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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일생
"임자, 해보기나 해봤어?"
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생전에 부정적인 의견을 접할 때마다 "해보기나 해봤어?" 하는 말을 하면서 끝없이 도전하고 성취했다.
이런 그의 삶과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에피소드와, 그를 사랑했던 여인과 그가 사랑한 여인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Ⅰ.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에피소드
1. 강을 건넌 후 뺨을 맞았지만 진작 이렇게 할 걸하고 후회하다.
고 정주영 회장은 어릴 때 무작정 가출해서 상경하다가 한강에 이르렀는데, 강을 건너는 배는 있었지만 배 삯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거의 반나절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여 망설이다가 무작정 배를 탔다.
배가 강을 건너 사공이 정주영에게 배 삯을 달라고 하자, 어린 정주영은 굉장히 곤란해 하면서 배 삯이 없다 했다. 그러자 엄청 화가 난 뱃사공이 정주영의 따귀를 몇 대 올려붙이고는, “네가 저지른 행동이 후회되지?”라고 하자, “예”라고 하길래, “후회될 짓을 왜 해, 이놈아!” 라고 하니까, 어린 정주영은 “뺨 맞은 게 후회되는 게 아니라 뺨 몇 대에 배를 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진작 탈 걸, 괜히 반나절이나 허비한 게 아까워서요.” 라며 기가 막힌 말을 했다.
이 일을 회고하던 정주영씨는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지, 강을 건너게 되면 다른 인생이 펼쳐지잖아, '다시 되돌아 갈 까? 그냥 건너 갈 까?' 하는 둘 중에 어느 것을 택하냐에 따라 엄청나게 다른 결과가 나타나잖아!”라고 했다.
2. 빈대를 보고 얻은 “임자 해보기나 해봤어?”라는 불굴의 정신
네 번째로 가출을 감행한 열여덟 살의 정주영이 인천부두에서 힘겨운 하역 일을 할 때였다.
당시 힘든 하역 작업 보다 정주영을 더 괴롭혔던 것은 밤에 잠을 잘 때 덤벼드는 빈대였다.
그곳의 노동자 합숙소는 온통 빈대천지였는데, 몸이 솜처럼 피곤한데도 밤이면 빈대 때문에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정주영은 꾀를 내어 주위에 있는 나무로 엉성한 평상을 만들어 거기서 잠을 잤다.
그러나 잠시 동안 물지 않던 빈대는 금방 평상의 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와서는 예전과 같이 사정없이 정주영을 물어뜯었다. 하지만 정주영은 다시 머리를 써서 물을 담은 세숫대야를 평상에 붙은 네 개의 다리발에 담궈 평상 위에서 편안히 잠을 잤다. 그런데 한 참 고이 잠들었다가 너무 근지러워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 일어나 불을 켜자, 놀랍게도 예전과 같이 빈대가 자기를 물었던 것이었다.
‘틀림없이 빈대는 수영을 못할 텐데’하고 유심히 살펴보니, 예상대로 몇 마리의 빈대가 평상의 다리를 오르다가 물에 떨어져 죽어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놀라운 것은 그 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빈대들이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가서 누워있는 사람을 목표로 천장에서 정확히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때 정주영은 하찮은 빈대도 물이 담긴 세숫대야를 뛰어 넘으려고 필사적으로 달려들어 모든 방법을 구사하여서 자기 뜻을 이루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일생 동안 마음의 지표로 삼는 큰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뜻을 세우고 최선을 다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정주영 일생의 정신은 빈대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정주영의 빈대로부터 얻은 이런 정신은 그 후 그의 사업에서 난관이 있을 때마다 위력을 발휘하였다.
3. UN묘지의 황야를 파란 보리밭 공원으로 단장하다.
1952년 12월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가 한국전쟁에 참전 중인 미군들을 위로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아이젠하워의 방문일정 중에 유엔묘지 참배가 들어있었다.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참전용사들의 묘가 있는 부산의 유엔군 묘지는 전쟁 중에 조성되어 풀 한포기 없는 맨땅에 팻말만 꽂아놓아서 초라하기가 그지없었다.
주한 유엔군사령부에서도 묘지를 꾸밀 시간적 여유가 없었지만, 특히 겨울철이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젠하워가 유엔군 묘지를 가보겠다니 하니 비상이 걸렸다.
황량한 묘지에 대통령을 모시고 갈 수 없었던 미8군 사령부는 한국 측에 푸른 잔디를 덮을 방법이 없겠느냐고 문의했지만, 겨울에 잔디를 그것도 파란색의 잔디를 입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의 여러 건설업체에 문의했지만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돌아왔는데, 한 업체에서만 할 수 있다는 답변이 왔는데, 바로 그게 현대의 정주영이었다.
정주영은 사령부 관계자를 만나서 공사 내용을 상의하며 이렇게 말했다.
"겨울철에 파란 잔디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대통령이 다녀가시는 동안 파랗게 풀이 덮인 묘역을 만들기만 하면 되지요?"
"예. 대통령이 유엔묘지에 갔을 때만 묘역이 파란 풀로 덮여 있으면 됩니다. 공사비는 3배라도 드릴테니 꼭 해주세요"
정주영은 바로 낙동강 하구 지역으로 내려갔다.
그곳의 많은 보리밭에는 늦가을에 심은 보리싹이 5~6cm쯤 파랗게 자라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파랗게 잘 자란 보리밭 주인들을 찾아가서 보리밭 전체를 통째로 산 후 대형 트럭 30대를 동원하여 흙이 붙은 채로 파란 보리를 떠서 유엔묘지로 옮겼다.
다음날 유엔묘지는 온통 파란색의 보리싹으로 덮였다.
흙먼지가 날리던 유엔묘지가 "푸른 공원"으로 바뀐 것이다.
미 8군 사령부 관계자들은 이를 보고 "브라보, 브라보"를 외쳤다. 그리고 이후로 미군부대의 모든 공사는 현대가 독차지했다.
4. 10분 만에 경제학 박사가 되고, 500원에 새겨진 거북선 그림으로 영국 은행의 차관을 얻어내다.
조선사업을 하기로 결심한 정주영은 막대한 자본이 들어가는 사업이라서 영국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기로 결심했다.
1971년 9월 영국의 런던에 도착한 정주영은 차관을 얻기로 한 버클레이 은행으로 가지 않고, 동행했던 직원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이봐, 영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교가 어디야?”
“제가 알기에는 옥스퍼드 대학입니다만…….”라고 하자,
“옥스퍼드 대학! 그렇지, 그리로 가자.”라고 했다.
직원은 왜 정주영이 은행으로 곧장 가서 차관문제를 협의하지 않고 옥스퍼드 대학으로 가자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옥스퍼드 대학에 도착한 정주영은 아무 말 없이 10여 분간 대학의 캠퍼스를 걷더니, “이제 됐다. 가자”하고는 옥스퍼드 대학을 떠나 버클레이 은행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버클레이 은행장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간청을 했는데, 은행장은 난데없이 찾아온 한국의 기업가가 차관을 달라고 하자 몹시 당황했다.
게다가 정주영은 자신을 소개하기를 스스로 경제학 박사라고 했다.
이에 은행장이 물었다.
“어느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으셨습니까?”
“아, 내가 방금 전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말에 버클레이 은행장은 놀라서 눈이 똥그래졌고, 옆에 있던 현대 직원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정주영은 방금 전 옥스퍼드 대학에서 10분 정도 걸어 다녔을 뿐인데,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계신 건가하고 직원이 정주영 사장에게 물었다.
“사장님, 언제 박사학위 받으셨어요?”하고, 어이가 없었던 직원은 정주영의 저의를 알고 싶어 상대방이 이왕에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영국인인 것도 잊은 채 귓속말로 물었다. 그런데 정주영은 너무도 당당하게 “임마, 아까 받았다고 그래!”하는 것이었다.
직원은 하는 수 없이 정주영이 시키는 대로 통역했다.
그러자 버클레이 은행장이 "어떤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느냐?"고 묻자, 정주영은 잠시의 뜸도 두지 않고 자신 있게 “아, 그거요? 내가 조선소 건립에 관한 논문을 제출했더니, 단 두 시간 만에 박사학위를 줍디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바지주머니에서 5백원짜리 지폐를 꺼내 펴 보였다.
“이 돈을 보시오. 이것이 거북선이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전인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소. 단지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었을 뿐, 그 잠재력은 그대로 갖고 있소.”라는 재치 있는 임기응변으로 버클레이 은행의 롱바톰 은행장을 감동시켜, 조선소 설립 경험이 전혀 없으면서 아직 배를 만들어 달라는 선주도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차관도입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해외 차관에 대한 합의는 얻었지만 이제 더 큰 문제인 일감을 맡길 선주를 찾는 것이었다.
그때 정주영의 손에는 황량한 바닷가에 소나무 몇 그루와 초가집 몇 채가 선 초라한 백사장을 찍은 사진이 전부였다.
정주영은 이 미포만의 초라한 백사장 사진 한 장을 쥐고 미친 듯이 배를 팔러 다녔다.
결국 정주영은 그리스의 거물 해운업자 리바노스를 만나 26만 톤짜리 배 두 척을 주문 받았고, 조선소 건립과 동시에 2척의 배를 진수시켜 세계 조선사에 유일한 기록 역사를 이뤘다.
이렇게 정주영의 추진력으로 이뤄낸 현대조선소는 현재엔 세계 최대의 조선소가 되었다
5. "너무 덥고 물도 없어서 도저히 안됩니다" 하는 중동지역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건설하기에 좋은 곳이 중동입니다"
1975년 여름, 박 정희 대통령이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을 청와대로 급히 불렀다.
“달러를 벌어들일 좋은 기회가 왔는데도 일을 못하겠다는 작자들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중동에 다녀오십시오. 만약 정 사장도 안 된다고 하면 나도 포기(抛棄)하지요.”
박정희 대통령의 이 말에 정주영이 물었다.
“각하, 무슨 말씀입니까?”
“1973년도의 석유파동으로 지금 중동국가들은 달러를 주체하지 못 하는데, 그 돈으로 여러 가지 사회 인프라를 건설하고 싶지만 그곳이 너무 더운 나라라서 선뜻 일하러 가는 나라가 없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일할 의사를 타진해 왔습니다. 관리들을 보냈더니 2주 만에 돌아와서는 너무 더워 도저히 일할 수 없을뿐더러 건설공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도 없어서 공사를 하기에 불가능 하다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당장 가서 보고 오겠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5일 만에 다시 청와대로 돌아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이렇게 보고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하늘이 우리를 돕는 것 같습니다.”
“무슨 얘기요?”
“중동은 이 세상에서 건설공사를 하기에 제일 좋은 곳입니다.”
“뭐요 임자!”
“각하, 그곳은 1년 12달을 비가 오지 않으니까 1년 내내 공사를 할 수가 있고요.”
“또 뭐요?”
“건설에 필요한 모래, 자갈이 현장에 있으니까 건설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자재 조달이 쉽고요”
“그러면 물은?”
“그거야 어디서 실어오면 되고요(이후 유조선이 우리나라에서 중동으로 갈 때는 물을 싣고 가고, 중동에서 한국으로 올 땐 기름을 채워 오게 했다)"
“50도나 되는 더위는?”
“그거야 천막을 치고 낮에는 자고, 밤에 일하면 되지요.”
“정주영 회장의 이 말을 들은 박대통령은 크게 기뻐하면서 급히 부저를 눌러 비서실장을 불렀다.
“임자, 현대건설이 중동에 나가는 데 정부가 지원할 수 있는 것은 뭐든 다 도와 줘요!”
이후로 정주영 회장의 말대로 한국 사람들은 낮에는 자고, 밤에는 횃불을 들고 일하는 초인적인 근면성으로, 사우디 국왕을 감명시킨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으며, 달러가 부족했던 그 시절, 30만 명의 일꾼들이 중동으로 몰려가 보잉 747 특별기편으로 달러를 싣고 들어왔다.
6.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대양수송작전
사우디의 주베일 산업항 건설 당시 정주영은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모든 기자재를 울산조선소에서 제작하여, 세계최대 태풍권인 필리핀 해양을 지나 동남아 해상, 몬순의 인도양을 거쳐 걸프만까지 대형 바지선을 끌고 가는 대양 수송작전이라는 이때까지 아무도 생각지 않았던 모험을 제시했다.
수송 도중 대형 파이프 자켓이 태풍으로 해난사고가 날 것에 대비해 자켓이 해면에 떠 있게 하는 공법의 치밀함도 보였다.
당시 선진국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자켓 설치공사 착수와 함께 자켓을 연결하는 빔제작도 설계대로 울산에서 제작한 사실이다.
수심 30m나 되는 곳에서 파도에 흔들리면서도 중량 5백 톤짜리 자켓을 한계 오차 5cm이내로, 꼭 20m 간격으로 심해에 설치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선진국들도 일단 자켓 설치가 끝난 후 그 간격을 재서 빔을 제작하던 실정이었다.
그러나 정주영의 창조적 발상과 그칠 줄 모르는 도전의식으로 가로 18m, 세로 20m, 높이 36m로 무게가 5백 톤이나 되는 자켓 89개를 울산에서 운반해 와서, 5cm 이내의 오차로 완벽하게 설치해 만든,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은 20세기 최대의 역사라고 세계 언론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7. 서산간척지의 신화, 유조선 공법(일명 정주영 공법)
서산 방조제 공사의 마지막 연결공사가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을 때다.
아무리 돌을 쏟아 부어도 세찬 물살은 흔적도 없이 돌무더기를 쓸어갔다.
4.5톤이 넘는 바위덩어리를 쇠줄로 서너 개씩 묶어서 던져도 소용이 없었다.
6400m에 이르는 방조제 중 270m를 남겨두고 현대건설은 불가능한 한계에 맞닥들였다.
당시의 정주영에게 번쩍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해체해서 고철로 쓰려고 30억원에 사다가 울산에 정박시켜 놓고 있던 스웨덴 고철선 워터베이호를 끌어다 가라앉혀 물줄기를 막아놓고 바위덩어리를 투하 시키면 되겠구나.’
현대정공, 현대상선, 현대중공업의 기술진이 총동원되었다.
길이 322m의 대형 유조선은 서서히, 그리고 정확하게 못 다 이은 방조제의 틈을 막았다.
물살이 잦아들자 수많은 돌무더기를 바다로 던져 넣었다. 이른바 '정주영 공법'의 탄생이다.
행정구역은 충산 서산시, 홍성군, 태안군이 함께하고, 총 간척 면적 4,611만평, 총 답(논)면적 3,062만평, 한반도의 지형이 바뀐 대공사였다.
유조선 공법에 대한 실행 가능성을 현대의 기술진들이 면밀히 분석한 후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자, 정주영은 1984년 2월 24일 직접 유조선에 올라 최종 물막이 공사를 진두지휘했다.
그래서 이 ‘유조선 공법’을 일명 ‘정주영 공법’이라고도 부른다.
이 공법 덕분에 현대건설은 계획공기 45개월을 35개월이나 단축, 9개월 만에 완공시킴으로써 총 공사비를 2백 8십억 원이나 절감해 세인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정주영이 창안한 ‘유조선 공법’은 그 후 미국의 뉴스위크와 뉴욕타임즈에 소개되었고, 런던의 템임즈강 하류 방조제 공사를 수행한 세계적 철 구조물 회사인 랜달팔머 &트리튼 사(社)가 유조선 공법에 대한 문의를 해오는 등, 전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8. 현대 직원이 손수 만든 꽃바구니로 올릭픽을 유치하다
한국과 일본의 올림픽 유치전 당시 한국이 올림픽 유치를 성공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올림픽유치위원장이었던 정주영은 현대의 해외파견 직원들을 동원해 IOC위원들에 대한 세밀한 신상파악으로 성향을 분석하고 경쟁유치국의 활동상황까지 치밀하게 분석했다.
정주영은 한국의 IOC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꽃바구니 하나씩을 각국의 IOC 위원 방으로 넣어 주었다.
그 꽃바구니는 단순히 주문된 것이 아니라, 현대의 해외 파견 직원 부인들이 정성스럽게 하나하나 만든 것이었다.
꽃바구니의 반응은 의외로 대단했다.
꽃바구니를 전달한 다음날, 각국 IOC위원들이 회의를 끝내고 로비에 모였다가 정주영 일행을 보면서 모두가 반가워하며, 아름다운 꽃을 보내 주어서 너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 주었다.
그때 일본측은 IOC위원 부부들에게 최고급 일제 손목시계를 선물했는데, IOC위원들이 시계 선물에 대한 인사는 없고, 꽃바구니에 대한 감사 인사만 만발했던 것이다.
역시 값비싼 선물보다는 마음과 정성이 담긴 작은 선물이 인간적인 따스함을 전달할 수 있고 부담감도 안준다는 사실을 정주영이 간파했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각국 IOC 위원들이 우리나라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쪽으로 변했고, 그동안 정주영과 현대 임직원들이 펼친 유치활동의 성과가 나타내기 시작했다.
결국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쎄울 코리아!”를 외쳐, 일본과의 올림픽 유치전은 한국의 승리로 마감됐다.
9. 소떼를 몰고 북한으로 가다.
어느 날 정주영은 사장단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얘기했다.
“나, 앞으로 소떼 몰고 평양으로 가겠다.”
사장단들은 모두 의아한 눈길로 정주영을 바라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왜 정주영이 하필 소떼를 몰고 북한에 가려는지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는 열일곱 살 때 지독한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세 번째 가출을 할 때, 한동안 밥이라도 굶지 않으려면 돈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
그의 아버지가 정주영의 누이를 시집보내기 위해 소 판돈을 장롱 속에 넣어둔 걸 알고, 그 돈을 훔쳐서 집을 나왔던 것이다.
정주영의 소 한 마리 값에 대한 죄책감은 평생을 두고 아버지에 대한 불효로 남아있었던 것이었다.
정주영이 고향인 이북 땅에 소떼를 몰고 방북을 하려했던 것은, 이런 아버지에 대한 불효를 오백 배, 천 배 갚고 싶었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소를 몇 마리나 갖고 갈까? 500마리? 아냐, 500마리가 뭐야! 이왕 하려면 501마리로 해야지”
최종결론은 501마리였다.
사장단이 물었다.
“500이면 500이지 왜 501마리 입니까?”
그러자 정주영은 “한 마리를 더 보탠 것은 이번으로 끝이 아니라, 앞으로 더욱 이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야. 여운을 주는 게 멋지지 않겠어?”
그는 1998년 10월 27일, 서산농장에서 키운 501마리의 소 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갔다.
“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든 반드시 된다는 확신 90%에,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 10%를 가지고 일해 왔다. 안될 수도 있다는 회의나 불안은 단 1%도 끼워 넣지 않았어, 기업은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야.”
한겨울 눈이 덮인 골프장에서도 다른 사람은 다 포기하였지만, 정주영 회장은 골프공에다 빨간 칠을 하게 한 후 골프를 즐겼다고 한다. 노는데도 포기 하지 않은 정주영 이었다.
* 정주영 회장의 명언들
1) 운 없다고 생각하니까 운이 나빠지는 거야.
2) 길을 모르면 길을 찾고, 길이 없으면 길을 닦아야지.
3) 무슨 일이든 확신 90%와 자신감 10%로 밀고 나가는 거야.
4) 사업은 망해도 괜찮아, 신용을 잃으면 그걸로 끝이야
5) 나는 젊었을 때부터 새벽에 일어났어. 더 많이 일하려고
6) 나는 그저 부유한 노동자에 불과해.
7) 위대한 사회는 평등한 사회야, 노동자 무시하면 안 돼.
8) 고정관념이 멍청이 만드는 거야.
9) 성패는 일하는 사람의 자세에 달린 거야.
10) 아무라도 신념에 노력을 더하면 뭐든지 해낼 수 있는 거야.
11) 내 이름으로 일하면 책임 전가 못 하지.
12) 잘 먹고 잘 살려고 태어난 게 아니야, 좋은 일 해야지.
13) 바쁠수록 일할수록 더 힘이 나는 건 신이 내린 축복인가 봐.
14) 열심히 아끼고 모으면 큰 부자는 몰라도 작은 부자는 될 수 있어.
15) 불가능 하다구? 해보긴 해봤어?
16)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Ⅱ. 정주영 회장을 울린 세여인
국내 최대 재벌 현대그룹의 회장 고(故) 아산(峨山) 정주영 씨에게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세 명의 여인이 있었다.
부인인 고(故) 변중석 여사, 단골로 드나든 요정 마담,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았던 첫사랑인 고향 통천의 이장 집 딸이 그 주인공들이다.
1. 정주영 회장의 부인인 변중석 여사
▲ 정주영과 변중석 부부, 좌) 1953년 피난지인 부산에서의 신혼시절, 우) 1985년 고희 때의 모습
정주영 회장은 변중석 여사와 스물넷에 결혼하였는데, 변중석 여사는 평생 아내이자 어머니, 맏며느리로서 소박하고 조용한 성품으로 대가족을 보듬으며 살았다.
정주영 회장은 평생 자기를 편안하게 내조한 아내에 대해 평하기를 "아내가 재봉틀 한 대를 유일한 재산으로 아는 점, 부자라는 인식을 전혀 하지 않는 점"을 존경한다고 밝힌 바 있다.
정회장의 최측근인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은 고 변중석 여사를 ‘살아 있는 천사’라고 묘사했다.
변중석 여사는 종갓집의 큰며느리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매일 자정이 되어 귀가하는 정주영 회장의 목욕물을 준비하고, 다시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했다.
남편 얼굴을 볼 시간도 거의 없이 일복(속칭 몸빼)을 입은 허름한 옷차림과 화장기 하나 없는 맨얼굴로 날마다 본사 직원 3백여 명의 점심을 준비했다.
더욱이 자식 양육까지 도맡으면서도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화내거나 싫은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변여사는 정주영 회장을 ‘여보’나 ‘당신’ 대신 항상 ‘회장님’이라고 불렀다.
정주영 회장의 어머니인 시어머니도 변 여사에 대해 말하기를 “자신보다 열 배는 부지런한 사람이다”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정주영 회장이 변 여사와 전혀 상관이 없는 핏덩이를 자식이라고 데려와서 “잘 키우라”라고 했을 때도 전혀 싫은 내색 없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녀는 고 정회장의 곁에서 평생 함께하며 그의 안위를 보살핀 조강지처였다.
2. 목숨까지 버리며 정주영을 도운 요정 마담
두 번째 여인은 정주영 회장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나타났다.
낙동강의 고령교 복구공사에 자신만만하게 도전했던 정회장은 여름에 불어난 물과 부족한 장비,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공사 진척도 보이지 않고 재정도 바닥난 상태였다.
인부들은 밀린 노임을 지급하라며 파업을 해서 일은 거의 중단되었고, 모든 돈을 쏟아 부었지만 그 마저도 바닥나서 이젠 사채 조달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정회장은 당시 사채놀이를 크게 하고 있던 요정의 마담에게 자금 지원을 부탁했다.
그녀는 더 이상 돈을 융통하기 어려웠던 정 회장에게 필요할 때마다 자금을 지원했다.
정 회장이 접대를 위해 자주 찾았던 그 요정의 마담은 당시 최고로 잘나가던 요정의 마담으로써 천하일색에다 여전(현재의 대학)까지 나온,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인이었다.
이 요정의 단골손님이던 정 회장은 소박하고 검소한 모습과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 씀씀이로 요정 내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말이 청산유수라는 마담도 정 회장 앞에서는 얼굴이 빨개져서 제대로 말을 못할 정도였다 한다.
그녀가 돈을 보내줄 때마다 당시 경리 책임자인 오인보 씨가 서울에 가서 받아오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요정 마담이 정 회장에게 “한 번은 꼭 보고 싶다. 이번에는 직접 와 달라. 서울에 꼭 들러 달라. 준비를 좀 많이 했으니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정 회장은 볼 면목이 없다며 오인보를 보냈고, 평소보다 세 배가 넘는 큰돈과 편지를 받았다.
정 회장은 편지를 읽고 깜짝 놀랐다.
그 편지는 다름 아닌 유서였다.
‘꼭 성공하시고 앞으로 더 큰일들 많이 하시기를 바랍니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 정 회장은 그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좋아했던 정 회장을 위해 요정 마담은 계속해서 큰 빚을 내어 자금을 댔다가 죽음으로써 그 빚을 모두 안고 떠난 것이었다.
정 회장은 마담의 장례식을 치르고 장지에 다녀오면서 오인보 씨와 함께 크게 울었다고 한다.
그녀에게서 받은 마지막 돈으로 밀린 노임을 해결하고 일부 이자를 갚아 다시 일을 시작했다.
사업 실패를 코앞에 두고 자살까지 생각했던 정 회장은 마담이 그를 대신해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죽음은 생사의 기로에 섰던 정 회장에게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해결할 수 있다’라는 교훈을 뼛속 깊이 새기고 살아가게 했다.
3. 정주영의 첫사랑 북한 통천의 이장집 딸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여인인 정 회장의 첫사랑은 ‘오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의 나뭇잎 같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북한에 있는 강원도 통천의 이장집 딸이었던 정 회장의 첫사랑은 통천에서도 제일가는 부잣집 딸이었다.
그녀의 집은 당시 경성(지금의 서울)에서 발행하는 동아일보를 유일하게 구독하는 집이었다.
정 회장은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하고 몸에 진이 다 빠진 후에도 이장 집에 가서 동아일보를 받아 올 생각만 하면, 20리 떨어진 길도 100m 달리기 선수처럼 쏜살같이 달려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동아일보에 연재되고 있던 이광수의 <흙>을 보며 ‘허숭’처럼 경성에 가서 변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두 살 많은 이장 집 딸에게도 농군의 모습이 아닌 변호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문을 받을 때마다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천사같이 예쁜 그녀의 모습에 소년 정주영은 눈이 부시고 가슴이 울렁거려 얼굴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얼굴이 빨개지고 화끈거려 땅바닥만 바라보았고 신문을 주는 손만 봐도 천사의 손보다 더 곱다고 생각했다.
<흙>과 이장 집 딸 때문에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던 그때 그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꿈을 이루겠다고 네 번의 가출 끝에 고향 통천을 떠난 정 회장은 온갖 고생 끝에 광복 이후 현대건설 간판을 걸고 건설업과 자동차 수리업을 해 꽤 큰돈을 벌었다.
정 회장은 항상 마음에 품고 살던 첫사랑이 보고 싶어서 고향을 찾아갔다.
하얀 신사복에 앞이 뾰족한 백구두를 신고, 모자도 쓰고, 좋은 시계도 찼다.
당시 아주 멋쟁이 모습으로 친구 김영주와 함께 고향에 가서 그녀를 만났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결혼해 아이를 둘이나 두고 있었다.
그녀는 신랑을 소개해주면서 밥을 차려주었지만 정 회장은 여전히 그녀가 너무나 예뻐 얼굴도 쳐다보지 못했다.
가슴이 울렁거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식사를 끝냈다.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그 여자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침 식사 대접을 한 번 더 받고서 준비한 선물을 준 뒤에 헤어졌지만,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정 회장의 첫사랑에 대한 사모는 그의 가슴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67년이 흘렀고, 17세 소년이었던 정 주영은 한국 최대의 재벌 현대그룹의 명예회장으로 그의 나이 84세가 된 때였다.
그는 이익치 회장에게 자신이 북한에 가려는 이유 두 가지를 말했다.
먼저는 국가와 민족의 통일, 두 번째는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익치 회장으로 하여금 김정일 위원장에게 그 여인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에서 첫사랑을 데려와 매일 아침 손잡고 걸어서 출근하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정 회장은 서울 가회동에 첫사랑과 함께 살 집을 마련하라고 이익치 회장에게 지시했다.
이 회장은 가회동에 매물로 나온 전 화신산업 박흥식 사장의 집을 70억원에 매입했다.
가회동 2층에 침실을 마련했고, 그날부터 정 회장은 가회동에서 기거했다.
노년의 정 회장에게 첫사랑에 대한 희망은 곧 삶에 대한 희망이었다.
2000년 초 자식들의 재산 싸움을 보면서 정 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정씨 일가의 경영 일선 퇴진과 전문 경영인 체제 도입을 선언했지만 자식들은 이를 거부했다.
정 회장은 더욱 큰 실의에 빠졌고 이것은 건강 문제로 이어졌다.
그러나 마지막 희망이 남아 있었기에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을 성공시키며 김정일 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6월28일 판문점을 지나 평양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정회장은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한 첫사랑 여인이 2년 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북한의 관계 당국이 동원되어 통천의 이장 집 딸을 수개월간 찾으면서 정 회장의 마음의 연인인 그녀가 전쟁 때문에 폐허가 된 통천을 떠나 청진에서 살다가 죽었다는 것과, 그녀의 가족을 평양에 데려다 놓았으니 원하면 만나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정 회장은 북한의 아태평화위 송호경 부위원장에게 한 시간여 동안이나 그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고는 “2년 전에만 알았다면 아산병원에 데려가서 고칠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가 좀 늦었다”라며 굉장히 슬퍼하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 후 정 회장은 다시 북한을 찾지 않았다.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것을 본 정주영 회장은 몇 달 후인 2001년 3월 눈을 감았다.
그의 첫사랑은 평생을 그의 마음에서 함께했고, 결국 그를 데려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