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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해방운동가 최옥란 열사 15주기 및 2017 장애해방열사 합동추모제를 잘 치렀습니다.
올해는 매주 촛불집회가 열리는 광화문 광장 한복판인 세종대왕상 앞에서 진행됐습니다.
150여 명의 동지가 함께 모여 추모했고, 지나는 시민들도 함께 진보장애인운동의 역사와
그 역사 속에 산화해가신 장애해방열사/희생자를 함께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추모제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상임공동대표의 사회로,
95년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에 목숨을 잃은 이덕인 열사의 일기장의 한 구절로 시작했습니다.
혁명, 혁명하라.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그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 없는 오늘이 있을 수 없고 오늘이 없는 과거가 있을 수 없다. -이덕인 열사 일기장 중
또한 진보장애인운동의 역사를 4개의 시기로 구분하여 그 역사를 보여주고,
그 시기에 돌아가신 열사/희생자의 이름 및 당시 상황을 설명하였으며,
각 시기마다 한 분의 유서를 편집하여 낭독하였습니다.
진보장애인운동의 1시기는 1980년대~1990년 말까지로 잡았습니다.
이는 장애문제에 대한 사회적 대응의 시작, 진보장애인운동의 태동의 시기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낭독은 박현 동지가 해주셨습니다.
김순석
유서
염보현 서울시장님께.
나는 김순석입니다. 이 유서를 쓰기 4년 전인, 1980년 10월에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내 나이 서른에, 갓 태어난 아들도 하나 있었습니다. 3년 동안 투병 생활을 했지만, 원래 있던 장애가 더 심해져 끝내 휠체어를 타게 되었습니다. 살아갈 길이 막막했지만 절망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제대로 안아주지도 못했던 아들이 어느새 네 살이 되어, 아빠 힘내라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췄습니다. 셋방 옆 추녀 아래 세평 정도 작업공간을 꾸리고 머리핀과 브로치, 반지, 목걸이 등을 만들어 남대문시장에 납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겨웠습니다.
리어카와 좌판들이 빽빽이 들어찬 남대문시장 골목길에 제 휠체어가 들어서면, 사람들의 신경질과 욕설이 뒤통수에 따갑게 와 닿았습니다. 그까짓 냉대와 모멸감쯤이야 살아보려는 저의 의지를 다시 한번 다지게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휠체어를 탄 나에게 선뜻 주문하는 이는 많지 않았습니다. 겨우 주문을 받아내도 남들보다 싼값으로 계약하려 들었고, 막상 대금을 치를 때면 다음번엔 계약을 끊어버리겠다며 또다시 가격을 낮추기 일쑤였습니다. 억울하지만 참았습니다. 내가 더 열심히 일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도대체 움직일 공간을 만들어주지 않는 서울의 거리는 나의 마지막 발버둥조차 무참히 꺾어놓았습니다.
시장님! 우리는 왜 골목골목마다 박힌 식당 문턱에서 허기를 참고 돌아서야 합니까. 우리는 왜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놈의 문턱과 싸워야 합니까. 우리는 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지나가는 행인의 허리춤을 붙잡고 도움을 호소해야 하고, 우리는 왜 택시를 잡으려고 온종일 발버둥을 쳐야 합니까. 건너갈 수 없는 횡단보도, 들어갈 수 없는 식당과 화장실, 우리가 살 땅은 어디입니까. 장애인을 사람대접해주지 않는 세상, 우리가 가진 아주 작은 것조차 빼앗고 이용하려 드는 세상, 나는 더 이상 이곳에서 살 수 없어 이제 세상을 떠납니다. 부디 잘못된 세상을 바꿔주시기 바랍니다.
진보장애인운동의 2시기는 1990년대 말~ 2005년까지로,
진보장애인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보여준 이동권연대~전장연 준비위원회까지로 잡았습니다. 낭독은 김광이 동지가 해주셨습니다.
최옥란
유서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나의 아들, 준호에게.
너와 통화한 지도 꽤 오래되었구나. 하지만 엄마는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 너와 꼭 함께 살고 싶었는데 이번 생애에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엄마는 이제 지쳤단다. 너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멀리 떠나는 엄마를 용서해다오. 엄마가 어디에 있던 너를 지켜주마. 준호야, 사랑한다. 너무 보고 싶구나.
병태 형, 경석이 형.
나도 형들 같은 소아마비 장애인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시 태어난다면 절대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아. 이제는 버틸 힘이 없어. 너무나 외로워. 이 사회에서 나는 필요하지 않은가 봐. 형들은 내가 준호를 데려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지? 이제는 포기할래. 이 나라에선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아요. 내가 이루지 못한 것들을 형들이 이루어주세요.
김대중 대통령께.
나는 최옥란입니다. 서른다섯 살 장애 여성이며,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권자입니다. 한 달에 26만 원을 받지만 그것으로는 생활할 수 없어 노점을 했습니다. 하지만 소득이 33만 원을 넘으면 수급권에서 탈락한다는 기막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급권과 노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나는 1급 뇌성마비 장애인입니다. 정기적으로 받는 병원 치료를 위해 수급권은 꼭 필요합니다. 어쩔 수 없이 노점을 접었습니다.
그랬던 나에게 또다시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4년 전 이혼한 나에게는 아홉 살 난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너무나도 간절히 아이와 함께 살고 싶었습니다. 양육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선 통장에 어느 정도의 돈을 넣어두어야 한다고 변호사가 조언해주었습니다. 노점을 해서 번 돈과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700만 원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돈 때문에 또다시 수급권에서 탈락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수급권과 양육권, 둘 다 가질 수는 없다고,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대통령님,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돈을 모아서 아이를 데려오겠다는, 그 희망 하나로 살아왔는데. 이런 상황에선 아이를 데려올 수도 없고, 데려온다 해도 엄마의 가난과 장애의 짐을 그 아이가 다 떠안게 될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없다면 이렇게 힘든 세상, 더는 버틸 힘이 없는데. 대통령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지금 정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나의 작은 꿈을 다 빼앗아갔습니다. 다시는 저와 같은 동료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이 법을 고쳐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동료들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내가 다하지 못한 것들을 꼭 이어서 해주십시오.
2시기와 3시기 중간에 진보장애인운동을 해온 김종환 동지의 추모공연이 있었습니다.
열사 추모곡인 '봄날' 과 세월호 추모곡 '세월'을 공연해주셨습니다. 각 노래의 가사를 첨부합니다.
봄날
글, 곡 : 김종환
봄날은 따스한데 님의 흔적 간 곳이 없어 살아온 그날들이 가슴에 사무치네
봄날은 따스한데 님의 온기 산산이 남아 우리의 가슴속에 아롱져 타오르네
: 해방을 향해 온몸 불살라 어두운 산천 환히 비추니
열사여 아 열사여 해방의 투혼으로 함께하리니
열사여 아 열사여 장애해방 새 세상에 살아오소서:
열사여 아 열사여 해방의 투혼으로 함께하리니
열사여 아 열사여 장애해방 새 세상에 살아오소서
장애해방 새 세상에 살아오소서
세월
글, 곡 : 김종환
또다시 세월은 푸르러 그날 그 봄이
사무치는 먹먹한 슬픔 가슴에 가득한데
흘러가는 세월 속에 또 다시 그날 그 자리에
잡으려 애써 손 내밀어도 허공을 가르는 빈 손
가만히 있으라 거기 가만히 있으라
피맺힌 그 몸부림 속에 떠나간 원혼이여
아 짓밟힌 들녘의 슬픈 푸르름이여
여울여울 불타오르는 영혼의 깃발이여
가만히 있지 말라 뜨겁게 기억하리라
흩어진 그 절규를 모아 끝내 다시 만나리니
아 짓밟힌 들녘의 슬픈 푸르름이여
여울여울 불타오르는 영혼의 깃발이여
진보장애인운동의 3시기는 진보장애인운동의 대중화시기로 보았고, 2005년~2012년까지로, 전장연 준비위원회부터 전장연, 그리고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 공동행동의 농성 전까지로 잡았습니다. 낭독은 문애린 동지가 해주셨습니다.
우동민
나는 우동민입니다. 태어난 지 3일 만에 고열로 장애가 생긴 뒤 누워서 지냈습니다. 여섯 살 무렵 조금씩 기어 다닐 수 있게 되자,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나날이 커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이 집을 비운 사이, 나는 집 밖으로 기기 시작했습니다. 열린 대문 틈을 비집고 골목길로 나서자, 처음 보는 동네 아이들이 얼굴이 빨개질 만큼 힘껏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나는 넋을 놓고 그 모습을 쳐다보았습니다. 하지만 곧 아버지에게 발각되었고, 모진 매질을 당했습니다. 그 후 나는 밖으로 나가기를 포기한 채 살았습니다. 부모님께 폐를 끼치지 않는 착한 아들로, 흔한 사춘기도, 질풍노도의 시기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30년이 흘렀습니다.
서른셋의 나이에 장애인 시설인 명휘원에 들어가서 5년을 살다가 서른여덟에 자립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옛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세상은 다시 나를 가두려 들었습니다. 나는 싸워야 했습니다. 활동보조서비스를 얻기 위해, 버스와 지하철을 타기 위해, 일하기 위해, 그리하여 또다시 방구석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나는 한강대교를 기고, 도로를 점거하고, 삭발하고, 노숙농성을 했습니다. 미군 기지에 반대하며 평택 대추리 농로를 스쿠터로 달렸습니다. 그렇게 세상 밖으로의 포복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제법 평범한 직장인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는 탈옥에 성공한 뒤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느끼기 위해 두 팔을 벌립니다. 그 순간 그는 세상에 대한 복수심보다는 자유 그 자체에 집중했을 것입니다.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집이라는 감옥 바깥으로 나왔는데, 나는 자유로운가. 어쩌면 나는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감옥을 만들어서, 또다시 나를 가두어 버린 건 아닐까. 내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닐까. 내 나이 불혹을 넘었지만 생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살아온 날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자문해 보았습니다.
나는 다시 꿈을 꿉니다. 이번에는 내가 스스로 만든 마음속 감옥으로부터 탈출하는 꿈을 꿉니다. 늦기 전에 혼자 힘으로 외국에 나가는 꿈을 꿉니다. 아직은 너무 막연한 꿈이지만, 언젠가는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어 봅니다. 스스로 계획하고 부딪치고 넘어지면서도 다시 도전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립생활이라고 나는 배웠으니까요. 언젠가는 나도 멀리 여행을 떠날 수 있겠지요? 앞만 보지 말고 옆도 보고 뒤도 보며 그렇게요....
진보장애인운동의 마지막 시기는 2012년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공동행동부터 현재까지로 잡았습니다. 혁명의 시기에 함께 혁명을 이뤄야 겠습니다. 낭독은 김진석 동지가 해주셨습니다.
박현
나는 박현입니다. 열세 살에 꽃동네에 들어가 15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2011년 1월, 스물아홉 살에 서울에서 자립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자유롭게 살고 싶었습니다. 시설에서 나오자마자 노랗고 파랗게 머리를 물들였습니다. 특별한 존재로 살고 싶었습니다. 꽃동네에 사는 3천 명의 이름 없는 장애인 중 한 명이 아니라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나, 박현이란 존재로 인간답게 존중받으며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전입신고를 마친 후 종이 위에 쓰인 나의 주소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습니다. 마치 그것은 나와 이 세상을 연결하는 탯줄 같았습니다. 그것 하나 얻기가 그토록 어려웠습니다. 행복했으나 두려웠습니다. 집과 시설에서 평생을 살아온 나는 태아처럼 무력했습니다. 턱없이 부족한 생계비와 활동보조서비스를 받는 나에게, 하루 24시간은 한없이 길었습니다. 그 막막한 시간을 건너올 수 있었던 건 팔 할이 동료들의 덕이었습니다. 실의에 빠져있을 때 따뜻한 음식을 나누어주었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함께 손잡고 싸워주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통해 비로소 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탈시설 장애인들의 모임인 우리들의 이름은 ‘벗바리’. 누구도 포기하지 않도록 ‘곁에서 도와주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사람들은 강자가 사라져야 약자가 사라질 거라고 말합니다. 나는 순서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심장이 아닙니다. 가장 아픈 곳입니다. 이 사회가 이토록 형편없이 망가진 이유, 그것은 혹시 우리를 버려서가 아닙니까. 장애인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버리고, 병든 노인들을 버려서가 아닙니까. 그들은 가장 먼저 위험을 감지한 사람들, 이 세상의 브레이크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속도를 낮추고 상처를 돌보았어야 합니다. 상처 난 곳으로 온갖 악한 것들이 꿀처럼 스며드는 법입니다. 약자가 없어야 강자가 없습니다. 가장 아픈 곳으로부터 연결된 근육들의 연쇄적인 강화만이 우리를 함께 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생명을 포기하는 곳, 연대가 끊어지는 그 모든 곳이 시설입니다. 그러니 모두들, 탈시설에 연대해 주십시오.
연대발언으로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한 투쟁현장의 동지들을 모셨습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의 상임활동가 전성호 동지와 416연대 운영위원인 인권운동사랑방의 미류 동지가 연대발언을 힘차게 해주셨습니다. 두 분 동지의 발언 내용을 첨부합니다.
반올림 상임활동가 전성호
안녕하십니까. 반올림 활동가 전성호입니다. 반올림은 지난 몇 달 동안 토요일이면 늘 광화문역 9번 출구에서 전장연 동지들의 도움과 지지 연대를 받으며 투쟁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삼성의 잡범 이재용을 구속하기도 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너무도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장애인이동권 투쟁 당시 버스에 사슬을 묶고 처절하게 싸우던 박경석 동지와 여러 많은 동지들을 기억합니다. 경찰에 개처럼 끌려가던 그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렇게 도입된 저상버스가 조금씩 드러났고 지하철 엘레베이터가 조금 늘어났습니다.
삼성 직업병 노동자들 중에는 장애인들도 있습니다. 그분들이 강남역 8번 출구 노숙농성을 하려면 엘레베이터가 필요하고 장애인콜택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의 그동안 투쟁이 없었다면 강남역 노숙투쟁, 어려웠을 겁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의 투쟁은 여러분들만의 투쟁이 아닙니다. 이 땅의 어렵고 힘든 많은 이들을 위한 투쟁이고, 그 혜택을 받아보고 있습니다.
오늘 최옥란 장애빈민 열사를 비롯해 장애인권을 위해 투쟁하다 먼저 세상을 떠나신 많은 분을 추모합니다. 반올림도 장애인차별철폐투쟁에 함께 갈 것입니다. 그리고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 등으로 세상을 떠난 79명의 노동자들을 함께 기억해주십시오. 삼성이 직업병 피해 노동자들과 유족들에게 제대로 사과하고 정당하게 보상하도록 하는 반올림 투쟁에도 많은 연대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416연대 운영위원 미류
인권운동사랑방에서 활동하고 416연대에서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는 미류입니다. 반갑습니다. 어제 세월호가 수면 위로 완전히 올라왔고 그래서 오늘, 아니 어제죠. 어제 반잠수정에 실렸습니다. 아마 광화문 농성을 하면서 광장의 동료이기도 했던 여기 계신 분들이 가장 기쁜 마음으로 그 소식을 들었을 거로 생각합니다. 그러시죠? 조명이 강해서 사실 얼굴이 하나도 안 보이는데요 다들 한마음으로 기뻐하며 그 순간을 반가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인양은 이제야말로 시작입니다. 우리가 세월호를 뭍으로 올리자고 그렇게 인양하자고 했습니까. 조은화 허다윤 남현철 박영인 양승진 고창석 이영숙 권혁규 권재근 이 9명의 미수습자들을 만나기 위해서 세월호를 뭍으로 올리자고 했습니다. 왜 침몰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 참사에 원인을 찾아보자고 샅샅이 뒤져보고 조사해보자고 뭍으로 올리자고 했습니다. 목포신항에 세월호가 도착하면 그때야 인양은 시작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월호는 길이가 150미터정도 되고요 옆으로 누운 상태로 올라오면 21미터정도가 됩니다. 옆에 보이는 세종문화회관보다 더 큰 건물이 땅 위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9명의 미수습자를 찾아내야 하고, 295명이 남긴 흔적들을 최대한 찾아내야 하고 그 선체를 모두 조사해야 합니다. 하루 이틀 걸려서 풀릴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해양수산부가 이 정부가 해온 것을 보면 우리가 두 눈 똑똑히 쳐다보고 지켜봐야 우리가 원하는 인양을 이룰 수 있습니다. 작년 여름부터 해양수산부는 선체를 절단하겠다고 이야기해왔습니다. 여러분 혹시 그런 이야기 들으신 적 있나요?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왔는데 절단이 되면 우리가 원하는 인양이 이뤄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절대 안 됩니다. 어디에선가는 미수습자 가족들이 선체 절단을 원한다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을 하기도 합니다.
해양수산부가 왜 선체를 절단할 수밖에 없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대답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미수습자를 수습하기 위해서 그 방법밖에 없다고요. 해양수산부가 언제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어떻게 인양할지 결정할 권한이라도 준 적이 있습니까? 그런 것이었다면 왜 이제서야 인양합니까. 2014년 11월부터 인양하라고 그렇게 그렇게 애원했는데 왜 이제서야 뭍으로 올립니까. 한 번도 세월호 가족들을 위해서 인양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끝까지 함께 싸우지 않으면 우리가 원하는 인양은 불가능합니다. 바로 지금부터입니다. 지금부터 온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고 투쟁해주십시오.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이 안타깝고 유가족들이 너무 불쌍해서 돕고 싶은 것이라면 그 마음 잠시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서 누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버려지지 않기 위해서 이 아홉 명을 찾아야 하고 참사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그래서 우리는 함께 싸우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이 무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영상으로 비춰졌습니다. 김순석, 최정환, 이덕인, 박흥수, 정태수, 최옥란, 우동민, 김주영, 송국현, 박현, 우리가 다 외지도 못하는 이런 이름들, 그 죽음을 함께 기억하고 싶어서 우리가 이렇게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의 죽음도 모욕당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시신이 그 깊은 바닷속에서 그 뻘에 뒤덮여서 어떻게 녹아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이런 상황은 다시 엎어야 하기에 우리가 세월호를 인양하는 것입니다.
장애등급제는 무엇입니까.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할 권리에 등급을 매기겠다는 제도 아닙니까.
부양의무제는 무엇입니까. 생명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가족이 우선 나서서 구조하라고, 국가는 발을 뒤로 빼는 제도 아닙니까.
이런 제도를 그대로 두고 세월호를 인양하지 않고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지 않고 우린 누구도 살 수 있다고 우리의 생명이 소중하다고 우리가 서로를 지켜줄 수 없다고 약속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싸우고 있습니다. 박근혜를 끌어내린 그 힘으로 우리 모두의 생명이 평등한 사회를 우리 힘으로 반드시 만들어나가면 좋겠습니다. 함께 투쟁합시다! 감사합니다.
추모제의 마지막 발언은 장애해방열사_단 대표,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대표이신 박김영희 대표님의 추모발언 입니다.
힘찬 발언으로 2017 장애해방열사 합동추모제를 마무리지으셨습니다!
장애해방열사_단,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대표 박김영희
동지 여러분, 제가 반갑습니까? 왜 반갑습니까? 이제 끝이 날 거니까. 이제 집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거죠. 제가 예뻐서 반가운 게 아니셨죠.
어쨌든 동지여러분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 처음 시작을 뭐로 했습니까. 장애/빈민대회로 처음 시작했습니다. 자 우리 오늘 마무리를 뭐로 하고있습니까. 열사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나올 때 우리 옷 두껍게 입고 나가자는 이야기 많이 했었죠. 따뜻하게 입고 나오자. 우리는 매번 겪었습니다. 매년 오늘 이날 우리는 따뜻한 옷을 입고 나와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있습니다. 밤이되면 굉장히 춥죠. 언제부터 우리는 이렇게 투쟁하면서 3월의 마지막 주말 즈음에는 우리는 투쟁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을까요.
최옥란 열사는 가난하고 장애를 가진 여성이기 때문에 이사회에서 존재하고 있으나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이름이 있으나 이름조차 불리지 못했던 사람으로 그리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이승에서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15년 전에 그분은 이승을 떠났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죽어보지 않아서. 이승이 더 나은지 저승이 더 나은지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최옥란 열사가 돌아가신 지금 이승보다는 나을 거라고 믿고싶습니다. 그녀가 처절하게 울면서 외쳤던 가난과 장애라는 것을 그 처절함을 이제는 저승에서는 울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렇게 삶을 살아야 했던 장애를 가진 한 여성의 삶을 우리는 매년 326이라는 것으로, 빈민과 장애라는 것을 가지고, 가난과 그리고 기초법 이야기를 하면서 매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 우리는 무엇을 하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혁명하자고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장애가 있으므로 보호해야 한다고 지금까지 그런 삶을 살도록 강요해왔던 사람들이 이제는 우리의 목소리를 내면서 새로운 판을 짜자고, 혁명하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혁명이 그냥 말만 하면 되는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투쟁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해왔듯이,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우리는 계속 해나가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동지분들은 그 대선 후보자들을 따라다니면서 우리의 목소리 우리의 요구를 받아달라고 지금까지 투쟁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문재인이라는 후보한테 부양의무제 폐지하겠다는 말 한마디 들으려고 새벽부터 가야 했던 우리 장애인들의 삶을 그들은 모를겁니다. 장애인들이 아침 9시에 모이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게 이동했을지 과연 대통령 후보라는 사람이 알겠습니까? 그들이 그것을 알겠습니까? 그 전날부터 잠 못 자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장애인콜택시를 부르거나 아니면 지하철을 타면서 추위에 떨면서도 그렇게 찾아가야 했던 그 이유를 그들이 알기나 하겠습니까?
아마 최옥란 열사가 여기 살아있었다면 그는 아들이 성장하면서 부양의무제 때문에 또 죽어야 하는 자신을 생각하면서 울어야 했을 것입니다. 최옥란 열사 같은 사람이 아직도 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 부양의무제 때문에 내 목에 칼이들어오는 것처럼 살아야하는 장애인들이 바로 내 자신이고 바로 우리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대통령 후보라는 사람들을 한사람한사람 찾아다니면서 약속을 받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받고도 우리는 의심이 갑니다. 하도 거짓된 약속을 많이 받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불신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뒤통수 치는 짓을 너무 많이 했었기 때문에 우리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확실하게 도장 받을 때까지 대통령 후보들에게 우리의 요구를 정확하게 받아내는 투쟁을 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삶은 우리가 변화시키고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지, 그들이 만들어주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끝까지 투쟁할 겁니까? 왜 해야 합니까? 살기 위해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이라는 사람들, 정치인이라는 사람들, 그들은 권력을 위해서 그렇게 살고 있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위해서 살고 있고, 우리가 이렇게 살지 않으면 다음의 장애인들이 우리와 같은 삶을 살기 때문에 우리는 끝까지 투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동지 여러분, 오늘 여기서 추위에 떨면서 우리가 이렇게 추모제 했던 거, 그리고 이 앞에 있는 열사들의 삶을 더이상 슬픔과 좌절과 포기로 그렇게 사는 삶이 아니라 더 끝까지 투쟁하면서 이름을 남기는 그런 투쟁의 삶을 살도록 우리 함께 끝까지 투쟁합시다. 동지들과 같이 함께 가겠습니다. 투쟁입니다. 투쟁!
추모제가 진행되는 반대편인 해치마당에서는 대구시립희망원의 309명 희생자를 추모하는 추모관이 설치됐습니다.
지나가는 많은 시민들이 소리없이 죽어간 장애인 희생자를 추모하고 귀를 귀울였습니다.
장애해방운동가 최옥란 열사 15주기 및 2017 장애해방열사 합동추모제를 잘 치렀습니다.
장애해방열사의 정신을 계승하여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하겠습니다.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장애인수용시설 꼭 폐쇄시키겠습니다!
장애해방 그날까지 열사들의 정신으로 끝까지 투쟁하겠습니다!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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