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회 평창 대관령 음악제 7월 28일 오프닝 공연

[pichon(피숑)]

2016. 7. 28. 목요일. 저녁 7시 30분
제 13회 평창대관령음악제
저명연주가 시리즈1

아마도 글쟁이라면 -비록 작가는 아니라 하더라도- 첫문장에 유독 정성을 들이고 싶어할 것이다. 며칠간 혹은 몇달간 빈 캔버스와 기나긴 사투를 벌이는 화가처럼
오감이 글자라는 매개체를 만나 입을 떼기 전까지 글쟁이는 백지 위의 침묵과 지리하게 마주 볼 뿐이다.

7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도 다가고 저녁놀이 감돌고 있다. 부엌에선 저녁 끼니 준비가 한창이다. 미역국을 끓이려나보다.
물에 불리자 그네들은 한때 드넓은 바다 속 물풀로서의 자태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애꿎은 연필을 빙글빙글 초조하게 돌리고 있었다.
이미 이틀이 지나 건조 될대로 건조된 감흥에 생기를 되살릴 수만 있다면........

벌써 13회로 접어드는 대관령음악제!
공연 한시간 전부터 음악홀 주변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즐거운 긴장감에 둘러쌓여 있었는데......
흡사 오페라의 서곡이 끝나고 막이 오르며 어둡던 무대가 일순간 환해지는 것처럼 가로등이 켜지고, 알펜시아 콘서트 주변 주차장에 차가 하나 둘 들어서고, 말쑥히 차려입은 신사 숙녀들이 입장하고, 연주회장 여기저기서 흥분과 호들갑이 섞인 셔터소리가 들리고....
한편 홀 한켠엔 샴페인의 대명사 perrier jouet가 연주후의 감동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역시나 음악회 시작 전엔 언제나 아메리카노가 안성맞춤인데 유명 커피 브랜드 카페 테라로사에서 몇년째 협찬중이다.

우리 모두에게 (엄마, 이모 나) 실상 그날밤의 오프닝 공연은 매우 특별했다. 40여년 초등학교 교직생활을 8월 31일자로 마감하는 울 사랑하는 엄마를 위로하는 동시에 축하하는 자리였으니까...삼남매의 자애로운 어머니로서 동시에 훌륭한 교육자로서 평생 헌신하느라 여윌 대로 여윈 엄마. 그 빼빼마른 실루엣, 화려한 화이트 룩으로 교묘히 감추어진 엄마의 왜소한 몸매를 떠올리니 눈시울이 절로 붉어졌다. 그러고 있는데...군중들 틈으로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이미 수일 전 만나기로 예정된 존경하는 사진작가 선배님, 그리고 혹여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으며 재회하길 갈망했던 일신홀 사무국장님!!행복한 만남은 비단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무지크바움의 선배님들 몇 분도 여기서 뵙게 될 줄이야......

연주회장은 내부구조면에서나 규모에서나 참으로 소박했다. 아직은 어둠속에서 잠들어 있는 무대 위의 쳄발로와 보면대. 이윽고 객석에는 포근한 암흑이 깔리며 연주회는 시작되었다. 모든 피조물이 기뻐하는구나!

-1부-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5번 D장조
"오르간은 신성을 지닌 악기야."
"그럼 쳄발로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속세를 떠난 악기지 수도사와 같은 악기야."
오래 전 올겐연주자 친구 송이와 나와의 대화 일부다.
J.S바흐가 브란덴부르크 후작에게 헌정한 6곡의 협주곡 중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특히 1악장 후반부의 쳄발로 독주부분을 유독 사랑하는데, 시대를 앞선 바흐식의 카덴짜 같다는 생각마저든다.
고악기 앙상블답게 금관이 아닌 목관으로 된 바로크식 플룻 또한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특유의 부드럽고 향긋한 소리는 바흐의 커피 칸타타를 연상케했다. 커피향을 닮은 음색!
음악회 마치고 한 잔 더 하리라...
오프닝 무대의 첫 연주라는 부담 때문이었을까?!1악장에서 간간 현악기군과 쳄발로 그리고 플룻의 호흡이 종종 어긋나는 듯 했지만 이후로는 금새 제 기량을 찾더라.
1악장의 2%의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단원들의 몸짓 표정에 녹아있는 여유, 매회 연주의 결과에 상관없이 음악 자체를 정말 사랑하고 즐기는 마음가짐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

보로딘 현악 4중주 2번 D장조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진 의학박사이자 화학가
오직 일요일에만 작곡가.
세상에는 겸손한 천재도 있는 법이다.
보로딘처럼......
한달 전 로열석을 예매해두고 (바로크 이전 고음악 애호가 우리 셋째 이모 덕분^^)가장 기대하던 곡이 3악장 노트루노이다.
꿈많던 10대와 20대 때 슈베르트의 현악4중주「죽음과 소녀」와 더불어 가장 많이 듣던 보로딘의 현악4중주 2번, 특히 3악장 노트루노. 그의 동료들(발라키레프, 무소르그스키, 림스키 코르샤코프, 큐이)이 이 작품이 넘 전통적 보수적이라 폄하했다던데 설령 그렇다할지라도 그의 노트루노는 시적이지 않은가!!
너무나 황홀해서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서정적이다♥

보통 현악4중주하면 제1바이올린이 제2바이올린보다 돋보이기 마련인데, 이날 연주에서는 제2바이올린주자 바이올리니스트 이유라씨가 단연코 돋보였다. 여장부같은 외양만큼 통크고 터프한 연주와 태도.
지극히 근경에서부터 출발하여 점차 원경으로...원경으로...원경으로....
마침내는 시베리아 광활한 대지 전체를 품고도 넉넉히 남는 그의 작품-오직 러시아 예술가들만이 그럴 수 있으리라-바로 그의 작품을 닮고도 닮은 연주였다.
앙상블이 아닌 솔리스트들인데도 불구하고
각 파트의 긴밀한 협연이나 유기적 곡 해석 모두 최고였다.

-2부-
베를리오즈 여름밤 op7중 발췌곡
(목가/ 장미의 유령/ 미지의 섬)
올해 음악제엔 앞날이 창창한 젊은 피아니스트 둘을 만날 수 있었다. 바로 김다솔군과 손열음양. 이들은 이날 오프닝제를 시작으로 음악제 내내 피아노에 관련된 모든 음악적 시도를 할 예정이었다.
역시 젊어서 좋구나~~

89년생의 꿈 많은 젊은 예술가.
그가 7월의 한여름 밤 하늘 위로 달콤한 첫 음을 쏘아올린다. 그 순간 테오필 고티에의 밤의 이미지가 고스란히 살아 숨쉰다.
베를리오즈와 마리 마르탱
김다솔과 모니카 그롭
수줍은듯한 젊은 피아니스트가 이따금 연상의 노래하는 여인을 바라보며 피아노를 쓰다듬고 있다....
어디서 봤더라??????
프랑스 파리 몽소공원의 조각상 「쇼팽과 상드」가 자연스레 오버랩 됨은 어쩔 수 없었다.

백승완 고독(한국초연)
우선 작곡가의 작곡 경위부터
"Einsankeit(고독)는 일상의 삶을 위해 타인과 사회에 맞춰 나를 바꾸고 때론 감추거나 과장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느끼는 내면의 고독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려했다. 미세한 두 음정이 부딪히면서 자아내는 소리의 흔들림은 내면의 갈등을 대변한다. 한 옥타브를 정확히 반으로 나누는 음정을 주로 사용하여 수많은 갈등 속에도 중심을 지키려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나타내려 했다."

'나는 고독하다 생각하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
고독이 현대인의 삶에 너무나 일상적이다보니
우린 고독을 못 느끼는 게 아닐까.......
마치 지구의 자전과 태양계 안에서의 공전이라는.... 거대한 회전 속에 살면서도 어지럼증을 전혀 못 느끼는 천성적 둔감함처럼.......
무대 위 홀로 서 있는 외로운 바이올리니스트의 저 모습이 바로 우리 각자의 모습이리라.....
복잡다단하고 예민하며 섬세한 인간 내면의 이미지를 단 4줄과 활로만 형상화 한다는 것.
때문에 현대의 모든 음악이 그러하겠지만 이 작품의 주법도 매우 어려울 수밖에. 활 한번 켤 때마다 표현되어야 하는 미묘한 셈여림,
음정간의 불화....
현대문명이 잉태한 끔찍한 괴물 고독.
우리 모두는 애써 숨겨 두었을 뿐이다.
크레타섬 크노소스 궁의 미궁 안에.......
그날 밤 그녀의 비상한 연주를 통해 미궁 속 괴물의 울부짖음을 다시금 확인한다.

브루흐 파아노 5중주 G단조
아버지의 화학공장이 안겨주는 부도 법률가로서 누리는 명예도 그에겐 한낱 무용지물이었다. 오직 예술과 음악외엔 아무것도 중요치 않았다. 요컨데 그는 진정 풍류를 아는 자였다.

또 한명의 피아니스트가 나온다. 붉디 붉은 석류빛 드레스를 입은 피아니스트 손열음.
젊디 젊은 피아노의 여제는 당당했다. 그 빛나는 존재감이란!!!

그녀와 같이 연주할 음악 동료들. 죄다 남자였다. 말하자면 오늘밤 그녀는 4명의 남성 현악기 주자들과 대결하는 동시에 실내악이니만큼 연주의 밸런스에도 신경써야 했다.

만 29세. 그럼에도 그녀는 이미 테크닉에 있어서는 대가다운 모습을 보였다. 명료한 프레이징, 빠른 패시지일수록 여유로운 대범성, 한음한음 고루 들리고 절대 뭉개지지 않는 스케일, 무엇보다도 현란한 아르페지오!!
깨끗한 페달링 처리 등등....
그녀의 연주에 심각하게 빠져버린 결과
남자들의 연주가 들려오질 않았다. 첼리스트 지안 왕을 위시로 쟁쟁한 현악주자들이 단단히 무장한 채 그녀 앞에 바리케이트까지 쳤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손열음에게 시선이 쏠림은 어쩔 수 없었다.ㅠㅠ

Bravo!!!
피날레 알레그로 아지타토의 마지막 선율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공연장 안 가득 터진 외침이다! (더러는 아예 기립박수를 치는 이도 있었고...)활화산같이 뿜어져 나오는 그들 연주에 대한 열렬한 갈채였다! 필자도 마지막 장에 가서는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한동안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의 박수세례가 장내를 가득 매웠다.

모름지기 모든 축하연에 샴페인 만한 건 없나보다. 연주회 장 밖에는 삼삼오오 음악계 인사들이 축배를 드는 진귀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말없이 엄마의 손을 꼬옥 잡는다. 36년간 엄마노릇하랴 40여년간 교사로 일하랴 거칠고 주름진 그 앙상한 손을......
그녀의 다른 한쪽 손을 엄마를 유독 따르는 이모가 붙잡고 있었다.
"우리도 우리만의 축배를 들어야지요."
"숙소로가서 네 엄마(우리 언니) 정년퇴직 기념 파티하자."
밖은 한결 시원해져 있었다. 청량감마저 느껴지는 그러한 밤 바람이었다.
주위는 무척 고요했다.
이따금 가로등 불빛 밑 부나방이 바스락 바스락 날개 부딪히는 소리만 간간 들릴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