 병풍바위는 마치 요새와 같이 존재했다>
서문 근처에는 이 산성의 크기에 걸 맞는 큰 우물이 있다. 전시에 많은 병사들이 먹을 수 있는 식수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수인산성이 요새와 같았음을 알 수 있다.
흐르는 물을 이용하여 곡식을 갈았을 맷돌과 절구통 그리고 아궁이가 있는 움막터가 보존되어 있다.
간간이 큰 나무도 보이지만 수인산에는 식생이 매우 작고 갈참나무 활엽수가 많은데 6.25전쟁으로 온산의 소나무가 불탔다고 한다. 침엽수림이 불타버린 산록은 가늘고 번식력이 빠른 활엽수와 소사나무 군락이 자리 잡았다.
서문을 지나 조금 내려서면 온전한 산성과 공터 그리고 바위벽에 새겨진 많은 글씨를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 관찰사들의 호와 이름이 음각되어 있는데 그 단서는 병영마을 읍성의 존재에서 기인한다.
병영면은 예전 관찰사가 묵었던 읍성이 있는데 그 때 근무했던 관리들이 비석을 세우고 이곳 수인산 북문 근처 병풍바위에 자신들의 이름을 남긴 것이다.
수인산 서문 근처와 북문 근처는 병사들이 묵을 수 있는 장소가 많다. 왜구의 침범으로 병영읍성을 버리고 이곳 산성으로 부대를 옮겼을 당시를 회상하니 늘 외침에 시달린 국운을 생각해 본다.
병풍바위를 지나 수인사에 가다보면 헬기장을 만난다. 헬기장에서 보이는 병풍바위와 남근석이 파란 하늘과 비교되어 아름다움을 뽐낸다.
홈골 절터와 홈골 561미터의 노적봉과 북문이 왼쪽에 위치하고 남근석과 병풍바위 그리고 남문이 우측에 자리하여 철옹성을 이룬다.
산은 비단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만으로 시선을 끄는 것은 아니다. 걸을 때 마주치는 곳곳마다 살아 꿈틀대는 역사의 현장들이 가슴을 뜨겁게 한다. 수인산성은 그런 아픈 역사의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성터를 밟거나 성 내에 들어서면 그러한 흔적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되는데 멀리는 고려 때부터 가까이는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유물과 유적, 혹은 지형적인 특징으로 남아 후세들의 눈길을 받는다.
많이 망가지고 허물어졌지만 축성이 그 당시를 말해주고, 곡식을 빻기 위해 만든 돌확과 우물터, 방죽터, 비밀통로인 수구(水口)와 봉수지가 그런 과거를 말해준다. 이는 왜적을 막거나 피하기 위해, 혹은 난리 통에 들어왔던 민초들이 생존을 위해 도구로 삼았던 흔적들인 것이다.
산정의 수인산성은 수직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고려말부터 조선말까지는 병영성의 전략적 요충지로 왜구가 침입할 때면 장흥, 강진, 영암, 보성 주민들이 피난하여 왜구를 막을 목적으로 축성했다는 산성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둘레가 3,756척, 높이 9척, 많은 건물과 동, 서, 남, 북문과 우물 6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어 동으로 장흥 억불산, 서로 영암 갈두봉, 남으로 마량 남원포와 통하였다고 한다.
자신의 생활 근거지와 고향을 등지고 전란을 겪었던 관리와 백성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수인산성 곳곳의 정취는 단지 산을 찾아 나선 산꾼의 어눌한 감정이 아닌 역사적 현장을 마주한 기록의 현장들을 보는 듯하다.
허물어진 성벽과 깨지고 무너진 성곽들이 잘 보존되고 또한 복원되어 후손들에게 지나간 역사의 증거물로 되살아나기를 기대해 본다.
수인사를 지나 홈골제에 다다르니 수인산 노적봉과 병풍바위 그리고 남근석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게 카메라 앵글에 잡힌다.
서쪽으로 보이는 월출산의 안정된 모습도 수인산과 마주보며 시야에 가득하다.
<맷돌>
<아궁이가 있는 병영>
<절구통>
<서문쪽 성곽>
<병풍바위>
<병풍바위 절벽에 새겨진 절도사 이름 음각 글씨>
<온전하게 정비된 수인산성>
<월출산과 병풍바위>
<월출산과 홈골제>
<남근석과 병풍바위>
수인사(修仁寺)는 조금은 절 같지 않은 건물로 홈골제 상류에 있는데 조계종 22교구 중 하나인 대흥사의 말사(末寺)인데, 그 창건 및 연혁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전하여지는 바가 없다. 그러나 1500년대 이전에 창건되었으며 오래 전부터 병영의 유서 깊은 사찰로서 그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원래는 조선시대 병마절도사가 청련암이라는 암자를 세운 것이 시초라고 전하며, 이후 100여명의 불자들이 거주할 만큼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수인산이 농민군의 피신처로 변하였고,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다시 이 지방 의병장 심남일 장군의 활동 무대가 되자 1908년 일본군의 수인산 초토화 작전 때 법당을 포함한 암자들이 모두 불타버렸다.
그리고 1950년 6·25동란 때는 후퇴하는 인민군의 은닉처를 주지 않기 위해 국군이 방화하여 암자가 다시 불에 탔으며, 1946년에 건립한 법당을 1970년에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홈골제에서 본 병풍바위>
<홈골제에서 본 월출산 모습>
<병풍바위와 홈골제>
<상림마을 표석>
<수인산 안내판>
<병영읍성>
<병영읍성 개축 현장에 서며>
산행을 마치고 상림마을 근처에서 뒤풀이를 하며 푸근한 농촌 풍경에 잠긴다. 잠시 짬을 내어 버스로 읍성을 카메라에 담는다.
병영읍성은 말 그대로 예전 관찰사가 묵었던 읍성에서 유래한다. 낙안읍성이나 해미읍성처럼 쌓은 성곽인데 많이 허물어지고 윤곽마저 불투명하다. 성안에는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그리고 성벽과 치가 우뚝하다.
성벽 개축공사가 한창인데 보도에 의하면 상당히 많은 예산을 들여 문화재로 다시 등장할 듯하다. 또한 이곳은 하멜이 표류하여 생활하던 곳으로 전시관 공사가 한창이다.
성안에는 활궁장이 있고, 네모진 읍성은 그 크기가 해미읍성 정도이다. 병영면 일대와 군동평야는 평화시기에는 황금물결로 출렁대는 곡창지대이다. 하지만 이곳 곡창지대가 전쟁의 상흔으로 얼룩져 주민과 병사들의 고통이 함께 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병영’은 병마절도사영의 준말이며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군사도시였다. 전라 병영성은 조선조 500여 년간 전라도 육군의 총 지휘부였던 곳이며, 1417년(태종 17) 본래 광산현(광주 송정리)에 설치되어 있던 병마절도사영이 옮겨왔다. 병영성은 초대 병마절도사인 마천목 장군 때 축조됐다고 한다. 꿈속에 계시를 받아서 ‘눈의 자국을 따라 축조하였다’고 하여 ‘설성’이라고도 한다. 병영에 설성식당이나 설성슈퍼 등이 있다.
<병영읍성 내부1>
<병영읍성 내부 2>
낙안읍성과는 달리 성곽 안에는 백성이 아닌 군사들이 머물렀다. 성곽 안의 건물이나 유적은 모두 없어졌으나 성곽은 뚜렷이 남아 있다. 성곽은 대부분 공사장 방벽으로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병영성은 또한 동학농민혁명과도 관련이 깊다. 병영성 건물과 유적은 동학농민혁명 때 소실됐다. 농민군과 최후의 격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전라병영은 거의 잿더미로 변했고, 이듬해인 1895년에는 일제의 영향을 받은 군제개편에 따라 폐영됐다.
이곳 병영 주민들의 고충이 컸으리라는 것은 짐작 가능하다. 병영을 유지하기 위한 각종 세금이 강진의 민초들에게서 나왔을 것이고 병영 수축과 같은 노역에도 동원됐을 것이다. 군졸의 고충 또한 마찬가지였다고 기록은 전한다.
마을 가운데쯤 자리한 커다란 은행나무가 마을의 대표적 표상으로 마을 어느 쪽에서 보아도 보일 만큼 은행나무는 크고 오래된 듯하다. 800살 정도 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는 돌담보다 성벽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태어나 그간의 시간을 지켜봤을 것이다.
낯선 땅에서 억류돼 노역에 시달리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던 하멜 일행에게 그늘이 돼 주기도 했을 것이고 동학농민군의 치열한 전투와 병영성의 함락을 지켜보기도 했을 것이다.
나무 근처 고인돌은 이곳 병영에 자리 잡은 인간의 역사가 훨씬 더 오래됐음을 증언한다.
“옛날에는 사람이 많았어.
병영은 논이 귀해서 장사로 유명하제.
병영 사람이 안 가믄 장사가 잘 안된다고 했어.
병영장에서 강진장과 장흥장으로 여기 저기 다녔어.”
일찍부터 병영이 있어 외지인들의 왕래가 잦았던 병영.
그래서 상업이 발달했던 병영은 그 이후로도 상업으로 이름을 떨쳤다. 오랫동안 군사주둔지 마을 주민으로 살아온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 상업의 발달로 이어졌을 것이다.
돌담을 높이 쌓아 군관들로부터 사생활을 지키려 했던 병영 사람들의 기질이었을까. 6·25 당시에는 온 마을에 대나무 울타리를 쳐서 마을 주민들이 돌아가며 보초를 서기도 했다고 한다.
<보수된 병영읍성>
병영면에서 만난 나물 파는 노파를 보며 역사의 흐름과 질곡을 본다. 하멜이 표류하여 낯선 이방인으로 살던 곳, 그리고 전쟁과 농사 그리고 백성과 군인의 신분으로 살아야했던 당시 주민들의 애환을 느껴본다.
평화시기에는 수인산 자락 여기 저기 사찰과 암자가 있어 주민들의 신앙심을 다져 주기도 했으나 일제 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역사성을 무시하여 산성이 장흥군과 나뉘고 성곽 상당 부분이 장흥군 유치면에 위치함도 알 수 있었다.
새롭게 개축되고 보수되며 하멜 기념관을 짓고 수인산성을 관광 상품화하여 인파가 몰리는 부흥의 병영면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남녘에 묻혀 있던 수인산성과 병영읍성을 찾아 역사의 현장과 시간의 흐름을 이어본 산행이 감사하다.
주변 조망과 뛰어난 산경 그리고 수인산성과 함께한 하루가 즐거웠다.
<수인산성과 병영읍성을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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