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권 30, 위서(魏書) 30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제 30
동이전 서경(書經)에서 말하기를 '동쪽은 바다에 닿았고 서쪽은 사막에까지 이르렀다' 하였다. 구복(九服)의 제도에 있는 곳(중국의 지배 아래 있는 곳)은 말할 수가 있으나, 오랑캐 땅 밖은 여러 번의 통역을 거쳐야 이를 수 있다. 또 발길이나 수레가 닿지 않기 때문에 그 나라의 풍속이 중국과 다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우(虞- 요임금이 세웠다는 나라)로부터 주(周)에 이르기까지 서융(西戎)은 백환(白環)을 바쳤고 동이(東夷)에서는 숙신(肅愼)의 조공이 있었다. 모두 여려 해가 지나서야 도달했으니 그 먼 거리가 이와 같다. 한나라 때 장건(張騫)을 서역에 사절로 파견하여 황하의 근원을 찾고 여러 나라를 두루 방문하였다. 드디어 도호(都護)를 설치하고 그들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런 뒤에야 서역의 사정을 모두 알 수 있게 되어 사관도 상세하게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위(魏)나라가 일어난 뒤에는 서역 모든 나라가 다 오지는 않았으나, 큰 나라인 구자(龜玆), 우치(于 ), 강거(康居), 오손(烏孫), 소륵(疎勒), 월씨(月氏), 선선( 善), 車師 등의 무리가 조공을 바치지 않는 해가 없었다. 대략 한 나라 때와 같았다. 공손연(公孫淵)이 아비, 할아비 3대에 걸쳐 계속 요동을 차지하자, 천자는 그 지방을 절역(絶域- 먼 땅, 멀리 떨어진 외국)으로 여겨 해외의 일로 내버려두었다. 결국 동이와의 관계가 단절되어 중국과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경초(景初 - 위 명제의 연호. 237-240년) 연간에 크게 군대를 일으켜 공손연을 죽였다. 또 가만히 바다를 건너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을 수습하였다. 그 후 해외가 안정되어 동이들이 굴복하였다. 그 뒤 고구려가 배반하므로 다시 약간의 군대를 파견하여 토벌하며 아주 먼 지방까지 추격하였다. 오환(烏丸)과 골도(骨都 - 환도(丸都)가 아닐까)를 넘고 옥저(沃沮)를 거쳐 숙신(肅愼)의 왕정을 짓밟고 동쪽을 큰 바다에 이르렀다. (그 곳) 장로가 말하였다. ' 얼굴이 이상한 사람이 해가 돋는 곳 가까이 살고 있다. ' 드디어 여러 나라를 두루 관찰하여 그들 나라의 법령과 습속을 수집하고, 나라의 크고 작음의 구별과 각국의 명칭을 상세하게 기록할 수 있었다. 비록 오랑캐의 나라이나 조두(俎豆- 도마와 접시로 제사 그릇을 말함)를 쓰는 예절이 남아 있다. '중국이 예를 잃으면 사방의 오랑캐에게 구한다'라는 말을 더욱 믿을 수 있겠다. 그 나라들을 순서대로 서술하며 그 가운데 같고 다른 점을 열거, 앞 사서의 미비한 점을 보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