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愛
나는 비를 좋아한다. 비 오는 소리를 좋아한다.
“우두둑우두둑. 두투둑두투둑, 다다닥다다닥”
다양한 빗소리들을 한글로 표현하자니 참 어렵다. 그리고 빗소리는 부딪히는 것들에 의해 아주 다르게 들리기도 한다. 비닐우산, 일반우산, 유리창, 어릴 적 살던 슬레이트 지붕, 플라스틱 캐노피, 활엽수의 잎사귀, 꽃잎, 연못 등에서 부딪혀 들려오는 소리는 제각각이다. 비 소리에 귀 기울이면 저마다 개성적인 소리에 추억마저 다채롭다.
봄 비.
이른 봄의 교정에 비가 오고 나면 본관에서 운동장까지 긴 계단 옆으로 무리지어 쌓여있는 붉은 동백꽃의 주검. 피다만 어여쁘고 수줍은 모습에 슬픔이 차오른다. 그 색이 하도 고와 조심스럽게 손바닥에 올려놓고 그 죽음을 애도한다.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은 그 요염한 자태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중 가장 어여쁜 것을 골라 양지바른 곳에 꽃 무덤 하나 만들었다. 지금도 동백꽃을 보면 여고 교정이 생각난다. 점심 식사 후 우산을 받쳐 들고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작은 동산을 오르며 비누향 머금은 채 머리카락 나풀대던 그 봄날의 우중 산책을.
여름 비.
소낙비가 달궈진 아스팔트 위로 내리꽂힌다. 얼마나 달궈졌으면 비가 그친 후 아스팔트 위에는 아지랑이가 피어날까. 복개천 틈새로 시큼한 하천내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해 저무는 도시의 골목골목에는 애주가를 부르는 냄새들이 발길을 이끈다. 연탄불에 갓 구워낸 곰장어와 고갈비는 술을 부르고 마주 앉은 친구들의 눈꼬리는 빈 술병의 개수만큼 쳐져간다. 포장마차 지붕위로 다시 소나기가 내리면 이 비 그치면 가자며 술 한 병을 추가한다. 잠들지 않는 도시의 밤. 자작거리는 빗소리와 함께 잠시 더위는 소강상태.
가을 비.
열린 창으로 흙내가 진하게 넘어 온다. 단풍이 들기도 전에 말라 떨어진 잎새 위로 가을비는 위로하듯 내린다. 그 당시 남자 친구는 어학연수를 떠난 뒤라 가을 비는 무료한 나를 무척이나 쓸쓸하게 만들었다. 그가 부재가 느껴질 때면 커피를 두 잔을 탄다. 한 잔은 내 앞에 또 한 잔은 나와 마주 보게 할 때면 어느새 같이 듣던 김현식의 노래가 빈 공간을 채워갔다. 헤어져 있던 그 시간 동안 비가 올 때면, 나는 ‘비처럼 음악처럼’을 그는 ‘거울이 되어’라는 곡을 몇 번이고 반복해 들었다. 그는 겨울이 시작될 즈음 돌아왔고 그 다음해 가을이 시작될 무렵 우린 또 다시 헤어졌다. 그리고 긴 가을장마가 시작되었다.
겨울 비.
결혼 후 대구에서 맞이하는 3번째 겨울이다. 낯선 그곳에서 어느새 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독박육아가 제 옷인 듯 몸에 익어가고 있다. 평화로운 오후, 두 아이는 낮잠을 자고 주방에서 끓여낸 보리차의 열기로 거실 창은 온통 뿌옇다. 뜨거운 보리차를 컵에 붓고 커피믹스 2개를 푼다. ‘커피’인지 그냥 ‘단물’인지 한 모금 마신다. 후줄근한 추리닝 바지에 늘어난 티셔츠를 걸친 서른이 코 앞인 나.
‘점심을 먹었던가?’
‘세수에 양치질은 했나?
베란다 문을 열어보니 겨울비가 나의 민낯에 와 부딪힌다. 눈물인 듯 아닌 듯…….
엄마가 보고 싶다. 집에 가고 싶다.
비는 잠시 가던 길 멈추고 큰 호흡하며 기지개도 펴라는 누군가의 시그널 같다. 뒤돌아보며 추억에도 잠겨보고 그러다 잔잔히 떠오른 것이 있다면 끄집어내어 다시금 떠올려 보라는.
오늘 비가 내렸다. 이른 더위를 다독이며 비가 한 마디 한다.
‘그렇게 급하게 갈 필요 없잖아! 급히 가다간 다쳐“
며칠 분주했던 마음 추스르며 추억에 젖는다.
첫댓글 개인적으로 저는 여름 비가 쪼아요. ~그칠 때까지 한 병 더~캬아~~~
사계절을 통 털어 바라본 비에 대한 관점을 써내려 가니 새롭게 보입니다.
비는 누군가 에게 전하는 시그널 같다. 가던 길 멈추고 잠시 심호흡하며 기지개를 켜라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