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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남겨진 자의 상처와 치유 - 프란쯔 라이트의 마써즈 빈여드 섬으로 산책가다.pdf
홀로 남겨진 자의 상처와 치유
―프란쯔 라이트의 [마써즈 빈여드 섬으로 산책가다]
양균원 (대진대 교수, 시인)
프란쯔(Franz Wright)는 1953년생 미국 시인이다. 그는 1998년 오버리 대학(Oberly C) 출판사에서 상재한 어둑한 빛(Ill Lit)으로 세간의 상당한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다음 시집 이전의 인생(The Beforelife)을 주요 출판사 중의 하나인 노프(Knopf) 사에서 2001년에 발행했다. 2003년의 마써즈 빈여드 섬으로 산책가다(Walking to Martha’s Vineyard)는 다음 해에 그에게 퓰리처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라이트(James Wright) 또한 1978년에 시전집(Collected Poems)으로 같은 영광을 누린 적이 있는데 이로써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한 상을 수상하는 첫 경우가 발생한다. 2006년의 신의 침묵(God's Silence)에 이어 2009년에는 휠링 모텔(Wheeling Motel)이 발표되었고 최근작으로는 2011년의 산문시집 아이죽음숲(Kindertotenwald)과 시인의 이름 첫 글자를 제목으로 삼은 2013년의 F(F: Poems)가 있다.
프란쯔는 창작 외에 번역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여 왔다. 독일의 릴케(Rainer Maria Rilke)와 불란서의 샤르(Rene Char)의 시를 번역했고 2008년에는 번역가이며 작가인 부인과 함께 벨로루시 시인 발지나 모트(Valzhyna Mort)의 시를 번역한 눈물공장(Factory of Tears)을 출간하기도 했다.
프란쯔의 수상경력에는 2004년의 퓰리처상 외에 1985년과 1992년 두 차례 수혜한 미예술기금(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 1989년의 구겐하임 연구비(Guggenheim Fellowship), 국제펜클럽의 1996년 뵐커 시문학상(Voelcker Award for Poetry), 그리고 2008년의 패터슨 시문학상(Patterson Poetry Prize)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현재 매사추세츠 주 월썸(Waltham) 시에서 부인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
이 글은 프란쯔의 2004년 퓰리처상 수상시집에 실린 네 편의 시를 완역하고 분석함으로써 그의 언어의 특징과 핵심 주제를 살피는 데 뜻을 둔다.
I
치유는 항상 상처를 전제한다. 하지만 상처가 항상 치유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 상존하는 고통의 요소들과 신이 사라진 영적 불모의 시대상황을 고려할 때 섣부르게 도달한 해결과 극복은 치유가 아니라 자기기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프란쯔의 시는 압도적 우위에 있는 고통과 거기에 맞서는 작은 행복이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묘한 균형을 이루는 경우를 종종 보여준다.
시집 마써즈 빈여드 섬으로 산책가다의 들머리에 실린 시 「첫 해」(“Year One”)는 프란쯔가 다른 시들에서도 특징적으로 견지하는 어떤 균형의 감각을 잘 예시해준다.
북쪽 모퉁이에
나는 여전히 서있었다.
늑대 무리의 절망의 색채를 띤 달빛 동천의 구름들.
당신의 존재의
증거? 아무것도 없다,
다만.
I was still standing
on a northern corner.
Moonlit winter clouds the color of the desperation of wolves.
Proof
of Your existence? There is nothing
but. (3)
일반적으로 시는 연 구분을 위해 한 행의 여백을 두는데 이 시는 두 행의 공백을 벌려놓고 있다. 그래서인지 간결하게 응축된 세 개의 연이 각자 더 외롭고 단절되어 보인다. 한 연 안에 위치한 단어들조차 서로의 관계를 서먹해하는 듯하다. 그래서 각자의 존재가 더 도드라진다. 이 시의 종결은 “but”이라는 한 단어로 이뤄지고 있다. 이 단어가 앞선 행의 마지막 단어 “nothing”과 만나면 함께 “only”의 뜻을 형성하게 된다. 그 둘은 다음에 오는 것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뜻하게 된다. 생각하기에 따라 부정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강조되지만 긍정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더라도 뒤에 오는 것은 분명하게 있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그런데 행갈이에 의해 서로 떨어지고 보니 이 시에서 “nothing”은 우선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보다 강조하게 된다. 화자는 “당신의 존재의 / 증거”에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북쪽 모퉁이에서”의 기다림은 좌절에 이른다. 오지 않는 당신, 과연 당신은 존재하기나 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에서 화자는 그 증거가 아무것도 없는 현실에 압도당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그는 압도적 고통을 끌고 마지막 행으로 내려와 “but”을 토한다. 그가 “다만” 다음에 무엇을 데려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가 “당신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면서도 이것만은, 하고 내세울 수 있는 게 무엇일지 궁금하다. 화자는 “다만”에 멈춤으로써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지만 그 다음을 기약함으로써 혹은 감춤으로써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프란쯔의 시에서 행복은 비록 잠깐이라도 고통만큼 실제적이라는 느낌을 주고 그로써 독자에게 호소하는 바가 큰데 그렇다고 그가 위안을 찾아 의지하는 것이 종교만큼 높거나 철학만큼 깊은 것 같지는 않다. 그는 그냥 고통스럽고 또 스치듯 어떤 기쁨을 실제로 감지하는 듯하다. 그는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려하지 않고 현장의 감각을 가장 간결한 언어로 드러내는데 주력한다. 그의 간결한 언어는 직접적 경험을 구현하면서도 예지적 직관을 함축하는 바가 있다.
II
시 「심장은 하나」(“One Heart”)는 고통을 더 잘 이겨내는 자가 희망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희망은 고통의 극복에서보다 오히려 그 안에서 더 찬연할 수 있다.
늦은 오후, 아무도 모르는 산책길을
평소보다 더 오래 걷다가 방금
돌아왔어요. 거의 한 달 만에 처음 나선 길인데
모든 게 변했어요. 한 번 더 살게 된,
3월의 끝이에요. 젊은 여인이 오늘 아침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코카인을 주사하는 것이 어쩐지
설명했지요. 놀랍도록 바람 센 격변의 빛,
구름, 그리고 물은 어느 순간
바로 당신이었어요.
내 육신에는 심장이 하나밖에 없어요,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갈색 잎에 묻힌 채 아직 창조되지 않은 모든 겨울의 발들이
녹색을 띠기 시작한 죽은 풀들 위로 달리고 있어요, 향기가
나지 않는 첫 오랑캐꽃이 여기저기, 되돌아오는 걸, 첫 별이 단번에
알아챘어요, 누군가 서서 검은 물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당신께 감사해요, 정신 멀쩡한 사람으로 한동안 살게
해줘서; 당신께 감사해요, 이렇게 사는 게 무언지 알게
해줘서. 당신께 감사해요, 바라볼 수 있게 해줘서, 당신의 겁나게
푸른 하늘을 두려움 없이, 당신의 무시무시한 세상을 공포
없이, 또한 사랑받지 못하여 희망 잃고 상실에 빠진 당신의
정신병자를
이 사랑으로
It is late afternoon and I have just returned from
the longer version of my walk nobody knows
about. For the first time in nearly a month, and
everything changed. It is the end of March, once
more I have lived. This morning a young woman
described what it's like shooting coke with a baby
in your arms. The astonishing windy and altering light
and clouds and water were, at certain moments,
You.
There is only one heart in my body, have mercy
on me.
The brown leaves buried all winter creatureless feet
running over dead grass beginning to green, the first scent-
less violet there and there, returned, the first star noticed all
at once as one stands staring into the black water.
Thank You for letting me live for a little as one of the
sane; thank You for letting me know what this is
like. Thank You for letting me look at your frightening
blue sky without fear, and your terrible world without
terror, and your loveless psychotic and hopelessly
lost
with this love (5)
화자는 아무래도 회복 중에 있는 환자인 것 같다. 그의 주변에는 마약중독에서 벗어나려하는 “젊은 여인”이 있다. 사랑하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로 주사바늘을 꽂을 때 그녀는 얼마나 자신이 밉고 괴로웠을까. 화자 또한 그토록 빠져나오기 힘든 중독의 늪에서 재활의 분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한 번 더 살게 된 / 3월의 끝에서” 그는 병을 딛고 겨우 몸을 추슬러 한 달 만에 산책에 나선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맨 정신으로 요동치는 “빛,” “구름,” 그리고 “물”을 만난다. 그가 어느 순간 그것들에서 대하게 되는 “당신”은 굳이 신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깨어있는 정신은 평소 그렇지 못한 정신에게는 각별하게 소중할 것이다. 화자는 지난 해 낙엽에 묻혀 사라진 피조물의 유령의 “발들”이 채 싹이 돋지 않은 것들 위로 돌아다니는 것을 목격한다. 생명은 그렇게 죽음과의 경계에서 간절하고 놀랍다.
그래서 “심장은 하나뿐”이라는 화자의 의식은 생명의 위태로움과 경이로움을 함께 드러낸다. 생명, 혹은 깨어있음이 소중하게 다가오는 그만큼 그것을 유지하고픈 소망 또한 커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가 고마워하는 생명은 활력에 넘치고 환희에 찬 종류의 것이 아니다. 화자는 잠깐이나마 맑은 정신의 상태에 있게 된 것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것에 대해 연도라도 하듯 반복적으로 감사해하고 있다. 남들에게는 일상적으로 주어지는 것에 불과했을 “푸른 하늘”과 “세상”이 화자에게는 “겁나게”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이제 그는 그것들을 “두려움 없이” “공포 없이” 바라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 그는 일반의 기준에서 대단한 것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다. 화자가 토하는 감사의 연도가 주는 감동은 여기에 있다. 더군다나 그는 마지막에서 “사랑받지 못하여 희망 잃고 상실에 빠진 당신의 / 정신병자를” 지금은 감사하게 바라볼 수 있다고 천명하고 있다. 그것도 “이 사랑으로.” 사실, 시 원문의 끝부분에서 화자가 바라보는 마지막 대상은 “정신병자”가 아니라 “정신병을 앓는” 그리고 “상실에 빠진” 누군가 혹은 무엇이다. 화자는 이제 제정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대상을 나열하다가 마지막에 수식어만 남기고 고의적으로 수식될 실체를 생략하고 있다. 그것은 “사랑받지 못하여 희망 잃고 상실에 빠진” “정신병을 앓는” 화자, 화자와 같은 처지의 사람, 혹은 그러한 세상을 다 뜻할 수 있다. 시를 종결짓는 “이 사랑으로”가 다른 행들과 다르게 유일하게 들여쓰기 되어 있다. “사랑”이라는 말을 함부로 내뱉지 못하고 주저하는 마음 또는 그 감정에 대한 조심스러운 고마움이 효과적으로 살아난다.
화자가 자기연민에서 빠져나와 스스로를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은 그의 심장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뿐인 심장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기 때문이다. 정신병을 앓고 알코올과 마약중독에 취약하더라도 그 몸과 마음을 다시 사랑해야하는 것은 심장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랑은 남녀 간의 그것처럼 애틋하지도 종교의 그것처럼 이타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절망과의 경계선상에서 처연하기까지 하다. 그의 기쁨은 고난의 극복을 통해 오는 종류의 것이 아닌 듯하다. 그가 의존하는 밝음은 어둠이 가신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늘 함께 있다.
III
프란쯔에게 아버지는 창조자이면서 파괴자이다. 부모의 이혼 후 어머니와 살게 된 프란쯔에게 아버지는 한편으로, 훗날 시로써 서로 맺어지는 데서 볼 수 있듯,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어떤 것을 상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가 의지하고자 하는 어떤 것의 소멸과 그에 따르는 방황을 뜻한다. 간결하게 짧은 시를 써내는 데 능한 시인이 그런 시편 넷을 모아 구성한 시 「비행」(“Flight”)은 아버지의 부재가 그의 인생에 일으킨 물결을 형상화하고 있다.
1
저 유리잔, 저기에 채워졌던 게 뭐였지, 알코올, 물, 아니 빛이었던가
열 살 때
나는 당신을 종교로 만들었지요
고독하게
당신 향해 네 발로 엎드린 사제, 나는
그 작은 구유 촛불을
계속 타오르게 했어요
당신의 반 인치 크기
검정 성경문구를
은신처에 보관해왔어요
세상의
파괴자
저 텅 빈
유리잔
That glass was it filled with alcohol, water, or light
At ten
I turned you into a religion
The solitary
four-foot priest of you, I kept
the little manger candle
burning, I
kept your black half-inch of
scripture
in the hiding place
Destroyer
of the world
That empty
glass
2
4학년인가 5학년 때, 당신께서 나타나리라고
어머니가 신문에서 읽어주셨던 곳, 그곳이 어느 도시였던가
어머니는 나에게 정장을 입히고
작은 타이를 매주고는
데리고 가셨지요
당신에게 뛰어가고 싶었어요―이 사람들은 다 누구일까?―
나는 혼자 앉아서 당신에게
눈빛을 쏘아내고 있었고 당신은 차마 내 눈을 마주보지 못하다가, 나중에
머뭇머뭇 다가서서
나와 악수했어요
In which city was it, in fourth or fifth grade, Mother
read in the newspaper you'd be appearing
and dressed me up in suit
and little tie
and took me
I wanted to run to you―who were all these people?―
I sat alone beaming
at you who could not meet my eyes, and after
you shyly approached
and shook my hand
3
대륙 구석구석을 뒤덮고 있는
도시의 거리들을 걷다가
불빛이 모두 꺼지고
사람들마저 사라져 텅 비게 되더라도
설령 그때라도
당신은 거기 있어요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이 사랑에 압도되어
내가 그 거리들을 걸어가고 있다면
여전히 나는 바다에 내리는 눈보라일 거예요
당신이 나를 떠난 여덟 살 이후로 늘 외로웠어요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서 별처럼 멀리, 하지만
내 뼈보다 더 가까이, 당신은
당신은 거기 있어요
If I'm walking the streets of a city
covering every square inch of the continent
all its lights out
and empty of people,
even then
you are there
If I'm walking the streets
overwhelmed with this love for the living
I will still be a blizzard at sea
Since you left me at eight I have always been lonely
star-far from the person right next to me, but
closer to me than my bones you
you are there
4
다시 1963년, 낡은 미니애폴리스 공항, 내게는
너무 넓어, 마구 달려요
혼자만의 오랜 비행 후에 달려가고 있어요
당신의 거대한 품속으로―
이제
이제 난 마흔 다섯, 꿈을 꿔요
우리가 다시 함께 있어요, 둘 다 마흔 다섯이에요
이번에 당신은 모두 내 차지예요, 걸어가고 있어요
함께 걸어가고 있어요, 푸르게 빛나는 터널을 따라
비행시간에 때맞춰 왔어요, 믿을 수가 없네요
단 둘이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다니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을
누가 신경 쓰겠어요, 걸어가면서
행복하게 이야기하면서
웃고, 숨 쉬고
It's 1963 again, the old Minneapolis airport so vast
to me, and I am running
after the long flight alone I am running
into your huge arms―
Now
I am forty-five now and I am dreaming
we are together again we are both forty-five
and I have you all to myself this time, and we are walking
together we're walking down a glowing-blue tunnel
we're on time for our flight, I can hardly believe it
we are traveling somewhere together alone
God nows where we are going, and who cares
we're together, walking
and happily talking
and laughing, and breathing. (16-18)
비행은 멀리 떨어진 둘 사이의 간격을 가장 빨리 건널 수 있는 방편이다. 화자에게 아버지는 부재에 의해 그 존재가 더 분명해지고 있다. 그 자리에 일상으로 자리하고 있으면 놓치고 지나쳤을 것도 거기 없음으로 해서 그 존재의 가치와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수 있다. 프란쯔는 생부의 부재와 계부의 상습폭행 등으로 세상에 혼자 버려졌다는 느낌 속에 성장기를 보냈던 사람이다. 10살 무렵의 그에게 곁에 없는 아버지는 종교로 화했다. 시의 첫 행에서 화자는 아버지가 사용하던 유리잔을 마주하고 있다. 그것은 술잔이고 물잔이며 때로 빛의 잔이기도 했지만 제1시편의 마지막 두 행에서 “저 텅 빈 // 유리잔”으로 변하고 만다. 각각 두 단어와 한 단어로 이뤄진 두 행 사이에 연 구분을 위한 여백이 들어서 있다. 텅 빈 술잔의 공허에 모아지고 있는 화자의 시선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화자의 숭배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화자가 의존하고 있는 “세상의 / 파괴자”였던 것이다.
부모의 이혼으로 헤어진 후 첫 부자상봉의 장면은 제2시편에서 악수로 끝을 맺는다. 아버지는 화자에게 존재의 근거와 이유인 까닭에 제3시편에서처럼 세상의 모든 불빛이 꺼지고 모든 사람이 지상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화자가 걸어가는 도시의 길 어디에나 항상 “거기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항상 함께 하는 아버지는 “내 뼈보다 더 가까이” 있으면서도 “별처럼 멀리” 있는 까닭에 화자는 “여전히 … 바다에 내리는 눈보라일” 것이다.
제4시편에서 화자는 다시 첫 부자상봉의 장면으로 돌아간다. 낡고 넓은 미니애폴리스 공항 홀을 가로질러 10세 소년이 달려가고 있다. 그렇게 안기고 싶던 아버지의 품으로. 이제 자신이 마흔 다섯이 되고 보니 그 당시 아버지의 나이가 된 셈이다. 화자는 아버지와 아들이 그렇게 서로 마흔 다섯의 나이로 만나 단둘이 여행을 떠나는 꿈을 꾼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들고 웃고 그리고 숨을 쉬면서. 화자가 시의 맨 마지막에 위치시킨 “숨 쉬고”는 아버지와의 결합에서 그의 생명이 궁극적으로 발원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그의 시적 경력 전반에 걸쳐 주요한 모티프로 등장하고 있다. 프란쯔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그의 생물학적 근원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통을 견뎌내게 하는 힘이면서 생명을 아름답게 유지해야할 이유와 목적인 것으로 보인다.
IV
시 「마써즈 빈여드 섬으로 산책가다」는 시집 제목이기도 하다. 그 정도로 시인 프란쯔의 분위기를 물씬 드러내는 데 부족함이 없다. “마써즈 빈여즈”(Martha’s Vineyard)는 매사추세츠 주 케이프코드(Cape Cod) 반도 연안에 있는 섬이다. 늦은 8월의 바다와 바람 그리고 빛이 산책 내내 화자를 감싸듯 따라다니면서 그의 고독과 기억을 휘젓는다.
바다에서 라일락 향기가 난다, 늦은 8월이면―어찌
그리되는 걸까.
그곳의 빛은 기억 속의 빛처럼 부드러운 (은빛).
아이들이 있으세요?
아뇨, 그들로선 다행이죠.
돌고래여, 네게 두 손이 생긴다면 나쁜 일이 일어난단다.
당신의 성장에 관해 조금 말해주세요?
우주나 자궁에는 하강도 상승도 없다.
내가 태어나던 날 그들이 날 찔러 죽였다면, 그것은
자비로운 행위가 되었을 텐데.
끝에 위치한 창 없는 방, 마지막 방은, 빛처럼
계속 내다보고 있으리라. 황금빛 엷게 띤, 푸른
수증기 꼬리가 이제 사라지고 있다, 진종일 운전한 후에,
당신 눈이 감길 때, 당신 눈에 보이는 흰 줄처럼;
수증기 꼬리가 이제 사라지고 있다, 당신 부모의 얼굴을 한
일종의 러시모어 산을 닮은 거대한 구름들 사이로.
여기 이렇게 바람 센 미답의 뒷길들에서―목화
잎들이, 길고 푸른 수평선의 빛 속에, 나를 스쳐
흩날리고―
내가 섬에 있다면, 영원히 진행될 그것들, 어찌 그리되는 걸까.
무한의 부드러움을 닮은 이 하늘, 나는 그것을, 자주, 아주 자주,
힐끗 보아왔지만, 여직 묘사해보지는 못했고,
어떻게 된 일인지, 지금도 그리할 수 없고, 앞으로도 결코 그리하지 않으리라.
어찌 그리되는 걸까, 나는 내 일생을,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사랑하면서, 행복해하면서, 보내지 못했다.
치고 또 치는 파도, 바다에서 라일락 향기가 난다,
늦은 8월이면.
And the ocean smells like lilacs in late August―how
is that.
The light there muted (silver) as remembered lght.
Do you have any children?
No, lucky for them.
Bad things happen when you get hands, dolphin.
Can you tell us a little bit about your upbringing?
There is no down or up in space or in the womb.
If they'd stabbed me to death on the day I was born, it
would have been an act of mercy.
Like the light the last room, the windowless room at the
end, must look out on. Gold-tinged, blue
vapor trail breaking up now like the white line you see,
after driving all day, when your eyes close;
vapor trail breaking up now between huge clouds resembling
a kind of Mount Rushmore of your parents' faces.
And these untraveled windy back roads here―cotton
leaves blowing past me, in the long blue
horizontal light―
if I am on an island, how is it they go on forever.
This sky like an infinite tenderness I have caught
glimpses of that, often, so often, and never yet have
I described it, I can't, somehow, I never will.
How is it that I didn't spend my whole life being happy, loving
other human beings' faces.
And wave after wave, the ocean smells like lilacs in
late August. (71-72)
시인은 산책을 즐기는 사람이다. 바닷가 바람 센 “미답의 뒷길들”에서 화자는 바다가 은빛으로 화하는 것을 지켜본다. 하늘에는 비행기가 남기고 갔을 파르스름한 수증기 꼬리가 점차 하얗게 흩어져가고 있다. 목화 잎이 센 바람에 흩어지고 그에게는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치고 또 치는 파도처럼” 일어나고 또 사라진다. 화자에게 질문을 건네는 주체는 돌고래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성장과정과 아이들에 대해 묻는 돌고래에게 그는 너에게도 인간처럼 두 손이 생긴다면 나쁜 일들이 생길 거라고 답해준다. 고독과 고통의 과거는 바닷바람에 실려 라일락 향을 풍긴다. 화자에게는 아이들이 없다. 아이들이 있었다면 자신이 아버지 탓에 힘들었던 것처럼 자기로 인해 그들이 불행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태어나던 날 부모가 차라리 자길 죽여 버렸다면 지금의 고통이 없을 것이므로 “자비로운 행위”가 되었을 것이라고까지 말해버린다. “하강도 상승도 없”는 “우주나 자궁”은 화자의 죽음에 대한 혹은 존재 이전의 상태를 향한 욕구를 반영한다. 기쁨도 슬픔도 없는 곳에 대한 지향은 화자의 현재의 처지를 반증한다.
그래도 부모는 그리움의 대상이어서 화자는 구름의 형상에서 그들의 모습을 본다. 처절한 고독 속에서도 “길고 푸른 수평선의 빛 속에” “무한의 부드러움”을 품은 하늘을 본다. 그것을 묘사해본 적이 없고,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강하게 부정하면서도 그것을 “자주, 아주 자주” 힐끗힐끗 훔쳐봐 왔다고 고백한다.
화자는 자신이 일생동안 행복하게 살지 못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의 얼굴을 사랑하면서 살지 못했다는 것을, “어찌 그리되는 걸까,” 묻고 받아들이면서, 피할 수 없는 염세주의자의 운명을 조용하게 털어놓는다. 그러는 가운데도 그의 시선은 먼 수평선의 빛과 고요하고 부드러운 하늘을 향하곤 한다. “무한의 부드러움을 닮은” 하늘, 거기서 길러진 화자의 고독이 압도적인 일생의 고통과 맞서 위태롭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늦은 8월이면 바닷바람에 풍겨오는 라일락 향, 그것은 향기로우면서도 쓸쓸할 듯싶다.
V
프란쯔는 195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생후 3개월쯤 되었을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왔는데 그의 아버지 제임스 라이트(James Wright)는 노동자의 아들이었고 참전용사였으며 훗날 매우 영향력 있는 시인이 된 인물이었다. 귀국 후 아버지 제임스는 워싱턴 대학(U of Washington)에서 시인 뢰쓰키(Theodore Roethke)와 동문수학했고 졸업 후 미네소타 대학(U of Minnesota)에서 강사직을 구했을 때 가족을 데리고 인근으로 이사했는데 주말이면 시인 로버트 브라이(Robert Bly)의 농장을 방문하곤 했다. 프란쯔는 시인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프란쯔는 8세가 되던 해에 부모의 이혼을 겪고 아버지의 보호와 영향 밖에 놓이게 된다. 그는 당시 3세의 아우와 함께 어머니를 따라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했다. 아버지의 부재가 그에게 남긴 상처는 심각한 것이었는데 의붓아버지의 상습폭행으로 더 깊어져 평생을 따라다니는 종류의 것이 되었다. 그의 시 도처에 혼자 남겨진 자의 모습이 등장하는 것은 이때 골수에 새겨진 고독의 양상일 것이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인근을 도보로 탐색하고 다니곤 했는데 이러한 배경에서 창작된 그의 시는 아버지에 대한 타오르는 갈망과 처절한 외로움에도 불구하고 그가 혼자만의 산책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인물로 성장해 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프란쯔가 시 쓰기를 진지하게 고려하게 된 것은 10대 중반 무렵이었다. 방학 중에 찾은 북 캘리포니아에서 이상한 느낌으로 깨어나 근처 목장으로 산책을 나갔는데 자신과 세상에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를 감지하고 갑작스럽게 7행의 시를 한 편 쓰게 되었다. 이때 솟구친 기쁨이 놀랄 정도로 강력해서 평생 시에 헌신하겠노라 마음먹게 되었고 그 시를 아버지에게 보냈는데 즉각적으로 날아온 그의 답은, “빌어먹을, 너야말로 시인이구나,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였다고 한다. 이러한 아버지의 전폭적인 인정이 어쩌면 프란쯔의 인생을 결정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혼자 버려졌다는 느낌, 아버지에 대한 목마름, 그리고 시에 대한 추구는 다 한 가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게 시는 아버지의 피 속에 있는 시인의 유전자를 이어가는 것이고 자신의 곁에 없는 그에 대한 갈망을 실현하는 것이면서 피할 수 없는 혼자의 존재를 감내하게 해주는 힘인 것이다.
프란쯔는 1977년에 오하이오 주 소재 오버린 대학(Oberlin C)을 졸업한 후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판단하여 수개월 후에 중단하였다. 그 후 방랑이 뒤따랐는데 주로 뉴욕과 뉴잉글랜드 지역을 떠돌았다. 그는 자신이 원했다고 하더라도 오랫동안 직장다운 직장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심신의 불안정 속에서 프란쯔는 어느 때부턴가 시를 유일한 천직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거기서 희망을 느끼면서 집중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신 1980년에 프란쯔는 27세의 나이에 최초의 주요 시집이라고 할 수 있는 그대 없는 세상(The Earth Without You)을 출판했다. 이후 30여년간 그는 여러 차례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시 쓰기와 번역에 꾸준하게 매진해왔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조울병을 앓아왔고 알코올중독과 약물중독에 대한 취약성을 대물림해왔다.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에서도 그는 시 쓰는 데에는 어떻게든 집중력을 발휘해왔는데 바로 이러한 시에 대한 헌신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구원해온 것으로 보인다.
시는 누구에게나, 특히 그것을 써내는 시인에게, 다소간에 치유의 작용을 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는 시가 “치유의 사색”으로 위안을 준다고 했다. 그런데 프란쯔의 경우에 시는 그에게 생득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게 닥치는 고통에 맞서는 것, 혹은 그것 없이는 곧 무너지게 될 수밖에 없어서 의지하게 되는 것으로서 보다 절실하게 찾아낸 유일한 치유책인 듯싶다. 그에게 시를 쓰는 행위는 혼란을 적당히 잠재우는 수면제나 안정제가 아니라 합병증이 도사리고 있는 치명적 질병에 대한 항생제 투여와 같아 보인다.
참고문헌
Wright, Franz. The Earth without You. Cleveland: Cleveland State UP, 1976.
_______. Ill Lit: Selected and New Poems. Oberlin: Oberlin CP, 1998.
_______. The Beforelife. New York: Knopf, 2001.
_______. Walking to Martha’s Vineyard. New York: Knopf, 2003.
_______. God’s Silence. New York: Knopf, 2006.
_______. Wheeling Motel: Poems. New York: Knopf, 2009.
_______. Kindertotenwald. New York: Knopf,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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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전남 담양 출생. 1981년 <광주일보>와 2004년 서정시학으로 등단. 최근 연구서로 1990년대 미국시의 경향(2011)과 시집으로 허공에 줄을 긋다(2012)가 있음. 현재 대진대 영문과 교수.
문학청춘 2013 겨울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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