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그것이 이제까지 한 일은 그저 거기 있으면서 자기를 제공하며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이리 와. 앉아서 편히 쉬어. 나는 너를 위해 여기 있으니까.”
그리고 미래의 깨어남을 추구하느라 너무 바빠서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카펫.
그것이 어떻게 그저 거기 있으면서 자기를 제공하며 속삭이는지 보십시오.
“이리 와. 내 위에 서 있어 봐.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
당신은 카펫 위에 서 있는 깨달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카펫을 보기 전에, 50년 동안 수련을 하거나 열반에 이르기 위해 명상하려고 했습니다.
아니면, 완전히 현존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 뒤에야 카펫을 보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전부 뒤로 미루는 행동이었습니다.
그것은 전부 지금 여기를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오지 않는 미래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카펫은 항상 너무나 순전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거기에 있으면서 자기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삶은 언제나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우리는 바삐 떠나기만 했습니다.
우리는 천장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바꾸려 하느라, 자기 자신을 뜯어고치려 하느라, 다른 어떤 사람이나 다른 무엇이 되려 하느라 너무 바빴습니다.
천장에는 무관심한 채, 우리는 그 천장 아래서 깨어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동안 줄곧 천장은 그런 것은 없음을, 당신이 착각하고 있음을, ‘이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임을 아주 다정하고 부드럽게 상기시키려 하고 있었습니다.
줄곧 천장은 신성의 비밀스러운 표현이었습니다.
하나임은 언제나 거기에, 천장 속에, 카펫 속에, 옷 속에, 호흡 속에 모든 것 속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하나임은 언제나 거기 있었지만, 우리는 허구적인 자아를 개선하느라 너무 바쁜 나머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얼마나 순전한지요! 우리는 한순간도 이 순전함과 분리된 적이 없습니다.
분리를 끝내려 애쓰면서 그 모든 세월을 보냈지만,
이제 우리는 애초에 분리된 적이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의자, 천장, 카펫은 ‘이것’으로 돌아오라고 언제나 우리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언제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명백한 것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즉, 삶 자체가 언제나 우리를 가르치려 했고,
삶 자체가 언제나 유일한 스승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저 깨어남의 체험을, 저 지복의 체험을, 책에서 읽은 저 간접적인 체험들을 추구하느라 너무 바쁜 나머지 ‘이것’의 체험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비범한 체험을 추구하느라 너무 바쁜 나머지 평범한 체험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며, 그러므로 다른 ‘영적인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속이느라 나무나 바쁜 나머지,
‘영적’이라거나 ‘깨어났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지만 누구 못지않게 조화로운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길 위의 노부인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출처 : "경이로운 부재" 제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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