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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8년, 백치기행
그때의 사건은 유쾌한, 그러나 가슴 아픈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유쾌한’과 ‘가슴 아픈’은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없는 단어들입니다마는, 그때의 사건은 그렇게 부조리한 문장의 조합으로만이 설명이 가능한 아프고도 아름다운 사건으로, 2088년의 어두운 시대를 헤쳐 살던 우리가 찾은 한 줄기 청정우였습니다. 우리는 패배를 달게 받아들인 자신들의 용기를 가능성의 지표로 삼는 것으로 실패로 끝난 그 사건의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그 시대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드물게 극적인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고, 출연진의 연기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기 때문에, 여느 시대라면 일상사로 흘려버릴 사건들도 슬프고 아름다운 연극으로 엮어지곤 하였습니다. 인간이 저마다 하나씩의 사연을 갖고 일생을 헤쳐 사는 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마는, 그 시대만큼 파란 많은 운명들로 엮어진 시대도 흔치는 않을 것입니다. 그럴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으니, 그 시대는 핵전쟁의 참화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이 재기를 위해 몸부림을 치던 세계 재구성의 변환기였던 것입니다.
이제부터의 이야기는 그 시대의 숱한 ‘인간 이야기’중의 하나로 젊은 날의 나와 내 동료들이 친히 겪고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아픈 비밀의 고백입니다.
기형인간 격리지구를 탈출하여 청정지구의 대도시로 숨어든 의사인간(疑似人間) 김진욱이 일곱 살 소녀 권유민과 첫 상면을 가졌던 때는 2088년의 무더운 여름도 끝나갈 무렵의 어느 휴일이었습니다. 도망자였던 진욱은 대도시의 중심에 있는 자연공원에 숨어 휴일을 즐기러 나온 시민들과 어울리는 것으로 추적자인 윤리청 관리들의 눈길을 피했는데, 귀갓길 시민들을 보호색 삼아 공원을 빠져 나오는 길에 유모차를 길 중앙에 가로세우고 인파의 흐름을 방해하며 무언가 애타게 외치고 있는 유민을 만난 것입니다. 단정히 땋아 내린 쌍갈래 머리와 동그란 얼굴이 무척이나 귀염성스러운 유민은 제 키 만큼이나 높은 유모차를 밀어 지나가는 진욱을 막고 큰소리로 청했습니다.
“이 아기, 엄마 찾아줘요!”
진욱은 처음 다른 많은 시민들이 그러한 것처럼 유모차를 비켜 지나치려 하였습니다. 그는 도망자였으므로 사람들의 시선을 모을 돌출행동은 되도록 피하고 있었습니다.
“제 말, 안 들려요? 이 아기, 엄마 찾아주어야 한다니까요!”
유민은 유모차를 밀어 진욱의 앞을 막아서며 책망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같은 뜻의 하소를 여러 ‘아저씨’들에게 하였지만 도움을 받지 못한 모양으로 분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빛에 눈물이 가득 고인 눈망울을 하고 있었습니다.
진욱은 황급히 주위를 살펴 추적자들이 보이지 않음을 확인한 후 꼬마 여자아이가 “엄마를 찾아주어야 한다!”고 외치는 유모차 안의 아기를 들여다보고 실소를 터뜨렸습니다. 유모차 속에서는 커다란 왕눈이 곰인형이 ‘엄마 잃은 아기’의 역을 맡아 네 활개를 펴고 누워 있었습니다.
“소꿉장난을 하자는 거니?”
가볍게 핀잔을 준 진욱은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 하였습니다. 진욱은 쫓기는 입장의 사람이었으므로 일곱 살 여자아이의 장난에 어울려 줄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욱의 도주는 몇 발짝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유민이 와앙! 울음을 터뜨려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어 주었고,‘저 아이의 소꿉장난에 어울려 주는 것도 내게 부여된 운명의 한 수순이 아닐까?’의 예지가 작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욱은 발길을 돌려 유모차의 손잡이를 잡았습니다.
공원의 입구에서는 윤리청 소속 고급관리의 지휘를 받는 보안요원들이 임시검문소를 설치해 놓고 지나는 시민들을 검색하고 있었습니다. 진욱은 유민을 번쩍 안아 유모차에 태운 후 곰인형을 안겨 주고 태연히 유모차를 밀어 검문소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보안요원 중 하나가 유민에게 눈짓으로 익살을 떨어 보이며 유모차를 세웠습니다. 유민은 곰인형을 높이 들어 보이며 명랑하게 말했습니다.
“엄마 찾아가는 거예요!”
유민의 그러한 태도를 귀엽게 본 보안요원은 시늉만의 검문으로 진욱과 유민을 통과시켜 주었습니다. 진욱은 한 순간 보안요원이 자신과 유민을 평가하여 떠올린 상념을 전달받고 고소를 지었습니다.
(이들은 부녀간인 모양이군. 그렇다면 이 친구는 우리가 찾는 수배 인물이 아냐. 우린 기형인간 격리지구를 탈출한 범죄자를 찾고 있는 거야. 수배령에 의하면 그는 청정지구에 친척도 연고지도 갖지 못한 최악의 기형인간이라고 하였어.)
진욱은 보안요원의 두뇌가 떠올리고 있는 기형인간들의 모습을 더불어 느끼고 우울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팔다리가 뒤틀리거나 눈 코 입이 제자리에 있지 않은 천형의 인간들이 격리지구의 척박한 땅에 씨를 뿌리거나 폐허의 흔적을 파헤쳐 플라스틱 폐품을 찾는 모습이 진욱의 생각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이를 데리고 놀이를 나온 아빠처럼 명랑한 모습을 하고 검문소를 지나치는 진욱이었습니다.
“계속 앞으로 가요!”
검문소가 보이지 않는 번화가의 십자로로 나섰을 때 유민은 ‘어디로 갈까?’의 머뭇거림을 보이고 있는 진욱에게 항로를 지정해 주었습니다. 진욱은 로봇처럼 그 명령을 따랐습니다.
“나는 권유민. 아저씨는 누구?”
두 사람이 처음으로 인사를 나눈 것은 야외식당에서 요기를 하면서였습니다. 진욱은 한 입 베어 물은 빵 조각을 핑계 삼아 답변을 늦추며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판단에 골몰했습니다. 나는 무엇일까? 나는 인간인가?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도 이름은 있어. 김진욱.”
한참 후 그렇게 웅얼거리듯 답하는 것으로 유민의 채근 어린 시선의 공세를 피하며 진욱은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자신의 모습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나는 인간의 형태를 하였으나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동물은 더욱 아니다. 나는 그저 나였을 뿐, 다른 무엇과도 같지 않다……
“의사 지성체 김진욱은 최초의 인간형 변이 생명체입니다.”
진욱을 끌고 위원회에 나선 77번은 시종 기복이 없는 억양으로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감정을 갖는 것을 허락 받지 못한 로봇처럼 표정이 없는 얼굴에서 나오는 그의 목소리를 원탁 주위의 좌석에 둘러앉은 위원들이 역시 무감동의 표정으로 듣고 있었습니다.
“인간을 닮은 지성체를 창조하거나 복제하는 일은 금기로 되어 있다. 그런 연고로 너는 영원히 인간이 되지 못한다. 적어도 윤리적으로는……”
그렇게 강조하여 인식시킨 후 끌고 간 위원회였습니다. 그곳에서 얻어들은 몇 마디의 말들이 진욱이 알고 있는 자신의 신상 정보의 전부였습니다.
“이 친구는 이 부류의 생물 중에서 최고의 진화를 이룬 물건입니다. 그러나 진화의 모델이 된 우리와는 같지 않습니다.우리는 이 친구를 빌어……”
위원회의 장로가 황급히 77번의 발언을 막고 경비병을 불러 진욱을 끌고 나가게 하였습니다. 진욱이 ‘장본인인 내가 알아서는 안 될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의문을 품었음은 당연한 지성활동이었을 것입니다.
“아저씨, 일어나요. 해가 졌어요.”
유민의 채근에 현실로 돌아온 진욱은 식탁에서 일어나 다시금 유모차를 밀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저녁 해가 기울고 있는 거리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는 시민들로 북적대고 있었고, 유민은 곰인형을 품에 안고 토닥거리며 한가로이 자장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행인들은 그러한 유민에게 미소를 보내곤 하였습니다. 진욱은 문득 이러한 시간을 처음 대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모습에 슬픔을 느꼈습니다. 나는 왜 이들과 하나가 아닌가……
슬픔이 주인인 상념 중에 진욱은 자신을 중심으로 어떤 관념이 교통하고 있음을 감지했습니다. 기복이 없는 억양의 언어를 구사하는 품으로 보아 관념의 주인공은 77번인 듯했습니다.
-놈에게는 인질이 있다. 주의하여 포위하도록.
어찌된 두뇌람. 주위에 없는 사람의 대화가 실상처럼 느껴지곤 하거든. 나는 역시 정상인이 아닐지도…… 그렇더라도 피해야 한다. 77번은 무서워. 진욱은 서둘러 유모차를 밀며, 77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의료복을 상시 입고 있던 매부리코의 유전공학자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격리지구에서 출현한 기형인간들 중 특별하다고 분류할 수 있는 변종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마는, 근자에 발견되는 강화인간류의 기형인간들이 보이는 경이는 미래형 인간의 예고편을 보는 듯해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기형인간에게서 보이는 과속진화, 이를테면 강화된 체력이나 증폭된 두뇌 기능 등은 부분적인 결함이 허다히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다는 증거를 보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금번에 본인이 발견한 이 기형인간은 그러한 사례 중에서도 특출한 경우로 격리지구 창설 이래 최대의 수확으로 평가될 것입니다.
그날 위원회에서 77번은 그렇게 진욱을 소개했습니다. 경비원에게 끌려 회의실을 나서면서 진욱은 거리가 멀어지는 데도 77번의 소리가 강약의 변화 없이 전달되어 오는 것이 이상스러웠습니다. 나는 지금 청각 외의 수단으로 뜻을 전달받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두뇌의 기능이 강화된 인간이란 나를 두고 하는 말? 나는 정상인은 아니지만 인간일 수 있다?
“아저씨, 이상한 얼굴 하지 말아요.”
진욱은 유민의 지적을 받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군. 나는 위험 속에 있었어. 77번에게 잡혀서 격리지구로 돌아가는 건 정말 싫어. 싫다구! 진욱의 발걸음이 빨라졌고 표적물이 도주를 시작했음을 눈치 챈 듯 예의 나직하고 단호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공격을 명령했습니다.
-작전을 개시하도록! 인질의 보호에 만전을 기할 것!
순간, 거리의 분위기는 일상의 평화를 잃고 투쟁의식이 충만한 상태로 돌변했습니다. 저녁 산책을 즐기는 양 다정히 팔짱을 끼고 거닐던 중년 부부가 손가방에서 충격봉과 마취총을 꺼내어 들고 진욱과 유민을 목표로 육박해 왔고, 상점 앞에서 호객행위를 하던 상인들이 변장용 겉옷을 벗어 던지고 길을 막았습니다. 거리라는 무대에 행인이라는 단역 배우로 출연한 시민들 중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윤리청 보안요원이라는 국가기관원으로 변신하여 사방에서 몰려들었습니다.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한 진욱은 저항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경우 진욱은 주위의 일반 시민들로부터 도움을 구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시민A는 시민B가 갑자기 밉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전에 만난 적이 없었고 우연히 같은 거리를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을 뿐인데 시민A는 시민B가 오랜 원수인 양 눈에 거슬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시민A는 기어코 시민B에게 한 주먹 날렸습니다. 스스로도 싸울 이유는 없다고 생각되었지만 이유는 만들면 된다는 생각이 또한 떠올라 팔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시민A는 시민B의 턱에 자신의 주먹이 명중하는 순간 상대의 티셔츠가 빨간 색깔임을 발견하고 분노의 정당성을 찾았습니다. 건방진 녀석! 감히 빨간 색깔의 옷을 입다니! 빨간색은 피의 색깔이고 나는 피를 싫어하는 평화주의자란 말이야!
여인A는 연인인 남성A에게 투정을 부리고 싶어졌습니다. 이유? 이유는 찾으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남자는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그럴싸하게 늘어놓으면서도 몇 달 전인가의 약속에는 15분이나 늦게 나왔었어. 가볍게 보고 있다는 증거. 흥! 혼자 걸어 보시라구요! 헤어지는 기념으로 한 주먹 꽝!
진욱을 잡으려고 쇄도하던 보안요원들은 갑자기 혼란을 일으킨 행인들에게 방해를 받고 신경질이 되었습니다. 목표물이 눈앞에 있는데 이게 웬 훼방꾼들이람. 겸손하고 예의 바르기로 소문이 높던 시민들이 이 무슨 난폭한 행동? 이곳은 최고의 선민들만으로 이루어진 청정지구의 수도인데 이건 수치라구. 충격봉의 맛을 보아야 질서를 존중하는 평소의 시민들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공격이야. 공격이라구!
보안요원들의 충격봉과 마취총이 혼란을 일으킨 시민들을 다스리는 양을 본 다른 시민들은 문득 이 나라가 민주국가임을 자각하고 분노가 일었습니다. 법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국가윤리를 주관한다는 윤리청 소속의 보안요원들이 선량한 시민들에게 이 무슨 행패인가. 좋아. 법이 먼저 규범을 어겼겠다? 차후에 더 큰 법에 호소하여 다스리기로 하고 우선은 시민 된 권리를 지켜야겠어. 싸워야지. 싸우자구!
보안요원들이 뜻밖에 반발이 완강한 시민들과의 싸움을 끝내고 그 지역을 돌파했을 때는 도망자인 진욱은 이미 종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저씨, 쫓기고 있어요?”
위기를 벗어난 진욱이 가로수의 그늘 아래에 유모차를 세우고 한숨 돌리고 있을 때 유민이 품속의 곰인형을 토닥거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습니다. 진욱은 갑자기 황당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가 어쩌자고 이 아이를 끌고 다닌담. 아무 곳에나 유모차를 세워두고 도망치면 윤리청의 사회복지국에서 잘 처리해 줄 텐데. 인질범으로까지 몰렸지 뭐야.
“격리지구에서 도망쳐 왔어요?”
유민은 진욱의 속셈도 모르고 그렇게 천진하게 묻고 있었습니다. 조금은 미안해진 진욱은 다시금 유모차를 밀어 그곳을 떠났습니다. 곰인형의 엄마를 찾아줄 방법은 없을 터이므로 유민을 보호자에게 인계하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해소할 결심을 하고, 어느새 곰인형을 안은 채로 잠이 든 유민의 의식 속으로 자신의 의식을 들이밀어 정보를 얻으려 하였습니다.
여인은 자신에게 격리지구행의 통지가 날아왔음을 어린 딸에게 알려줄 수 없음이 슬펐습니다. 딸은 이별을 비극으로 의식하지 못할 만큼 어렸던 것입니다. 하기는 딸이 사리를 알만큼의 나이였다 해도 다가온 불행은 딸과 나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여인은 역시 혼자만의 비극으로 받아들이려했을 것입니다. 여인은 지난주의 검진 때에 모발의 색깔이 변하고 있음을 지적하던 의료요원이 윤리청에 보고했으리라 짐작되어 그때에 뇌물을 쓰지 않은 자신의 무지를 탓했지만 이미 오염된 인간으로 낙인찍힌 후인지라 격리지구행을 피할 방법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여인은 어린 딸과의 마지막 날을 청정지구의 수도에서도 가장 공기가 맑고 경관이 아름답다는 자연시범공원에서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날 여인은 어린 딸에게 자연공원의 온갖 전시용 청정 생물들을 구경시킨 후 유모차에 태워 공원의 한곳에 남겨 두고 청정지구를 떠났습니다. 윤리청 산하 복지기관이 보호해 줄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었는데, 격리지구로 향하는 호송차 안에서 여인은 내내 곰인형을 안은 딸이 공원의 곳곳을 헤매며 엄마를 찾는 아픈 상상을 떨치지 못해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진욱은 유민이 꿈속에서나마 엄마를 만나도록 도왔습니다. 유민의 기억에 개입하여 아슴푸레 떠오르던 엄마의 모습을 실제처럼 느끼도록 수정해 주었고, 가장 따뜻하고 포근한 엄마의 품을 선물하여 평안을 얻도록 하였습니다. 진욱은 엄마 품에 안기어 어리광을 부리는 꿈을 꾸던 유민이 방긋 행복한 웃음을 흘리는 양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역시 운명이었다. 나는 이 아이의 보호자역을 버릴 수가 없겠다……
그날 이후 유민을 태운 유모차를 밀고 청정지구의 곳곳을 떠돌게 된 진욱은 곱절 이상으로 늘어난 위험을 감수해야 하였습니다. 곰인형을 안은 어린아이, 그 아이를 태운 유모차, 유모차를 밀고 허겁지겁 옮겨 다니는 20대 후반의 부랑자…… 그토록 노출된 도망자도 없을 터이므로 윤리청의 사주를 받은 추적자들은 내킬 때마다 습격을 하곤 하였습니다. 게다가 상당한 액수의 현상금까지 걸려 있었기 때문에 진욱이 여러 성향의 추적자들에게 시달림을 받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범죄자 사냥을 직업으로 삼는 전직 사격선수 류는 예고 없이 찾아온 윤리청 관리의 언동에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때의 상황을 돌이켜보려고 애썼지만 쉽사리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77이라는 번호표가 붙은 의료복을 입고 억양이 없는 목소리를 구사하던 예의 윤리청 관리는 현상범의 사진을 꺼내 놓고 사진의 주인에게 걸린 현상금의 액수와 체포 방법 등에 대해 설명하다가 범죄자의 인상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에 갑자기 어법에 맞지 않는 대사를 늘어놓았던 것입니다.
“이 범죄자의 외양은 더할 수 없이 선량해 보이지. 잘 다듬어진 얼굴에 악의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맑은 두 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범죄자를 대하고 있다는 느낌이 사라지고 색다른 기분이 된단 말이야. 어떤 기분이냐구? 웃고 있는 느낌. ‘우린 친구야!’하는 의식이 전달되는. 어떤 기분이냐구! 웃고 있는 느낌. ‘우린 친구야!’하는 의식이 전달되는. 어떤 기분이냐구? 웃고 있는 느낌. ‘우린 친구야!’하는 의식이…”
우스운 친구였어. 같은 대사를 몇 번인가 반복하더니 갑자기 작별인사를 하였어. 그 사이에 약간의 여백이 있었던 듯도 싶기는 하지만…… 그가 내게 무언가 힘을 행사했을까? 아냐, 없었어. 기억에 없는 걸. 그 친구, 생긴 건 단단해 보였는데 ‘아니올시다’였어. 윤리청은 최고의 실력을 갖춘 일류 인물들의 집합처라는 소문이던데 그런 헤식은 친구도 있더군. 하기는 범죄자를 잡아다 주고 현상금을 챙기기만 하면 되는 입장인 내가 신경을 끓이는 것도 정상은 아니겠지.
류는 이번의 사냥감이 예사 인물이 아님을 몇 차례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후 깨달았습니다. 조준경의 십자 조준선 중앙 초점에 도망자의 상체가 놓여 있음을 확인하고 방아쇠를 당겼고, 마취탄이 명중하여 목표물이 쓰러졌음을 확인하고 총을 거두었는데도 평소 사냥물을 포획했을 때에 느끼던 만족감이 얻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 도망자는 류가 찾으면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곤 하여 전문 범죄자 사냥꾼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몇 차례인가의 실패를 거듭한 류는 망원렌즈를 이용한 원거리 사격이 효과가 없음을 깨닫고 범죄자의 가슴에 직접 총구를 들이대기로 작정을 하고 거리를 좁혀 갔습니다.
이즈음 진욱은 유민과의 떠돌이 행각에서 삶의 새로운 경지를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보호를 청한 다른 생명이 있다는 사실은 유민의 철부지 행동으로 인한 크고 작은 번거로움에도 불구하고 진욱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미더움을 선물했습니다. 유민이 곰인형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며 엄마 흉내를 내거나 여자아이다운 잔망스러움으로 진욱의 입성을 깨끗하게 해주거나 할 때마다 진욱의 유민에 대한 애정은 심도를 더해 갔습니다. 이 아이를 윤리청 사회복지국의 관리들에게 맡길 수는 없다……그들은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할 뿐 애정까지는 주지 않는 관료들이다…… 더구나 진욱은 유민에게서 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길을 인도 받고 있기도 하였습니다. 유민이 그랬거든요.
“아저씨, 쫓기고 있죠? 그럼 원로원을 찾아가요.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준대요.”
원로원. 핵전쟁 이후의 세계를 청정지구와 격리지구로 나누어 인류의 순수혈통 보호를 도모한 공로자들의 모임. 개인의 명예를 희생하여 전체를 살린다는 숭고한 뜻을 가진 인물들이 만든 그늘의 세력. 진욱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유민의 제안을 분석해 보고서 ‘그렇겠다’의 결론을 얻었습니다.
진욱이 유민의 인도를 받아 원로원행을 시작한 시각, 77번은 위원회의 노 원로들과 설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격리지구는 인류의 순수 혈통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대들 젊은 위원들에게 인간 실험을 위한 공장을 만들어 주었던 게 아님을 어찌 모르는가. 그만 저 친구를 학대하는 일을 끝내고 돌려보내도록 하라.
-우리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능력을 가진 고급 지성체입니다. 기형의 인간들로 가득한 격리지구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슬픔과 절망과 악몽의 원천일 수 있지만, 저 친구라는 희망을 또한 낳아 주었습니다. 우리가 핵전쟁을 벌여 서로를 죽인 원인은 우리의 생명이 육체의 기능이 다함과 함께 소멸되고 만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음을 깨달은 데서 온 자기보호 본능에 있을 것입니다. 최초에 사소한 실수로 오발된 핵폭탄에 의해 손해를 본 한쪽이 공포를 느끼고 공멸을 노려 열 곱절의 파괴로 적국에 되돌렸고, 적국 또한 그러했으므로 지금과 같은 절망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저 친구는 우리의 그러한 약점을 보완해 줄 관념의 생물과 유사한 점이 많은 의사인간(擬似人間)입니다.
-관념의 생물이라면, 소위 영적(靈的) 완전 지성체라는 것을 말함인가?
-우리가 생각 속에서 안드로메다 성운 일주를 성공시켰다면 그것은 곧 가장 기초적인 관념 여행을 해낸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사고력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돌파하고 안드로메다 성운을 다녀온 것입니다. 저 친구는 우리의 미래형 모습의 표본과 같은 능력을 지녔습니다. 우리는 저 친구를 통해 우리의 미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핵전쟁 직후, 지구 세계의 대부분은 방사능이 가득한 오염지역이었고 극히 일부분의 청정지역에 인간다운 인간이 살아있는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선택이 청정지구와 격리지구의 구분이었다. 그대는 기왕의 일을 계속하더라도 우리가 원해서 이런 현실을 만들었던 것이 아님을 명심하고 인명의 손실을 피하도록 하라.
77번이 원로들을 설득하고 있는 회의장의 전면 스크린에는 유민이 탄 유모차를 밀고 원로원을 찾아 헤매고 있는 진욱의 모습이 커다랗게 비치고 있었습니다.
도망자 진욱이 범죄자 사냥꾼 류와 접촉한 곳은 원로원이 있다는 번화가의 입구였습니다. 진욱은 진작 류의 직업의식에서 비롯된 적의를 감지했습니다마는, 예술가의 작품에의 열정과 발명가의 창조에 대한 추구, 도박사의 승부 의식 등과 구별하기 힘들어 불의에 공격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전문 범죄자 사냥꾼의 살기를 여타 전문분야의 사람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와 구별하게 되었으므로 능동적인 대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진욱은 류가 자신이 남긴 잔류 영상에 총을 쏘곤 하는 양을 안전한 곳에서 지켜보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류가 시각과 추리만의 공세를 버리고 총구를 직접 사냥물의 가슴에 들이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사정은 달라졌습니다. 진욱은 다가오는 위기의 실체를 감지하고 허겁지겁 도망쳤지만 유민이라는 피보호자와 원로원행이라는 진행 방향에 제약을 받고 있었으므로 모처럼의 도주도 유모차의 네 바퀴가 구르는 속도와 원로원이 있는 도시의 중심가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여, 쳇바퀴를 돌 듯 제자리 뛰기를 한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핵전쟁 피해자 위령탑’이 보이는 전쟁 공원 근처 아치형 육교 아래 도로를 지나던 진욱은, 육교 위에 세워진 조각상들에게서 강한 살기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달리 원로원으로 가는 길을 알지 못했으므로 발걸음을 빨리 하여 위험을 벗어나려 한 것이 진욱이 취한 대응책의 전부였습니다.
육교 위의 조각상들은 온갖 군상의 전쟁 피해자들을 형상화한 것이었는데, 그 중 여인상 하나가 우르르 굴러 떨어졌습니다. 진욱이 그쪽으로 주의를 돌린 순간 핵폭발 때에 고층건물 속에서 구원을 청하던 소년 소녀들의 모습을 조각한 집단 조각이 차례로 무너져 내렸고, 그 그늘에 숨어 구르듯 뛰어내린 장군상(將軍像)이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뽑아들어 진욱의 앞가슴을 겨누었습니다.
장군상의 주인공은 범죄자 사냥꾼 류였습니다. 드디어 목적을 이룬 류는 진욱의 앞가슴에 총구를 묻은 채로 자신의 범죄자 사냥 철학에 오점을 남긴 상대를 노려보았습니다. 20대 후반의 잘 다듬어진 외모를 한 사나이가 한 손으로 유모차의 손잡이를 잡고 다른 손으로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를 감싸 안고 있었는데, 윤리청 관리가 준 명령서에 기록된 바와는 다르게 기형의 기색이 보이지 않아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을 머뭇거리게 하였습니다.
이건 뜻밖에 격리지구 출신의 기형인간답지 않은 순진한 얼굴이군. 이런 친구가 요술을 했다? 어디에 그런 능력이 숨어 있었을까. 류는 자신의 일을 번거롭게 만든 범죄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총구로 턱을 밀어 고개를 들게 하였습니다. 역시 윤리청 관리가 예고한 바와 같이 맑은 눈이군. 그가 뭐랬더라? 순진한 얼굴로 ‘우리는 친구야!’한다던가…….
진욱은 자신과 시선이 일통된 범죄자 사냥꾼 류에게 정신통제의 길을 열고 하소를 시도했습니다. “우린 친구입니다. 총을 거두십시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류가 총구를 돌려 유민을 머리를 겨누었습니다. 류는 진욱의 ‘우리는 친구…’의 메시지를 접하자 순간적으로 절도를 잃고 동물적인 발작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놀란 진욱은 강하게 류의 행동을 제지했습니다. 안 돼! 이건 친구끼리 할 일이 아냐! 순간, 류는 행동을 멈추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강한 반발에 부딪친 듯 얼굴이 삽시간에 새빨갛게 충혈 되고 머리카락이 올올이 곤두섰습니다. 누군가 이 사람의 정신 속에 장벽을 만들어 주었나보다…… 진욱은 류의 반발이 일찍이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도발적인 성질의 것이었던지라 심력을 최고로 높여 대항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총을 겨누다니 이 무슨 무도한 짓인가?
류의 두뇌 속에서 윤리청 관리가 심어 놓은 왜곡된 심리 상태에서의 어떤 명령과 진욱의 인간애에 호소하는 설득이 번갈아 파동쳤습니다. 77이라는 숫자가 쓰인 명패를 단 윤리청 관리는 류에게 투쟁성이 강한 최면의식을 심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가 ‘우린 친구야!’할 경우 그대는 기형인간 따위와 친구가 될 수 없는 청정인의 진면목을 보여야 한다. 방법은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총알을 선물하는 것이다.”
한참의 혼란을 치른 끝에 류는 총구를 먼발치에서 구경하고 있는 시민들에게 돌렸습니다.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심신이 제멋대로 행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순간, 그의 잠재의식 속의 윤리관은 예의 77번의 목소리로 대변되어 반발을 해왔습니다. “무슨 짓인가? 청정인에게 총을 겨누다니! 이런 기형적인 행동을 하는 인간을 위한 대비로 격리지구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진욱 또한 류를 만류하고 나섰습니다. “안 돼! 우린 모두 친구야!”
류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입가에 거품을 흘리며 눈을 뒤집고 쓰러졌습니다. 류의 총구로부터 유민을 지켜낸 진욱도 무척이나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진욱은 이마의 땀방울을 훔치며 생각했습니다. 나 외에 그의 정신계에 영향력을 행사한 이가 있었다. 그것도 나 이상의 강한 힘으로.
-강하게! 더욱 강하게!
77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의료복을 입은 유전공학자는 수족관 속의 진욱에게 그렇게 강요했습니다. 진욱은 투명 유리로 밀폐된 수족관 속에서 일각일각 줄어가는 산소를 아쉬워하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탈출하라! 너는 지옥으로부터 살아 나온 특수 생명이다! 유리상자 정도에서의 탈출은 네게는 가벼운 놀이에 불과하다! 어서 유리벽을 깨고 탈출하라!
77번은 진욱을 극한 상황 속에 가두고 스스로 탈출해 나올 것을 강요했습니다. 진욱이 가졌음이 확실한 어떤 능력의 폭발을 기대한 상황 설정이었습니다마는, 기실 진욱은 생사의 기로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시시각각 물은 수족관을 채워왔고, 공기가 차지하는 공간은 줄었습니다. 수족관의 유리벽을 발로 차보았지만 강화유리로 된 유리벽에는 작은 충격도 줄 수 없었습니다. 진욱은 괴로움에 몸부림쳤고 이윽고 필요한 만큼의 산소를 공급받지 못한 두뇌가 기능을 상실하자 정신을 잃었습니다.
분노와 당황, 그리고 삶에의 갈망으로 정신동력을 강화시켜 인간의 한계를 돌파해 보이기를 기대한 77번의 실험은 매번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77번은 오히려 실험의 강도를 높여 피실험자의 분발을 강요했습니다. 3개월여의 시간 동안 음식물을 공급받지 못해 탈진하여 쓰러졌던 진욱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77번은 실험의 성과를 피실험자인 진욱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너는 역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초생명적인 존재임이 확실하다. 인간에게 가장 가혹한 함정인 외로움과 굶주림의 한계를 훌륭하게 돌파해 내었다. 더욱 분발하라. 너는 발전하고 있다.
77번의 설명에 의하면 진욱은 밀폐된 장소에 갇혀 외부와의 교통이 끊기고 식량을 공급받지 못하게 되자 스스로 가사상태에 들어가 극히 적은 양의 에너지만으로 생명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정상인이라면 두 주일을 견디기 힘든 환경 속에서 석 달씩이나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진욱 자신에게는 괴로운 시련일 수밖에 없는 그러한 사건들은 77번에게는 매번 경이로 받아들여졌고, 그 결과 이번의 수족관 속의 익사 위기와 같은 극한 상황이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정신을 차린 진욱에게 77번은 여간 노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는 칼날처럼 진욱의 정신계에 침입해 상처를 주었습니다.
-인간 중의 어떤 부류는 심신에 충격을 받으면 생명능력의 폭발적인 향상을 보인다. 이는 일반인이 위기 상황에 놓였을 때 우발적으로 나타내는 순간 증폭과는 다른 상시적인 현상이므로 개인의 체질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는 네게서 그러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모든 방향의 시술을 하였다. 고로 이번의 실험에서, 너는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애써 기피하여 실패를 조장했음이 확실하다.
그날 진욱은 77번이 조종하는 기계가 발하는 라디오파의 공격에 진종일 시달려야 했습니다. 라디오파의 공격은 진욱의 두뇌에 번민을 주는 고문의 의미 외에, 의도가 의심스러운 목적성의 세뇌를 또한 겸하고 있었습니다. 탈출하라! 너는 할 수 있다! 이런 어려움을 감수하다니 얼마나 비겁한 짓이냐? 완충지역 건너 청정지구에는 평화가 있다는데 왜 찾아가지 않느냐? 진욱은 몸부림쳤습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내게 무엇을 바라고 이런 시련을! 그러나 진욱의 저항은 장벽에 막힌 양 외부로 나가지 못하고 탈출에의 욕구만 더욱 증폭될 뿐이었습니다.
범죄자 사냥꾼 류의 배후에 77번이 있음을 느낀 진욱의 감상은 옳은 것이었습니다. 77번은 진욱이 류를 제압하는 광경이 영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대형 모니터 앞에서 낮게 탄성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저 친구는 또 한 번의 시련을 돌파해 냈어. 이로서 성공에 한 걸음 다가선 셈이군.
77번의 옆에는 78번의 의료복을 입은 여의사가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우린 죄를 짓고 있어. 격리지구를 만든 본래 목적은 기형의 사람들을 치료하여 정상의 생활로 돌리는 것이었는데, 이 이는 너무 욕심이 많아. 두 사람은 부부였기 때문에 비밀이 없는 사이였습니다. 78번의 연민에 젖은 눈길이 유민에게 집중되고 있음을 감지한 77번은 낮게 중얼거렸습니다. 어쩔 수 없다오. 이런 비상수단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 상황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찾을 수 없다오. 77번은 진욱이 자신의 손길에서 벗어난 후부터 모니터 스크린을 통해 시종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진욱은 거듭되는 탈출에의 강요에 못 이겨 염동력을 발휘했고, 철창을 구부려 탈출구를 만든 후 격리지구 밖으로 내달았습니다. 격리지구와 청정지구 사이의 완충지역 격인 사막을 가로질러 달리는 진욱의 뒷모습을 보며 77번은 속으로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네가 인간 한계를 돌파하는 날, 나는 네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류의 공격을 벗어나 번화가로 진입한 진욱과 유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인 요새로 불리는 전투로봇의 대군이었습니다. 지난 전쟁의 종반에 대량 감소한 인간군(人間軍)을 대신하여 등장한 전투로봇은 청정지구의 대도시를 보호하는 방위군의 주축 군력이었는데, 진욱의 원로원행을 저지하기 위하여 동원된 것이었습니다.
로마군단의 보병부대와 같이 강철 범퍼를 나란히 한 무인요새의 대군이 조용히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전투로봇이 무인요새로 불리며 청정지구의 최대 전력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임무를 맡으면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완벽하게 해치우는 냉정성에 있었습니다. 지구세계 2088년 체제의 최종 보호막인 전투로봇 군단과의 대전을 앞둔 진욱은 일대 위기를 맞은 두려움으로 가늘게 떨고 있었습니다.
격리지구 출신의 기형인간이 청정지구에 잠입했던 경우는 진욱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탈주 기형인간의 대부분은 윤리청 보안요원들의 검색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붙잡히곤 하였습니다. 일개 기형인간의 체포를 위해 전투로봇의 대부대가 동원된 일은 사상 처음이었으므로 명령을 내린 77번은 내심 기꺼워하며, 진욱이 마지막 시련까지도 견디어 주기를 간절히 빌고 있었습니다.
전투로봇의 첫째 무기는 완력이었습니다. 영구동력의 꿈을 이룬 고성능 태양전지를 동력원으로 하는 전투로봇 군단의 무분별한 돌격은 청정지구를 철벽의 요새로 만든 최대의 전력이었습니다.
무인요새의 대군 앞으로 진욱과 유민의 유모차는 굴러갔습니다. 진욱은 적이 길을 열어 주기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기계에 대한 정신통제는 불가능한 시도였습니다. 유모차가 전투로봇이 휘두른 강철제의 팔에 박살나는 순간, 진욱은 유민을 끌어안고 뒷걸음질을 치는 것으로 겨우 위기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전투로봇은 다시 팔을 휘둘러 공격해 왔습니다. 한 발짝, 두 발짝, 이리 팔짝, 저리 훌쩍……. 위험 속을 헤엄치며 전투로봇의 동력이 멈추기를 기원하는 진욱의 심신은 과도한 정신력의 소모로 일순간에 수십 년의 노쇠를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이 백발로 변색되고 주름이 늘고…… 그러나 역시 무생물에 대한 정신통제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인요새로부터 대인(對人) 미사일이 발사되었습니다. 전쟁기술만이 발달된 문명…… 전란이 낳은 파괴예술의 결정판인 대인 미사일이 진욱과 유민을 노리고 일직선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모든 힘을 집중시킨 진욱의 정신계 안에서 미사일의 움직임이 활동사진의 느린 화면처럼 각 장면으로 세분되어 읽혀지고 있었습니다. 진욱은 미사일이 명중할 찰나 유민을 안고 나비처럼 날아 12차선 대로의 중심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인간의 체온을 따라 추적장치가 가동되는 대인 미사일은 진욱의 순간적인 움직임에 속아 관성운동을 계속하여 건물의 벽을 강타하고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노력으로는 위기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대로의 중심은 차선 전체가 스스로 움직이는 자동도로였는데, 진욱이 유민을 안고 내려서자 갑자기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놀란 진욱이 몸을 날려 달렸지만 자동도로는 연쇄적으로 무너져 내려 진욱과 유민을 땅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자동도로의 지하에서는 핵전쟁 당시에 건설된 거대한 방공호가 검은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진욱은 한참의 추락 끝에 바닥에 닿았습니다. 힘들여 몸의 균형을 잡아 서는 것으로 유민을 보호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이번에야말로 피할 수 없는 위험이 뒤를 따랐습니다. 파괴된 자동도로의 파편이 우박처럼 떨어져 내려 지하호를 메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진욱은 유민을 끌어안고 몸을 동그랗게 말아 웅크렸는데, 빠져나갈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피신의 방법이 그것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크고 작은 콘크리트 조각들이 연이어 떨어져 내려 유민을 감싸고 있는 진욱의 등을 강타했습니다. 아픔 이상의 충격을 받고 정신을 잃어가며 그 찰나의 순간 진욱은 뜻밖에 한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아아, 그때에 어머니도 나를 이렇게……
그 격렬한 핵전쟁의 와중에서 파괴된 지하호 속에 갇힌 어머니가 나를 낳았지. 돌덩어리가 무더기로 무너져 내려 시시각각 공간이 좁아지는 상황 속에서 모체가 생명의 씨앗을 지키는 길은 스스로 돌연변이가 되는 방법뿐…… 젤라틴의 덩어리 속에 내가 있었어. 개구리의 알처럼 보호되고 영양을 받고. 이젠 편안해. 시련 따위는 없어. 어머니와 같은 길로 돌아가는 거야. 모태로…….
같은 시각 77번 부부는 진욱과 유민이 파묻히고 있는 장면이 나타나고 있는 모니터 스크린을 지켜보면서 간절히 빌고 있었습니다. 너는 할 수 있다! 너는 그 전쟁 이후 7년 세월 동안 강력한 뇌파를 발사하며 구원을 기다렸던 초인이었다! 77번은 전날 진욱을 끌고 찾아갔던 위원회에 올린 보고서의 내용을 되새기며, 간절히 진욱의 분발을 빌었습니다.
-이 기형인간은 발견되었을 때 연질의 단백질 덩어리 속에 숨어 구원을 청하는 뇌파를 발사하고 있었습니다. 난태생 동물의 알이 보호를 받듯 젤라틴 상태의 단백질 덩어리 속에서 생명의 씨앗은 열심히 구원을 청하는 메시지를 발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형식의 기형인간 발견이 최초의 일이었던지라 우리는 그의 생존방식이 정상인과 다른 점에 유의하여 모방생물이거나 인간중의 돌연변이가 아닌가-그 경우 어떤 메커니즘이 작용했는가-를 조사했습니다. 인간의 자격을 주지 않고 미성숙된 태아를 기르듯 그 생명의 씨앗을 인간으로 형성시켜 인간에 닮도록 조작을 가했습니다. 그 결과 의사인간으로 분류된 이 친구는 여타 인간에게서 볼 수 없는 정신교감의 능력 등 많은 초능력을 잠재한 강화인간류의 기형인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우리는 그에게 김진욱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2040년대의 번영의 시기에 살았던 천재 로봇공학자의 이름을 빌어서였습니다. 그때의 김진욱이 자동전자가구인 인간형 로봇을 개발하여 인간계의 삶의 질을 한 단계 높였듯이 이번의 김진욱도 같은 은혜를 베풀기를 기대한 목적격적인 작명이었습니다- 깊이 50m의 지하에서 7년의 생명을 이었고, 수십km 밖의 의료진에게 구원을 청했습니다. 즉,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관념교통 능력을 보유하여, 인간 한계 돌파의 가능성을 몸으로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피실험자가 스스로 실험 목적에 부합되는 능력의 발휘를 포기했으니 어찌할 수 없었다고 해야겠지요. 우리가 그를 구하려고 자동도로 밑의 지하를 파헤쳤을 때 -우리는 의도적으로 그를 그러한 곳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최초에 그가 발견된 환경과 유사한 조건을 주어- 그는 놀랍게도 어린 여자아이를 위해 자신을 단백질의 덩어리로 만들어 영양을 공급해 주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수고에 힘입어 소녀를 구해 낼 수 있었는데, 어떠한 메커니즘이 개입되었는지 -이제부터 규명해야 할 숙제일 것입니다- 소녀는 모태 안의 태아인 양 편안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피실험자가 육적 지성체로서의 한계를 돌파한 초자연적인 반격을 해 올 것을 기대하여 출구가 없는 함정에 몰아넣었는데, 그는 한 소녀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리는 것으로 우리에게 실패를 선물했던 것입니다.
실험이 실패로 끝난 후 우리는 모두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피실험자가 자신을 포기하여 다른 생명을 구한 경이를 보인 사실을 단순한 인간 변환의 기형적인 사례의 하나로만 받아들이기에는 우리의 지성이 지나치게 도덕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피실험자가 인간이었거나 인간의 형태를 한 또 다른 지적 생명체였거나를 막론하고, 피실험자가 보인 자기희생의 행동은 그것을 강요한 우리의 양심에 커다란 상처자국을 만들어 주었고, 우리는 그의 인격적인 지성활동을 몸으로 체험한 덕택에 우리의 가야할 바를 업으로 부여받은 셈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우주와 신의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를 만들며 역사를 쌓아갈 것입니다. 우리야말로 파괴와 건설의 악순환을 되풀이하면서도 현재의 문명을 이룩한 지구상 유일무이의 지성체로서, 현재의 정체를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음을 자부심으로 갖고 있고, 사실상 우리 이외의 대안이 우리에게 없음 또한 이번의 실험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인간의 이야기를 하며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우리 이상의 존재, 이를테면 신의 경지에 놓고 싶어 하였으나, 이번의 실험은 아직 인간의 이야기를 버릴 수 없다는 교훈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바라던 경지는 -관념의 교통이 가능한 세계를 찾고자함이 이번 실험의 목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꿈속에서 먼 외계의 도시를 여행했다면 그것이 곧 관념여행을 성공시킨 것과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현실계에 꿈을 대입시킬 방법을 연구했던 것입니다- 가장 근사치의 능력을 가졌음이 확실한 한 미지의 지성체가 보여 준 자기희생의 행동 덕택에, 육적 지성체에 속하는 현재의 우리로서는 무리라는 결론을 얻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겨우 우리가 속한 세계 안에서 여러 가지 인간의 이야기들을 나누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미완성의 불완전지성체였던 것입니다.
끝으로 예의 의사인간이 몸을 버리면서까지 보호하려 했던 소녀는 우리의 일원인 77번과 78번 부부가 양녀로 맞아 잘 기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며, 이만 아프지만 아름다운 실패로 끝난 어떤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잠시 먼 미래를 여행하고 가는 느낌입니다.
그곳에도 인간성과 비인간성이 공존하나 봅니다.
사람 사는 곳으로의 설정인데 어딘들 그렇지 않은 곳이 있겠습니까. 사랑과 욕망과 탐욕이 교차하는 건 모두 같겠지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미래의 가상현실을
풍부한 상상력과 직관력으로
다양한 인간의 심리상태까지 묘사한
형님의 수준 높은 글에 경의를 표합니다.
좀 아쉬운 것은
번호와 기호로 표시된 인물들도
사람 이름으로 바꿔주시면
이해하기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사람의 이름은
아무래도 미래의 가상소설이기 때문에
영어나 러시아식 이름이 어울릴 것 같군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확하게 지적해 주셨네요. 사실 제가 외국어에 엄청 약합니다. 정식 학력이 거의 무학에 가까운지라 외국어에 관계된 부분은 부러 기피하곤 합니다.
기왕에 충고를 주셨으니 다음 글부터라도 보완해 나가겠습니다. 선생님이 없이 배운 글이라서 약점이 많이 발견될 텐데 수시로 충고를 주세요.
방랑하는 마음에 들어와서 좋은 글벗들을 만나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독자는 가장 엄한 스승이라는데 그런 면에서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상현실.....이해 하도록 노력할게요
잘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