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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주현대불교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Kevin Dwyer, "Toward Reconstruction : An Anthropological Wager"
Morocoan Dialogue - Anthropology in question, Waveland Press, 1987, pp.270-286.
1. 절망과 변증법
드와이어는 인류학이 직면한 절망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는, 지금까지의 인류학이 사회적 체제에 종속되어, 군사적, 종교적, 경제적, 문화적 제국주의에 복무해왔다는 점에서 비판받고 있는 현실이다. 물론 인류학자들은 이런 지배의 역사에 저항하기도 했다. 하지만 타랄 아사드(Talal Asad)가, 인류학은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고, 인류학이 생산한 정보와 이해는 결국 착취를 위한 자원으로 사용된다고 비판했던 것처럼, 서구 제국주의의 확산에 기여했다는 의심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절망의 두 번째 내용은, 지금까지의 인류학은 타자에 대한 객관적 이해의 불가능성에 직면했다는 인식과 관련된다. 이에 대해 드와이어는 몇 인류학자의 의견을 인용한다. 우선 라딘(Radin)은 원주민 정보제공자는 기껏해야 조사자의 요구를 만족시키는데 흥미를 가질뿐이어서 인류학자가 '내부의 관점(inside view)'을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했고, 클럭혼(Kluckhohn)도 인류학자가 다루는 자료는 원주민이 자발적으로 제공한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학자의 목적에 맞게 만든 자료들을 다룬다는 점을 지적하며, 기어츠(Geertz)도, '참여관찰'의 개념이 인류학자로 하여금 자신을 관심을 가진 체류자(sojourner) 이상으로 생각하도록 하기까지 이르렀을 경우 그것은 인류학에서 가장 강력한 잘못된 믿음의 원천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드와이어는 이런 절망의 원천은 자아와 타자를 분리하고, 자아와 타자의 만남을 형성하는 '조건'으로부터 분리하여 연구하는 것에 놓여있으며, 이런 연구는 '반드시(must)' 실패한다고 지적한다. 역사와 문화가 생략된 "객관적" 자아와, 자아와 접촉하지 않는 "본래적(pristine)" 타자로 분리시켜 양자의 변증법을 억눌렀던 과거의 인류학은 군사적, 선교적 기획과 지배에 기여해온 것이다.
이러한 결과들에 도전하기 위해 인류학은 그 임무를 변경해야만 한다. 자아와 타자가 직접적으로 서로에게 상호작용하는 '만남'(confrontation)에 기반하는 인류학은 자아와 타자의 독립성을 '생산하는(produce)'대신, 역사적, 문화적으로 조건지워진 만남을 '창조하는(creates)' 사회적 행위의 특수한 형태로 보아야만 한다. 즉 타자는 자아와의 관계에 의해 창조되고, 자아는 타자와의 만남에서 창조되며, 또한 양자의 변증법은 반드시 문화적 역사적 지형(terrain)안에 위치지워져야 하는 것이다.
2. 내기
드와이어는 인류학적 기획은 이제 더 이상 "외적 사건의 관찰", "숨겨진 현상의 드러냄" 혹은 "과학적 사실의 숙고"로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인류학적 기획의 구성요소는 '중립성', '객관성', 그리고 '거리감'이 아니라, 위기, 실패와 성공의 가능성을 종합한 '내기(wager)'라는 것이다.
여기서 드와이어는 파스칼(Pascal)의 내기와 맑시스트의 내기를 '관조적 인류학'과 '대안적 인류학'의 구분에 사용하고, 다시 전자는 말 경주에, 후자는 포커 게임에 대조한다. 즉 파스칼의 내기는, 말 경주처럼, 그 사람의 의지와 행위로부터 독립해 있는 실재(파시칼의 개념으로는 신)에 거는 것인 반면, 맑시스트의 내기는 포커 게임에서처럼 플레이어들이 결과를 예상하고, 속이는 등의 여러 가지 책략들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전자처럼 인간의 행위에 대한 관조적 해석들이 지배적이어서 내기적인 측면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아와 타자의 독립성에 대한 개념이 변화하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관조적 관점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특히 보편성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적 지배, 경제력과 제도에 의한 통치가 지리적으로 떨어진 지역들을 묶고 있는 세계에서, 상이한 인간집단들의 차이와 다양성은 위계와 지배로 재구성되었고, 관조적 관점은 이러한 지배의 재강화를 추구하는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드와이어가 주장하는 것은, 인류학적 기획은 그것이 속한 사회,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경험, 이해를 추구하는 방식과의 관계에서 갖는 취약성(vulnerability)과 내기적 속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내기로서의 대화적 측면
관조적 태도는 필드워크의 상황에서 전복될 수밖에 없다. 자아와 타자의 인격적 만남에서 양자 사이에 놓인 장벽은 일상적 상호작용을 통해 무너졌고, 객관적 자아의 환상은 지탱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만남은 필연적으로 어떤 "대화적" 성격을 갖는다. 드와이어는 그것을 "연속성", "우연성", "탑승"으로 설명한다.(뒤에 설명) 이와 같은 새로운 접근은 전통적 인류학과, "근거가 확실한" 지식의 서구적 개념에 도전한다. 새로운 접근은 인류학자로 하여금 끊임없는 조정(adjustment)과 수정(modificatio)을 받아들이게 하고, 만남의 과정에서 반복된다. 이런 입장은 개인적 행위와 사회적 세계를 분리하는 입장을 거부하며, 양자의 결합을 명료하게 표현한다.
4. 내기, 대화, 그리고 필드워크 "기록"
드와이어는 필드워크의 "기록"이 이 대화적 요소들을 어떻게 구체화시키는가에 대해 다룬다. 인류학은 대화, 특히 "핵심 정보제공자 key informant"와의 대화를 필드워크에서 기초적인 것으로 여겨왔다. 리차드슨(Richardson)은 한 사람을 여행자에서 민족지가로 변화시키는 것은 정보제공자와의 관계이며, 민족지가가 정보제공자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는 것을 느끼는 이유는, 그 공동체를 이해하기 위해 민족지가가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지식을 정보제공자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런 대화에 초점을 맞추는 인류학자라 할지라도 관조적 입장은 대화적 요소를 없애고 여러 가지 유사한 픽션을 조장하게 했다. 이들 픽션은 자아와 타자가 그들의 차이를 초월하여 서로에 대한 왜곡없이 커뮤니케이션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즉, 자아와 타자는 궁극적으로 서로에게 명백하게 되고, 그들의 차이는 상호 이해의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형식을 지속적으로 창조하기보다는 번역의 기술적인 과제만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는 변증법적 관점을 거부하며, 자아와 타자는 단지 잠정적으로 다르며, 타자는 길들여지고 점령할 수 있다는 단정을 조장한다. 이런 픽션은 타자의 목소리를 회복시킨 민족지들이라 주장하는, 시드니 민쯔(Sidney Mintz), 오스카 루이스(Oscar Lewis), 그리고 카를로스 카스타네다(Carlos Casreneda)와 같은 이들의 작업에서도 단순한 자서전의 '병렬'이라든지, 관조적인 입장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의 차이가 무엇이든, 이들의 저작이 지닌 여러 가지 장점이 무엇이든, 세 작가는 모두 근본적인 유사성을 드러냈다. 그들은 텍스트에서 수행한 작업을 숨김으로써, 필드워크에서의 만남을 독자들이 볼 수 없도록 가려버렸고, 따라서 저자의 작업을 심각하게 비판할 기회를 독자들로부터 빼앗았던 것이다.(이 점에 대해 드와이어는 라비노우와 크라판자노의 민족지에 대해 길게 언급한다. pp.277-280, n.6)
드와이어는 이상의 비판을 통해, 필드워크 "기록"에서 다루어야 할 '만남'의 세 가지 성격을 제시한다. 그것은 '연속성'(sequence)과 '우연성(contingency)', 그리고, '탑승'(embarkation)의 개념이다.
첫째, '연속성'의 개념은, 텍스트는 명백히 시간적인 질서안에 있으며, 그리고 선행한 것과 관련된 '발화(utterance)'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텍스트에서 의미는 단선적인 방식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recursive) 것임을 뜻한다. 즉 의미는 선행한 의미의 의존하면서도, 앞선 의미들을 개정할 수 있는 것이다. 드와이어는 파키르(Faqir)와의 대화가 어떤 연속적 과정을 통해 의미를 분명히해가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이 개념을 더 명료화한다. 파키르와의 마지막 대화는 전에 있었던 모든 대화들을 재해석하게 한다. 앞선 장들에서의 파키르의 발화는 靜的인(static) 것이 아니라 경험에 대한 응답이며, 따라서 과거와 현재에 대한 문제제기와 재해석이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드와이어가 강조하는 것은 텍스트를 작은 조각들로 잘라내어 왜곡하거나, 혹은 필드워크에서의 시간적 순서를 텍스트에서 자의적으로 편집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텍스트는 경험의 시간적, 순환적 성격을 반영해야 한다. 이는 독자들의 몫을 남겨놓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독자들은 텍스트에 대한 반응을 통해 새로운 공적인 장(章)을 덧붙이는 주체들이다. 독자들은 텍스트와 그 내용에 대해 창조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즉 독자들은 텍스트에 동의하거나, 수정하거나, 혹은 그것들을 거부하면서 필연적으로 대화에 참여하고, 내기에 포함된다.
둘째, '우연성'(contingency)의 개념은 필드워크가 선행하는 이론적 계획의 단순한 수행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필드워크 경험은 인류학자 의도와 타자(정보제공자)의 의도 사이에 이루어지는 저항과 수용, 혹은 반대의 산물이며, 자아와 타자의 만남은 적응과 거부의 과정이다. 때로는 타자가 인류학자를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하며, 인류학자를 거절하기도 한다. 이처럼 자아와 타자 사이의 균열(rupture)과 연속성은 복잡하게 혼합되어 있다. 예를 들어 파키르와 드와이어의 만남은 총체적인 균열을 피했을지라도, 외면적으로 나타나는 연속성에는 복잡한 문제들이 있다. 각각의 대화는 분리되어 있고, 대화 안의 주제도 분명한 변화가 있다. 또한 파키르는 조사에 수동적으로 따르지도 않았다. 그는 간명하거나 상세하고, 혹은 왜곡과 흥정을 통해 불화를 만든 것이다.
셋째, '탑승'(embarkation)의 개념은 인류학자나 정보제공자 모두 사회, 문화, 역사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드워크에서의 만남은 단지 개인 사이의 만남이 아니라, 그 개인을 포함하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역사적 관계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만남은 권력의 문제, 자아에 대한 질문을 야기한다. 그동안 인류학의 비서구사회에 대한 기술과 해석이 서구사회가 갖는 제국주의적 침략의 성격을 회피하지 못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인류학자의 행위는 그가 속한 사회(서구)의 관심과 스타일이 반영되어 주제를 제한했던 것이다. 이는 아무리 인류학자가 타자에 대해 근접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인류학자는 자신의 사회에 탑승해 있음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러한 탑승이 고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타자와의 만남, 그리고 인류학자의 의도에 대한 타자의 저항에서 변형될 수 있는 것이다. 만남에서 타자에 대한 상호 영향이 강하게 미치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차이'는 극복되지 않는다. 타자와의 만남은 더 깊은 분절과 새로운 차이를 생성시키는 것이다.
5. 결론 및 논평
타자의 도전을 듣는 노력이 없이는 처음부터 희망이 없다. 그러므로 인류학자는 처음부터 타자의 완전한 "목소리"를 침묵시키지 않는 사회적 행위의 형식을 찾아야만 하며, 그리고 그 목소리를 맥락으로부터 추상화시키지 말아야 하며, 또한 자아에 대한 비판적 제기를 듣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필드워크 "기록"은 이런 접근들에 대해 대안적인 것을 암시하지만, 대안적이라는 것은 결정적이거나 모델로서 취해지는 의미가 없이 강조되어야 한다. 즉, 모델을 제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학이 서구와 비서구사회의 사람들 사이의 만남에서 생기는 모든 복합성을 요약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인류학의 모든 어법이 필드워크를 다 포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건과 대화의 '기록'이 필드워크의 경험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건 + 대화'의 모티프는 모델로서 볼 것이 아니라 내기의 성격을 포함하는 인류학에 대한 암시적 메타포로 보아야만 한다. 이 메타포의 목적은 여러 측면에서 조명될 있다. 타자의 통전성(integrity)을 전달하는 것, 인류학의 비판적 연구를 추구하는 것, 그리고, 이 "기록"이 객관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하거나 실패한다는 것, 내기적 측면과 내재한 취약성을 인식하는 서구인의 프로젝트의 새로운 형식을 추구할 필요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글은 드와이어 자신의 필드워크 경험에 대한 반성적 성찰인 동시에, 관조적 인류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대안적 인류학을 수립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그가 제시한 '내기'의 은유는 전통적 인류학이 가진 '지도'를 제거한다. 이제 타자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는 길이 표시되어 있는 지도는 없다. 모든 인간의 정신구조는 보편적 이항대립의 구조로 되어있다는 레비-스트로스의 가설이나, 뒤르껭의 사회학적 입장이나, 혹은 프로이드 심리학이나 맑시즘의 이론적 도식들이 '간단히' 풀어내는 것과 같은 지도를 가지려 했던 인류학적 기획은 절망만을 가져올 뿐이기 때문이다.
성공의 필연만을 주장했던 관조적 인류학 대신 드와이어가 선택한 것은 실패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모험이다. 자아와 타자는 고정적 실체가 아니라 '만남의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과정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타자에 대한 이해는 그 상호작용 과정에서 늘 달라질 수 밖에 없으며, 같은 타자라 할지라도 시간의 구조에서, 그리고 만남의 상황에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자아'와 '타자', 그리고 '독자'는 '포커페이스'를 한 채 테이블에 앉아, 팽팽한 긴장으로 서로를 탐색하고, 반응하고, 속이고 거절하고 있다. 이 만남의 '대화적 과정'과 '내기적 속성'은 성공만이 아니라 실패의 가능성이라는 위태로움 또한 가지고 있다. 우리는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위태로움이야말로 인류학자로 하여금 타자에 더 다가가도록 하는 창조적 긴장이다.
종교참여조사연구( 2001.5.14), 지도교수 : 김성례, 발표: 정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