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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향토사연구가 김진우의 족보이야기-(41)남양홍씨(南陽洪氏)
홍성하 추천 0 조회 427 13.04.15 22:08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http://blog.daum.net/perseush 순철(淳喆)

 

3()호당, 9大科 10대 문벌

김진우의 족보이야기-(41)남양홍씨(南陽洪氏)

2010 05 16 () 11:24:58

김진우 sewoora@naver.com

 

 

 

 

 

 

 

뿌리공원에 조성된 남양홍씨 조형물.전면/대전중구

작품명

화합(和合)

조각가

홍성도(홍익대학교미술대학조소과교수)

작품설명

화강암 좌대위에 청동으로 제작되며 문중의 선비정신과 진취적인 자세 그리고 화합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러 문중이 화합을 상징하는 원을 받치고 있는 형상과 중간의 검정색돌로 향하는 진취성을 효현 하였음.

 

 <뿌리공원에 새겨진 남양홍씨 유래>

남양홍씨(南陽洪氏)의 선()시조 단학사공 홍천하(洪天河)께서는 고구려 영유왕의 초청으로 이 나라의 문물을 깨우치기 위해 당나라에서 오셨다가 그후 정착하신 곳이 당성(唐城) 현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상안리 사적217)이니 때는 삼국 통일 직전이다. 당성은 당나라와의 교통의 요지로 삼국이 서로 탐하여 다투던 곳인지라 공께서는 환난을 벗어나 잠시 지리산 동쪽 덕산 땅으로 옮기셨다. 이 때 신라조정 에서 공의 큰덕을 기려 덕산촌주를 봉하고 국사(國師)로 예우하였으며 그후 당성 을 다시 쌓고 공을 당성백(唐城伯)으로 봉함에 대대로 이를 이어내려오니 당성홍씨 는 신라귀족의 반열에 서서 이땅의 문물을 깨우치며 풍속을 다스리는 지도계급으로 존경을 받아왔다. 이후 고려가 개국할 때 시조 태사공 홍은열(洪殷悅)께서는 고려 태조를 도와서 개국공신 태사(太師)가 되시었다. 공의 5대손 충평공 관()은 고려 제1의 충신이자 명필로써 보문각 태학사로 경학을 강론하신 탁월한 철학자이 시다. 다시 그 5대손 광정공 규()께서는 무신들의 횡포를 제압하고 서울을 강화 에서 개성으로 옮겨 고려의 왕권을 다시 세운 공신이며 그 종형 충정공 자번(子蕃)께서는 수상을 여러차례 역임하면서 원()의 압정을 막아내려 노력하시다가 끝내는 원나라의 연경에서 순절하신 충신이시다. 광정공은 두 따님(충선왕비, 충숙왕비)의 국혼으로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에 봉해지고 익주(당성)을 남양부로 승격, 공의 식읍(食邑)으로 삼으니 이때부터 관향이 남양홍씨가 되었다. 이후 고려왕실과의 혈연관계 때문에 조선조가 들어설 때 잠시 큰 수난을 당한바도 있다. 그러나 이 태조가 큰 뜻을 이룬 후에는 남양홍씨 가문을 회유하기 위하여 수교(受敎)로서 태사공의 후손은 누구나 다 병역과 부역을 면제하고 관노나 천한일에 부릴수 없도록 엄한명을 내렸으니 이는 그후, 역대 조정에서 추인바다. 조선조에서만도 남양홍문에서는 무려300여명의 대과급 제자와 10여명의 상신, 수많은 재상과 학자 충의절사가 배출되어 자랑스런 문벌이 되었으니 일컬어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한다. 이처럼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조, 조선조에 이르는 동안 항상 역사의 주역으로 예를 존중하며 인류의 도리를 세우고 풍속을 바로잡아 질서를 다듬는 선비정신 에 투철하였던 선조들의 유훈을 이어받아 우리 후손들은 언제나 확고한 소명(召命) 의식으로 나라와 가정을 충실히 가꾸어 보람차고 밝은 사회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

199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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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작가의 해설>

 

                                                <남양홍씨>- 현대인물(당홍.토홍계)

 

홍인화(남양홍씨중앙화수회회장).홍상수(영화감독.2010522.영화 '하하하'로 제63회 칸영화제그랑프리인'주목할만한시선상"대상수상).홍문표(농어촌공사사장.국회의원.민주동우회간사장).홍준표(국회의원.한나라당원내대표.국회환경노동위원장).홍사덕(17대국회의원).홍만표(검사장.노무현대통령수사당시대검수사기획관).홍선기(전대전광역시장).홍성표(대전시교육감지냄).홍두표(전한국방송공사사장).홍성유(중앙일보주필.부사장).홍종인(언론인).홍문화(서울대약대학장지냄).홍경모(문공부장관.방송공사사장지냄).홍영기(서울지방경찰청장.전남지방경찰청장.2010년 지방선거 민주당 목포시장후보)

 

홍종철(전문공부장관).홍성철(전내무부장관).홍진기(내무.법무.중앙일보회장).홍석현(중앙일보회장).홍라희(삼성그룹회장이건희부인).홍낙선(전경기대총장).홍승만(국회의원.변호사).홍승인(경기대행정대학원장).홍승만(동원대교수).홍승제(한국은행근무).홍일유(중대교수).홍남선(목포대교수).홍사광(한국사회문화원).홍승용(전인하대총장).홍승원(아주대교수).홍승기(하와이대교수).홍신선(동국대교수).홍정선(인하대교수).홍종화(연대교수).홍승직(순천향대교수).홍민선(아주대교수).홍병유(성대교수).홍승권(충주대교수).

 

홍승열(원자력연구원근무).홍승태(서강대교수).홍원화(경북대교수).홍일선(명지전문대교수).홍장환(충남대교수).홍승용(전해양부차관).홍승완(전청와대수석).홍승혜(서울산업대조형대학교수).홍시교(국정원근무).홍승목(외교부대사).홍사립(동대문구청장).홍승활(대구시청근무).홍진동(대전중소기업청근무).홍승진(미국변호사).홍승목(초교교장).홍삼선(초교교장).홍사술(초교교장).홍사묵(초교교장).홍호선(예비역육군준장).홍민(예비역공군준장).

홍사훈(KBS기자).홍승일(중앙일보기자).홍수선(mbc보도국).홍찬선(머니투데이기자).홍승철(KBS라디오PD)홍정선(방송작가).홍사종(정동극장장.극작가).홍승기(배우겸 변호사).홍승찬(무용가).홍승엽(우용가).홍재선(전경련회장).홍유선(한국일보발행인).홍사중(언론인.문학평론가).

 홍로성(홍사용.시인).홍난파(홍영후.봉선화작곡가).홍정원(독립협회간부).홍사익(일본육사26기육군중장.전범으로처형)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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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에 따르면 우리나라 홍씨의 본관은 남양.풍산.부계.홍주의 4본이라고 하며,
위의 여러 본관 중  대본(
大本)은 남양홍씨이며 이어 풍산.홍주.부계홍씨의 순으로 되어 있다.

홍씨(洪氏)는 조상을 전혀 달리하는 두 문중이 동성동본으로 일컫는 성씨(姓氏)로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그런 성씨는 오직 남양홍씨(南陽洪氏) 뿐이다.


고려.조선에 걸쳐 1천여년 융성을 누리며 우리나라 10대 문벌(門閥)의 하나로 꼽혔던 남양 홍씨는 당홍(唐洪)과 토홍(土洪)의 전혀 다른 두 계보가 있다.

당홍(
唐洪)은 고구려 때 당나라에서 귀화 해 온 홍학사(洪學士)의 후예이고 토홍(土洪)은 고려 고종때 금오위(金吾衛) 별장(別將:3품 벼슬.고려시대 무관의 정7품 벼슬)을 지낸 홍선행(洪先幸)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


(
당 홍).(토 홍)이라는 속칭도 이같은 (귀화파) (토착파)의 구분에서 연유했다. 그러나 (토착파)인 토홍(
土洪)의 역사보다 귀화파인 당홍(唐洪)의 역사가 3백여년 더 오래되었다
.

두 집안은 서로 계보(
系譜)를 가리되 종씨(宗氏)로 사이좋게 지내오고 있다.

조상은 다르지만 동성동본인 만큼 서로 결혼도 하지 않는다. 근래에는 각자 종친회 외에 <() 홍씨 대동친목회-회장 홍승만>까지 결성하여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홍씨는 남한에만 약 40만명이며 인구순위는 20위이다.

 

 

 

                                          남양홍씨(南陽洪氏,당홍계)

 

                              1.591명의 과거급제자 배출한 삼한갑족

                  이성계,태사공 후예는 '병역과 부역을 면제하라' 엄명

                                        천하일신하려던 혁명아 홍경래

 

남양홍씨(南陽洪氏,당홍계)의 시조  학사공(學士公홍천하(洪天河)는 고구려 27대 영류왕(營留王,재위기간:618~642) 때 영류왕의 초청으로  당 태종이 8학사를 문하사절로 고구려에 파견할 때 그 중 한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유학을 진흥시키고 문화를 널리 전파시켰다.<조선씨족통보>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에 의한 삼한(三韓)이 통일되자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 유학의 발전에 공을 세워 문무왕 때 당성백(唐城伯:당성은 남양의 옛이름)에 봉해졌고 이어 신무왕 때는 태자태사(太子太師:1품 벼슬), 효소왕 때는 당성후(唐城侯)에 봉해졌다고 한다.

 

이후 홍천하(洪天河) 당성(唐城:현재의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사적 217)에 정착 하였다고 한다.그래서 후손들은 시조의 봉군지(封君地)이며 세거지인 당성(唐城:남양의 옛이름)을 본관으로 삼았으며 당성이 후에 남양으로 지명이 바뀌어 본관을 남양(南陽)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홍천하(洪天河)는 우리나라에 들어와 유학(儒學)을 가르치고 문화(文化)를 널리 개척했으며서기645(3(?)을사 乙巳)에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난()을 당하여 신라국 지리산(智異山) 덕산동(德山洞)에 피지(避地)하여 선덕여왕때 유학 발전에 공()을 세워 문무왕(文武王) 때 당성(唐城:남양의 옛 지명) ()에 봉해지고,신무왕(神武王)이 태자태사(太子太師:최고명예직)로 추대했으며 효소왕(孝昭王)때 당성후(唐城候)로 삼았다고 한다.

 그 당시 신라 조정에서는 학사공(學士公)의 큰 ?을 기려 덕산촌주에 봉하고 국사(國師)로 예우하였으며 그 후 당성을 다시 쌓고 홍천하(洪天河)를 당성백(唐城伯)에 봉하였다. 당성홍씨는 신라 귀족의 반열에서 이 땅의 문물을 깨우치며 풍속을 다스리는 지도계급으로 존경을 받아왔다.

 

 그후 당성(唐城)의 지명이 개칭됨에 따라 후손들은 남양(南陽)을 본관으로 삼고 홍은열(洪殷悅) 1세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는데 특히 조선조에서는 10대명벌(十代名閥)로 손꼽혔다.

 

남양홍씨는 홍학사(洪天河)를 선시조로 모셔 두고, 그의 10세손인 고려 개국공신 홍은열(洪殷悅)을 시조로 받들며 세계를 헤아려 온다.

 

 

 

<남양홍씨족보,토홍계>--정묘중간세보(丁卯重刊世譜), 1687(숙종13)간행,  목판본,  . 2,  상하내향어미, 가로24 , 세로35cm,
 
만력(
萬曆) 병자년 여름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홍섬(洪暹) ()
.

. 2책 으로 구성 되었으며  남양홍씨  
始祖 洪先幸 부터 16세손  홍수(洪璲)까지 기록
.
유사는 호조좌랑 
洪游敬, 연산현감 洪灝세자익위사익위 洪淨 .  

 홍은열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개국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삼중대광(三重大匡:고려때 정1품 문관의 품계)으로 태사(太師:3()의 하나로 정1품 벼슬)에 올랐다.후손들은 홍천하를 원시조, 홍은열을 중흥시조 겸 1세조로 받들고 있다.

 홍은열은 원래 이름이 홍 유(洪儒)였는데 태조 왕건이 "은나라 부열(傅說:은나라 고종때의 명 재상)과 같다"하며 이름을 은열(殷悅)로 하사 했다고 한다.

홍유[(洪儒,홍은열,?∼936(태조19)]는 고려의 무신이며 의성부(義城府)태생이다.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 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弓裔)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개국1등공신이 되었다.

태조 즉위후 청주(淸州)에서 변란이 일어나자 유금필(庾黔弼)과 함께 진주(鎭州:진천)에 주둔하며 이에 대비하였다.

이듬해인 서기 919(태조 2)에는 오산성(烏山城)을 고쳐 예산현으로 하자 대상(大相) 애선(哀宣)과 함께 유민(流民) 500여호를 옮겨 안정시키기도 하였으며 이어 대상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1품 품계)으로  태사(太師;1품 최고벼슬)올랐다.

 

그의 딸은 태조의 26번째 부인인 의성부원부인(義城府院夫人)이 되어 의성부원대군을 낳기도 할 만큼 태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서기 936년 후백제를 쳐 후삼국을 통일할 때 일리천(一利川)의 전투에서 마군을 거느리고 우군(右軍)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서기 994(성종13) 태사(太師:1품벼슬)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  왕건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홍은열의 손자대에서 1 [재신공파(宰臣公派)], 증손대에서 다시 1[예사공파(禮史公派)], 6세손대 때 1[중랑장파(中郞將派)]가 갈리고 13세손대에서 13파가 갈려 모두 16파조로 나뉘는데 그중에도 맏이인 남양군(南陽君)[홍주(洪澍)]파와 문정공(文正公)[홍언박(洪彦博)]파가 남양홍 전체의 70%를 차지할 만큼 수도 많고 융성을 누렸다.

 

 

그밖에 판중추(判中樞: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종1품 벼슬)를 지낸[홍언수(洪彦修)].익산군(益山君)[홍운수(洪云遂)].예사공(禮史公)[홍복파] 중랑공(中郞公)[홍후(洪厚)]가 버금가는 세력을 차지하여 이들 6파가 남양홍씨 위세의 주력이다.

 

 

                            남양홍씨세보(南陽洪氏世譜)

남양홍씨세보는 서기1603(조선 선조 36)에 저술한 것으로 남양 홍씨의 계보를 모아 엮은 책이다.

남양홍씨의 계보는 처음에 홍일동이 수록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없어지고 서문만이 남아 있던 것을 이를 본 서담 홍위가 족보의 계통을 확인하여 남양 홍씨의 2차 족보를 만든 것이다
.

친가의 계통과 외가의 계통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후손은 7∼20대손까지 기록되어 있고 자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남양군 홍 주의 7세손인 석벽(石壁) 홍춘경(洪春卿,선조때 한성우윤(漢城右尹:2))의 자손에서만 상신(相臣:정승) 5명과 문형(文衡: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벼슬.대제학 大提學)2, 왕비(王妃) 1, 20여 명의 판서(判書)급을 배출하는 화려한 가통을 이루었다.

 석벽은 홍천민(洪天民,선조때 도승지(都承旨:3품 당상관 왕의 비서실장).홍일민(洪逸民,현감(縣監).홍성민(洪聖民,대제학(大提學.참찬(參贊:의정부 정2품 벼슬))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홍성민의 후손에서 4명의 정승이 나왔다.

 

 홍은열의  6세손 충평공 홍 관(洪灌,?~1126(인종4))은 고려 제1의 충신이자 명필로서 보문각태학사(寶文閣 太學士:보문각은 고려때 경연과 장서를 맡아보던 관아.태학사는 조선때의 대제학)로 경학을 강론한 철학자로 유명하였다.

 홍 관은 고려조에서 예부상서(禮部尙書:3품 장관).수사공(守司空).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상서도성의 정2품 벼슬로 재신 반열)에 올랐고 서기1126(인종 4) 이자겸의 난때 도성(都城)에서 직숙(直宿)하다가 변고를 듣고 들어가 왕을 시위하였으며, 왕이 연덕궁(延德宮)으로 옮기게 되자 노병(老病)으로 걷지 못하여 뒤따라가다가 서화문(西華門)에서척준경(拓俊京)의 난군에게 살해당하였다.

뒤에 순절을 포상하여 추성보국공신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태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예부사 상주국(
推誠報國功臣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守太尉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禮部事上柱國)으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평(忠平)이다.

*삼중대광(1품 품계).개부의동삼사(고려때 문산계 최고 정1품의 관계.고려때는 종1품이 최고이나 공훈자에게 정1품을 주었음).둥중서문하평장사(송나라의 관직으로 재상의 명칭).상주국(고려 문종때 정2품 공훈자에게 주는 훈작).

 홍 관(洪灌)은 신라 김생의 필법을 계승한 당대의 명필로 문무(文武)를 겸비해 보문각(寶文閣), 청연각의 글씨와 보전하루의 병풍과 편액은 모두 그의 작품이다.

 또한 충평공 홍관의 5세손 홍 규(洪奎)는 무신들의 횡포를 제압하고 수도를 강화에서 개성으로 옮겨 고려 왕권을 다시 세운 공신이며 종형(宗兄)인 충정공 홍자번(洪子藩)은 시중(侍中:1품 벼슬로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한 정승)을 여러차례 역임한 명신으로 원나라의 간섭을 막아내려 노력하다가 원나라의 연경에서 순절(殉節:나라위해 목숨을 바침)한 충신으로 알려져있다.

 

홍자번(洪子藩:1237~1306.시호는 충정 忠正)은 문과에 급제한 고려시대의 문신으로  충청.전라도 안찰사.밀직사지사가 되어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으며 원나라의 일본 정벌을 위한 전함의 수조(修造)를 담당하였다. 충렬왕과 충선왕 사이를 이간시킨 오기(吳祈).석천보(石天輔)를 잡아서 원나라에 보내는 등 왕의 부자(父子)를 화해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홍자번이 젖먹이때  여윈 어머니 산소에서 탄식하며 지은 시()>

 

젖먹이 나이에 어머님을 여위었는데 외로운 무덤이 이 산에 계실줄이야

저승길이 다르니 모습은 못뵙지만 은혜는 아직 남아 때때옷을 입었다네

한 무더기 숙근초에 혼이 없지 않으리니 돌아가는 천리길에 눔물어찌 참을거나

만가지 슬픈정을 말로 이루 다 못하여 한수의 시를 물결에나 띄우리오.

 

 광정공(光定公) 홍 규(洪奎:부인은 삼한국부인 三韓國夫人-광주김씨)는 딸 둘이 충선왕비,충숙왕비가 되어 국혼(國婚)으로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충선왕,충숙왕의 장인으로 광정대부(匡靖大夫:금자광록대부가 바뀐 품계로 2품계)로 상의 첨의도감사(商議 僉議都監事)를 지내고 이어 벽상삼한공신(壁上三韓功臣:공신당의 동.서벽에 초상이 그려진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삼중대광(三重大匡:삼중대광은 정1)의 품계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익주(남양,당성의 옛 이름)를 남양부(南陽府)로 승격하고 광정공의 식읍(食邑:공이 많은 신하에게 고을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하는 것)으로 삼았으며 이때부터 본관을 남양홍씨(南陽洪氏)로 하게 되었다.

 남양홍씨는 고려 왕실과의 혈연관계 때문에 조선시대에 와서는 잠시 수난을 당한 때도 있었으나

이성계가 남양홍씨 가문을 회유하기 위해 수교(受敎)로써 태사공의 후손은 누구나 병역과 부역을 면제하고 관노나 천한 일을 할 수 없도록 명을 내렸다고 하며 이는 역대 조정에서도 추인했다고 한다.

 

 

 

 

<세덕사> 대전시 유성구 지족동 가마골 598번지에 소재한 전국최대의 남양홍씨 사우

     선시조인 학사공 홍천하.시조 태사공 홍은열과 16파조(派祖)를 모신 사우

 남양홍씨는 조선조에도 10여명의 정승과 수 많은 충의열사가 배출된 문벌로 항상 역사의 주역으로 예()와 선비정신에 투철했던 삼한갑족(三韓甲族:대대로 과거급제자 및 명신현유를 배출하였고 충..열사를 배출한 가문)이었다.

 조선초기 남양홍문의 두드러진 인물로는 조선 개국공신으로 호조판서를 지낸 홍길민(洪吉旼)과 그의 아들로 이조판서를 지낸  홍여방(洪汝方), 세조의 쿠테타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된 홍윤성(洪允成)과 홍달손(洪達孫).홍순손(洪順孫) 형제가 있다.

홍윤성은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예조참의(禮曹參議:3품 벼슬)를 역임했으며 좌익3등공신으로 녹훈되어 인산군에 봉해졌고 1460(세조 6) 모련위의 야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신숙주의 부장이 되어 이를 토벌하여 우의정(右議政:의정부의 정1품 정승)과 좌의정(左議政:1품 정승)을 거쳐 예종때 영의정(領議政:의정부 정1품 정승)에 올라 좌리1등공신이 되었다.

 홍달손(洪達孫)은 좌의정(左議政;1품 정승), 홍순손(洪順孫)은 판서(判書;2품 장관)를 역임하여 남양홍씨영화의 기반을 닦았다.

 또한 홍유손은 당대의 석학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영남 사림의 종조)에게 글을 배워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낸 청담파로 알려졌으며 학자로 영의정에 추증된 홍인우와 병조판서(兵曹判書:2품 국방부장관)를 지낸 홍 적이 가문을 빛냈으며 대사간(大司諫:3품 사간원의 으뜸벼슬) 홍천민의 아들 홍서봉은 문.무를 겸비하고 문장과 시()에 뛰어났으며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1640(인조18) 영의정에 올랐다.

성종.광해군때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2품 감사).호조참판(戶曹參判:2품 차관)을 지낸 홍흥(洪興) "당대 제일의 풍채"로 선망을 받았던 인물이었다고 한다.성종은 그를 일부러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우리나라의 인물 자랑을 했다고 하며 뛰어난 풍채만큼 글씨도 훌륭했다.


그의 형 홍응(洪應)  성종조에 좌의정(左議政)까지 올랐다. 이들은 익산군(益山君)파다. 홍경주(洪景舟)는 중종반정에 참여한 공신으로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2품 으뜸벼슬).좌참찬(左參贊;2품 차관).병조판서(判書:2품 장관)을 지내다 사림파(士林派)출신 언관(言官)들의 탄핵을 받아 물러났다.

 그러나 그를 포함한 훈구파(勳舊派)의 반격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정치를 무너뜨리고 신진사림(新進士林)들을 몰아낸 뒤 이조판서와 좌찬성(左贊成:의정부 종1품 벼슬) 을 지냈다.

조선시대 남양홍씨 인물의 일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중국에 "조선남아의 기개를 알리고 나중 그 인연으로 임진왜란에 국난극복의 공신이 된 홍순언(
洪純彦)"이 있다.


「통문관지」에 실린 그의 일화를 보면, 홍순언이 젊었을때 연()나라에 가게 되었다. 어느날 청루(靑樓,술집)를 찾아갔는데  소복(素服)한 여인이 있었는데 얼굴이 절묘(絶妙)하였다. 여인에게 소복한 연유를 물으니 그가 대답 하기를 "저의 부모가 본래 절강(浙江) 사람으로 경사(京師,서울) 벼슬을 지내다가 일시에 구몰(俱沒,두 사람이 다죽음)하니 집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를 방법이 없으므로 나의 몸을 팔아 장례식에 쓰고자 한다"고 말하였다.

 홍순언이 장례비는 얼마나 필요한가 물은 즉 삼백금(三百金)은 가져야 된다고 하였다. 홍순언이 삼백금을 주자 여인이 잘 받지 않으려 하는 것을 강권하여 주었고 몸은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여인의 순결(純潔)을 보장해 주었다.

 

 

 몇 년 후 서기1584(선조 17)에 종계변무(이태조의 종계(宗孫)를 척신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기록된것을 중국측에 알려 고치려한것)의 일로 황지천정욱(黃芝川廷彧)을 따라 통역관으로 중국을 향하였다.

중국 조양문(
朝陽門)밖에 닿을 무렵 말을 타고 달려오는 사람이 홍판사(判事:홍언박)인가 묻고, 예부(禮部) 석시랑(石侍郞)이 기다린다 말한다. 이윽고 한 부인이 몸종 10여명의 호위를 받고 교사에 내려와서 홍판사에게 배복(拜伏:절하여 엎드림)한다. 홍판사가 자리를 피()하려 하자 석시랑이 이르기를 이절은 보은배(報恩拜,은혜를 갚는 절)이니 절을 받아야 된다고 하였고, 부인은 고의(高義)를 받아 부모를 안장(安葬)하였음은 대인(大人)의 덕()이라고 칭찬하였다.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석시랑의 도움을 받아 종계변무가 잘 해결 되었고 그후 1592(선조 25)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중국의 원병으로 무사히 물리쳤다. 이와 같은 일도 석시랑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진 것이라고하며  홍순언(洪純彦)의 의기(義氣)는 국가흥망이 좌우될 때 큰 공헌을 세운 것이다.

홍희남(
洪喜男)은 남양홍씨가 낳은 조선조의 명외교가다. 임란 이후 대일(對日) 교섭에서 조선측의 주역으로 일본에 여섯 차례나 사신으로 왕래, 국교회복을 매듭지었으며 명에도 두 차례나 사신으로 파견됐다.

 

 

 서기1649년 인조가 죽었을 때는 일본의 조문사절을 부산에서 맞아 일본사신 왕래의 새로운 규례를 정하기도했다. 특히 그는 1659(효종10) 일본에 사신으로 간 길에 서양을 통해 들어온 유황(硫黃)의 산화법(酸化法)을 배워 와 우리나라 화기 발전에 공헌했다.

남양홍씨의 세계(
世系)는 시조의 12대손에서 13(),등 모두16파로 대별되는데 그 중 후손의 수가 많은 파()는 남양군(南陽君),문정공(文正公),판중추(判中樞),익산군(益山君),예사공(禮史公),중랑공(中郞公) 파 등 6파이다.

 이 중에서도 <남양군파와 문정공파>의 후손이 특히 많아서 당 홍(唐洪)의 약70%를 차지하고,익산군파가 약 15%를 차지한다.

 남양홍씨(당홍계)은 조선시대에 정승(政丞:의정부의 정1품 벼슬.영의정.좌의정.우의정으로 상신(相臣)이라 함) 8명과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으뜸 벼슬로 문형 이라 함) 2명을 비롯하여,왕비1, 청백리 3,부마(駙馬:부마도위의 약자로 왕의 사위) 4,공신10여 명을 배출하였다.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른 홍서봉(洪瑞鳳)과 그의 아버지인 홍천민(洪天民), 할아버지 홍춘경(洪春卿) <3대 호당(湖堂:문신중에 재덕을 갖춘 유능한사람을 장의사에서 사가독서 시킨것)>의 명예를 누린다.

 또 홍천민의 동생인 홍성민(洪聖民)의 후예는 그로부터 6() 7명 대과(大科:문과)의 영예를 쌓아, 홍춘경(洪春卿)의 아버지 홍계정(洪係貞.이조참판)부터 따지면 9() 대과(大科:문과) 5백년 유일 무이한 가문 기록을 세웠다

 홍춘경(洪春卿)의 자손(경파 京派)에서 상신(相臣:정승) 5,문형(대제학) 2,왕비 1명을 비롯 20여 명의 판서(判書:2품 벼슬)급을 배출하였다.

 

 

 홍춘경은 홍천민(洪天民:율정공파 栗亭公派),홍일민(洪逸民:연기공파 燕岐公派),홍성민(洪聖民:졸옹공파 拙翁公派) 3 형제를 두었는데

  셋째 아들인 홍성민(졸옹공파)자손에서  정승 4명이 나왔다.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 문형홍성민(洪聖民) 비명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이포리

홍성민의 자는 시가(時可), 호는 졸옹(拙翁). 아버지는 관찰사(觀察使:2품 감사홍춘경(洪春卿)이며 서경덕.퇴계 이황(李滉)에게 수학했다. 서기 1561(명종 16) 진사시에 합격했고, 1564년 식년문과(式年文科:3년마다보던 정기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정자(正字:승문원의 외교문서검토와 교정교서관의 서적 교정등을 맡아보던 9품벼슬).교리(校理:집현전.홍문관에 둔 5품 벼슬)를 지냈다.

 

서기 1567년 사가독서(賜暇讀書:문신중에 재덕을 겸비한 유능한 사람을 장의사에서 글만읽도록 한것)한 후 대사간(大司諫;왕에게 간하던 일을 맡아보던 사간원의 정3품 으뜸벼슬)·호조참판(參判;2품 차관).부제학(副提學:왕의 자문과 문한의 처리를 하던 홍문관의 정3품 벼슬).예조판서.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부의 종2품 벼슬.검찰총장)을 역임했다.

 

서기1575년 사은사(謝恩使:우리나라에 호의를 베풀때 중국에 보내던 사신))로 명나라에가 종계변무(宗系辨誣,아래 참고)의 노력을 했고, 1588년 종계변무가 이루어지자 1590년 그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건저문제(建儲問題:왕의자리를 계승할 왕세자나 황태자를 정하던일)로 서인의 거두 정 철(鄭澈)이 실각하자 이해수(李海壽) 등과 함께 파직당해 부령으로 유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특사로 풀려나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벼슬.문형)호조판서를 역임하다가 전란중 병사했다. 저서로 <졸옹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종계변무(宗系辨誣)>

<종계변무>는 조선 개국부터 선조 때까지 약 200년간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종계(宗系)를 개록(改錄)해 줄 것을 주청한 사건이다.

 태조 이성계가 명나라의 태조실록.대명회전 등에 고려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되어 있는 것을 처음 안 것은 1394(태조 3)이었다. 이인임은 우왕 때 이성계의 정적이었는데 이성계를 그의 아들이라 한 것은 조선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이 사건은 두 나라 사이에 심각한 외교문제로 부각되어 태조 때부터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고쳐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시정 약속만 하고 실현되지 못하여 이는 역대 왕들의 가장 큰 현안문제가 되어왔다. 그럼에도 1518(중종 13) 중국에서 돌아온 주청사(奏請使;조선때 중국에 주청할일이있을때 보내던 사신) 이계맹(李繼孟) <대명회전> 조선국조(朝鮮國條)의 주에 명나라 태조의 유훈(遺訓)이라 해서 "이인임의 아들 단(:태조 이성계) 4(四王:공민.우왕.창왕.공양왕)을 시해하였다"고 정정되지 않았음을 보고하였다.

 남곤(南袞)이 주청사로 가서 시정을 요구하는 등 중종 때만 해도 여러 번 사신을 보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 뒤 1584(선조 17) 종계변무 주청사 황정욱(黃廷彧) 등이 가서 정정키로 확정을 보고, 1588년 유 홍(兪泓)이 고쳐진 대명회전을 갖고 들어와 일단락되었다.출처-<백과사전.한국인의 역사>

 

 첫째인 율정공파에서는 대사간(大司諫:사간원의 정3품 으뜸 벼슬)을 지낸 홍천민의 아들 홍서봉(洪瑞鳳)은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병조참의(3품 벼슬)가 되고 정사3등공신으로 익녕군(益寧君)에 봉해졌다.

 

 

 

 

                                     광제서원(廣濟書院)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계원리543(문화재자료 제223)

남양홍씨 홍의와 홍관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洪毅(홍의,?∼1356)는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무신이며

洪灌(홍관,?∼1126)은 고려 문신.서예가로 예부상서(尙書:3품 장관등 여러 벼슬을 거쳤다.

 광재서원은 처음에 홍복사(洪福祠)이던 것을 홍지암(洪池庵)으로 1747년 개칭 되었으며 홍지암 상량문에 의하면 1891년 중수한 기록과 함께 모원재(慕遠齋)로 개칭
되면서 남양홍씨 문중에서 제실로 사용하고 있다.

1976
년 영남유림에서 광제서원으로 격상시켜 매년 음력 3 10

고려은청광록대부 상서
洪毅(홍의)와 고려 금자광록대부 수상공상서

보문각, 태학사 홍관(
洪灌) 양위(兩位)에게 春享(춘향)을 올리고 있다.

 

 

 

 

                                            광제서원 현판

 그후 우의정(右議政:1품 의정부 정승),좌의정(左議政:1품 벼슬.정승)을 거쳐 1640년 영의정(領議政:1  정승)에 올랐으며 문장과 시()에 능했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생전에 그가 병자호란을 겪은 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심양에 잡혀 갈때 그 슬픈 민족적 심경을 노래한 시조가 아래와 같이 전해진다

이별(
離別)하든 날에 피눈물이 난둥만둥

압록강(鴨綠江) 내린 물이 푸른 빛이 전혀 없네
배 위에 하얗게 센 사공(沙工)이 처음 본다 하더라.

 

홍천민의 증손 홍처량(洪處亮)은 숙종때 예조판서(禮曹判書:2품 벼슬)를 지냈다. 둘째인 연기공파에서는 홍일민의 손자 홍명원(洪命元)이 인조 때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의 다섯 아들 중 첫째인 홍처후(洪處厚)의 자손이 번창하였다.

 경종 때 노론(老論)의 선봉으로 소론(少論)과 맞섰던 홍계적(洪啓迪)은 홍처후의 증손이며 영조 때 이조판서(吏曹判書:2품벼슬.장관)를 지낸 홍계희(洪啓禧)는 홍처후의 아우인 홍처심(洪處深)의 증손이다.

 

이밖에 혁명아 홍경래(洪景來,1771~1812)가 남양홍씨다.

홍경래는 19세기 초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 난"의 최고 지도자이다. 그는 기층사회에서 성장한 인물로 천하를 일신하려 항쟁을 주도한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썩어빠진 조선왕조를 뒤엎고 천하를 일신하려던 혁명아 홍경래(洪景來). 그는 일찍 어려서 서당에서 훈장에게 글을 배우다 진시황(秦始皇)을 암살하려다 잡혀 죽은 형가(邢可)를 두고 시()를 지으라는 말에 秋風易水壯士拳 白日咸陽天子頭(추풍역수장사권 백일함양천자두)라고 지어냈다.

 훈장이 「秋風易水壯士拳 추풍역수장사권)이요, 白日咸陽天子頭(백일함양천자두)라」하자 소년 홍경래는 "선생님 그렇게 읽는 게 아닙니다"하고 이의를 달았다.

 그는 「秋風易水壯士拳(추풍역수장사권)으로 白日咸陽天子頭(백일함양천자두)를」하며 <으로> <>이라는 토에 힘을 주며 주먹을 쥐어 방바닥을 내리쳤다. 약한 제나라를 삼키려 기회만 노리는 폭군 진시황을 죽이겠다고 차가운 가을 역수(易水) 강물을 건너던 그 형가(邢可)의 주먹으로 대낮 함양(咸陽)에 중국 천자(天子)의 머리통을 부숴 버리겠다는 이 소년의 기백에 시골훈장은 그만 혼비백산하여 「얘야, 이제부터 나는 너를 가르칠 수 없다」고 말했다는 얘기다.

홍경래는 과거에도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세도정치와 당쟁과 지역차별의 속속들이 병든 조선을 바로잡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고 판단 과거를 단념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박천(
博川)의 청룡사(靑龍寺)에서 명문(名門)의 서자(庶子)로 역시 사회개혁의 의지를 품고 배회하던 우군칙(禹君則)을 만나 의기가 투합 거사의 모의가 시작된다. 가산 다복동(嘉山 多福洞)을 본거지로 각지의 장사·기인 ·술사 등을 모으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부자들도 포섭, 자금을 대게 했다. 1811(순조 11) 극심한 흉년으로 인심이 혼란해지자, 12월에 2천 병력을 일으켜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라 일컫고 혁명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가산(
嘉山).박천(博川).곽산(郭山).정주(定州).선주(宣州).태산(泰山).철산(鐵山).용천(龍川) 등 평북(平北) 일대를 휩쓸고 서울로 진격하려 했으나 관군과 안주(安州)에서 싸워 패주, 그의 웅지는 꺾이고 만다
.

정주성(
定州城)에 웅거하며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그는 성밑에 굴을 파고 화약을 터뜨린 관군의 기습으로 전사했다. 그때 나이 서른 둘이던 그는 불꽃 같은 혁명아의 일생이었다. 비록 웅지(雄志)를 이루지 못한 채 정주(定州) 북장대(北將臺)의 이슬로 사라졌으나 <민족의 영웅>으로 길이 살아 있다.

 

 

 홍경래는 평안도 용강군 다미동(多美洞)에서 출생했다고 하며  아들만 네 형제인 집안의 셋째로 처 최소사(崔召史)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으며 몰락한 양반 출신이었다고 한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유교는 물론 풍수(風水)에도 상당한 소양을 지니고 있었으며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한 지식인이었다. 평양 향시(鄕試)를 통과했고 한양으로 올라와 사마시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고 전한다.

 홍경래는 당시 세도가들의 폭정과 민중탄압을 비판하고 민중의 희원을 반영하여 초인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정진인설(鄭眞人說)"을 봉기의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니고 있어 직접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기도 하였으며, 병법에도 밝아 다양한 전술로 관군과 대항하였다고 한다.

 

 

 

<홍경래가 점령한 청천강 이북 8> 19세기는 세도정치로 인해 국가 기강이 헤이해지면서 탐관오리의 부정은 극에 달했고, 농민들의 삶은 점차 피폐해져갔다. 이에 농민은 종전의 소극적자세에서 벗어나 항거, 봉기 등의 적극적 방법으로 지배층의 부패에 대응했고, 이러한 움직임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백과사전.한국인의 역사 등 참고)

졸옹공파에서는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으뜸 벼슬.문형)에 오른 홍성민(洪聖民)의 손자 홍명하(洪命夏)가 현종 때 영의정(領議政:의정부 정1품벼슬. 정승)을 지내고 청백리에 올랐으며

 홍치중(洪致中)이 영조 때 영의정(領議政;1품 벼슬.정승)을 지내 유명하였다.또한 좌찬성(左贊成:의정부 종1품 재신반열 벼슬)을 지낸 홍재철,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부의 종2품 으뜸벼슬로 검찰총장)을 지낸 홍직필과 홍순목(洪淳穆)이 고종 때 영의정(領議政:1품 벼슬.정승)에 올라 가문을 크게 빛냈다.

 홍순목의 아들 홍영식은 개화파의 선봉으로 김옥균과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홍범도 장군,홍기조,홍병기,홍원식 등은 선조들의 위업을 본받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명문의 전통을 더욱 빛냈다.

 홍순목의 아들 홍영식[(洪英植:1855~1884,문신(文臣),호는 금석(琴石). 시호는 충민(忠愍)]. 서울 출생. 1873(고종 10)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한후 정자(正字:홍문관.교서관 등의 정9품벼슬).대교(待敎:예문관의 정8.규장각의 정7품에서 정8품 벼슬)를 지내고,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서통리기무아문 부경리사가 되었다.

 이듬해 부제학(副提學:홍문관의 정3품 벼슬)을 거쳐 참의통리(대한제국때 의정부 각 아문에 둔 벼슬). 내무아문사무(內務衙門事務:지방행정을 총괄하는 부서로 이조.제중원.내무부의 직무 총괄).참의군국사무를 역임, 1883년 협판(協辦)교섭통상사무(외교와 통상사무 보던 관아의 벼슬)를 지내고 전권부대신(全權副大臣)으로 미국에 다녀와 이듬해에 병조참판(參判:2품 국방부차관)이 되었다.

 

 

홍영식은 개화당(開化黨)의 중진으로서 신설된 우정국(郵征局)의 총판(總辦:총판은 칙임관 1등급.대한제국의 관직으로 1895년 통신국을 1900년 통신원으로 고침)이 되어 그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새대당(事大黨)을 제거, 신정부를 조직하고 우의정(右議政:1품 정승)이 되었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천하로 끝났다.

 

 

 

 

                        우정국 창시 80주년기념 우표 도안인물로 선정된 홍영식

 

또한  홍범도 장군,홍기조,홍병기,홍원식 등은 선조들의 위업을 본받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명문의 전통을 더욱 빛냈다.

 1880(고종 17)일본서 돌아온 수신사(修信使:일본에 가던 사신) 김홍집(金弘集)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왕에게 올려 개화논의가 분분할때 홍재학은 관동유림(關東儒林)의 대표로 척왜(斥倭)를 상소하여 미지근한 태도의 왕까지도 공격했다고한다.

 그는 결사적으로 개화를 반대하다가 참형을 당했으며, 일제(日帝) 침략의 국난기에 남양홍문은 많은 의병과 열사를 배출했다.

만주에서 항일 무력투쟁을 벌인 전설적 영웅 홍범도(
洪範圖)장군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2년후 1907년 차도선(車道善).태양욱(太陽郁) 등과 함께 평북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압록강을 넘나들며 일군(日軍)을 공략하는 무력투쟁을 계속했다.

 

유명한 평안도(平安道)포수들로 조직된 그의 소수 정예부대는 신출귀몰하는 기습전술로 삼수(三水).혜산.풍산.만포진.봉오동 등지에서 숱한 승리를 기록하여 침략 일본군을 공포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그중 가장 빛나는 전투가 유명한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으로 대첩후에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 서일(徐一)을 총재로 추대하고 김좌진(金佐鎭)과 함께 부총재가 되어 레닌 정부의 협력을 얻어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하던 중 레닌 정부의 배신으로 독립군이 소군(蘇軍)에 무장해제를 당하는 흑하(黑河)사변으로 조직이 해체되고 큰 타격을 입는다.


그후로도 그는 백두산일대를 근거지로 무력항쟁을 계속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의 최후는 전해지지 않는다. 건국후 건국공로훈장복장(複章)이 수여됐다.

홍병기(
洪秉箕)는 천도교(天道敎)대표로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에 가담했으며 3년형을 받고 출옥 후 만주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홍기조(洪基兆) 역시 천도교대표로 33인 이었으며 2년형을 살고 나와서는 천도교의 교사(道師). 장로(長老)로 신앙을 통해 청년들에 민족정신을 고취했다. 해방후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주어졌다
.

그밖에도 홍익성(
洪益成)은 기독교 장로로 1911 <105인 사건>에 연루, 18개월 옥살이를 하고 3.1운동 때는 황해도 신천군(信川郡)의 시위를 주동하고 만주로 망명, 임정(臨政)연락원으로 안동(安東)서 활약하다가 일경(日警)에 체포돼 신의주(新義州)감옥에서 순국했다.


홍식( )은 만주서 독립군사령부 제3영장(營長)으로 국내에 들어왔다가 일경(日警)과 교전 끝에 전사했으며, 홍학정(洪學渟)은 평안도 일대에서 독립운동 자금모집에 활약했는데 1927년에는식산은행(殖産銀行) 의주지점을 습격하고 금융조합에서 980원을 강탈하여 만주로 가기도 했다. 그 후에도 압록강을 넘나들며 각지의 일본경찰서를 습격하고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 일경(日警)에 체포돼 순국했다.


홍원식(洪元植) 3.1운동 때 고향 화성(華城)에서 시위를 주동했는 데 유명한 일제의 제암리(提岩里)학살사건 때 현장에서 살해당했다.
일본중앙(
中央)대학을 졸업하고 상해에 망명, 임정의 자금조달에 활약했던 홍승로(洪承魯)는 해방 후 귀국, 반민특위 감찰위원,한독당 감찰위원장으로 민족정기의 선양에 앞장섰다.<자료참고>

 

 

 

                          (감암정)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아천리

남양홍씨 홍민헌의 손자 홍이해가 조부모의 지난 일을 추모하여 조 모(유씨 부인)가 기    도 드리던 바위 위에 1653년에 정자를 세워 감암정으로 이름 하였다.

이 각은 임란때 국가가 위태롭게 되자 한 선비로서 의분에 못 이겨 의거에 참가,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홍약창과 그의 아들 홍민현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참전, 적과 싸우다가 역시 전사한 사실과 홍민현의 처 유씨 부인 유복자를 잉태하고 홍씨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하여 큰 바위 밑에서 지성으로 생남 기도를 드려 득남 후 훌륭히 기른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조성된 각이다
.

성균 진사였던 홍약창은 원래 낙동 지방에 살고 있던 선비였다. 왜란이 발발하여 상주성이 실함 된 후 의병장 이 봉을 도와 왜병을 맞아 싸우다가 많은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전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들 홍민현은 가족을 안전한 곳에 피하라 이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전진에 뛰어 들어 수많은 왜병을 죽이고 장렬하게 전사하여 그의 말이 주인의 의관을 물고 피난 중인 가족에게 전하고 말도 기진 하여 쓰러졌다고 한다
.

함창읍지의 충효록에 의하면 당시 세인들이 <만고의 충효지문이라> 칭찬하였다 한다. 부자(
父子)가 순국 후 미망인으로 시어머니 동래 정씨, 며느리 진주 유씨만이 남았는데 때 마침 며느리 유씨가 유복자를 잉태하여 고부간에 약속하기를 아들을 낳으며 살아서 잘 기르고 딸을 낳으면 3대의 여자 모두 자결키로 하고 그날로 큰 바위 밑에서 생남 기도를 지성으로 드렸더니 영험이 있어 아들을 낳았는데 이분이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홍씨들의 중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

세인들은 하늘과 땅이 감동하여 생남 하였다 하여 당시 동명 병현리를 감암이라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양홍씨(토홍.당홍)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 330,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 151,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시험) 836,역과(譯科:중국어.몽고어.일본어.여진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아 쓰기 위해 보이던 과거) 112,의과에 24,음양과(陰陽科:천문.지리.명과학에 밝은 사람을 뽑던 과거) 23,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던 잡과) 5,주학에 110명 등 10명의 장원급제자를 포함하여 모두 1,591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명벌(名閥)이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남양홍씨는

1985
년에는 총 92,124가구에 인구는 382,090명 이었으며
2000
년에는 총 117,638가구에 인구는 379,708명으로 조사되었다
 

남양(南陽)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와 화성시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때는 당항성(唐項城)이었다. 1895(고종 32)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인천부 남양군이 되었고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남양군이 폐지되어 수원군에 병합되었다.1949년 수원군을 분할하여 수원시로 승격시키고 수원군을 화성군으로 개칭하였으며 1967 6월 서울시에 있던 경기도청이 수원시로 이전되었다. 1983년 전국행정구역 조정으로 용인시 수지면(水枝面) 하리(下里).이의리(二儀里) 2개 리가 편입되었고 1988 7월 장안구.권선구 2개 구가 신설되었고 1993년 팔달구가 신설되었다.

 

1994년 권선구에 입북동.당수동을 팔달구에 영통동이 각각 신설되었다. 1995년 권선구 곡선동이 권선동과 곡선동으로 나뉘고 화성군 태안읍 신리와 망포리 일원이 팔달구 매탄3동에 편입되었다. 2003 11월 영통구가 신설되었다. 출처<한국인의 역사.이상옥저 한국의역사.조선씨족통보.백과사전등>

 

 

              김진우

김진우(金鎭宇)-금석문(金石文)에 관심많아 각종 비문(碑文:지석.신도비.묘갈명 등) 연구 *전국의 문화유적 탐방 지방사 연구 *족보전문가 *민족문제연구소회원 *단재 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회원*지방자치실무연구소회원 *한국성씨연구소 대표() <지은책>- 한국인의 역사(286개 성씨를 교과서에 없는 역사책으로  수록한 한국인 교양서.도서출판 춘추필법 펴냄).공주고.고려대 경영학.한국과학기술원 수료.

(삼성의료원과 함께 2009 "대한민국 성공기업 선정" 한국성씨연구소).

(2009년 올해를 빛낸 '장한한국인상' (문화)수상)

이메일 sewoora@naver.com 블로그.카페

족보로 살펴보는 한국인의 역사, 새로운 지평 열다
김진우 한국성씨연구소 대표, 교과서에 없는 ‘한국인의 역사’출간
2009년 12월 07일 (월) 11:44:15 김실 기자 solocompany@sisamagazine.co.kr

족보의 대중화를 위해 ‘한국인의 역사’ 출간

   
김진우 향토사연구가는 ‘한국인의 역사’라는 책을 발간하기 위해 10년간 고군분투하며 한국의 뿌리를 찾는데 주력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 286개 모든 성씨의 족보를 분석해 조상의 뿌리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한국인의 역사’를 9월1일자로 출판하였다.
김진우 향토사연구가는 “자신의 뿌리를 알 수 있는 족보는 서가에 있는 장식품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일반인들이 보기에도 너무 어려우며 집안의 어른들 혹은 문중에서나 보는 책이었기 때문이죠. 이에 우리나라의 뿌리를 연구하면서 족보를 대중화시키고 서가 밖으로 꺼내야겠다는생각을 했습니다”고 집필 동기를 설명하며 “족보는 우리나라 역사의 기본입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면서 글로벌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과 한국인의 뿌리부터 알자는 의미"라며 "다양한 자료와 묘비, 신도비 등을 해석해 중요한 인물들은 족보에서도 특별하게 언급함으로써 우리 조상들의 업적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고 말했다.
   
▲ 김진우 향토사연구가가 출간한 ‘한국인의 역사’는 1,026쪽 분량으로, 우리나라 286개의 성씨의 족보를 가나다순으로 엮었으며, 현존하는 성씨의 유래와 분파, 변천사 등을 일목요연하게 담아냈다.
이번 출간한 ‘한국인의 역사’는 1,026쪽 분량으로, 우리나라 286개의 성씨의 족보를 가나다순으로 엮었으며, 현존하는 성씨의 유래와 분파, 변천사 등을 일목요연하게 담아냈다. 또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관청과 관직, 품계 등을 현대의 직제와 비교, 설명해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구성한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 각 문중의 주요 인물은 ‘인물탐구’와‘역사탐구’로 조명하여 공적과 사실을 검토할 수 있도록 했고, ‘최 고집’과 ‘황 고집’의 유래에서부터 황진이와 논개의 본관, 최초로 시조가 국제결혼을 한 김해김씨, 증·즙·궉 씨 등 희귀 성씨에 대한 설명과 사진까지 담겨있다. 이에 세대를 망라하고 누구나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국민 필독서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실제로 ‘한국인의 역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교보문고 등 대형서점에서 책을 보내달라는 연락이 쇄도했으며 1·2·3판 발간한 책이 다 팔려 현재는 4판을 제작 중에 있다.
지난 10월에는 미국의 동포가 한국인의 역사를 보고 잊었던 자신의 뿌리를 찾았다며 고맙다는 장문의 편지가 왔었고 전국의 주요대학에서 특강요청이 쇄도하고 있으며 10월6일에는 고려대 대학원에서 특강도 했다. 마지막으로 김진우 향토연구사는 “앞으로 ‘한국인의 역사’가 국민 교양서로써 그 역할을 수행해 나갈 수 있도록 더욱 정진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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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9.11.19 23:10

    첫댓글 고인이 되신 삼표형님이 그립군요 대전 계실 때에는 수시로 뵙고 식사도 하고 보학도 배우고 하였는데 서울 큰 자제분 댁으로 가신 후 로는 서울 남양군파 종중회의 때에나 상봉하였답니다 그후 요양원에 가셔서 운명하신줄도 모르고 있엇지요 정말 보학에는 능통하신 어른이신데 대전에도 큰 업적을 세우셨답니다. 계속 수고하시고 우리 홍문을 위하여 더욱 노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대전.세종.충남종친회. 세덕사보존회 회장 홍 영 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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