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 시 : 2014년 3월 16일(일)
* 위 치 : 서천군 마서면/서천읍/장항읍
* 동 행 : 도연, 마카루
* 코 스 : 군사오거리(서천읍)-남산,147m-댕골산,63-이성산,66-중태산,102-
봉근리도로-송내교차로-왕제산,98-구룡말마을-용당산공원
07 : 38 군사오거리, 들머리
08 : 17 남산
10 : 08 중태산
11 : 20 송내교차로
11 ; 42 왕제산
12 : 56 용당산
군사오거리-(2.8km)-남산-(1.5)-댕골산-(1.8)-이성산-(1.4)-중태산-(3.5)-
왕제산-(1.7)-용당산
마루금 : 12.7km / 5시간 18분
***** 錦 江 *****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의 신무산(神舞山, 897m)에서 발원하여 군산에서 황해로 흘러드는 강. 우리 나라 6대 하천의 하나이다. 유역 면적이 9,885㎢, 유로 연장이 401㎞로 남한에서는 낙동강·한강 다음으로 큰 강이다.
본류는 장수읍의 수분리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섬진강과 갈라져 진안고원과 덕유산 지역에서 흘러오는 구리향천(九里香川, 34㎞)·정자천(程子川, 30㎞) 등 여러 지류들이 북쪽으로 흐른다.
전라북도의 북동부 경계 지역에 이르러 남대천(南大川, 44㎞)·봉황천(鳳凰川, 30㎞)과 합류하고 옥천·영동 사이의 충청북도 남서부에서 송천(松川, 70㎞) 및 보청천(報靑川, 65㎞)과 합류한 뒤 북서쪽으로 물길을 바꾼다.
다시 갑천(甲川, 57㎞) 등 여러 지류가 합쳐 충청남도의 부강에 이르러 남서 방향으로 물길을 바꾸면서 미호천(美湖川)과 합류하고, 공주·부여 등 백제의 고도(古都)를 지나 강경에 이르러서는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도계(道界)를 이루며 황해로 흘러들어 간다.
≪당서 唐書≫에서는 금강을 웅진강(熊津江)이라고 기록하였다. 금(錦)은 원어 ‘곰’의 사음(寫音)이다. 곰이라는 말은 아직도 공주의 곰나루[熊津]라는 명칭에 남아 있다. 일명 호강(湖江)이라고도 부른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금강의 명칭은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다. 즉, 상류에서부터 적등진강(赤登津江)·차탄강(車灘江)·화인진강(化仁津江)·말흘탄강(末訖灘江)·형각진강(荊角津江) 등으로 되어 있으며, 공주에 이르러서는 웅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하류에서는 고성진강(古城津江)으로 되어 있다.
우리 나라 대부분의 하천이 그러하듯이 금강도 유황(流況)이 대단히 불안정하여 단기간의 홍수 유출량이 총 유출량의 약 70%를 차지했다.
금강 하류 지역에는 부여의 규암평야, 논산천 유역의 강경∼논산평야와 같은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되어 있는데, 이들 평야는 큰 홍수가 발생할 때 수해를 심하게 입었다.
그런데 1980년에 대전의 신탄진 부근에 대규모 다목적댐인 대청댐이 건설되면서 금강물의 이용량은 늘어나게 되었다. 대청댐은 당초에 홍수 방지와 관개용수의 확보를 위해 건설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뒤 대전·청주·천안 등의 도시가 크게 성장하고 각종 용수의 수효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이 댐은 이들 도시의 상수원으로서의 중요성이 막중해졌다.
대전과 천안은 대청호(大淸湖) 없이는 지금과 같은 크기의 도시를 유지할 수 없다. 나아가 1990년에는 금강하구둑이 건설되어 금강은 수자원으로서의 중요성이 더욱 증대되었다. 그리고 현재 또 하나의 대규모 다목적댐인 용담댐이 금강 상류의 전라북도 진안에 건설되고 있다.
이 댐은 유역변경에 의하여 금강 물을 만경강 유역으로 보내기 위한 것으로써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군산과 부안 앞 바다의 새만금 간척사업 역시 이 물 없이는 성립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청호는 지금도 수질오염이 심각하기 때문에 상당한 양의 물을 잃어버렸을 때의 상황에 대한 우려도 있다.
금강 유역은 대체로 백제의 심장부에 해당하며, 충청남도의 공주·부여와 전라북도의 익산을 중심으로 백제 문화의 복원 사업이 활발히 추진되어 왔다.
금강의 상류는 전라북도의 장수군·진안군·무주군과 충청북도의 영동군 일부 지역의 물이 모아져 시작된다. 지질은 옥천누층군(沃川累層群)의 변성퇴적암 내지 선캄브리아기의 화강편마암과 이들을 관입한 중생대 화강암 등 복잡한 구조를 이루기 때문에 지형도 매우 복잡하다.
소백산맥에서 노령산맥이 갈라지는 이곳은 높이 1,000m 이상의 험준한 산들이 많아서 이른바 진안고원을 형성하고, 그 동단부에는 덕유산(1,594m)·백운산(1,279m) 등 험준한 산들이 솟아 있다. 이들 산지를 깎아 흐르는 수많은 하천들은 심한 감입곡류(嵌入曲流)를 하며, 무주구천동이나 영동의 양산팔경(陽山八景)같이 아름다운 계곡을 이루어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이 많다.
중·하류는 충청남북도의 지역으로 남동쪽에 소백산맥, 북서쪽에 차령산맥이 있다. 지질은 중생대 쥐라기의 대보화강암(大寶花岡岩)이 북동에서 남동 방향으로 분포한다.
금강 본류의 금산분지, 대전천·갑천 유역의 대전분지, 보청천 유역의 보은분지, 미호천 유역의 미호평야 등은 대보화강암의 분포 지역에 발달되어 있다. 금강 하류 지역에는 편마상화강암이 주로 분포하며, 경상누층군의 퇴적암도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하구 부근은 조차(潮差)가 약 6m인데, 하구둑이 건설되기 이전에는 하구에서 약 60㎞ 떨어진 부여의 규암까지 조석의 영향이 미쳤다. 그리고 강경까지는 밀물 때 강물이 빠른 속도로 역류했다. 근대 교통이 발달하기 이전에 금강은 수운이 대단히 활발했다.
바다에 올라오는 배는 밀물, 내려가는 물은 썰물을 이용했다. 강경은 하항(河港)으로 크게 번성했으며, 강경장은 우리 나라 3대 시장 중 하나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강경까지는 큰 배가 올라오고 부여까지는 1백 석의 곡식을 실은 배가 다닐 수 있었으며, 작은 배는 충청북도 청원군의 부강까지 오르내렸다. 금강의 수운은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급격히 쇠퇴하였다.
오늘날과 같이 금강의 수자원을 다양하게 이용하게 되기까지는 오랜 역사를 통해 사회의 변천 과정을 거처야만 했다. 공주시 동쪽 석장리의 구석기시대의 유적을 비롯하여 마암리유적, 대청댐의 인접지인 청원의 두루봉 유적, 영동·옥천 일대의 신석기 유적, 부여의 송국리 청동기시대 유적 등은 금강이 오래 전부터 유역인의 삶과 관계가 깊었음을 말해준다.
이 무렵에는 주로 생활 용수나 어로 작업의 장으로서의 의미가 컸을 것이다. 역사시대로 들어 백제가 공주나 부여에 도읍을 했던 때에는 정치와 문화 교류 및 군사적인 이동로로서의 의미를 갖었었다.
물화의 수송을 위한 것으로 고려, 조선조에 실시했던 전세(田稅)나 대동미(大同米) 등 국가 세미 수송을 위한 조운을 들 수 있다. 금강 유역에서는 연안의 조창에다 세미를 수집 보관했다가 수운을 이용하여 경창으로 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상업적인 선운업이 발달되면서 금강은 수운 수로로서 큰 몫을 하게 되었다. 18세기 중엽 이중환(李重煥)은 금강 유역의 강경포(江景浦)를 상품 유통의 중심지로 적고 있다. 이렇게해서 1870년대에 중 하류 중계 하항인 강경이 평양, 대구와 함께 3대 시장의 하나로 번성한 바 있다.
1899년 군산 개항 전까지 강경포는 중국의 무역선까지 들어오던 황해안 최대의 무역 상업도시로 한때 군산항과의 역학 관계를 서울의인천, 평양의 진남포와의 관계로 비유하기도 했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군산항으로 들어온 무역 물동량의 약 80%는 강경장을 통해 소비지로 팔려 나갔다고 한다.
충청과 전라의 행정 중심지이였던 공주와 전주의 상권까지도 강경의 상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수운 성기인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금강의 뱃길의 끝은 충청북도 부강까지 이었으며, 군산·강경·공주·부강사이는 20여 개의 하항이 발달하여 화물용 범선 외에 여객선을 운행하고 있었다. 부강 이상의 신탄진이나 미호천 유역에도 하선의 왕래는 있었으나 지역 내의 소형 시장선 만이 있었을 뿐이다.
강경이나 부강에서는 수운의 성기에 수산물 중 소금을 인력이나 축력으로 멀리 추풍령·충주·영월 등지까지도 실어 갔다. 근대로 들어서 경부선,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고, 충북선과 장항선이 차례로 개통되면서 금강의 수운 기능은 급격히 쇠퇴되였다. 이에다 하상에 토사가 쌓여서 수로 자체가 마비된 것도 요인 중 하나다.
그 뒤 철도 연변의 역들은 경제적 기능의 중심지로 성장해 가는 반면 한때 번창했던 공주, 부여와 같은 중류 유역의 하항들은 점차 경제적 기능을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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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北正脈上의 백월산 부근 錦北岐脈 分起点을 출발하여 그 脈을 다하는 錦江하구언/군산만까지의 여정이 古代로 부터 歷史的 사실과 흔적을 간직한 채 水運이 발달했을 때는 부여와 충청도 부강까지 뱃길이 왕성했던 3大하천으로 名性을 자랑하는 錦江과의 同行임이 틀림이 없다.
錦江은 호남평야의 젓줄로서 백제시대에는 首都를 끼고 文化의 中心地를 이루었으며
日本에 문화를 전파하는 水路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백제가 멸망하고 唐나라의 군사들이 짓밟은 뒤 고려와 조선을 거치는 동안 금강은 줄곧 民族의 恨을 머금은 비극의 場이 되기도 했다.
동학운동때는 전봉준이 공산성나루에서 붙잡혀 금강을 건너 압송되기도 했다.
맥길이 최종 날머리로 다가갈 수록 해발 100m 內外의 낮은 山과 부드러운 마루금으로 이어져 편안하게 肉山길을 즐긴다.
3구간에서의 雜木구간과 伐木잔재들로 힘들었었는데 이번 구간에서도 일부 구간에서 같은
어려움이 있어 임도를 이용하여 불가피하게 하기도 한다.
서천읍을 출발하여 서천군을 관통하여 최종 날머리인 용당산(공원)에서 바라본 錦江하구언/장항 앞바다의 위풍당당함에 압도가 된다.
이런 위용이 백길을 부여/충청도 부강까지 이어졌을거라는 確信이 드는 것은 百聞이 不如一見을 감히 말하고 싶다.
이런 完走의 感動은 70여km를 힘들게 달려왔던 발걸움을 무색케 한다.
일부에서는 아파트의 개발로 도로를 걷기도 했고 잡목구간에서는 임도를 이용하기도 하는
맥길의 이탈이 있었긴 하지만 歷史의 江, 錦江의 品格에 同化되어 自然이 된다.
들머리, 군사오거리
남산
남산으로 이어지는 맥길(들머리에서 서천읍 시내를 관통-맥길 skip)
지나온 '오석산'
장항 방향
남산
지나온 '오석산' 방향 과 서천읍 시내
지나온 '남산'
장항제련소 방향
송내교차로
금강하구언/장항 앞바다-장항시내
왕제산
용당산
용당산으로 이어지는 맥길
금강하구언/장항 앞바다
군장대교(군산-장항)
장항제련소 방향
건너편이 군산
道然의 1백두대간 9정맥 9기맥 完走에서
이번 錦北岐脈을 종주함으로써 이제 錦南岐脈만을 남겨둔다.
대단한 위업을 앞두고 있는 도연과 마지막 기맥까지 同行을 할 것이다.
다사항에서의 소라쭈꾸미 샤브샤브과 소맥으로 1기맥종주를 自祝한다.
鏡 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