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지평선
‘사건의 지평선’은 할리우드 영화 ‘이벤트 호라이즌’을 소개한 어느 영화평론가의 글에서 처음 대한 말이다. 우리의 우주와 블랙홀 내부 초공간의 경계면을 뜻하는 ‘이벤트 호라이즌(Event Horizon)’의 번역이라는데, 시간과 공간이 운행을 멈추어 버린 블랙홀 내부를 짐작할 수 있는 초물리적 사건의 시작이 되는 우주라는 의미에서 그렇듯 의미심장한 말로 조화를 준 듯하다.
‘사건의 지평선’ 너머의 우주에서는 영화 ‘이벤트 호라이즌’에서 잘 묘사되었듯이 상식이 대접받지 못하는 우주가 펼쳐진다고 한다. 신비 현상이 정당화된 세계라고나 할까. 중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계가 되다보니 빛도 제 역할을 못하여 검은 구멍인데, 알려진 바와 같이 모든 것이 포로가 되어 있는 것만은 아니고 빛보다 빠른 어떤 입자가 수시로 탈출하여 “여기에 검은 구멍이 있다!”하고 외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반역하는 무리를 거느리기 마련이라는 속설이 증명되는 순간일 터인데, 우리 인류의 선조가 신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함으로 신의 노염을 사서 인간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어느 종교의 경전 내용을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 예상치 못한 엉뚱한 우주 속에서 해석이 난해한 물리 현상의 하나로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난해함은 그 엄청난 크기로부터 비롯된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해석하기 힘든 사건을 불가사의한 현상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우리가 신세를 지고 있는 우주야말로 불가사의의 대표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하루의 일과를 끝낸 저녁 시간에 모처럼 맞은 한가로움을 즐기고자 창문을 열면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 아름다운 별세계를 보게 되는데, 으레 곁에 있는 풍경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동화책을 보는 양 즐기곤 했던 별세계가 몇 광년, 몇 십 광년, 혹은 보다 훌쩍 뛰어넘어 몇 백만 광년 이상의 먼 곳에 있는 불덩어리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은,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말을 구태여 블랙홀 경계면까지 가져가지 않고도 확인할 수 있는 불가사의일 것이다.
우주라는 무대에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기본위적인가 하는 회의를 갖게 하는 사건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우리를 중심으로 우주가 돌고 있다고 생각한 고대의 과학은 한 예일 터이지만, 우리야말로 모든 현상의 중심이 되어 우주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고, 무리가 많은 듯싶던 예의 주장을 옳다고 편드는 견해도 있다. 당장 우주의 중간치 정도의 구성원인 우리 인간계만 하여도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 얼마나 많은가. 무한히 큰 우주에 대비한 우리의 크기가 한없이 왜소해 보임은 주지하는 바와 같지만, 무한히 작은 우주에 대비한 우리 인간의 크기도 한 몫 하는 모양이라 다소간 억지를 부려 중간치 정도의 구성원인데, 그 한낱 중간치가 ‘사건의 지평선’의 중심 되는 위치에 있다고 하면 옳다고 인정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마는, 우리의 탄생과 죽음은 경이 중의 경이로 모두가 인정하는 현상임과 함께 당사자인 우리에게 있어서는 존재의 생몰과 직결된 일대사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 않은가 말이다.
우리는 수시로 자문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인식하려고 든다. 태어나기 전의 우리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현재의 삶이란 과연 현실인가? 우리가 창조되었다면 목적이 있었을 터인데 터전으로 주어진 우주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우리는 창조주에게 무엇이 되는가? 우리의 탄생 이전에도 우주가 존재했음이 우리가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듯이, 우리의 죽음 이후에도 우주는 역시 존재를 계속할 터인데,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우주는 우리에게 무엇이 되는가? 우리의 죽음은 현상계의 상실인가, 또 다른 미로를 향한 도전인가?
태어나기 전의 사건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 모양이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 또한 딱히 ‘이것이 정답이다!’하고 정의된 논리가 없음이 사실이다. 종교들이 말하는 내세관, 혹은 부활론 등은 막연한 기대치일 뿐 물리적인 논거가 없음이 또한 사실이고 보면, 우리가 가장 많은 의문을 품고 가장 심각하게 고민하는 죽음이라는 이름의 사건이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관문이 아닐까 싶다.
현실계로부터 소외된다는 상실과 새로운 생애를 맞을지 모른다는 도약 중의 어느 쪽일지 정답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맞게 되는 죽음은 우리에게는 불안한 현실일 수밖에 없다. 영화 ‘이벤트 호라이즌’에서는 엉뚱한 시간과 상황 속을 헤매는 것으로 ‘사건의 지평선’을 표현하고 있는데, 예의 사건을 경험하는 주체가 우리 인간이고, 겪어야 하는 사건이 우리 인간계의 현주소의 극명한 표현인 데서 우리의 비극이 발견된다. 영화 ‘이벤트 호라이즌’은 “우리는 겨우 상황에 휩쓸려 들어 견디어 나갈 수 있을 뿐인 피동의 생물이었고,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상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도살장 입구의 가축에 지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을 일컬어 불완전지성체로 푼다고 한다. 상대역이 될 소위 완전 지성체가 어떤 경지를 뜻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의 현실은 ‘불완전’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음이 사실이다. 겨우 100년을 넘지 못할 생애 안에서 나고, 늙고, 병들고,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등으로 온갖 약점을 드러내고 살면서도, 그나마 아쉬움이 남아 어떻게 더 살 수 없을까 잔꾀를 부리는 게 인생 아닌가 말이다. 생애의 끝을 상징하는 죽음의 순간에 “여한 없는 삶이었다”고 행복해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야말로 ‘이벤트 호라이즌’의 실체가 된다는 주장이 성립되는 이유는 그런 까닭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탄생이라는 이름의 영문 모를 돌출로 인한 것이었고, 우주의 영겁한 시간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은 생애 안에서 경험한 기억이 전무한 탄생 이전의 세계를 논하기도 하고, 예의 짧음 속에 영원을 담아 영혼이니 영생이니 하는 초현실적인 개념을 예사로 희롱하는 존재이니 불가사의로 부르는 것이 어찌 이상한 일이겠는가. ‘사건의 지평선’이 인간계의 일상 속에 이미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당연한 이유는 우리 자신을 우리가 정의하지 못하는 불가사의에 대한 최선의 해석을 찾은 결과인 때문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하는 노랫말이 있다. 현실계에서의 삶도 현재 이후의 것은 미지의 것이라는 증명을 뜻하는 말인데, 예의 노랫말이 의미하는 사건에 죽음을 대입시켜 보면 보다 극적인 사건이 된다. ‘어느 시간, 혹은 어느 차원 속에 다시 태어나서 어떤 모습으로 누구를 만나 어떤 사연을 엮으며, 또 한 차례의 기막힌 생을 어떻게 엮고 다시 어떠한 모습으로 떠날 것인가’하는 의문은, 죽음이 연습을 허락하지 않는 단 한차례뿐인 단절이기에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다. 기왕에 보낸 일생 속에서 같은 공기를 숨 쉬며 맺어온 인연들에 대해 손을 놓기 아쉬워하고, 아쉬움이 지나쳐서 죽음을 슬픔으로 인식하고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발버둥치는 게 현실인 것이다.
내 가족, 내 친구, 내 소유에 연한 인연과의 단절이야말로 죽음으로 인해 맞게 되는 가장 큰 상실일 것이다. 슬픔은 현실에 대한 비관에서 오는 감정 표현일진대, 우리가 맞을 현실 중에서 가장 큰 관문인 죽음의 순간은 반역이 허락되지 않는 사건이기에 우리가 잃을 인연은 사실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고, 슬픔과 절망으로밖에 해석이 안 되는 사건인 것이다.
되돌릴 수 없는 상실의 순간을 피할 길이 없는 현실이야말로 우리의 죽음 현상이 기왕의 인연 따라 변화하는 ‘사건의 지평선’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태어나기 전의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었거나 혹은 아무 것이 되기 전이었다면, 기왕의 한 생애를 보낸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야 할 것이고, 가능하면 현실계에서의 인연에 연계된 무언가로 환생할 수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절박함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벤트 호라이즌’이 즐거운 행사일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첫댓글 이벤트 호라이즌 이란 영화에는 아직 못 본 것이라서요.
일단 줄거리를 찾아 보았네요.
우주에 관한 소재이지만 주제는 어찌된 것일지 예의 대한민국에서는 청소년 불가 등급이라는 것에도 주목이 되구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의 우주......
우리가 알아내지 못한 영역이 너무나도 광범위하여
그 존재자체도 이상향이되기도 하는 우주 ........
그 속에 한 점 나 ... 그래도 나 이외에는 내 입장에서는 그 무엇도 중요할 수 없을 것이기에요.
나 보다 무엇을 더 중요한 우위에 둘 수 있으려나요?
나의 존재 이전과 이후의 일....... 나는 물론 타인도 물리적인 논거로 증명할 수 없고 해서
존재여부까지 아니라고도 수긍하기도 어려운 일이겠지요.
심지어 우리가 이렇게 소통하고 있는 언어 조차도 인간이 약속한 것일뿐만 아니라
유기체처럼 다양하게 변화되는 실정이니요.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어 해 아래 새로울 것이 없다면서도
다시 도전과 비전을 가지라는 살아 볼만한 가치로운 것으로 격려하는 것을 보면요.
'요세푸스'......라는 책을 본 적이 있는데요,
물론 제가 가진 신념에 가감이 되는 사항은 아니었지만요.
그러나 지금도 나 자신에게 저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은 제가 살아 있음으로 당연한 상황일텐데요. 그렇다고 그 변화를 세밀하게 측정한 데이터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해서
변화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일것이고요.
이벤트 호라이즌 이란 영화가 흥미있을 거란 기대가 되는 말씀이구요.
이 생에서의 완전한 이별로 겪는 상실은 너무 많은 아쉬움과 아품을 갖게 하지요.
저의 경우는 ..... 지금 당장 불려가도 여한은 없을 거란 생각을 ...
각고의 노력에도 반드시 불려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상황에는 여한은 없이 받아들이겠다는 각오만은 틀림없습니다.
봄을 시샘하는 추위들이 한동안 함께 하겠지만
이미 봄은 와 있는 것 또한 섭리겠지요.
과하객 님의 글을 읽다보면 그 속에 담겨 있는 심오한 철학은 물론이지만
구성된 언어들로 즐거운 시간이 되네요.
요즘 분주한 일상들로 아쉬운 봄볕만큼이나 전광석화처럼 하루가 가네요.
환절기 건강하시구요. 평안하세요. 고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에 의문을 품는 것은 인류의 조상이라는 아담과 이브 시절부터의 숙업이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생명나무의 과실을 탐낸 것으로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위치를 확립한 결과를 낳았는데, 신께서 진정 우리를 사랑하신 증표라고 생각합니다.
'요세프스...'는 유대전쟁사를 말씀하시는지요. 예수님의 실존을 증명하는 최초의 역사서라고 하여 저도 본 적이 있는데 두 곳에 각 한 문단 정도씩 실려 있더군요. 후에 끼워넣은 문서라는 말도 있다지만 저는 사실로 보이더군요.
영화 '이벤트 호라이즌'은 그 이미지가 너무 강해 본래 줄거리는 오히려 거의 잊었는데 대강 기억해 보면...
항성간 여행을 하는 일가족이 블랙홀의 영역에 들어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초자아를 경험한다는 스토리였던 것 같습니다. 영화 '솔라리스'와 분위기가 유사하지만 조금 더 현실적인 SF영화로 기억하는데 아마 비슷하리라 봅니다.
전도서의 말씀을 인용하셨는데 저도 가장 좋아하는 성구 중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 얼마나 하찮은가 생각되어 신의 베푸신 뜻을 의심도 했지만 오로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걸 해결책으로 제시한 결론을 보고 욥기의 '주신자도 여호와시요...' 부분과 연계하여 감탄을 하였습니다.
부족한 글에 매번 좋은 평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엄한 선생님을 만난 기분으로 계속 글을 써 보겠습니다.
언어의 변화뿐만 아니라 우주 자체가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이지 싶습니다. 내 기억이 사라지는 순간 우주도 없다.... 어떤 책에서 종말론을 그렇게 풀어 놓은 걸 본 적이 있는데, 타당한 면이 있는 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확인해주는 존재가 있을 때만이 생성되는 입자가 있다고 풀어 놓은 양자론 책을 읽고서는 우주 역시 우리가 인증을 할 때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구요.
'나'야말로 우주의 주체가 아닌가 하는 경망스러운 생각도 가져봅니다마는, 저는 역시 '모르겠다'가 정답인 것 같네요.
카론샘 님의 '이제 불려가도 여한이 없다'는 경지가 부럽습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참 기막힌 인연으로 한세상 살아갈때
우리 서로 좋은 만남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삶을 살고 싶어요.
우리의 태어남은 그 자체로 기적이라지요. 인간이 있기 전의 40억 년 동안 죽어간 선주생물들은 모두 우리의 조상인데 살아있는 현재 속에 그 자취가 남아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혈액의 성분은 바다생물일 때의 자취이고 꼬리 뼈는 영장류로 진화하기 전의 흔적이고...하는 식의 이야기였습니다.
머지않아 또 한번 생명의 헤쳐모여를 해야 할 텐데 어찌 될 지 모르겠네요. 말씀대로 좋은 기억을 쌓으며 살아갈 밖에요.
좋은 댓글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1광년은 빛의 속도로 1년을 가는 거리입니다.까진 1,3초, 은 약 4000억 개,
태양까지 8분 25초,
태양계의 막내인 명왕성까지는 7시간,
북극성까지 970년,
우리가 속한 은하계의 지름은 약 10만 광년,
안드로메다 성운까진 250만 광년 떨어져 있고,
최근 1200만년 떨어진 곳에 있는
두 은하계의 충돌장면을 포착하였으며,
인간의 기술로 80억 광년 떨어진
은하계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 은하계의
은하계가 1000억 개가 모인 곳이
이 우주의 크기라 하는데....
여하간 상상불허 입니다.
형님의 우주와 인간의 생명에 관한
철학적 고찰을 대하며
잠시 잘난체 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인간은 참 묘한 존재라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하나 안에 전체가 있어 모든 것을 짐작하는 양 하면서도 커다란 결함이라도 있는 양 또다른 하나를 찾기 위해 죽을둥살둥 헤매고....
둘이 모여야 하나가 되는 계산은 손해가 분명한 결함인데 아무도 원망하는 이가 없으니 우리를 만드신 이의 안배는 참으로 오묘하다는 생각입니다.
소설이랍시고 쓰면서 우리야말로 해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언급하신대로 우주는 무한한 곳인데 그 크기를 가늠하려고 드는 우리라는 존재는 어디까지가 한계인가 싶기도 하고.....
변변찮은 글을 빠짐없이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끝이 있다면 끝 저편이 또 있을 테니 끝의 개념은 성립되지 않겠지요.
좋은 글 잘 익었습니다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
잘 읽고 갑니다.
영화 한편으로 이렇게 긴 글을 남기시는것을 보면 과하객님은 글꾼임임 분명합니다.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