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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지기님 - 나의 이력서 ( 2004년 ) -
이 홍 자
참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나 봅니다. 제가 태어 난 곳은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면 중화동 360번지 , 윗마을 아랫마을이 빙 둘러 싸인 움푹 들어간 골짜기로 봄이면 진분홍 참꽃들이 만발해 붉게 산을 물 드린다고 하여 화갑(花甲)으로 통용 되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는 꽃마을 동네 입니다.
아랫마을 약 열두 세가구중 멀리 마을입구에 들어서면 감나무가 제일 크고 높은 집, 가을이면 제 주먹 반 만 한 감이 주렁주렁 달려 사람 키와 장대가 닿지 않는 곳은 떨어 지지 않은 홍시(연시)들이 그대로 달려 까치밥이 되던 생각도 납니다. 마을을 끼고 흐르는 냇가는 좁은 마을길을 빠져 나와 논두렁을 지납니다. 자갈밭을 밟고 맑은 물을 따고 올라가면 약간 깊은 웅덩이 안에는 송사리 보다 조금 큰 피라미 떼들이 이끼 낀 돌 밑 에서 열심히 헤엄치고 있을 때 첨벙거리며 뛰어오는 우리들 발 소리에 놀라 깊은 물속으로 숨어 버리곤 했지요. 고향 마을 국민 학교에 적을 두고 계셨던 아버지와 엄마사이에 2년 터울에 두 오빠와 여동생까지 태어나 관심을 적게 받을 수밖에 없는 셋째에 끼어 어린 마음에 더 사랑 받고 싶어, 눈길을 끌고 싶어 밥상 앞에서도 징징, 생선 가시 발라주지 않는다고 징징-. 이런 투정 속에 아버지 손에 목덜미 채 들려 마루 밑 신발 디딤돌위에 내려놓은 그대로 가족 모두 식사 끝 날 때 까지 징징-. 할머니께서 나중에 데리고 들어가 따로 먹여 줄때까지 고집 피웠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그러니까 아주 평범한 한 아이로 교육학 심리학에 잘 끼워 맞출 수 있었던 환경에서 자라났지요.
국민 학교 입학 전 가족이 대구로 이사를 나와 살던 곳은 앞산 밑 단독 주택 이였어요. 넓은 꽃밭이 있었고 나팔꽃, 오이, 수세미는 변소 담을 타고 대문 쪽으로 덩굴을 올렸고 시골아줌마에서 도시 아줌마로 변한 날씬한 몸매에 원피스 입은 엄마로 하수구 대신 그릇 씻은 양은 함지박물을 꽃밭에 뿌렸습니다. 아버지 정근으로 가족이 대구로 이사를 와 가슴에 콧 수건을 단 예쁜 원피스를 입고 엄마손 잡고 61년도에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 나오는 명덕 국민 학교에 입학 했습니다. 오빠들과 같이 다니다 다시 아버지의 정근으로 김천 위 아천 이란 시골에서 동생이랑 3년을 보냈지요.
아천- 저 에게는 많은 동심을 심어준 잊을 수없는 곳입니다. 동무들과 벼가 누렇게 고개 숙인 넓은 들판에서 메뚜기도 잡고 한쪽이 다 떨어진 소쿠리로 팔딱팔딱 튀는 민물 새우 잡던 일, 방과 후 한 시간 이상 걸어가는 동무 마을에 가서 다슬기도 잡았습니다. 식목일에는 시골 친구들이 가르쳐주어 산에서 산나물, 쑥, 냉이 캐던 일 욕심 많은 친구가 냉이 많은 곳을 가르쳐 주지 않아 미워했던 일, 추수 후 들판에서 콩 사리 밀 사리 해 먹고 검둥이가 되어 집에 돌아왔던 일도, 우리 뒷집 남숙이란 애는 집이 몹시 가난해 닭 모이 대신 같이 개구리를 잡아 깡통에 삶아 주던 일도 있었지요. 아- 또, 야단맞았던 일도 있어요. 엄마가 약에 쓸려고 사다 놓은 댓 병 토종꿀, 군것질이 없던 그때 동생이랑 입에 살살 녹는 꿀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다 나중에는 병에 입을 대고 둘이서 1/5병쯤 맛있게 먹고 며칠 동안 동생과 교대로 요강에 앉아 설사 했던 일도, 전기가 없었던 그때 성냥 가지고 놀다가 문종이에 불이 붙어 아슬아슬하게 불을 껐던 일도 생생하게 영상으로 그릴 수 있습니다.
국민 학교 6학년 때 대구로 다시 전학을 와 중학교 입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똑똑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멍청하지도 않은 중간 밖에 못가는 제가 분수에 맞게 제1차 시험 상서 여중에 합격했습니다. 내심 무척 기쁘기도 했지만 일류가 아닌 이류(?)학교여서 기도 약간 죽었습니다. 한창 사춘기에 접어든 그 나이에 겉멋은 들어 안경은 안 쓰고 귀한 콘텍트렌즈를 끼고 다닐 정도였지요. 가끔 놀러 오시는 막내고모님께서 “너는 안동에서 간호학교를 다니 거래이” 하시던 권유로 학력부에 장래 희망 란에 ‘간호원’을 기입 한 덕분에 안동 간호 고등학교에 입학 했습니다. 도립병원 안에 있던 간호학교시절, 그때 지방명문 이었던 안동고등학교 남학생들이 안동여고생 보다 간호 고등학생을 더 좋아했기에 다들 콧대들이 높았지요. 그때 또 기억에 남는 일요? 있지요 기숙사 이야기- 선후배 합쳐 약 40명이 사는 기숙사, 사감선생님 외 2명 처녀선생님이 계셨어요. 다들 경북대 출신이셨는데 저녁 점오 후 잦고 늦은 외출이 4,5년 어린 우리 눈이 좀 시리더라구요. 그날따라 사감 선생님 까지 외출 하셨기에 졸업반인 우리들이 모여 돌아오신 선생님들에게 대문을 열어주지 않고 항의를 했지요. 선생님들 힘이란 세긴 세대요. 그때 제 학력에 (수치라면 수치 일수 있는) 일주일 빨간 줄이 들어 있어요. 아직도 동창회 때면 처분당한 친구들 끼리 웃음으로 엮어 나가지요. 하나 더 할까요? 기숙사 학생들 파워-. 또 괜찮았어요. 매달 꼬박꼬박 기숙사비 내는데 부식이 나쁘다고 식당 아줌마 ㅤㅉㅗㅈ아 내던 일도 있었습니다. 깍뚜기, 콩나물, 고등어, 라면, 시래기 국은 졸업 후 몇 년 동안 쳐다보기조차 싫었어요. 39명 졸업생 중에 기숙사 골동품 별명을 가진 8명중에 꼬박 3년을 기숙한 한사람 중에 속해요.
졸업 후 안동 성소병원에서 일 년 반 근무한 적이 있고 75년도에 교육 공무원 이셨던 아버지 월급으로 대학교 둘, 고등학교 둘을 집까지 팔아가며 교육 시키고 부모님에게 남은 것은 빚이었던 가정도 도울 겸,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벌써 파독 되었던 친구 소식에 독일 행 비행기를 탔지요. 서양에는 멋쟁이들만 있는 줄 알았던 그때, 빨강앙상블에 흰색 꽃무늬로 수놓은 옷을 입고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양식 나오는 Lufthansa에서 식칼로 고기를 잘못 썰어 기름이 옷에 튀겨 신경 쓰였던 일, 기내 화장실 문을 잠글 줄 몰라 문 열림에 당황스러움과 시골스러움이 차츰 나의 사고까지 변화시킨 독일 생활 이었습니다. 농촌으로 둘러 쌓여있는 괴팅겐이란 아담하고 고풍이 흐르는 아름다운 대학도시, 철학, 경제학, 신학자들의 도시인 대학 병원에 근무하며 3년 후에 다시 귀국 한다는 부모님과의 약속을 뒤로 미루었어요. 교회 수양회에서 기타 잘 치는 유머스러운 청년과의 만남이 나의 긴 인생항로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네요. 무엇보다도 눈길을 끈 것은 교회생활이 마음이 들었어요. 무엇이냐고요? 왜, 왜 있잖아요. - 시간 전에 일찍 나와서 예배 준비하는 자세와 성격이 원만해 다들 어울리고 싶어 하는 분위기 - 그렇게 저렇게 우리는 무르익어 갔는데 결혼을 준비하며 남편도, 나도 완전무일푼으로 시작하자며 서로가 통장에 있는 돈을 각자 자기 집으로 송금하고 나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마침 그시기에 교회 집사님동네 할머니 한분이 세상을 떠나 집안 살림을 정리한다기에 옷장, 침대, 커텐, 식탁을 얻어와 신방을 꾸몄습니다. 20년 이상 다른 환경에서 살던 사람들끼리 만나 실갱이하며 부닥치는 일들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 잘 살아 보자 잘 살아보자(헤어지자, 헤어지자?) 라고 생활 한지가 벌써 25년이 되네요. 꼭 한번 정말 헤어지자는 아슬아슬한 순간이 있었지요. 뭔가 서로의 자존심 때문에 - 그때 제가 남편에게 편지를 썼어요. ‘나의 진실은 당신을 사랑하노라’고 평범하게 살면서 아들 딸 낳고 이젠 중년으로 서로가 서로를 표정만 봐도 알 수 있고 이야기하는 높낮이만 들어도, 발걸음 소리로도 잘 아는 능구렁이로 서로를 편안하게 해주며 은혼식도 지났네요.
짧은 이력서 칸이 좀 아쉽네요. 이제 나의 생각을 나의 갈망을 부르고 싶은데요. 볼 수 있는 눈이 미약해도 미술가를 사랑합니다. 들을 수 있는 귀가 미약해도 음악가를 사랑합니다, 글을 많이 표현하는 소설가를 사랑합니다, 몸으로 감정을 나타내는 무용가를 사랑합니다. 왜냐고요? 마음을,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그들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하지만 나는 다른 방면으로 행복합니다. 오늘도 나에게 노동(직장)할 수 있는 힘(건강)이 있고 남편과 함께 가정을 꾸려 갈 수 있고, 우리 아이들 - 우등생도 아니고, 열등생도 아닌 청년아이 둘- 에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으니까요. 욕심이 있다면 좀 더 나에게 총명함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혜롭게 똑똑해 보았으면 좋겠어요.
넉넉한 나만의 시간 속에 조그마한 사건도(읽는 이로 하여금) 생생하게 그릴 수 있는 지나간 아름다움을 그려보았으면 좋겠어요. 이 이력서를 읽는 분은 나에게 꿈을 주시는 분이라 믿습니다. |
첫댓글 혹시 안동간호기술고등학교 재학한 이재순씨 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