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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백 년 전의 이혼 풍경 |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1704년, 수운판관 유정기(兪正其)는 아내 신태영(申泰英)을 상대로 예조(禮曹)에 이혼 청구 소송을 냈다. 부부가 혼인한 지 26년, 별거한 지 14년 만이다. 참고로 신태영은 유정기의 후처로 시집 와 10년 동안 아이 다섯을 낳았고, 12년째 되던 해에 유정기의 집에서 쫓겨나 전처 아들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예조에서는 나랏법[國典]에 없다는 이유로 유정기의 이혼 청구를 기각시켰다. 이에 유정기의 친구이자 사헌부 장령인 임방(任埅, 1640~1724)이 예조에 문제를 제기하며 왕에게 직접 아뢰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법전을 들먹인 예조를 조롱하듯 임방은 “변통을 생각하지 않은 채 시종 굳게 지키는 것을 능사로 삼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했다. 다음날, 예조판서 민진후(閔鎭厚, 1659~1720)가 임금을 독대하였다. 임방을 염두에 둔 듯, 그는 예조가 이 사건을 기각시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목마다 밝혔는데, 우선 신씨의 행실이 패악하다고들 하지만 부부 반목으로 인한 거짓 정장(呈狀)인 경우를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거짓 정장을 예조가 승인할 경우 윤리의 더 큰 변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정기 측이 상언한 내용에 “제주에 오물을 섞고 시부모에게 욕설을 했다”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십악대죄(十惡大罪)에 관계되므로 형조(刑曹)로 옮겨 사실을 규명해야 할 중대한 사안이라고 했다. 예조는 형조의 결과를 기다린 후에 움직이겠다는 것이다. 사나운 아내를 고발하다 민진후가 임금을 만난 바로 다음 날, 장령 임방이 다시 왕을 알현했다. 그는 신씨의 부도한 행실에 온 나라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말로 사건을 풀어나갔다. 신태영의 패악한 행실 몇 가지를 더 추가시킨 임방은 사건을 형조로 넘기는 것에 반대를 표명했다. 임방은 왜 사건의 형조 이관을 반대했을까. “신 여인과 그 남편을 한 법정에 나란히 입장시켜 사실 관계를 따져 묻는다면, 정장(呈狀)의 내용과 같을 수가 없다”는 송상기(宋相琦, 1657~1723)의 말을 참고할 만하다. 유정기의 ‘변호인’ 임방은 다시 열변을 토했다.
임방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형조로 넘어갔다. 신태영은 남편의 벼슬을 따라 의금부의 옥에 갇혔는데, 조사가 시작되어 그녀가 발언권을 얻자 사건을 서술하는 관점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옥에 갇힌 신태영은 수천 마디에 달하는 공초를 올렸다.
신태영이 올린 장문의 언문 공초는 논리가 너무나 정연하여 문사(文士)가 대신 써준 것 같다고들 했다. 시부모에게? “욕설한 일
없습니다”, 제주(祭酒)를? “더럽힌 일 없습니다.” 증언자로 불려온 유씨 종족의 대표는? “유정기에게 들었을 뿐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신태영의 등장으로 대신들은 논쟁에 휩싸였고, 이 과정에서 고위직 몇 명이 갈리었다. 이혼 소송이 시작된 지 2년이 지나, 유정기는 집안을 잘못
다스린 죄로 장(杖) 80대, 신태영은 남편에게 욕설한 죄로 장 40대를 받았다. 아내 신태영, 자신을 변론하다 비판하는 자들은 신씨가 “남편을 원수처럼 여겨 사람 축에 끼지 못하게 날조했다”면서, 잠자리에서의 일까지 까발려 남편을 우습게
만들었다고 분노했다. 그들은 고 유정기의 이혼 정장에 나와 있는 신씨의 ‘악행’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논증하기보다 남편을 대하는 ‘무례한’ 태도에
더 집중했다. 마치 자신들의 속살이 드러나는 듯한 기분으로.
또한 김진규는 떠도는 말을 주로 인용한 임방과는 달리, 자신은 들려오는 많은 말을 배제하고 오로지 옥안(獄案)에 기재된 것만을
자료로 삼았다고 했다. 김진규가 발언한 1713년 5월 26일 이후, 신태영 사건은 조정 회의에서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신태영은 유정기의
법적 아내로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혼인과 이혼에 대한 신태영의 생각은 오늘의 우리와 다를 수 있다. 왜 다르고 어떻게 다른지는 그 시대의
맥락을 통해야 해명될 일이다. 진실 규명을 위해 싸운 10년, 신태영의 대상은 한 개인 유정기를 넘어 좁게는 유씨 집안, 넓게는 국가사회라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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