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원피스의 교훈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30대에 혼자되신 엄니는 어린 4 남매를
데리고 아버지가 운영하던 양복점을 맡아서 하시게 되면서 집에는 일하는 식모를 두게 되었다. 그때는 배가
고픈 시절이라 시골에서는 밥만 먹여 주어도 남의 집으로 식모살이 하러 오는 어린 여자아이가 많았다. 엄니는
나보다 2살 많은 명자라는 식모에게 2살이던 막내 여동생을
돌보는 일과 살림살이를 맡기고 양복점에 출근은 하셨다. 그러나 성당에서 초상이 나면 모든 일을 제쳐
놓고 달려가셔서 염을 하고 수의를 갈아 입히는 등 궂은 일을 도맡아 하셨다. 엄니는 죽은 사람이 조금도
무섭지 않고 사체에서 나오는 오물도 더럽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시신을 만지고 오면
오히려 몸이 가볍고 건강해진다고 했는데 아마도 세상을 떠나서 천국에 가는 사람을 잘 보내드린다는 믿음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양복점 일은 재단사 아저씨에게 맡겨놓고 성당 일에만 열심을 내다가 보니 자연히 재단사가
주인행세를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재단사가 그 동안 우리 집의 단골손님들이었던 중앙청 직원들의 외상
대금을 몽땅 받아서 사라져 버렸다. 엄니는 부득이 양복점을 접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양복점의
문을 닫게 되자 외할머니가 용인에 있는 땅을 팔아 돈을 마련해서 양복점 자리에다 미제물건을 팔도록 해주셨다. 가게가
중앙청 옆 문 바로 앞에 있었고 중앙청 옆 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공보실 건물이 있었다. 당시에는 동시녹음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영화가 촬영 후에 녹음을 따로 해야 해서 배우들이 녹음을 위해서 공보실로 와야 했다.
왜냐하면 녹음 시설이 공보실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유명한 영화배우들도 우리 가게에
많이 드나들어서 장사는 잘 되는 편이었다. 깜찍하게 예뻤던 배우 엄앵란이 황정순 씨와 팔짱을 끼고 와서
미제 껌이나 초콜릿을 샀었고 또 김의향이라는 아주 예쁜 배우도 왔었다. 그러나 엄니는 여전히 성당에
초상이 났다 하면 성당으로 달려갔다. 가게는 중학교 1학년이던
나에게 맡기거나 우리 집에서 유학 중이던 대학생 외삼촌에게 맡기거나 심지어는 식모에게도 맡겼으니 장사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어느
날은 엄니가 명자 것과 내 것으로 파란 원피스 두 벌을 만들어 오셨는데 나는 식모와 같은 옷을 입는 것이 너무 싫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식사 시간 때 물심부름은 꼭 나를 시키셨다. 내가
싫어서 꾸물거리는 사이에 명자가 일어서서 물을 가지러 가려고 하면 엄니는 명자는 앉아 있으라고 하고 나에게 “물을
가져오지 못하고 왜 꾸물꾸물 대냐?”고 야단을 치셨다. 여름이면
그래도 괜찮지만, 겨울엔 정말 일어나기 싫었다. 하지만 엄니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불만만 쌓여 갔다. 나는 엄니가 왜 딸과 식모를 똑같이 취급하시는지, 아니 오히려 식모인 명자를 더 배려해주고 예뻐해 주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명자가
나보다 더 잘하는 것도 없고 또 눈도 사팔뜨기였는데, 나는 눈이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엄니가 명자를 자식으로 삼고 싶은 것 같지는 않은데 나에게는 한없이 무뚝뚝한 분이 명자에겐
부드럽게 미소까지 띠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니가 그렇게 하니 자연히
명자도 자기가 딸인 양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중에는 밥하는 일 외에는 청소나 요강 비우는
것까지도 나와 반반씩 하자고 해서 기가 막혔다.
그런
사실을 엄니에게 일러봐야 본전도 못 건질 것 같아 참고 지내자니 명자에 대한 미움만 점점 더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명자의 보따리를 호기심에 풀어 봤더니 그 속에 껌과 초콜릿 젤리 같은 것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동네에서는 그런 물건이 우리 집밖에 없었기 때문에 엄니가 명자에게 가게를 맡기셨을 때 훔친 물건이 틀림
없었다. 나는 “옳다구나!”
하고 드디어 명자가 호되게 야단맞는 꼴을 보겠구나 하고 고소한 생각이 들어서 엄니에게 얼른 일러바쳤다. 더욱이 명자가 얄미운 것은 명자가 방문에 구멍을 뚫고 맞은편 방에 세를 들어 사는 대학생들을 훔쳐 보는 것이었다. 나는 틀림없이 명자가 대학생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초콜릿을 갖다 바쳤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예리하게 추리를
했다. 그런데 세상에! 잔뜩 기대했는데 엄니는 명자를 앉혀
놓고 “네가 얼마나 먹고 싶으면 그랬겠니? 그럴 네가 아닌데……. 이 다음부터는 먹고 싶으면 아줌마에게 얘기해.”라고 조곤조곤
타이르시는 것이 아닌가?
나로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어서 눈물이 푹 쏟아졌다. 만약에 내가 그랬다면 1시간은 족히 야단을 맞았을 터인데 명자에게는 나긋나긋하게 단 몇 분 만에 끝내다니? 혹시 내가 정말로 다리 밑에서 주어 온 아이는 아닌가? 사실 엄니와
나는 얼굴도 닮지 않았잖아? 저럴 수가 없어. 엄니는 내
엄니가 아니야. 별 생각이 다 들어서 뒤쪽 마당 문을 열고 사직공원으로 나가서 한참을 울었다.
명자가
미워서 학교 갔다 집에 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꾀를 낸 것이 아이들의 머리를 해주는 것이었다. 제일
먼저 한 울타리 안에 세를 들어 사는 순자에게 머리를 예쁘게 해 주겠다며 부지깽이를 연탄불에 달궈서 꼬불꼬불하게 만들어 주었다. 순자는 거울에 비친 어른 같은 모습을 보고 좋아했는데 시장에서 돌아온 순자 엄마가 야단치는 바람에 머리를 감아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평소에 머리를 한 번 감기려면 애를 먹이던 순자가 고분고분 머리를 감으니까 순자
엄마가 앞으로 자주 머리를 감으면 1 달에 한 번 머리를 볶아도 된다고 허락을 해주셨다. 그렇게 순자는 첫 번째 단골이 되었다. 순자의 머리를 보고 동네
아이들이 하나씩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많이 하다 보니 제법 기술이 늘어서 마음 놓고 하다가 그만 한
아이의 머리를 태워 버렸다. 그 아이의 엄마가 와서 야단을 치는 바람에 한창 인기가 있던 무료 미용실(?)은 강제 폐업을 당했다. 그 동안 미용실 운영으로 바쁜 바람에
명자와 부딪칠 시간이 적어서 마음이 편했는데 아쉽게 끝났다. 나는 명자와의 신경전을 피하고자 이번에는
책이나 읽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집에 오면 책만 붙들고 있었다. 책은 원래 좋아해서 초등학생 때 아동문학가
마해송의 동화전집인 '떡 배 단배'를 시작으로 초등학교 졸업할
때는 이광수 전집을 끝냈다.
어느
일요일 명자가 사촌 언니네 집에 다녀오겠다고 하니까 엄니가 명자는 서울 지리를 잘 모르니 같이 갔다 오라고 하셨다. 싫었지만 엄니 말씀이 하나님 말씀 같았던 때라서 명자를 따라서 같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더욱 질색하고 팔짝 뛸 일은 명자와 똑같은 파란 원피스를 입고 가라는 것이었다. 주소와 약도를 받아 들고 길을 나섰는데 모처럼 외출을 하는 명자는 신이 나서 자꾸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것도 싫고 식모와 같은 원피스를 입은 것이 창피해서 대꾸도 하지 않고 가능하면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걸었다.
그런데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도착한 사촌 언니 집은 예상외로 부잣집이었다. 사촌 언니가 명자를 보더니
매우 반가워하며 내 눈에도 진수성찬으로 보이는 밥을 해 주었다. 나는 이렇게 부잣집 마님으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명자를 식모라고 무시해 온 것이 속으로 조금 켕겼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니까 사촌 언니는 매우 아쉬워하면서 명자에게 용돈까지 주었다. 더욱 놀란 것은 명자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촌 언니로부터 받은 돈의 반을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사양을 했지만 꼭 받아야 한다고 억지를
부려서 받기는 받았지만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이건 뭐지? 우리는
서로 미워하는 사이가 아닌가? 명자가 어떻게 돈을 나에게 줄 수 있을까? 그 동안 나 혼자만 명자를 미워한 것일까? 나 같으면 도저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집으로 돌아갈 때도 올 때처럼 명자와 나란히 걷지 못하고
올 때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뒤에 떨어져서 걸었다.
그
후부터 명자가 식모가 아니라 언니같이 느껴져서(사실은 명자가 2살이
많았다.) 전과는 다르게 사이 좋게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시골에서 홀로 사시던 명자 아버지가 새 장가를 갔는데 새 부인이 착한 사람이어서 명자를 딸 같이 잘 돌봐 주겠다며 데려가서 우리 집을 떠났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용돈 사건을 생각에 해보니 엄니가 평소에 교육을 그렇게 시켰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그
날 우리가 엄니의 방침 때문에 같은 원피스를 입었던 것처럼 명자는 항상 나와 동등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고 명자의 사촌 언니가 볼 때도 명자가
우리 집에서 딸과 똑같이 대우를 받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명자는 엄니가 가르치는 데로
나와 똑같이 요강을 비워야 하는 일처럼 용돈도 자연스럽게 나누게 된 것이었다고 생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